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보상은 누군가의 삶
그날 늦은 밤, 루나와 나는 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 조명만 켜두어서 화장기 없는 루나의 얼굴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배게 위로 어지러이 흩어져 있고.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향했다.
우리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늦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서 잠드니까 오빠와 결혼한다는 게 실감 나는 것 같아요.”
“나도 그래.”
“흫, 이렇게 같이 잠들면 악몽 안 꾸겠죠?”
“악몽? 너 악몽 꿔?”
“요즘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꿔요. 꿀 때마다 너무 무서워서 요즘은 언니랑 같이 자요.”
“어떤 내용으로 꾸는데?”
“꿈에요. 내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어요. 어린 남자아이. 아마도 우리 운빛인가 봐요. 꿈속에서 뭔가 무서운 게 매번 가득 했어요.”
“......”
“나는 너무 무서웠는데요. 더욱 무서운 건 아이가 위험해지는 게 더 무서웠어요. 그래서 무서운 것들이 다가와도 아이를 꼭 안았던 것 같아요. 주위에 우리를 구해줄 이가 없었어요. 그것들은 정말 많았고, 그게 내 주위로 가득해져서 제 살점이 뜯겨도 나는 아이를 보호하느라 절대 놓지 않았던 것 같아요.”
비록 꿈 이야기를 듣는 거지만, 나는 왠지 듣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말없이 팔을 뻗어 루나를 꼭 끌어안았다.
수호가 겪었던 시간에서 내 삶은, 아마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루나가 꿨던 악몽처럼, 실제 그런 끔찍한 일을 그녀와 수호가 겪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식으로 무력하게 루나를 잃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견딜 수 없을 거다.
“오빠? 숨 막혀요.”
“미안. 나 때문일 거야. 그런 악몽을 꾸는 건.”
“왜 그게 오빠 때문이에요? 그냥 내가 악몽 꾸는 건데.”
“미안해. 내 잘못이야.”
수호가 지나온 시간에서는, 루나를 잃을 무렵에 내가 각성했었던 것 같고.
나는 능력이 어떤 식으로 진화하게 될지, 또 진화한 능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결단을 했던 걸지 모른다.
생명을 불사르는 그런 결단을.
루나를 잃고 무력한 자신이 싫었을 거고.
수호를 지킬 자신이 없었을 거다.
모두가 살 방도는 그 방법뿐이라 여겼을 것이기에.
미래를 바꿀 능력을 얻기 위해 생명을 불살라서 능력을 극대화할 생각을 했던 것일 테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루나야, 네 악몽. 내가 지워줄게. 다시는 그런 꿈 꾸지 않을 수 있도록.”
* * *
애플 수 공식 팬클럽의 명칭은 ‘올차드’였다.
때로는 애플 올차드라 불리기도 했다.
올차드 팬클럽 회장, 강민철은 올해 41세 된 IT 기업의 젊은 회장이었다.
그는 오늘도 회장실에서 점잖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고수가 그린 ‘황금 나무’ 그림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다.
일을 하다가도 황금 나무를 한 번씩 흡족하게 쳐다보곤 하는 게, 일상의 낙이었다.
그는 업무를 끝내고는 비서를 호출했다.
회장실 안으로 비서가 들어오자 말을 내뱉었다.
“박 비서, 오늘은 갑자기 외부 일정이 잡혀서 일찍 퇴근해야 할 듯해,”
“외부 일정이라면, 최 회장님과 약속이 잡히신 겁니까? 오늘 저녁 회의도 일정에 남아 있는데요.”
“아니. 오늘 올차드 정모가 있는 날이야.”
“네? 아, 정모.”
“늦으면 안 돼.”
늦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강민철은 몹시 단호해 보였다.
애플 수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도 그를 못 말린다.
이런 그의 모습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지, 비서는 익숙하게 답했다.
“아, 예.”
전에 애플 수가 라이브 콘서트를 한다고 했을 때는, 표을 예매하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참, 이번에 뉴욕 소더비 경매에 애플 수 그림이 나온다는 말이 있던데?”
“알아보겠습니다.”
IT 기업 회장의 비서인지, 아니면 올차드 팬클럽 회장의 비서가 된 것인지.
가끔 비서는 헷갈렸다.
그날 저녁, 강민철은 어느 식당에서 올차드 정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편의점에 들렀다.
한강 공원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다.
그곳에 마침 고수가 들어와 음료를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애플 수임을 알지 못하는 강민철은 올차드 멤버와 잠시 통화를 했다.
“김학중 교수님, 오늘 반가웠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올차드에 가입하신 줄은. 하하, 그렇습니다. 올차드 회장이 진짜 회장 노릇하고 있는 줄은 대부분 모를 겁니다. 제가 평소 관심도 없던 미술품에 관심이 다 생겼지 뭡니까?”
그의 통화를 듣게 된 고수가 강민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수는 통화를 끝낸 강민철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혹시 올차드라면 애플 수 팬클럽입니까?”
“네, 맞습니다. 혹시 그쪽도 올차드?”
“아뇨. 저는 그냥 애플 수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요? 애플 수를 좋아한다면 올차드에 가입해야지요. 제가 회장입니다. 올차드 회장.”
“하하, 그러시군요. 언제 가입하겠습니다.”
“오늘도 정모를 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다양한 연령층이 팬클럽 멤버로 활동하고 있어요. 올차드 회장 직함으로 명함도 팠습니다.”
강민철이 고수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저번에 라이브 콘서트 때도 올차드는 단체 관람했었거든요.”
“그러셨군요.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네?”
“아, 제가 말이 헛나왔네요. 애플 수가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하하, 그렇죠?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 나올 수 없는 천재적인 인물이죠. 그는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강민철은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게 돌아서서 편의점 계산대로 향했다.
* * *
5월 하순이 되니 날이 따뜻해졌다.
한낮은 제법 덥기까지 했고 저녁은 산책하기에 적당히 선선했다.
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결혼식은 6월 11일.
특급 호텔에서 예식을 할 거고.
이미 많은 사람에게 청첩장을 보내놓은 상태다.
비싼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고 하객 식사도 1인당 15만 원짜리로 하다 보니.
결혼 비용이 훌쩍 올라갔다.
어제는 루나와 웨딩 촬영을 했었다.
수호는 지난 서울 전투에서 승리를 하긴 했었지만.
서울 외곽 지역에 남아있는 적들을 찾아내어 괴멸하느라 여전히 자잘한 전투가 이어졌다.
덕분에 코인이 내게 계속해서 들어왔다.
수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 2050 : 고수. 속도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교도 올려야 합니다.
- 2050 : 속도만 올리게 되면, 빨라진 그 속도를 몸이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자칫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 고수 : 그러잖아도 요즘 어깨와 팔 근육 통증이 심해졌거든. 기교를 올리면 빨라진 속도를 감당할 방도가 나오는 거야?
- 2050 : 네, 기교를 올려서 능력이 진화하면 당신은 굳이 팔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겁니다.
- 고수 : 헐, 진짜?
- 2050 : 저번 서울 전투에서 경기권으로 빠져나간 적들이 있습니다. 최근 비행선을 통해 그 적들을 처리하고 있어서 코인이 추가로 고수에게 쌓일 겁니다.
- 2050 : 다음 재능 업그레이드는 기교를 올려요.
- 고수 : 그래, 알았어.
수호는 그와 같은 전투를 이어가면서도, 2022년도의 유럽 북부 지역으로 드론을 보내 줄곧 탐색했다.
하지만 딱히 알아낸 것은 없었다.
그러다 유하준 박사와 통화했던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박사님, 저번에 회색 폭풍에 관해 알아보신다고 한 거는 결과가 있어요?”
<아직 별다른 내용을 찾지 못했네요. 제가 알아낸 거라고는 회색 폭풍의 원인은 지구에 있지 않다는 정도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아포칼립스의 원인도 지구에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겠네요.”
<그런 셈이죠. 미래의 내가 연구해서 기록한 내용을 보면 말입니다.>
“네.”
<회색 폭풍에 장시간 노출되면 식물이든 사람이든 죽게 됩니다만 30% 비율로 끔찍한 변이가 일어난다고 적혀 있어요.>
“네.”
<그런데 그 변이체는 이후 진화를 거듭했다고 되어 있네요.>
그런 끔찍한 게 진화까지 거듭한다고 하고.
아포칼립스의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답을 들으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작업실에 와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작업복을 입은 차림이다.
대형 캔버스를 앞에 두고 그림을 구상하던 중, 잠시 유하준 박사와의 대화가 떠올랐던 것.
다시 그림 구상에 집중해야겠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완성된 그림의 모습을 상상하며 떠올렸다.
하늘과 맞닿은 산.
그곳에서 바라보는 일출.
황금빛 여명에 어둠이 물러나고.
산봉우리에 걸쳐진 낮은 구름 위로 빛의 장막이 드리워진다.
산정상이 있는 곳에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나무의 아름드리 가지가 세상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다.
마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계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 나무 주위로 은백색 강이 둘러 흐르고.
나무에선 미미한 빛을 머금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렸다.
과일의 모양은 사과와 닮았다.
족히 수백만 개 열린 것으로 보이는 열매들.
과일 일부가 익어서 톡하고 터져서 투명한 과즙이 아래로 흩뿌려지는 광경이 연출된다.
마치 비가 되어 아래 세상으로 내리는 듯하다.
과즙의 비에 젖은 식물들이 더욱 싱싱하게 피어나고.
마치 곪은 상처처럼 여전히 남아있던 기괴한 식물이 과즙의 비에 젖자, 싱그러운 식물로 변모해간다.
그저 상상 속에나 존재할 수 있는 풍경.
나는 완성된 그림의 모습을 뇌리에 새겨두고,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하얀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슥슥-
연필을 잡은 내 손이 11배속으로 움직이는 듯한 속도로 움직였다.
이번에도 작업 과정을 카메라로 촬영하기는 했지만.
그림 작업 속도는 그대로 나타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런 괴물 같은 속도를 대중에게 그대로 보이기는 좀 그랬다.
스케치가 금방 끝이 나버렸다.
나는 잠시 쉴 겸, 카메라를 꺼두고 자리에 앉아 코인을 확인했다.
『명화 작가 33레벨
명화 시간 : 11
명화 기교 : 9
창조력 : 18
그랜드 코인 : 279.』
별로 기대하지 않고 코인을 확인했는데.
코인 액수가 엄청 쌓인 것을 보고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인이 왜 갑자기 불어나 있지?
경기도 지역에서 남은 적을 괴멸한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코인이 막 들어오진 않을 텐데.
혹시, 수호가 다른 지역에서 탈환 전쟁을 벌이기라도 한 건가?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들고 수호에게 톡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며 코인을 얻으려고 할 때면, 내 마음은 편할 수가 없다.
- 고수 : 수호야, 지금 대화 가능해?
- 2050 : 수호님은 지금 쉘터 외부에 계십니다.
- 고수 : 혹시 전투 중이야?
- 2050 : 전투 중은 아니고 외부 쉘터의 리더를 만나고 계십니다.
- 고수 : 아, 그래? 물어볼 게 있어서. 명성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니고, 적을 많이 제거했던 것도 아닌데. 코인이 갑자기 또 늘어나 있네.
- 2050 : 코인은 명성과 적의 제거 외에도 영역을 탈환하는 승리가 있을 때 보상으로 들어옵니다.
- 2050 : 그리고 그 외에 죽을 상황이었던 사람들을 구해서 그들이 살게 되면, 이 또한 코인으로 환산되어 들어오게 됩니다.
- 고수 : 어, 그래?
- 2050 : 그 부분은 눈으로 확연히 확인되는 부분이 아니라서, 코인이 대거 들어왔다면 그 덕택에 들어왔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 고수 : 그렇군.
어쨌거나 코인이 잔뜩 들어왔다면 코인 경로가 어떠하든 좋은 거 아니겠는가.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재능 스탯을 바라보았다.
수호가 조언했던 대로 명화 기교를 업그레이드했다.
그러자 128 그랜드 코인이 소모되었다.
『명화 작가 34레벨
명화 시간 : 11
명화 기교 : 10
창조력 : 18
그랜드 코인 : 211.』
이제 151 그랜드 코인이 남아있어야 할 터.
그런데 남아있는 그랜드 코인은 211이다.
업그레이드하는 사이, 짧은 순간에 추가로 들어온 코인이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