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된다는 것
티파니 브랜드의 다이아몬드 반지 가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블랙카드를 얻기 전에는 꿈도 못 꿨을 가격.
이곳의 다이아몬드 1캐럿은 2천만 원 가격부터 시작했다.
거기다 플래티늄 백금에 미세한 다이아몬드가 추가로 박힌 디자인의 제품은 가격이 더 올라갔다.
루나에게 줄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가격은 3200만 원.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줄 선물인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더 비싼 3800만 원이었다.
목걸이를 선택한 후,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직원에게 물었다.
“아기에게 줄 목걸이도 여기에서 살 수 있습니까? 남자아이인데, 어른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목걸이로요.”
나는 수호에게도 선물을 해주고 싶어졌다.
현재 시점에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직원은 방긋 웃는 얼굴로 내게 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팬던트 뒷면에 인그레이빙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객님들께선 미아방지 목걸이 용도로 목걸이를 구매하십니다.”
미아방지 목걸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수호를 떠올리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만.
“튼튼한 백금 줄에다 동그란 팬던트를 했으면 합니다. 하트 모양을 하면 싫어할 것 같기도 해서요.”
“네. 아무래도 남자아이라면 그런 경향이 있을 겁니다."
직원이 이내 팬던트와 줄을 골라주자 나는 그걸 사겠다고 했다.
"그럼 펜던트에 넣을 문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사랑한다는 말과 수호라는 이름을 넣었으면 하네요. 그리고 제 핸드폰 번호.”
“그럼 문구는 '사랑해'로 하고 수호라는 이름과 연락처를 넣어드리겠습니다.”
“네. 혹시 가장 작은 다이아몬드 알갱이로 하트를 박는 건 어떨까요? 좋은 거로 해주고 싶은데.”
“음 다이아몬드를 박으면 저희 매장으로선 좋지만. 살짝 조언을 드리자면 미아 방지 목걸이는 너무 비싸 보이지 않은 거로 하시는 게 좋아요.”
“그래요?”
“혹시 범죄자를 만날 경우, 목걸이를 낚아채 가려다 아이가 다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하지만 하트 모양은 문구에 넣어드리겠습니다.”
총 7100만 원어치의 쥬얼리를 구매한 나는 티파니 매장을 나왔다.
곧바로, 명품 시계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
파텍필립 매장.
내가 이런 곳에 와보게 될 줄은.
이곳 매장의 분위기도 유럽 느낌이다.
클래식하면서도, 조금 전 티파니보다는 묵직한 분위기.
깔끔한 수트를 빼입은 젊은 남녀 직원이 나를 안내했다.
이곳에서는 아버지에게 선물할 시계를 살 생각이었다.
“60세 남자가 찰 만한 시계를 사려고 합니다. 가격대는 3000만 원대가 좋겠군요.”
“그럼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제품으로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쇼핑만으로 1억 100만 원을 썼다.
명품관에서 이렇게 돈을 써보는 건 난생처음.
나는 백화점에서 적당히 이른 저녁을 사 먹은 다음, 아우디가 주차된 주차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백화점을 빠져나와 번화한 어느 거리에서 잠시 차가 멈춰서게 되었을 때.
어느 빌딩에 걸린 대형 전광판에 익숙한 장면이 흘러나왔다.
절로 시선을 뺏긴 나는 그걸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내가 마지막 그렸던 유화 그림.
호수에 새겨진 약속.
작업 과정을 너튜브 영상으로 올렸던 걸 바탕으로, 편집한 영상이 대형 전광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 모습은 편집되었고, 다만 유화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만 빠르게 나타났다.
세밀한 터치까지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까 새삼 신비롭다.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애플 수 팬클럽인 ‘올차드’에서 대형 전광판에 내 그림을 넣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된다.
지나던 젊은 행인의 대화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뭐야? 사진인 줄 알았는데. 그림이야? 되게 예쁘네.”
“너 몰라? 저거 애플 수 그림이잖아. 요즘 엄청 핫해.”
“사진 같으면서도 뭔가 신비하네.”
“젊은 층에서도 인기 많아. 아마 저 작가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그릴걸?”
“그래?”
“애플 수, 그림으로 돈도 잘 벌지만 기부도 많이 해서 평판이 좋다더라.”
거기까지 들었을 때, 앞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나 역시 차를 출발했다.
* * *
수호, 그에겐 깊은 흉터라고 할 수 있는, 오래된 기억이 있다.
그건 부모의 죽음이다.
수호는 먼저 어머니를 잃었고 그다음엔 아버지를 잃었었다.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그는 말을 잃긴 했었지만.
어머니에 관한 애틋함이라든가.
얼굴이라던가, 하는 건 기억에 없다.
다만, 그날의 일이 워낙 큰 충격이라서 한 토막 기억으로 흐릿하게 남아있다.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의 어떤 결단으로 인해 생겼던 일.
그렇기에 그의 마음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절로 딱딱해져버리곤 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고수를 만나고 난 이후,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숨을 거두던 순간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마르고 초췌했던...
하지만 당시, 수호는 말을 하지 못했고 오열도 하지 못했었다.
떠올리면 고통스러운 기억.
그 이후로도 역시 고통스러웠던 세월.
말을 하지 못한 채 4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었기에.
수호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펜던트에 새겨진 문구를 내려다봤다.
수년 전에 좀 더 긴 줄로 바꿔서 하고 다니는 목걸이다.
소소한 기억이지만 그의 기억 중 한 가지가 바뀌었다.
그 기억이 바로 이 팬던트.
그의 기억에 변화를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팬던트에 새겨진 이 문구를 볼 때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이 조금씩 녹았던 것 같다.
이전과는 다른 생각이 그의 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칠흑 같던 그의 마음에 씨앗 같은 빛이 점차 번져가듯.
아버지는 그와 어머니를 버렸던 게 아니다.
...라고 떠올랐던 그 생각은, 이내 어둡던 그의 마음을 빛으로 희석시켜 갔다.
몇달 전, 고수가 까톡 대화로 무심코 했던 말이 떠오른다.
‘김수호. 그런 멋진 말로 사람을 그냥 설득하네. 누구 아들내미인지 참 잘 컸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수호는 그와 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고수는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받아들이는 수호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오열하지 못해서, 어릴 적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기만 했던 묵은 울음.
이제 와서야 그의 안에서 솟구치려는 걸, 수호는 홀로 고요히 삼켜야만 했었다.
* * *
오늘 페라리 광고 촬영을 하려고 그제 밤은 밤을 새웠었다.
가까스로 완성한 그림.
온갖 과실나무가 열린 쉘터 주변의 자연 풍경 그림이다.
완성된 그림을 AI 2050에게 보내자.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3일이 소요됩니다.
나는 2050에게 퉁을 줬었다.
- 고수 : 야, 너는 AI면서 분석하는 게 왜 그리 굼떠?
- 2050 :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림 분석 외에도 쉘터 통제를 비롯한 수많은 업무를 처리해야만 합니다.
- 고수 : 이번에도 통과하면 27레벨 보상 금액. 1310억 7200만 원을 긁을 수 있는 거지?
- 2050 : 네, 그렇습니다.
- 고수 : 계속 궁금했는데. 수호는 그만한 거금을 대체 어디서 얻는 거냐?
- 2050 : 그 부분은 저에게 답변할 권한이 없습니다.
- 고수 : 그래, 그렇겠지. 내가 괜한 질문을 했다.
어제는 컨디션 조절을 하려고 도수치료도 받고 잠을 좀 자뒀다.
그러면서 크리스티 홍콩에서 낙찰된 내 그림의 가격을 확인했다.
겨울에 핀 봄, 낙찰가는 16억.
호수에 새겨진 약속은 19억이다.
총 낙찰 금액은 35억이다.
어쨌거나 오늘 이른 아침, 광고 촬영 전.
나는 대기실에서 의상을 입은 채 거울 앞에 섰다.
전에는 캐쥬얼한 의상이었다면 이번에는 중세 귀족이 입었을 만한 의상이다.
블랙 프록 코트와 바지.
그리고 검은색 화려한 가면.
헤어 스타일링도 클래식한 분위기가 들도록 전문가가 매만져주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급스럽다.
그러면서도 가면 때문인가.
강렬한 이미지도 엿보였다.
진구는 내가 의상 입은 걸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키가 되니까 옷 태가 난다. 진짜 고고한 귀족 같아.”
“후후, 그러냐?”
“근데 너 어제 여자친구한테 프러포즈한다더니. 어떻게 되었냐?”
그의 질문에 나는 입매를 조금 늘렸다.
어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어제저녁 즈음, 루나를 데리고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에 갔었다.
목선을 드러낸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
피부가 하얗고 얼굴은 작은 데다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하면서도 눈은 커다래서.
자세히 들여다 봐도, 참 예쁘고 소녀 같다.
루나가 내 연인이라는 게 새삼 놀랍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을 즈음.
그녀에게 목걸이가 든 작은 케이스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루나야, 우리 결혼하자. 결혼해서 같이 살자. 네가 설계해서 지은 집이 완성되면,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들도 함께 사는 것도 생각해보자.”
그러자 루나는 갑자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그녀가 감동한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루나는 금세 펑펑 눈물을 쏟으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황을 좀 했다.
“왜 그래? 루나야.”
“흑, 흐흑. 오빠. 어떡...”
“응?”
“하지... 계속 고민했어요. 흐엉.”
결혼하자는 게 고민되어서 우는 건가 해서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고민? 내가 결혼하자 해서? 미안. 내가 너무 급했지?”
“아니. 그게 아니라, 훌쩍. 아무한테도 말을 못... 흑. 했어요.”
한동안 울다가 울음이 잦아들 즈음, 루나는 핸드백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그걸 받아서 보니 두 줄 표시가 선명하게 나 있다.
임신인 거다.
“루나야?”
“오빠가 전에 지나가는 말로 결혼 얘기는 했어도, 그땐 사귀기 전이어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빠는 매일 바쁘구. 그런 중에 덜컥 임신해서 겁이 나고 걱정이 되었어요. 오빠가 망설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고.”
루나는 눈물범벅이 되었어도 예뻤다.
코끝과 눈가가 붉어진 모습이 하얀 피부 때문에 도드라졌다.
그녀는 마스카라를 바르지 않는 편이라, 울었어도 눈화장이 번지거나 하지 않았다.
“겁을 왜 내. 내가 말했잖아. 너와 결혼할 거라고. 실은 나 혼자 김칫국을 먼저 마신 거긴 하지만. 아이 이름도 지어났는걸.”
“이름이요?”
“응. 수호라고. 우리 아이. 수호.”
루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흐흐흫. 오빠아, 아직 아들인지도 모르는데. 수호라니.”
하긴, 아직 결혼하기도 전이고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
이름부터, 그것도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놨다고 하면 우습긴 할 거다.
그렇게 루나가 웃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데.
진구가 나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뭘 그리 실실 쪼개냐? 좋아 죽네.”
“흐흐. 내가 웃고 있었나.”
“어제 잘 되었나 보네.”
“응. 나 이제 애 아빠 된다.”
진구는 놀랐는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잉? 뭐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냐? 애 아빠?”
“그래, 너 제대로 들었어.”
“헐. 사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나이 어린 여자친구에게 벌써 결혼 프로포즈 한다기에 와, 이놈 좀 보소! 했는데. 이유가 있었구먼! 사고...”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나에게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똑똑-
노크 소리가 나서 진구는 대기실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스태프가 고개를 내밀며 우리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드린 콘티 숙지하셨어요?”
“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그럼 나오십시오.”
스태프의 말에 나는 대기실을 나섰다.
스태프는 앞서 걸으며 나를 힐끔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어, 애플 작가님. 저 팬입니다. 오늘 파이팅하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이번 광고 촬영은 그냥 그림만 그리면 끝이 아니었다.
페라리 측은 작정했는지 광고 제작비를 제법 투자해서, 내가 그림을 그릴 세트장만 해도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실내에 설치된 세트장에 도착한 나는 내심 감탄했다.
세트장은 마치 중세 귀족의 저택 내부처럼 보였다.
꽤 규모가 컸다.
저택의 계단과 난간을 바라보았다.
그냥 봐도 력셔리해 보였다.
콘티 대로라면 나는 저 위에서부터 아래로 걸어 내려와야 한다.
음, 굳이 저런 행동을 해야 하나? 싶지만.
광고를 찍기로 했으니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