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그리고 두 번째 이사 3
이틀 후, 유화 그림을 완성했고.
그림 작업하는 모습을 촬영한 파일을 진구에게 건넸다.
그리고 오후 무렵.
진구와 점심을 먹고 그가 봐두었던 집 중에서 최종 선택한 곳을 직접 보러 왔다.
이곳은 아파트는 아니었고 한강 변 신축 고급 빌라였다.
45평형이었고 매매가는 32억 원이었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도를 지나 넓은 거실이 나왔다.
우리를 안내하던 공인중개사가 설명했다.
“이 집은 방이 3개, 드레스룸 2개, 욕실 2개, 주방, 식당, 거실, 세탁실이 있어요. 현관도 꽤 넓고 구조도 잘 나왔습니다. 남향이라 채광도 좋고요. 신축이라 여긴 따로 손댈 게 없어요. 고급 붙박이 옷장도 있고 드레스룸도 잘 되어 있어요. 수납 공간이 많죠.”
나는 집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넓다.”
진구는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죽이지? 고수, 성공했다. 이런 집도 사고. 부럽네. 여기는 주차공간이 넓어서 3대까지 댈 수 있다던데.”
나 대신 공인중개사가 대꾸했다.
“예. 맞습니다.”
이제껏 원룸, 작은 투룸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이런 집에 산다는 건 꽤 설레는 일이다.
나는 집의 곳곳을 둘러봤다.
거실이 꽤 넓었다.
커다란 소파를 놔둬도 공간은 황량할 정도로 남아돌 듯했다.
공인중개사는 거실에 있고 진구와 나는 침실에 들어가 있었을 때,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계약해야겠다.”
“지금?”
“응. 여기 ”
“근데 말이야. 계속 궁금했던 건데. 비결이 뭐냐?"
"응? 비결?"
"작년 여름부터 너 달라졌잖아. 특히 그림 실력.”
내 가장 가까운 친구인 진구가 그런 의구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늘 생각해오긴 했었다.
진구에겐 내 비밀을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비밀을 지키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다만 2024년도에 나타날지 모를 아포칼립스를 알아봤자,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포칼립스가 실현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에게 말했겠지만.
어차피 2024년도의 그 시기는, 수호의 말대로 무사히 넘어가게 될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글쎄. 나도 궁금하긴 하다. 내 재능이 왜 이렇게 갑자기 빛을 발하는지.”
“그냥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넌 원래 천재였는데 그동안 마가 껴서 천재적인 재능을 표출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글쎄다.”
“요번에 네가 준 영상 파일. 편집하면서 또 놀래버렸잖냐.”
“왜?”
“네 기량이 전보다 더 업그레이드되었어. 전에 그렸던 그림도 대단했는데. 이번엔 더 대단해진 느낌이랄까. 이전의 기량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더 돌파할 줄은.”
나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속도는 왜 그렇게 빨라? 이미 인간의 범주가 아니던데. 정말 초능력 같더라. 대체 네 재능은 어디까지 발전하는 거냐?”
“세상을 구할 때까지?”
“뭐?”
“흐흐, 농담이다. 네 말대로 내가 천재였는데 그동안 마가 꼈든 아니든. 지금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냐?”
“그치. 지금 잘나간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나는 웃으며 진구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거실로 나가 공인중개사에게 말했다.
“이 집을 계약하겠습니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이 집, 비어 있으니 언제든 이사 올 수 있는 거죠? 잔금도 곧이어서 치르겠습니다.”
* * *
다음 날 늦은 오후, 나는 작업실에서 핸드폰으로 내 유화 그림이 낙찰된 가격을 확인했다.
황금 나무는 9억 8천만 원.
하늘 호수는 그대로 10억이다.
그래서 총판매액은 19억 8천만 원이 될 터.
물론 저기서 경매 낙찰 수수료가 차감될 거라서.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16억 정도 될 듯하다.
그러다 문득, 수호를 떠올렸다.
아직 부성애가 뭔지 알지 못하는 나이지만.
아포칼립스가 된 세상에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평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나 혼자만 알아야 하고.
홀로 삭여야만 한다는 건 가끔 마음을 어렵게 했다.
수호가 어떻게 지내는지 쉘터는 무사한지 늘 궁금했다.
그곳 쉘터민들이 가졌을 불안감이 이젠 내게도 머물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그곳의 상황은 내 피부로 깊이 느껴지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매우 다르다.
그래서 그저께 그에게 이런 말로 물었었다.
- 고수 : 김수호. 적들의 영역을 건드려도 너희 쉘터는 안전한 거 맞지?
- 2050 : 당분간 괜찮다고 판단해서 공격을 감행한 거다. 그만큼 고액의 코인이 떨어지기도 하고.
- 고수 : 그래. 코인 중요하지.
- 2050 : 아포칼립스를 막는 일에 코인은 필요하다. 그래야 능력도 업그레이드하고.
- 2050 : 이번에 네가 그린 전투 로봇으로 전투를 하는 거니까. 너의 공헌도가 높아서 너에게 코인이 꽤 떨어졌을 거다.
- 고수 : 그런데 적들은 진화도 하나 봐?
- 2050 : 처음 아포칼립스가 나타난 이래 적들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 2050 : 넌 걱정할 필요 없어. 적들이 우리 쉘터를 공격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이 진화를 거듭할지라도 우리가 더 빠를 거다. 우리 능력의 진화가 적과 이 세계를 압도하게 될 거지.
나와 수호의 능력은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
한 사람만 능력이 오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거다.
내 그림 스케일이 커질수록 그걸 실물 전환하는 수호의 능력도 뒷받침이 되어줘야 했다.
- 2050 : 고수. 27레벨에서 그려야 할 그림의 자료는 이메일로 보내두었다.
그의 말에 나는 이메일을 열어 그가 보낸 자료 사진을 확인했었다.
그가 보낸 사진은 쉘터 주변의 자연경관이었다.
사진으로 조그맣게 찍힌 쉘터.
그곳 지역 일대가 온통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무성한 수풀과 숲이 있었다.
과실 나무도 많았다.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심지어 바나나 나무도 있었다.
이건 뭐, 토지와 기후를 무시한... 너무 짬뽕이 아닌가?
사진 속의 대지는 생명력이 있는 땅이었다.
제법 지역이 넓어서 그림 그릴 때 노가다가 필요할 듯하다.
나는 수호에게 다시 톡 메시지를 보냈다.
- 고수 : 이런 자연 풍경을 실물 전환한다고 해도, 그곳 세계는 잿빛 폭풍 같은 게 불어올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 고수 : 그 잿빛 폭풍이 불면 모든 생명력 있는걸 좀먹는다고 들었어. 다시 땅이 못쓰게 되어버릴 게 뻔한데.
- 2050 : 그 땅이 며칠이라도 버텨준다면, 우리는 그 며칠만이라도 건강할 수 있다.
- 고수 : 아.
무슨, 그런 가슴 아픈 말을 이리 담담하게 한단 말인가.
- 2050 : 그리고 생명력이 깃든 땅은 우리가 적들에게 행할 수 있는 역습이기도 하다.
- 고수 : 역습이라고?
- 2050 : 그래. 꼭 무기로 하는 공격만이 전부가 아니지. 잿빛 폭풍이 우리의 세계를 좀 먹게 했었다면, 땅에 깃든 생명력은 적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우리의 세계를 복원하는 일이니까.
- 2050 : 그리고 쉘터 부근의 땅을 복원하는 일은 너와 나에게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 2050 : 너의 능력만이 아니라 내 능력도 결국은 궁극에 이르러야만 하는 거지.
- 고수 : 수호야. 단 며칠만이라도 건강할 수 있도록 열심히 그림을 그릴게.
- 고수 : 결과적인 승리도 중요하지만, 내겐 단 며칠이라도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과정도 중요해.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시 작업하기 위해 3D 디스플레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앞엔 2개의 3D 디스플레이가 펼쳐져 있다.
하나는 자료 사진이 열려 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그린 그림이다.
워낙 사진처럼 그림을 그리기에, 나중에는 어떤 게 사진이고 그림인지.
나조차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나는 자료 사진과 조금 다른 형태로 그림을 그려갔다.
퀄리티만 괜찮다면 식물 사진은 자료 사진과 달라도 상관없었다.
작업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진과 그림.
삭막하던 작업실 내부는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해져서 마치 이곳에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내가 잡은 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공허한 공간에 흙이 깔리고 수풀이 자라났다.
그렇게 한참을 작업하는데.
띠리리링-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니 진구 전화다.
<고수야,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
<페라리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 페라리 본사가 있는 이탈리아와 그 외 유럽 나라에 네 그림을 TV 광고의 모델로 내보내고 싶대.>
“오, 그래?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온 거야?”
<갑자기 연락이 온 거라기보단, 이번에 올린 너튜브 영상 보고서 연락이 온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진구가 이번에 편집한 너튜브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림 그리느라 조금 있다가 확인해봐야지 했었는데.
너튜브 영상은 나보다 페라리 관계자가 더 빨리 봤었던 모양이다.
그곳은 이제 오전일 텐데.
참 빠르기도 하지.
이렇게 금세 진구에게 연락까지 넣다니.
<이번에 올린 영상을 보고서 꽤 감명을 받았었나 봐. 본사 마케팅 책임자가 그동안 네 영상과 그림 경매 소식까지 다 챙겨보고 있었던 것 같아. 최근에 경매 낙찰된 그림까지 알고 있던데?>
“그래?”
<암튼 네 그림을 광고에 쓰자는 얘기가 그쪽 내부에서 계속 나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내가 새로운 너튜브 영상을 올린 걸 보고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 네 그림의 퀄과 기인 같은 네 작업 속도를 보고서 결정한 거지.>
“그럼 페라리 본사에서는 전에 찍어두었던 광고 영상을 유럽에 내보내겠다는 건가?”
<아니. 유럽에서 TV 광고를 내보내는 대신, 이번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서 다른 버전으로 광고 영상을 재촬영했으면 한 대. 이번엔 신차 광고라기보단 페라리 브랜드 이미지 광고인 것 같아. 잘만 하면 미국에도 광고를 내보낼 거라고 하던데.>
“음, 그럼 이번에도 그림 두 장을 그려야 하나?”
<자세한 건 다시 얘기해봐야겠네.>
“그래. 그럼 다시 연락 줘.”
나는 전화를 끊고서 핸드폰으로 진구가 올린 너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진구는 어제 영상 파일을 받아서 밤새 편집을 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까 점심 즈음에 영상을 올렸던 것이다.
영상을 보니 벌써 조회수가 엄청 늘어나 있었다.
댓글도 그사이 어마어마하게 달렸다.
당사자인 나보다 먼저 이 영상을 보러 온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나는 댓글을 대강 읽어보았다.
└ 애플 올차드 회장 : 크흡 ㅠㅠ 네 번째 그림 작업 영상! 드디어 보다니. 애플 수 작가님, 사랑합니다! (좋아요 1.2천, 답글 21개)
└ 올차드 농장 일꾼 : 저 지금 제 눈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보다 손놀림이 더 빨라졌어요? (좋아요 900, 답글 33개)
└ 김지용 : 저건 조작이다?!! (좋아요 138, 답글 12개)
└ anna : 아직도 조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ㅉㅉ (좋아요 15, 답글 0개)
└ 밥아죠씨 : 그림 작업 속도만이 아닌데요? 퀄도 더 좋아진 느낌인데 ㅎㄷㄷ 애플 수 그림은 항상 뭔가 신비해 보이네요.(좋아요 230, 답글 7개)
└ 예린이 : 미쳤다... (좋아요 5, 답글 0개)
└ 임지혜 : 오래 기다렸어요 ㅠㅠ (좋아요 3, 답글0개)
└ 정인성 : 그림의 제목이 왜 ‘호수에 새겨진 약속’인가요?
7개 빛의 색으로 이루어진 무지개.
무지개는 ‘약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에 재앙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긴 했다.
올차드는 애플 수 공식 팬클럽 명칭.
과수원이라는 뜻이다.
내 그림에 이토록 관심 가져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 * *
나는 계약했던 집의 잔금을 곧바로 치렀다.
잔금을 치르자마자 입주 청소 업체를 불러 청소를 했고 이사 날짜를 잡았다.
이사하는 날은 내일모레.
이사한 집에 필요한 물건은 딱히 사진 않았다.
어차피 이 집은 잠시 머물 집이라서 거실에 놓을 소파를 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