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된다는 것 2
광고 촬영 감독과 스태프들과 잠시 인사 나누고.
콘티 대로 움직였다.
저택 내부 계단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찍고 드넓은 홀 가운데로 나아갔다.
홀 안의 벽면을 응시하다가 캔버스 앞에 섰다.
내가 그릴 그림은 광고 속 저택의 거대한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이 될 것이었다.
태피스트리라 함은, 중세 유럽에서 성행한 직물 공예인데.
주로 성 내부의 벽을 장식하고 동시에 벽의 냉기를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벽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천지 창조’.
베드로와 바울의 생애를 기록한 라파엘로의 작품들.
그 모든 건 다 태피스트리로, 화가의 밑그림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페라리 본사가 있는 이탈리아.
그곳은 사람들이 익히 하는 미술계의 거장들이 태어났던 나라이기도 하다.
3대 거장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그들 모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이다.
나는 그들 거장처럼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스케치하는 내 손놀림이 폭풍처럼 빨라지자, 이번에도 스태프들은 감탄을 숨기지 못하며 탄성을 냈다.
잠시 고요해졌던 촬영 현장은 사람들의 감탄 소리로 메워졌다.
오늘 광고 촬영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기자 출입은 허락된 기자만 취재할 수 있었는데.
광고 촬영 전과 후로만 취재가 가능했다.
기자들 출입 제한은 내가 페라리 측에 요구했던 사항이었다.
나는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스케치했고.
풍경 안의 있는 저택 또한 그려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려야 할 페라리 차량도 스케치했다.
내 손이 워낙 빨라서 스케치는 금방 끝났다.
이윽고 나는 팔레트에 유화 물감을 배합했다.
붓을 들고 원하는 색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물감을 여러 번 섞었다.
스태프들은 마치 라이브 공연을 보듯, 내가 채색하는 작업을 지켜보았다.
내 붓에 의해 초록빛 나무들이 찬연한 모습으로 캔버스에 채워져 갔다.
그렇게 마라톤 같은 기나긴 작업 시간이 지나고, 자정이 되었을 무렵.
진구는 감독과 스태프들과 인사하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를 기다릴 겸 의자에 앉아 피로해진 몸을 쉬었다.
이제 대기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터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김주혜가 나를 보며 서 있다.
아, 광고 촬영이 끝나고나면 기자가 출입할 거라는 걸 깜박했다.
나는 고개만 까닥하며 인사하고는 진구를 눈으로 찾았다.
그녀와 말을 섞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독과 인사만 한다던 진구 녀석은 생각보다 말이 길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대꾸하고는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기사 쓰려는 목적으로 말을 거는 게 아니에요.”
“이만 가봐야 해서요.”
짧게 대꾸했을 뿐인데.
주혜는 바로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녀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하였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날에 애플 수와 데이트했을 줄은 몰랐네요.”
목소리는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음에도 그녀는 내가 애플 수임을 확신하는 듯했다.
“네?”
“그날 함께 소주 마신 날이요.”
“......”
“애플 수와 닮아서 묘하게 끌리긴 했었는데. 정말 그와 데이트했던 거네요. 얼마 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사과를 해오셨을 때, 솔직히 많이 아쉽긴 했었어요.”
“......”
“전 그때 꽤 호감이 있었거든요.”
나는 일단 오리발을 내밀려고 했다.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
그러자 주혜는 훗 하고 웃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팬이라고. 제가 한번 뭐에 꽂히면 정신없이 파는 기질이 있거든요. 애플 수에 관한 건 모든 것을 섭렵했었어요. 그림 작업하는 영상을 수천 번 되돌려 봤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림을 볼 때, 저는 애플 수라는 인물을 보고 또 봤었죠.”
“......”
“그래서 생겨난 눈썰미라고나 할까. 함께 술도 마시고 대화도 나눴는데. 착각일 리가 없어요.”
“음, 죄송합니다. 주혜 씨가 그때 만난 인물이 저 맞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기자긴 하지만. 제가 애정하는 인물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기사를 쓰진 않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애플 수가 사랑하는 분은 어떤 분이실지 부럽네요. 그때 사고 치자고 했을 때, 확 붙잡는 건데.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하.”
겸연쩍은 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녀에게 했던 그 말은 솔직히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말이다.
그때는 워낙 급하고 나름 절박해서 그런 말을 했었다.
“다음에 또 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진구가 내 쪽으로 다가오자 주혜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어차피 취재는 끝나서요. 항상 응원할게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진구는 주혜를 알아보고는 내게 말했다.
“김주혜 기자 아니야.”
“맞아.”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네. 이만 가자.”
“그래.”
* * *
어느새 3월도 지나가고 4월 초가 되었다.
쉘터 자연경관을 그렸던 그림은 승인되어서 2050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았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 블랙카드 레벨에 28레벨로 상승합니다.
27레벨로 그렸던 그림이 통과된 것이다.
나는 루나와 함께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해도, 복학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녀에게.
연애도 결혼식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산부인과부터 오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루나는 많이 긴장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두려움도 있는 듯했다.
피검사로 임신을 확인하고 오늘 초음파 검사를 하려고 왔다.
잠시 후, 검사 후에 의사는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임신 5주 차입니다. 아기집도 확인이 되고 난황도 보이네요.”
“난황이요?”
“탯줄이 생기기 전에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 게 난황입니다.”
“아.”
우리는 의사에게서 주의사항과 이런저런 설명을 들은 후에 병원을 나왔다.
잠시 근처 카페에 들러서 음료를 시켜놓고 한동안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봤다.
루나는 초음파 사진을 보며 말했다.
“신기해요. 기분도 이상하고.”
“나도 그래.”
“내 안에서 오빠와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루나야, 미안해.”
“오빠가 왜요. 아기가 우리에게 온 일은 미안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지금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랍고 믿기지 않고 기분이 이상할 뿐이에요.”
“응.”
루나는 사진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흐흫. 너무 작아.”
“그치.”
“아기가 생겨서 오빠와 내가 하나로 묶이게 된 기분도 들고. 엄마가 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서 놀랍기도 해요.”
“우리 태명 지을까? 이름은 내가 지었으니까 태명은 루나가 짓는 게 어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답했다.
“음, 전 ‘운빛’이라고 지을래요. 고운 빛. 빛 같은 아이로 자라도록요.”
“운빛. 이름 예쁘네.”
“그렇죠?”
“루나야, 한나가 가게 쉬는 월요일에 집으로 갈게. 그때 한나에게 아이 생긴 거 말하고 결혼하겠다고 얘기 꺼낼게.”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 답하며 작게 미소지었다.
* *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나는 씻자마자 곧바로 펜을 집어 들었다.
펜을 잡고 3초 동안 쥐고 있자 내 앞에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저장해두었던 블랙카드 28레벨의 자료 사진을 열었다.
이내, 거실 안에 입체적인 사진이 한가득 채워졌다.
이틀 전에 2050이 보내왔던 자료 사진.
거대한 비행선 같은 거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거라서, 실물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해야겠다.
나는 사진을 한동안 응시했다.
수호는 자료 사진을 보내면서 내게 말했었다.
- 2050 : 고수. 이번 그림은 장차 존재하는 게 가능하지만 실재하지 않은 피사체다.
- 2050 : 2027년도에, 유하준 박사가 대략 설계해두었던 것을 바탕으로 완성한 이미지이지. 전에 쉘터를 그렸던 것처럼 외부 말고도 내부까지 전부 그려내야 해.
- 고수 : 이건 뭐냐? 비행선?
- 2050 : 이동형 쉘터이자 초대형 전투 비행선이라고 알고 있으면 될 듯하다.
- 2050 : 비행선 안에 200명 가량이 생활 가능하고. 동시에 전투 차량과 전투 로봇을 수송할 수가 있지.
- 2050 : 티타늄 합금으로 제작되어서 강력하고 소형 미사일을 탑재한 데다 고출력 아이언 빔을 발사하기도 해서 비행선만으로도 전투가 가능하다.
- 2050 : 비행선이 실물 전환에 성공하게 되면 나는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나서게 될 거야. 이를 위해 꽤 오래 준비했어.
- 고수 : 이런 것도 실물 전환이 가능해?
- 2050 : 지금은 어렵지만, 네 창의력이 한 번 더 진화하면 가능해질 듯하다.
- 2050 : 조만간 명성으로 인해 너에게 코인이 대량 생길 거야. 2051년도에서 ‘고수’라는 이름이 더 멀리 퍼질 예정이거든.
수호는 실물 전환한 쉘터 주변 풍경을, 세계 곳곳의 생존자 쉘터로 퍼트릴 거라고 했었다.
자료 사진을 닫고 나는 내 코인을 확인해보았다.
“2050 고수.”
『명화 작가 28레벨
명화 속도 : 8
명화 기교 : 8
창조 창의력 : 14
그랜드 코인 : 7.』
나는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코인이 많이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곧바로 창의력을 업그레이드했다.
창의력에 진화 능력이 나타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명화 작가 29레벨
명화 속도 : 8
명화 기교 : 8
창조 창의력 : 15
그랜드 코인 : 3.』
그러고는 디스플레이를 터치하여 이메일을 열었다.
조금 전에, 2050이 보내왔던 영상 파일이 있다.
쉘터 주변 풍경을 실물 전환했던 내용의 영상이다.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 * *
2051년도의 어느 생존자들의 쉘터.
규모가 크지 않은 쉘터다.
파수탑에서 보초를 서던 강석은 멀리서 날아오는 드론 한 대를 발견했다.
그는 재빨리 기관총을 들고 드론을 향해 겨누었다.
드론이 더 접근하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드론은 공중에 그대로 멈춰선 채 한동안 부유했다.
그러다 드론에서 대형 3D 디스플레이가 공중에 나타났다.
강석은 그 광경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공에 펼쳐진 디스플레이는 점차 확대되었다.
그러자 쉘터의 이목이 쏠렸다.
“저게 뭐야?”
“어디서 저런 게 날아온 거지?”
“누가 보내는 영상 메시지인 듯해요. 공격 의사는 없어 보입니다!”
“저 영상을 녹화해!”
“영상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공중에 나타났던 대형 디스플레이에서 이내 어떤 영상이 흘러나왔다.
굳건해 보이는 어느 쉘터의 풍경.
높고 두꺼운 방어벽이 둘러 있고 방어벽엔 강력한 첨단 방어 무기가 설치되어 있다.
“저런 곳이 있었나?”
“저곳은 강력하고 안전해 보이는군요. 그런데 저런 영상을 보내는 저의가 뭐지?”
“약탈자가 보낸 드론은 아닌 듯합니다. 약탈자들의 요새는 저런 식이 아닙니다. 일단 영상을 보도록 하죠.”
영상에선 방어벽 위로 올라온 쉘터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다들 환했고 순박해 보였다.
그들의 표정엔 살의와 음울함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강석은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 묘한 감동을 받았다.
이런 비참한 시대에 저런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수호는 성공할 겁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싱싱한 바나나를 먹어볼 생각에 어제부터 잠이 오지 않았어요. 너무 설레서.”
“하하. 저런 풍경은 사진으로도 난생처음 봅니다. 과일이 종류별로 열려있다니! 고수의 그림 중에서 오늘이 최고입니다.”
“고수님! 이번에도 멋진 그림 감사합니다!”
“수호와 고수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길 바랍니다!”
영상으로 그림이 보였다.
쉘터 주변으로 초록빛 무성한 풍경이.
그리고 그곳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온갖 과일나무가.
에덴 동산이 있다면 저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영상을 보던 이들에게 스쳤다.
강석은 들고 있던 기관총을 내려놓았다.
그는 영상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초록빛 풍경은 사진인 줄 알았는데.
그림이란 말인가?
그때 쉘터의 리더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굳건한 어조로 목소리를 냈다.
영상을 통해 보는 거지만, 그의 장악력은 대단했다.
그의 목소리와 강한 어조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듯하다.
“오늘, 고수가 그린 그림을 실물 전환하는 광경은 많은 이들에게 보이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머무는 희망을 이곳에만 머물도록 할 수 없습니다. 2024년 이후, 적들은 인류와 이곳 터전을 삼켜왔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꽂을 때입니다! 죽음의 영역은 사라질 것이고, 초록빛 생명은 세상에 다시 회복될 겁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 일이 우리 쉘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와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함성이 이어질 때, 카메라 시점이 쉘터에서 더 멀어져서 주변 풍경이 보였다.
까맣게 죽어버린 땅과 기괴한 식물들이 자라는 풍경.
이윽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림이 사라지고 나자, 쉘터 주변의 풍경은 변화를 보였다.
땅이 차츰 회복되며 기괴한 식물들이 지워지고 대신 그곳에 싱그러운 초록빛 나무들이 나타나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강석은 놀라움에 눈을 커다랗게 떴고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