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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71화 (71/153)

아포칼립스의 원인

나는 곧바로 명화 속도를 업그레이드했고.

그랜드 코인 ‘64’가 소진되었다.

변화한 내 재능 스탯을 확인했다.

『명화 작가 33레벨

명화 시간 : 11

명화 기교 : 9

창조력 : 18

그랜드 코인 : 56.』

명화 시간?

이건 무슨 의미지?

일단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출발했다.

* * *

그날 늦은 밤, 나는 다시 아바타 기계를 사용하여 2051년도를 방문했다.

쉘터 내부, 지휘관실.

이곳은 내가 직접 그림을 그렸었기 때문에 실내 풍경이 어떠한지 잘 알았다.

4층인 이곳. 바깥 풍경이 한쪽 벽면의 창을 통해 훤히 내다보였다.

언뜻 보면 통유리창처럼 보이지만, 유리 금속으로 창이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대단히 견고한 이곳인 거다.

바깥 풍경으로 방어벽과 사람들, 붉은 하늘이 보였다.

지휘관 실에는 테이와 수호가 테이블에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기 위해 스마트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다.

나는 형성된 아바타 모습으로 그들과 동석해 있다.

내 아바타는 실물과 같다.

3D 사진이 아바타로 만들어진 것.

“뭔가 혼란스럽네요. 요 며칠 사이 바뀐 게 제법 돼요.”

테이는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자 수호가 말을 받았다.

“우리는 과거를 간섭해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바뀐 미래를 인지할 수 있지만. 그 외 사람들은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겁니다.”

“다만 잠시 꿨던 꿈으로 기억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잊어버리겠죠. 고수가 그렸던 사과나무가 시들어 죽는 꿈을 꿨어. 어? 나도 그래. 우리 쉘터에 방어막 기술이 없어서 회색 폭풍이 오는 날이면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꿈을 꿨어. 그 모든 게 악몽이어서 다행이야. 라고 서로 말하겠죠.”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수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바뀐 부분이 쉘터에 방어막이 생겼다는 부분인 거지?”

“예, 방어막 시스템이 이제는 쉘터에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의 상황이 바뀌어 있더군요. 방어막 기술은 유하준 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를 해왔던 부분입니다. 2027년도에 방어막 시스템이 가까스로 설치되고, 쉘터는 이후 회색 폭풍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호는 적응 안 되게, 내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칭은 그대로다.

그는 나를 여전히 고수라 불렀다.

“이 기술은 아직 불안정해서 방어막이 쉽게 깨어지기도 하더군요. 거기다 범위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방어막 시스템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것도 아포칼립스 상황이라 어려워서, 현재 방어막 기술을 쓰는 생존자 쉘터는 극소수일 뿐인 거죠. ”

“음, 그렇군.”

테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방어막이 생겨서 바뀐 긍정적인 변화가 많아요. 쉘터민들이 건강해요. 밝아진 사람도 있고요. 쉘터민들의 삶이 건강해진 것으로 우리의 시간이 흘러가게 된 거예요. 시간의 물줄기가 불행에서 꺾여 흐르게 된 거죠.”

아무래도 회복된 땅 위에 살게 되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먹을 기회가 쉘터민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자의 삶도 바뀌었어요. 예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요. 참 다행이에요.”

“잘 되었네요.”

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답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 어떤 기자에게서 유럽 북부에서 스모그 현상이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들 표정이 심각해졌다.

테이는 기억을 되짚어보는 듯했다.

“2022년도, 그즈음엔 대기 오염 문제가 있긴 했었어요. 하지만 심각하지 않았고 그러다가 회색 스모그나 폭풍은... 어? 확실히 앞당겨진 했던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로는 회색 스모그가 처음 이슈화된 게 2023년도 여름이었요.”

“그럼 2023년도 말에서 여름으로 앞당겨진 건가요?”

“네, 그렇게 되네요. 이렇게 되면 아포칼립스도... 앞당겨졌어요. 2024년도에서 2023년도 12월 즈음으로요.”

테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 쉘터에서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은 별로 달라진 부분이 없네요.”

수호는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우리에게 말했다.

“일단 제가 전송 기계로 2022년도의 유럽 지역에 정찰 드론 몇 대를 보내겠습니다. 그 지역에 수상한 점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죠.”

“그리고 회색 폭풍의 검출 성분을 연구했던 유하준 박사의 자료와 회색 폭풍에서 검출한 성분 표본도 보내줬으면 해. 유하준 박사가 연구하고 싶다고 했거든.”

“전송 기계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수호에게 물었다.

“전에 네가 이런 말을 했었지.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 극소수긴 해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가 있었다고. 그런데 그 능력은 어떤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어 퍼졌다고 했었어. 그 부분, 이젠 내게 얘기해줄 수 있을까?”

“......”

“이곳 세상에 너, 유하준 박사. 그 외에 또 있어?”

내가 묻자 수호는 말을 고르는 듯 느리게 입을 뗐다.

“이 세상이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나타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인이라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한반도에서는 고수, 당신이 유일합니다.”

“내가 유일하다고?”

“네. 하지만 당신에게 나타난 능력, 그림 그리는 능력은 아포칼립스가 된 세상에서 누군가를 구하기엔 그다지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내가 유일했다면 어떻게 나로부터 특별한 능력이 퍼져나갔다는 거지? 나는 그림 그리는 능력이 전부인데?"

"그 당시, 당신만이 뭔가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었나 봅니다. 자신의 능력에 방도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2026년 그 날에...”

수호가 다음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자 테이가 대신 이야기했다.

“2026년도 그즈음, 고수 씨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요.”

“예?”

내가 자살이라도 했다는 건가?

생각지 못한 내용에 나는 몹시 놀랐다.

어린 아들을 두고, 내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니.

부득부득 살기 위해 뭐든 해도 모자랄 판에?

“수호가 고수 씨에게 쉽게 마음 문을 열지 못했던 까닭. 거기에 있어요. 당신의 선택 때문에 수호는 부모 없는 아이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

나는 무거운 어조로 테이에게 물었다.

“내가... 어린 수호를 두고 자살이라도 한 겁니까?”

“음, 자살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고수 씨는 모두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거라서. 이전에는 고수 씨의 능력에 어떤 조건이 걸려 있었나 봐요. 그 부분은 수호를 키웠던 이전 리더에게서 들었던 내용이지만요.”

“이전 리더라는 사람은 저와 꽤 가까운 관계였나 봅니다.”

“네, 그랬을 거예요. 루나 씨가 죽고 고수 씨의 마음을 붙들어준 이가 그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제 능력에 걸린 조건이 뭐였답니까?”

“자신의 생명을 연료 삼아 일시적으로 능력의 숙련도를 극대로 올리는 거였대요. 남은 수명을 불사른 만큼 능력치가 올라가게 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고수 씨가 그 선택을 한 거예요. 얼마의 시간만 남겨두고 자신의 생명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거죠. 그래야만 아포칼립스를 막을 방도를 얻게 된다고 했었대요.”

뭐라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이번에는 수호가 내게 말했다.

“당신의 처음 능력은 속도와 기교, 창의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태우는 선택을 한 이후, 그 능력은 갑자기 증폭되었습니다. 속도는 시간, 기교는 능력 제어, 창의력은 창조력으로 바뀐 겁니다. 당신은 그 능력 중에서 능력 제어를 통해 아마도 몇몇 사람에게 능력 각성을 이끌어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너의 능력도 내가 이끌어준 건가? 실물 전환 능력, 그런 특별한 능력은 네가 유일하다 들었어.”

수호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아픈 기억을 드디어 내게 꺼내놓았다.

“2026년 가을. 당신의 마지막. 내가 유일하게 또렷히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기억입니다. 그때 나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싫다는 말도 할 수 없었고. 울부짖거나 오열할 수도 없었는데. 당신은 일방적으로 선택했고 나에게 말을 하더군요.”

“......”

“수호야, 너는 특별해질 거야. 창조 능력, 그 능력이 너에게 주어졌으니. 그건 이곳 세상에서 유일한 능력이야. 조금만 기다려. 반드시 살아남아.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특별한 거 원하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버리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지금 내가 원하는 건, 아포칼립스가 된 세상이라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수호는 눈가가 다시 붉어졌지만, 눈물은 결코 흘리지 않았다.

눈물 나는 건, 오히려 나였다.

수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결국, 당신은 또다시 아들보다 세상을 택한 셈입니다. 세상에 임한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해서 당신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니.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 당신에게 줄곧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 해도, 나는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지금 만난 당신은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며.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

“내가 알던 아버지는 초라했고 가난했으며 당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젠 영영 존재하지 않으며 돌아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수호야. 그런데 수호야.”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겪었던 그 시간의 나는 영영 너를 떠났지만. 아직 우리에겐 기회가 남아있어. 나는 이제 태어날 수호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물할 생각이야. 아낌없이 사랑해줄 거고. 결국,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모든 건, 오히려 전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질 거야.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며 네 어린 시절이 채워질 거다. 그 삶은 쭉 이어질 거고, 위협당하지 않을 거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네 기억은 그렇게 새롭게 다시 빚어지게 되는 거지.”

“......”

“아마도 나는 되찾기 위해서 너를 잃었던 것이고. 내 삶을 버렸던 걸 거야. 물론, 네가 겪었던 그 시간의 나를 내가 알지 못하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호야, 이제껏 기다려주고 살아 남아주고 나를 찾아와줘서 고맙다.”

수호는 미동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몹시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잠시.”

벌떡 일어나 지휘관 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가 갑자기 나가버리자 당황했다.

테이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수호. 보나 마나 뻔해요. 혼자 울러 간 거예요. 제가 잘 알아요. 수호는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 약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요. 되게 딱딱하고 재미없고 멋없고, 그러면서 항상 강해 보이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이죠.”

“그렇군요.”

“하지만 우리는 다들 그런 수호를 아끼고 좋아해요. 수호는 정말 강한 사람이거든요. 다만, 강해 보이려고 애를 쓸 필요 없는 게. 때로 눈물을 보여도 강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인정하고 있다는 걸 수호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네.”

나는 흐릿하게 답하면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어? 고수 씨, 우는 거예요? 아니, 이 부자가 정말... 나까지 눈물 나게.”

잠시 후, 수호는 지휘관실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담담하고 차분하고 동요함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눈가가 살짝 붉긴 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수호는 각 잡힌 태도로 말했다.

“우리는 아포칼립스의 원인을 밝히려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현재로선 세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른 차원이 이곳과 겹치게 되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외계에서 온 재앙이 아포칼립스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가설은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 원인이 있어서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원인이 있다면 오염 때문에 생겼다는 건가?”

“아니요. 특정 사람에게 재앙과 같은 거대한 능력이 나타나서 아포칼립스가 되었다는 가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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