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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58화 (58/153)

그들의 전환점 2

“루나야, 지금 어디야?”

<아직 가게에요. 이제 집으로 갈 거예요. 오늘은 언니랑 이야기하느라 좀 늦었어요.>

“좀 기다려줄래? 내가 지금 가게 앞으로 갈게.”

나는 핸드폰 통화를 끊고 ‘라멘 사랑’으로 달려갔다.

아까 저녁때 술을 마셔서 차를 운전하지 않았다.

루나가 만일 집에 있었다면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오갔다.

미래는 과거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오늘의 선택에도 분명 미래에 영향을 줄 거다.

일전에 유하준 박사를 만났던 때의 일을 생각했다.

유하준은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한 순간, 그의 미래가 변했고.

그의 영향력으로 인한 여파로 미래의 상황이 바뀌었다.

약탈자들의 손에 있던 드론들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

내가 ‘라멘 사랑’에 도착하자 루나는 한나와 함께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오빠.”

“오빠, 무슨 일이에요?”

루나는 나를 반겼지만 한나가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시간이 늦긴 했다.

이 시간에 갑자기 루나를 만나겠다고 했으니, 그녀의 걱정을 조금 덜어줘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한나야, 미안한데. 지금 루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루나와 얘기하고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지금 해야만 하는 이야기에요?”

“응. 미안.”

한나는 루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루나는 조르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언니이.”

한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게 말했다.

“너무 늦지 말아야 해요. 늦으면 루나 기다리면서 많이 걱정하게 될 거예요. 오빠 믿고 보내는 거예요.”

“그래, 알아. 고마워. 너무 늦지 않을 거야.”

한나는 그렇게 말하고 차가 주차된 곳으로 혼자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루나와 함께, 오면서 봐뒀던 카페로 향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한동안 걸었다.

루나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건 처음이다.

“오빠, 어디 가는 거예요?”

“추우니까 어디 좀 들어가려고.”

11시가 다 되어가니 이제 곧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지만.

나는 루나를 데리고 어느 카페로 들어갔고, 그녀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 카페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한두 시간 카페를 빌린 거다.

물론 그만큼 돈을 냈다.

그리고 테이블로 돌아와 루나와 마주 앉았다.

내 앞에 앉아 커다란 눈을 깜박이고 있는 그녀.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수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미래가 비틀려서 그의 존재가 지워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

아직 어떠한 선택을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지 모르겠다.

나는 핸드폰으로 테이에게 까톡 메시지를 보냈다.

- 고수 : 테이 씨, 이번에도 기억해줘요. 만일 2051년 그 날에 테이 씨가 전송 기계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는 게 가능하다면 수호의 상태가 어떠한지. 내게 전송 기계로 메모를 보내주세요. 2022년 2월 2일 23시. 카페 <아름다운 시간>

그렇게 보내고는 카페의 주소도 찍어서 보내주었다.

그러고는 카페의 창밖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어둠이 내린 바깥 풍경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어떤 선택을 했거든. 그런데 루나야, 오늘 너도 그 선택을 해야 해.”

루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에게 한 가지 물을게.”

오늘 내 선택으로 인해, 그리고 루나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는 크게 바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주사위를 던지려 한다.

그 결과는 우리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있든 나와 함께 하겠냐고 묻는다면, 너는 어떤 결정을 하겠어? 지금 난 너와 연애하고 미래도 약속하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루나는 한동안 나를 보다가 그녀의 입술을 뗐다.

“전에 레스토랑에서요. 오빠와 나 사이에 예상치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때 내심 기대했었어요. 지금 같은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고요. 나는 전부터 오빠 좋아하고 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

“한강 변에서?”

“네. 그때 산책하다가 오빠 보고서 일부러 그 옆에 앉았던 거예요. 미래에 어떤 일이 있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전 미래를 보고서 오빠를 택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고수 오빠라서 오빠와 함께하고 싶어요.”

루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랑스럽게 웃었다.

* * *

수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한 달 전쯤에 전송 기계를 통해 온 메모가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보낸 메모다.

그 메모지엔 이런 글귀만 적혀 있었다.

<일이 틀어질 경우, 이 시점으로 대비책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미래는 계속된다.>

존재함이 지워지지 않고 그의 삶이 계속될 거라는 의미.

그 메모와 메모를 본 기억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송 기계를 사용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에게서 그와 같은 기억이 새겨졌었다.

덕분에, 수호는 점차 더 흐려져만 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수호는 지난 12월 즈음, 2021년도로 드론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2022년도의 2월 그 시점에 관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부모의 만남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고수에 대한 그의 감정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었지만.

부모의 일에 간섭하고 뭔가 바꾸려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버티고 버텼다.

그가 직접 부모의 일에 간섭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그 선택권을 고수에게 주고자 했다.

그가 스스로 미래를 변화시키고.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고수에게 맡겼다.

그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고수가 알았다는 사실을.

고수와 2051년도의 테이가 소통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고수가 아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하는 걸 보고 싶어졌다.

전송 기계로 자신이 보냈던 메모를 본 기억이 새겨지기 전까지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그가 사는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포기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부모, 그리고 그가 아는 모든 이들의 종말을 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그저 일이 틀어질 경우, 대비책을 과거의 자신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수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이 조금 커다랗게 떠졌다.

돌아왔다!

점차 흐려져 가던 그의 몸이 다시 회복되었다.

흐려졌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하던 이상 현상이 이젠 멈췄다.

잠시 비틀렸던 그의 시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 * *

까톡!

까톡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수호에게서 온 까톡이다.

- 2050 : 내 삶을 두 번이나 받은 기분이다. 그 누군가에게.

뜬금없는 내용의 메시지.

수호 답지 않은 톡이다.

나는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 고수 : 고맙다는 거냐? 그런 거라면, 그 누군가에게 표현 좀 하지 그랬어?

내가 톡을 보냈지만 수호는 메시지를 읽기만 하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루나가 내게 답을 하고 나서 11시가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메모 같은 게 온 게 있으려나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렸다.

그때 루나가 의아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오빠, 이거요!”

그녀는 어느새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메모를 들고서 내게 보였다.

메모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의 미래는 안전해졌어요. 당신이 아름다운 시간 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루나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마침내 웃으며 말했다.

“너였구나.”

“네?”

“이젠 이전과 같지 않을 거야. 원래 나타났을 내 삶이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지킬게. 마음 아픈 미래가 오지 않도록.”

그날 밤, 나는 루나를 집까지 데려다줬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볍다.

며칠간 해왔던 고뇌의 무게가 반쯤은 덜어졌으니까.

침대에서 나와 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구야, 크리스티 홍콩에 연락 좀 해줘.”

<어, 그림 팔기로 결정한 거냐?>

“응. 지금 통장에 돈이 비어 있어서. 유화 그림, 하늘 호수와 황금 나무를 아트 K에서 경매 판매하고. 겨울에 핀 봄 첫 번째 작품은 크리스티 홍콩에서 경매 내놓을까 해.”

<오케이. 알았다. 연락해볼게.>

그림이 팔리면 집을 알아볼까 한다.

내가 있는 투룸은 15평밖에 안 되어서, 더 넓은 집으로 알아보려는 거다.

나는 개인적인 집을 구매하는데 수호가 주는 돈을 쓰고 싶지 않아졌다.

블랙카드를 긁는 건 쉘터 건축과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데 사용하고.

개인적인 용도는 그림을 팔아서 충당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말끔하게 차려입고 오전 10시 반 즈음에 ‘라멘 사랑’에 들렀다.

점심 장사 준비하기 전, 그녀들이 아침을 먹고 있을 시간.

내 손엔 풍성한 꽃다발이 들려 있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이 꽃, 한나에게 주려고 들렀어.”

“저요? 왜 저한테. 그보다 오빠, 아침 먹을래요?”

“아니. 금방 가봐야 해. 사실, 할 말이 있었어. 오늘 갑작스럽게 와서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한나가 내게 말했다.

“알아요. 오늘 찾아온 이유. 루나와 교제하기로 했다는 거 말하려는 거잖아요?”

“어, 응.”

“조금 놀라긴 했지만. 어느 정도 일이 이렇게 될 거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크리스마스 날부터 심상치 않았던 거 몰랐을까 봐요. 나야 고수 오빠를 좋게 봤으니까 축하할 일이긴 한데. 그래도 루나 언니니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야. 걱정 안 되도록 노력할게.”

“호호. 결혼까지요? 암튼 고수 오빠라면 전 괜찮아요. 축하해요.”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수호를 잉태하게 되는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시기와 확률까지는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영역.

하지만 다행하게도, 유하준 박사가 했던 선택만으로 미래가 달라졌던 것처럼.

모두의 행복을 바라며 했던 선택만으로도, 불행으로 치닫던 시간은 또다시 꺾이며 흘러가고 있으니.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길을 충실히 걸으면 되는 거다.

* * *

작업실에서 전투 로봇 그림을 새벽까지 작업하고서, 그다음 날 오전.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던 기관으로 와서 결과지를 받아보았다.

나와 수호는 부자 관계가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루나와도 수호는 혈연관계가 99% 이상이었다.

결과지를 확인하고 아우디가 주차된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

까톡!

루나에게서 톡이 왔는데, 메시지가 아닌 사진이었다.

사진을 확인하니 내 집의 주방이었다.

식탁에 참게 된장찌개가 담긴 냄비와 반찬이 놓여 있다.

- 루나 리 : 언니가 끓인 거 가져왔어요. 오빠 먹이고 싶어서 ㅎㅎㅎ

- 루나 리 : 어디에 있어요? 오빠 보고 가고 싶었는데.ㅠㅠ

나는 루나에게 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었었다.

그녀와 자연스레 가까워져야 하지만, 여느 때의 연애처럼 여유롭지만은 않다.

그래서 루나와 빨리 가까워지는 방법을 궁리하는 나다.

2월 안으로 뭔가...

- 고수 : 나 이제 갈 거야. 언니가 끓인 거 막 가져오지 마. ㅋㅋ 한나에게 잘 보여야 해.

- 루나 리 : 그럼 내가 끓인 거 가져올까요?

- 고수 : 아니. 그냥 가져오지 않는 게...

- 루나 리 : 너무 해. 맛없을까봐 그러는 거죠? (울먹)

- 고수 : 너는 그냥 빈손으로 와도 좋다는 얘기야. 오면 내가 라면 끓여줄게. 너 라면 좋아하잖아.

나는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출발하려는데, 진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진구는 다짜고짜 말을 쏟아냈다.

<크리스티 홍콩에서 연락이 왔어. 3월 즈음에 날짜를 잡겠다고 하더라. 거기서 특별 경매하면 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거긴 글로벌 대형 경매사라. 아마 경매가 열리게 되면 온라인에서 홈페이지와 너튜브 통해서 함께 이뤄질 건가 봐.>

“그래?”

<그리고 아트 K에선 곧바로 경매 판매 일정을 잡겠대. 이번엔 추정가가 10억에서 15억으로 책정될 거라고 하던데.>

10억이라...

그림 두 개만 팔려도 작은 집은 살 수 있겠다.

이번에도 팔릴 수 있겠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진구야, 부탁 좀 할게. 지금 내가 있는 곳 근처의 아파트 좀 알아봐 줄 수 있냐?”

<아파트?>

“부탁한다. 그림 팔리면 너에게 제대로 챙겨줄게.”

<오케이!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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