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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62화 (62/153)

한 달 안에 1310억 쓰기

저녁 무렵, 나는 집 근처 카페에서 잠깐 수연이를 만났다.

그녀는 며칠 새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다.

애써 밝은 얼굴로 내게 말하는 그녀.

“카드 지갑 선물 고마웠어. 예쁘더라. 아마 평생 가지고 다닐 것 같아.”

“나중에 생일 선물로 지갑 선물 또 할 테니까 평생은 참아주라.”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그녀는 흐릿하게 웃었다.

“진구에게 얘기 들었어. 여자친구 생겼다면서.”

“응. 조만간 결혼도 생각하고 있어.”

“축하해. 이번엔 좋은 사람 만났나 보다.”

“너도 얼른 좋은 사람 생기면 좋겠다.”

“그러게. 나 저번에 너에게 까톡 보내고 운 날. 못 볼 꼴 보인 것 같아서 엄청 창피했었어.”

“나는 너에게 미안할 뿐이지.”

“실은, 너 유라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애써 본 거였거든.”

“......”

“역시나 나는 너에게 친구 이상은 아니었던 거지. 너 애플 수인 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을게.”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절친할 거지?”

“물론이지.”

“그럼 되었어. 평생 가까운 친구로 널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수연이는 그렇게 말하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이어서 말을 꺼냈다.

“네가 결혼 생각한다기에 드는 마음인데, 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참 예쁘겠다. 그 아이도 내가 정말 좋아할 것 같아. 난 네 모든 걸 좋아했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수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호는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 김 씨라고 했었다.

어쩌면 수연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맙다, 수연아. 그렇게 말해줘서.”

“이번에 그린 그림 봤어. 난 네 친구이기 전에 팬이잖아. 1호 팬?”

“영광이지. 사실 지금의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네 덕분이기도 하고.”

“네가 그린 그림은 실재하지 않은 신비한 풍경을 실물처럼 그려내는 거라서 더 매력이 있는 것 같아.”

“그런가.”

“암튼 네가 잘되어서 좋아.”

생각해보면, 내가 애플 수인 것을 아는 사람은 진구와 수연이뿐.

수연이라면 재단을 운영하는 인물로 적격이지 않을까.

나는 돈으로 명성을 올릴 방법을 최근 고민했었는데.

그러다 생각한 게 ‘애플 수’ 이름으로 미술인 재단을 설립하는 거였다.

미술 분야는 아무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들을 후원하고 돕는 게 재단 설립 목적이다.

더불어 사회에 여러 좋은 일도 하면서.

요즘은 공공 미술이라고 해서 공원에 조형물을 만들거나 동네 벽화를 그리거나 하는 거로, 미술 사업도 할 수 있다.

예술인들에게 일자리 창출도 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거다.

그러면서 명성도 올릴 수 있을 듯하고.

수연이는 미술 전공인 데다 야무진 성격이라 잘 해낼 것 같다.

“수연아, 너 재단 이사장 한번 해보지 않을래?”

“응?”

“내가 애플 수 이름을 걸고 미술인 재단을 설립하려고 하거든.”

“아. 너 저번에 기부도 하고 그러더니. 좋은 일도 계속하려는 거구나.”

“그런 셈이지.”

“음, 솔깃하긴 한데.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그럼 생각해보고 연락 줘.”

“그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다 핸드백을 챙겼다.

“이만 일어날게. 오늘은 종일 바쁘게 일해서 피곤하네.”

“그래. 다음에 보자.”

수연이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 * *

어느덧 나는 새집으로 이사를 했고 며칠이 흘러갔다.

겨울이 물러가고 노란 개나리와 산수유가 피는 계절인 봄이 왔다.

내가 이사한 집은 꽤 넓었지만 물건이 별로 없어서 횅했다.

루나가 화병과 꽃을 사 와서 주방과 거실을 장식해서 그나마 이 집이 화사해지긴 했다.

이전에 살던 투룸을 정리하는 건 진구가 도와주었다.

그에게는 차를 사라고 8천만 원을 입금해주었던 터였다.

오늘은 정테이와 이루나, 유하준 박사가 내 집을 방문했다.

쉘터 건축 문제로 내 집에서 잠시 미팅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테이는 내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좋은 데서 사시네요.”

“좋은 집이긴 한데. 집에 아무것도 없네요.”

“곧 있으면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될 텐데. 집을 꾸미고 채우는 건 그곳에서 해도 되죠.”

“네. 앉으세요.”

내가 말하자 다들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커피 머신으로 라떼 4잔을 내렸다.

최근에 커피 머신을 조금 비싼 걸 구매해서 집에서 편하게 라떼와 마키아토까지 내려 마실 수가 있었다.

루나가 와서 쟁반에 커피를 담아 거실로 가져갔다.

“훗, 루나 씨는 이 집에 머무는 게 자연스럽네요. 잘 마실게요.”

“오빠 집에 가끔 놀다가 가거든요.”

“그래요? 혹시 자고 가기도 해요?”

테이가 짓궂게 묻자 루나는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아뇨. 그냥 잠깐 왔다가 집에 가요. 어차피 오빠는 바쁘고, 자고 가면 언니가 걱정하니까요.”

조만간 루나가 임신한 게 나타나게 되면 한나 얼굴을 어찌 볼지.

빨리 루나의 어머니와 언니에게 결혼 허락을 받아야 할 듯하다.

나는 소파의 적당한 자리에 앉아 유하준 박사에게 말했다.

“과수원 땅에 건축하게 될 건물에 유하준 박사님의 연구실도 마련될 겁니다. 박사님께선 벙커 쉘터 건축물의 방어 시스템과 제가 usb로 드렸던 내용에 관한 기술을 완성해주세요. 이를 위한 예산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정테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건물 건축은 지연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건물 자재는 비싸도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강하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모든 창은 방탄 유리여야 하고 창과 출입구마다 비상시 방어 시스템이 가동되어야 합니다.

지하 벙커는 어떤 충격이 있어도 어느 정도 자체 복구가 되는 시스템이 있었으면 하는데요.”

“그건 저희 팀이 유하준 박사님과 논의해 볼게요.”

“지하 벙커에는 기존 설계 외에 저장고를 더 넓혔으면 합니다.”

“네, 그럴게요.”

한나는 내가 하는 말을 메모했다.

“거기에 모든 의약품과 보존 식량이 장기 보관이 가능해야 합니다.”

“네. 그 점은 염려 마세요. 유통기한을 30년 넘게 잡았어요. 모든 의약품도 그 정도 기한 동안 보관될 수 있도록 할 거고요. 저희가 거래하는 회사 중에 특수한 통조림을 만드는 회사가 있거든요.”

“특수한 통조림이요?”

“네. 보통 통조림은 유통기한이 5년에서 7년? 그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여긴 유통기한이 30년이나 되요. 조리된 음식을 동결해서 건조 가공한 식품인데요. 수분을 98% 이상 제거해서 통조림으로 만든 거죠.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어요.”

“음, 그걸 최대한 많이 구매해서 벙커 안에 비축하면 좋겠군요. 그건 가격이 개당 얼마나 해요?”

“저희가 대량 구매하면 개당 5500원까지 낮출 수 있어요. 그걸 제값 다 주면 8000원 정도 하거든요.”

“일단 그걸 최대한 많이 구매하는 게 좋겠네요. 노가다 시간도 줄일 겸.”

“네?”

수호가 사는 2051년도는 식량 문제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었다.

특히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졌는데, 그 이유는 통조림 같은 식량이 바닥난 탓이었고.

쉘터민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쌀 포대를 산더미처럼 쌓은 그림과 대용량 통조림 그림, 포장 김치를 수호에게 따로 보냈었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리려면 시간도 걸리고 노가다가 되니 돈으로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제 수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림을 받아본 수호의 반응은 되게 떨떠름했었다.

- 2050 : 고수. 부탁하지도 않은 그림을 그렸군.

- 고수 : 속으로는 좋은 거, 다 안다. 수호야.

- 2050 : 네가 그린 통조림 말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고수 : 말은 안 되지만 내 그림은 말이 된다. 네가 전에 그랬지 않았나?

- 고수 : 창의력에 창조라는 명칭이 붙으면, 실재하지 않을지라도 실재하는 게 가능한 그림을 그리면 실물 전환에 용이해진다고.

나는 대용량 통조림을 그림으로 그렸었다.

참치 통조림인데 통조림 하나에 용량이 100킬로그램이었다.

그걸 6개 그려서 보냈고.

포장 김치도 100킬로그램으로 포장된 걸 3개 그려서 그에게 보냈었다.

- 고수 : ㅎㅎㅎ 맛있게 먹어라. 참, 이번에 그리는 쉘터 주변 풍경 말이다.

- 고수 : 온갖 과일나무는 다 총출동시켜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거든?

- 고수 : 귤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바나나 나무, 무화과 나무, 감나무, 포도나무 등등.

- 2050 : 그 또한 괴이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풍경이겠군.

- 고수 : ㅋㅋㅋ 누군가가 바나나를 먹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거기에 힌트를 얻어서 바나나 나무를 특히 많이 심어놨다.

수호는 한참 만에 내게 답을 보내왔다.

- 2050 : 그래. 고맙다.

- 2050 : 너는 나보다 앞선 세대이니 정중한 표현을 해야 하는데. 너를 대하던 방식이 이미 굳어져서...

- 고수 : 괜찮아. 나는 너와 동갑이잖냐. 하지만 내가 앞선 시대를 살고 있긴 하니. 형이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냐?

- 2050 : 그렇게는 못 하겠다.

- 고수 : ㅋㅋㅋ 그래.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

- 2050 : 고수. 내가 쉘터 주변의 자연경관을 그리게 한 건. 2051년도에 ‘고수’라는 이름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 고수 : 내 이름을?

- 2050 : 이 세계는 이미 희망이 꺼진 지 오래인 세상이지. 우리 쉘터는 이미 희망을 품고 회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지만.

- 2050 :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아. 한반도 전역만이 아니라 다른 대륙에 존재하는 생존자까지.

- 2050 : 그들도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뭔가 보여줄 만한 게 필요했다.

- 고수 : 그게 쉘터 주변 풍경이었군 그래.

- 2050 : 그렇다. 그 풍경을 가능하게 한 이름은 김수호와 고수라는 걸 퍼뜨리고 싶었지. 그것으로 명성 수치가 올라갈 수가 있어.

- 고수 : 혹시 다른 지역의 생존자들이 너희에게 위협이 되진 않을까?

- 2050 :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전투 로봇과 방어벽의 방어 시스템이 있어서 여느 쉘터보다 전투력이 상위니까.

나는 수호와 대화했던 일을 생각하다 정테이에게 입을 열었다.

“쉘터가 조속히 건축되어서 그 통조림이 채워진다면, 꽤 도움이 되겠네요. 다들 좋아할 테고.”

내 말뜻을 알아들은 테이는 빙긋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렇겠죠?”

하지만 유하준 박사와 루나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 *

크리스티 홍콩에서 경매 일정이 시작되었다.

애플 수가 ‘겨울에 핀 봄’ 그림 작업을 너튜브 영상에 올려서, 이후 라이브 콘서트까지 이어진 바 있었던 작품.

그 작품의 추정가는 12억이다.

그래서 시작가도 12억으로 정해졌다.

크리스티 홍콩의 홈페이지와 너튜브 영상을 통해 온라인 라이브 경매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마도 50만 명이 넘는 이가 시청할 터.

한국에서는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경매 프리뷰 전시 행사가 H 백화점에서 열렸다.

H 그룹의 손녀딸이기도 했던 김주혜는 이곳 전시 행사에 참석했다.

평소라면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을 거였지만.

오늘은 애플 수의 작품 프리뷰 행사라서 이곳에 참석한 그녀다.

이곳에 미술품 큰손들이 대거 참석했다.

애플 수의 팬클럽인 올차드 회장도 와 있다.

팬클럽 회장 감투를 쓴 그지만, 그 역시 능력 있는 사업가라고 알고 있다.

H 백화점 내부에 있는 대형 홀.

그곳에서 악기 연주자들이 클래식을 연주하고, 테이블마다 고급스러운 음식과 음료가 놓여 있다.

귀빈들이 참석에서 테이블 자리마다 착석했고, H 백화점의 사장이 나와서 뭔가 멘트를 하는 중이다.

주혜는 참석자들을 훑어보다가 어떤 여자에게서 시선이 머물렀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 수연이 앉아 있다.

익숙한 얼굴.

어디서 봤더라?

아! 전에 애플 수 라이브 콘서트에서 옆에 앉았던 여자.

주혜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수연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를 내며 수연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수연이 주혜를 바라보았다.

“누구...?”

“전에 애플 수 라이브 콘서트에서 옆에 앉았었는데. 기억하세요?”

“아. 그때 옆에 앉았던 분이세요? 죄송하지만 전 기억이 안 나서.”

“보통은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죠. 애플 수의 팬이신가 봐요? 여기서도 뵙네요.”

“네. 팬이에요.”

수연은 핸드백을 열더니 명함 하나를 꺼내 주혜에게 줬다.

명함에는 애플 수 미술문화 재단 이사장이라고 적혀 있다.

주혜는 관심을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애플 수 미술 재단이 생겼어요?”

“네, 며칠 안 되었어요.”

“저 사실은 기자거든요. 애플 수 미술 재단 설립 내용을 기사로 써도 될까요?”

“네, 그러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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