가장 큰 보상은 누군가의 삶 2
2051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그 땅에서 한 흑인 젊은 여자가 홀로 걷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브나.
아브나는 빛을 잃어버린 시선으로 공허한 땅을 응시했다.
이젠 한계다.
이곳에 정착을 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날짜를 가늠하는 것도 언제부터인가 하지 않았다.
그저 해가 기울면 오늘 하루를 살아남았다고 자위할 뿐.
전에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아직 남아있는 통조림 같은 거로 연명했지만.
이젠 그것도 어려워졌다.
근처에 있던 식료품 가게를 털고 폐허가 된 가정집을 털어보아도 이젠 먹을 게 나오지 않는다.
구덩이를 파서 투명한 비닐로 덮고 중앙에 돌을 놓아서, 태양열을 받아 안쪽에 습기가 맺혀 중앙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방법으로 물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물을 얻는 건, 쥐똥만큼이라 늘 갈증에 시달렸다.
슬슬 이제... 아니, 진즉부터 그녀는 지치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오래도록 굶주리니 적을 만나도 이젠 싸우거나 도망치는 게 쉽지 않다.
근처에 생존자 쉘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곳은 생존자들이 남아 있지 않다.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 대부분 죽어버렸고.
살아남은 자들은 약탈자들뿐이었다.
터덜터덜 걸었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흑.”
절망과 고통, 사무치는 고독.
하늘에 호소하는 울음이 그녀에게 차올랐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제발, 살려줘요.”
이곳에 이르렀다가 여러 날 전에 봤던 미래 환영.
애플 수라는 이름이 있던 병원 건물.
그 환영은 그저 그녀를 농락한 거짓된 환영이었던 걸까.
이곳에 병원 건물은커녕, 생존자 한 명도 보이질 않는다.
이곳에 머물며 그녀가 봤던 환영이 실현되기를 기다렸던 게 어리석은 선택이 되고만 것 같다.
그녀의 피부처럼 까맣게 된 메마른 대지를 무작정 걸었다.
저만치서 적들이 그녀에게 접근해오고 있었지만.
아브나는 마치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도망치거나 적을 대적할 생각도 하지 않고.
터덜터덜, 걷기만 했다.
그때였다.
그녀가 언젠가 보았던 환영.
생존자들이 머무는 그 건물이 눈앞에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츠츠, 츠-
아브나는 적들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홀린 듯이 건물을 바라보았다.
카아아아아악!
인간형 괴물.
그것들이 아브나에게 쏟아져나와 덮치려던 찰나.
흐릿하게 생겨나던 건물이 온전해지더니, 그곳에 있던 생존자 한 사람이 아브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위험해요!”
영어로 외치는 소리였다.
건물을 바라보던 아브나의 표정에 환희와 슬픔이 교차했다.
그토록 바라던 ‘희망’을 만났으나, 자신은 결국 죽게 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탕! 타앙!
총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기관총 소리도 들려왔다.
두두두두!
병원 건물이었던 생존자 쉘터.
그곳에서 한 남자가 개조된 차량을 타고 나오더니 아브나를 재빨리 구하고는 쉘터로 돌아갔다.
쉘터 방어벽 내부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나와 아브나를 부축해서 건물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깨끗한 물과 음식을 먹게 된 그녀.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꿈을 꾸는 걸까.
아브나는 선하고 친절한 그들에게 울먹이며 물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예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서 계속 당신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고요. 애플 수 병원!”
“우리는 이곳에 줄곧 있었습니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이후, 우리는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지내왔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네?”
“여기 애플 수 병원은 2022년도에 완공되었어요. 여긴 지하 벙커 시설이 있는 병원이라 우리는 이곳이 있어서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아.”
“선교사셨던 의사 두 분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이곳에서 병원을 시작하셨어요. 이후에 현지 의사 선생님들이 합류했었지요.”
아브나가 보는 생존자들.
이들은 원래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과거의 시간이 바뀌어서 그들은 이곳 쉘터에서 생존자로 살아남아 있다.
"그런데 애플 수는 무슨 뜻이에요? 기업 이름인가요?"
"아뇨. 사람 이름이에요. 듣기론 유명한 화가였다고 하는데. 그가 이 병원을 지어서 애플 수 병원이라고 했나 봐요."
"마치 그는 아포칼립스가 올 것을 예측한 것 같았어요. 2022년도에 병원이 완공되고 이듬해에 아포칼립스가 닥쳤으니까요."
아브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죽었어야 할 이들이 살아난 것.
과거가 바뀌어 미래의 결말이 이곳에서 달라져 있다.
그리고 아브나 그녀 역시, 오늘 그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 * *
늦은 아침, 나는 부스스 침대에서 눈을 떴다.
어제 유화 그림을 완성하고 자정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림 속도가 빨라져서 유화 작품을 그리는 시간도 비교적 줄어든 듯했다.
거의 1년이 지나는 사이, 죽도록 그림만 그렸더니.
컨디션이 안 좋아져 있다.
나는 욕실로 가서 씻고 거실로 나와 잠시 멍을 때렸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코인을 확인해보았다.
『명화 작가 34레벨
명화 시간 : 11
명화 기교 : 10
창조력 : 18
그랜드 코인 : 261.』
“어?”
코인이 그새 더 불어나 있다.
머리를 긁적이며 코인의 출처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그림을 보고 누군가 크게 감명을 받았나?
그게 아니면, 살 의욕이 없었다가 내 그림을 보고서 살 용기를 얻었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음, 잘은 모르지만.
일단 코인이 생겼으니 좋은 거다.
나는 기교를 또다시 업그레이드했다.
그러자.
『명화 작가 35레벨
명화 시간 : 11
명화 기교 제어 : 11
창조력 : 18
그랜드 코인 : 5.』
재능 명칭이 바뀌었다.
명화 기교에서 명화 기교 제어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대강 아침을 챙겨 먹었다.
어제 루나가 가져다 놓은 음식들이 있다.
찌개와 반찬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먹고 그림 작업을 시작하고 싶어서,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
커피 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내렸다.
커피가 잔에 채워지자 향긋한 커피 향이 코를 자극한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핸드폰 톡을 확인했다.
친구들 단톡방에 내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 이진구 : 고수 청첩장 나왔다. 6월 11일이다.
- 박강재 : 부럽다. 고수가 우리 중에서 제일 빨리 장가가네.
- 김준호 : ㅊㅋㅊㅋ 속전속결이다 이 자식.
- 장민석 : 여친 나이가 23세라지 않아? 혼혈이라며? 좋겠다.
- 이진구 : 내가 고수 여친 한 번 봤거든? 예쁘긴 하더라. 얼굴 작고 피부 하얗고.
- 김영진 : 고수 놈, 매일 바쁘다 하더니 연애는 했었네? 암튼 축하한다.
- 김준호 : 그치. 이놈은 전부터 그랬어. 돈 없고 시간 없다 해도 여친은 계속 있더구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비주얼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ㅋㅋㅋ
- 김영진 : 그래도 유라보단 일찍 결혼하네. 유라는 남친이랑 헤어졌다는데.
나는 그들에게 톡을 남겼다.
- 고수 : 축하해줘서 고맙다. 11일에 맛있는 거 먹으러 와.
- 박강재 : 정말 잘 되었다, 고수야. 그날 우리가 축가 부르기로 했어.
- 고수 : 오, 그래? 고맙다. 축가 기대하마 ㅋㅋ
샌드위치를 다 먹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펜을 손에 쥐었다.
이내, 내 앞에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두 개의 디스플레이를 활성화한 다음, 손으로 터치해서 크기를 적당히 조정했다.
이번에 진화한 능력이 어떻게 나타날지 기대되었다.
타블렛 창을 띄우고 그림을 그리려 펜을 움직이려니까,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순간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펜을 내려두고서 내가 그리던 그림을 응시했다.
그림을 보는 내 눈동자에 반응하며, 타블렛 창에 새하얀 빛의 점이 생겨났다.
그 빛의 점은 느리게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그림을 보던 내 눈동자가 움직이자, 손을 빠르게 놀려서 펜으로 작업하듯 빛의 점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생각을 따라 빛의 점이 그대로 움직이는 거다.
나는 놀랍고 신기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빛이 점은 내가 원하는 색상으로 연신 바뀌기도 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채색을 해 나갔다.
이렇게 되면 굳이 팔을 쓰지 않아도 타블렛을 통해 그림 작업이 가능해진 셈이다.
그렇다면 유화 그림을 그릴 때는 어떠할까?
그 점이 궁금해졌다.
일단, 나는 종이와 연필을 찾아와서 그것으로 그림을 그려보려 했다.
스케치를 시도하자, 이번에도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눈동자에 반응하여 종이에 명멸하는 빛의 점이 나타나더니.
손을 쓰지 않아도 스케치가 되는 것이다.
마치 직접 연필로 스케치하는 것 같다.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하고서 종이 앞에 놓아둔 연필을 살펴보았다.
일부러 뾰족하게 깎아놓았는데, 신기하게도 연필 끝이 제법 몽톡하게 닳아져 있다.
거참, 되게 신기하네.
물감 채색도 아마 이러할 것 같다.
팔레트에 물감을 배합해놓으면 알아서 소모되면서 캔버스에 채색이 되는 거다.
다시 나는 타블렛 창으로 수호가 요청했던 작은 도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여서 채색하고 있으니.
마치 물에 물감이 번지듯 완성된 그림이 내 눈앞에 점차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 삼매경이었다가 오후 즈음.
띠리리링-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서 받지 말까,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편에서 침묵하기에 나는 재차 말했다.
“여보세요.”
통화를 끊으려 하니,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
<유라야.>
내가 답하지 않자 유라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질척이는 건 별로라서 다시 연락할 생각 없었는데. 오늘은 너무 많이 생각나서.>
“나 결혼해.”
<알아. 들었어. 너와 헤어지고 나서 많이 후회했어.>
“이미 지나간 일이지.”
<너와 헤어진 거, 내 본심이 아니었어. 헤어지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냥 좀 지쳤던 거야.>
“......”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차가워진 널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 넌 항상 상냥했으니까.>
“그때는 내가 힘들고 배신감도 들고 그래서 너에게 차갑게 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내 잘못이기도 해. 네가 지칠 만했지.”
<왜 그렇게 말해? 그럼 내가 나쁘게 느껴지잖아.>
“누가 나쁘고 좋고는 의미 없는 것 같아. 그냥 한때 좋은 인연이었던 것으로 기억했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
<역시 넌 나빠...>
'나빠.'는 유라의 말버릇이다.
가끔 애교처럼 던지는 말.
“사는 게 힘들고 그러면, 주변을 돌아보기가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어. 내가 딱 그랬지. 내 초라함을 너까지 감내하게 했던 거 미안하게 생각해. 생각해보면 20대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게 만들었네.”
<아냐, 지금 와서 절실히 생각하고 있어. 그때는 왜 몰랐을까. 가장 중요한 건 네 위치와 조건이 아니라 너였다는 걸. 막상 놓치고 나니까 소중했던 걸 알겠더라. 그깟 남들과 비교되면 어떻다고. 내 자존심이 상하고 초라해지는 게 어떻다고. 그래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었는데.>
“......”
<지금 와서 말하면 자격도 없고 의미도 없는 말일 뿐이지만, 사실 매일 보고 싶었어. 그리웠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도 했었어. 하지만 이제는 늦어버린 거겠지. 고수야, 그래도 축하할게. 결혼 축하해.>
나는 느리게 입을 뗐다.
“고마워. 유라야, 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나.”
<응. 그럴래.>
유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