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나타날 능력
온갖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
그림으로 봤던 풍경이 저들의 쉘터 주변에 실물로 펼쳐졌다.
저런 풍경은 세상이 온전했을 때도 가능하지 않은 풍경이다.
지금은 절기상 봄인데도 밤나무엔 여문 밤이 주렁주렁 열렸고.
대추나무엔 반쯤 붉어진 대추가 가득 열렸다.
쉘터민들은 앞다투어 방어벽 밖으로 나와 나무에 달린 과일을 따기 시작했다.
공허한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난데없는. 풍성하게 추수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영상의 마지막에 자막이 나타났다.
<당신들이 보는 광경은 실제 일어난 일이며, 곧 당신들에게 나타날 일입니다.
이곳 세상에서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은 결코 없다고 다들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고수와 수호라는 인물이 있어 가능해질 희망입니다.>
영상은 그 부분에서 끝이 났다.
드론에 나타났던 디스플레이가 사라지자 강석은 흥분하여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드론을 준비해요! 저 쉘터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 * *
나는 펜의 전원을 끄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올라 등을 기대고 앉은 뒤, 핸드폰을 들었다.
수호에게 초음파 사진을 까톡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메시지를 적었다.
- 고수 : 수호야, 이루나 알지? 쉘터 설계했던 사람.
- 고수 : 그 이루나와 특별한 관계로 지내고 있어. 조만간 결혼하게 될 거야.
- 고수 :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어. 태명은 운빛이다. 루나가 지은 이름이야. 빛처럼 자라라고 지었어.
굳이 알려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 고수 : 루나는 신기해하며 웃었어. 아기가 너무 작다고. 이제 5주 된 태아니까 당연한 거지.
- 고수 : 초음파 사진을 보니까 조금 실감이 나. 내가 아빠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이 드네.
수호는 내가 보낸 까톡 내용에,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답다고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2050 : 축하해.
담백한 한 마디였다.
나는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태어날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미리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 고수 : 고맙다. ㅎㅎ 아이가 자라는 동안, 평화로운 세상을 보게 할 거야. 그 아이가 고통스럽고 아픈 세상을 보지 않도록. 뭐든 다할 거다. 반드시.
- 고수 : 내 삶을 걸고 그걸 너에게 약속할게.
-2050 : 기억하도록 하지.
* * *
다음 날 오전, 나는 거실에서 2050이 보내준 영상 파일을 열어보고 있었다.
2023년도 말부터 시작된 뉴스 보도 자료를 편집한 것이었다.
수호는 내게 톡 메시지로 말했다.
- 2050 : 2024년도 본격적으로 아포칼립스가 나타나기 전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할 시기까지. 안전하고 평화로운 시간은 이제 1년 반 조금 넘게 남은 듯하다.
- 2050 : 세계 곳곳에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 2023년도 말 즈음. 우리는 아직 아포칼립스의 원인과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 2050 : 이제 슬슬 네가 있는 곳에서 2024년도 아포칼립스의 진앙과 뿌리를 추적해야 해.
- 2050 : 전에 그렸던 드론 900대 중에서 추가로 드론을 보내겠다. 그곳에서 우선 드론 50대를 운용해야 할 거고 드론 조작은 AI가 할 거다.
- 고수 : 그래. 알았어.
나는 그렇게 답하고는 3D 디스플레이를 터치해서 영상 파일을 재생했다.
그러자 거실에 TV 크기만큼 사이즈가 조정된 영상이 재생되어서, 소파에 앉아 그 내용을 보았다.
영상을 통해 흘러나오는 뉴스 장면.
남자 앵커가 조금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로 뉴스를 보도했다.
“중국 서북부 지역에서 대규모 회색 스모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스모그가 나타난 시기는 지난달 30일 저녁 무렵으로, 점차 스모그 현상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중국 서북부 지역에서 이상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스모그에 노출된 지역의 식물이 갑작스럽게 시들거나 까맣게 잎이 타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고, 중국 국영 CCTV가 보도했습니다. 자세한 소식, 중국 란저우시에 나가 있는 하원준 특파원이 전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온통 회색 스모그에 잠긴 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한 기자가 바람이 거칠게 부는 어느 공원 앞에 서 있었다.
공원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저는 도심의 공원 앞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 나무들이 전부 시들어 있습니다. 수풀은 이렇게 까맣게 변색 되었습니다. 이런 이상 현상은 식물만이 아닙니다. 스모그가 나타난 지역의 하천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장면이 전환되고 영상에 자막이 나타났다.
<2024년 2월.>
이내 우리나라 앵커가 등장해서 뉴스를 전했다.
“세계 곳곳에서 회색 스모그 현상이 속출하고 있어서 오염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캐나다 북부 리자이나에서는 거센 회색 폭풍이 불어닥쳤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거세게 부는 회색 폭풍이 화면으로 보였고.
다시 자막이 나타났다.
<2024년 3월.>
침통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소식을 전했다.
“회색 폭풍으로 인한 피해는 이제 다른 나라의 일만이 아닙니다. 어제 늦은 오후부터 경기권과 강원도 지역부터 시작된 회색 폭풍은 충청 이남까지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이제 겨우 폭풍은 잠잠해졌지만 피해는 심각합니다. 김주혜 기자가 보도합니다.”
화면에 김주혜의 모습이 보였다.
최근에 마주쳤던 그녀는 생기 있는 모습이었는데.
2024년도 3월, 그 시기의 그녀는 피로해 보였고 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회색 폭풍이 지나간 후, 지금 보시면 토질의 색이 확연히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검게 변색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식물이 새카맣게 말라 죽고, 이렇듯 기이한 형태로 뒤틀려 자라는 식물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회색 폭풍에 노출되었던 많은 사람이 기관지와 피부 질환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회색 폭풍이나 스모그가 대기 중에 남아있을 땐,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외출 시에는 반드시 방독면을 착용해야 합니다.”
주혜가 취재한 도시 풍경이 화면에 잠시 보이다가, 장면이 전환되어 아나운서가 멘트를 이었다.
“스모그 현상이 나타난 지역의 대기를 분석한 결과, 지구에서는 현존하지 않은 물질이 검출되었다고 알려진 바 있습니다. 회색 폭풍과 스모그의 원인은 아직도 규명하지 못한 상태이며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회색 폭풍으로 인한 질환으로 전국 병원의 의료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소요와 폭동이 일고 있어서 각 나라의 정부는...”
장면이 또 편집되고 자막이 나타났다.
<2024년 4월.>
그리고 아나운서가 심각하게 소식을 전했다.
“회색 폭풍과 스모그에 오래도록 노출되어 이상 증상을 보이는 건 동식물만이 아닙니다. 대부분 식물은 새카맣게 변색하여 시들지만, 간혹 기괴한 형태로 변질되어 자라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2050이 보냈던 편집된 영상은 그 부분에서 끝이 났다.
나는 영상 파일을 닫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수호에게 물었다.
- 고수 : 김수호. 지금 톡 가능해? 영상을 봤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2050 : 말해.
- 고수 : 의구심이 드네. 아포칼립스의 시작은 회색 폭풍부터 해서 나타난 것 같은데. 내 그림 재능을 업그레이드한다고 해서 뭘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서.
- 2050 : 고수. 지금의 네 능력 상태로 판단하지 마. 지금 네 능력으로는 2051년의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니까.
- 고수 : 그렇다면 미래에 진화한 내 능력이 아포칼립스를 막을 수 있다는 건데.
- 고수 : 넌 나에게서 어떤 진화된 능력이 나타날지 알고 있는 거냐?
내가 묻자 수호는 1분 정도 잠잠하다 답을 했다.
- 2050 :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너에게 나타날 능력은 이후, 여러 사람에게 능력을 줄 만큼 성장하게 된다.
- 2050 : 그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구할 만큼 성장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지.
- 2050 : 내게 있는 실물 전환 능력. 그리고 유하준 박사의 기계공학과 물리 분야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능력. 그러한 재능과 능력은 너에게서 시초가 되었었지.
- 고수 : 뭐? 내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있다가 수호에게 다시 물었다.
- 고수 : 그럼 나는 왜 막지 못했었지? 네가 겪은 시간에선, 나는 왜 막지 못했었지?
- 2050 : 그건 너무 늦게 능력을 발견했고, 뒤늦게 재능을 계발했던 탓이지.
- 고수 : 이해가 안 되는데? 내 능력이 개발되지 않았었다면, 유하준 박사나 너에게 어떻게 능력을 줄 수가 있었는데?
- 2050 : 별로 답해주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하니 말해주지.
- 2050 : 내가 겪었던 시간에서, 너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 아포칼립스가 나타난 이후,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되어 가족을 잃어. 그때 충격을 받은 너에게 능력이 나타나게 된 거로 알고 있다.
- 2050 : 그 이후 네 능력이 성장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어. 그림 그리는 재능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었으니. 그 능력에 집중할 수도 없었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수호가 그동안 비밀처럼 묻어두기만 해서 알 수 없었던 내 삶에 관한 이야기.
들으면 결코 유쾌할 수 없고 내 멘탈을 흔들만한 것이기에.
수호는 처음부터 다 꺼내놓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모든 괴로운 이야기를 수호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내 마음은 복잡했다.
- 2050 : 그러다 넌 마지막 결단을 했던 것 같다. 가망 없는 세상과 우리의 미래를 보고서 그런 결단을 했던 거라 여긴다. 네 생명과 맞바꾸는 그런 선택이었지.
- 2050 : 난 그런 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 고수 :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속내를 언뜻 내비치는 말에 나는 물었지만, 그는 회피하며 다른 말을 했다.
- 2050 : 넌 죽기 전에 몇몇 사람에게 능력을 주었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2021년도 이후로 바꾸지 못했던 오래된 네 핸드폰. 거기에 능력을 심어두었다.
- 고수 : 아.
- 2050 : 그래서 나는 네 유품인 핸드폰으로 2021년도의 너를 만나게 된 거다.
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내 미래에 대한 수호의 말을 듣다 보니.
자꾸만 내 안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이 있다.
- 2050 : 그 모든 이야기를 해주고 유품을 보관했던 이는 나를 키웠던 사람. 그 사람이다.
- 고수 : 널 키운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
- 2050 : 아직. 나중에 말하겠다.
- 고수 : 그래.
- 2050 : 내가 블랙카드를 만든 까닭은.
수호는 그렇게 글을 적었다가, 다시 한참 만에 이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 2050 : 이전과 같은 상황을 원하지 않아서다. 네 핸드폰에 심어둔 능력을 통해 네 능력의 각성을 앞당겼으니.
- 2050 : 이젠 현실의 어려움과 상황 때문에 네 능력이 방해받지 않길 원했어.
- 2050 : 너에겐 아직 명성도 없으니 고액의 현금을 쓸 수 있는 블랙카드가 더욱 필요했지.
- 2050 : 나를 키운 그 사람이 말해주었었다. 네 능력은 우리의 희망이 될 거라고.
- 2050 : 그의 삶에 다시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포칼립스는 막을 수 있을 거고. 우리는 불행을 겪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지.
- 2050 : 나 역시 그 말을 믿었다. 너로 인해서, 2024년의 아포칼립스는 오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