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전환점
수호의 입이 열렸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전에 영상을 통해 들었던 목소리와 같다.
“드론으로 봤던 것보다 여긴 훨씬 좁군.”
“아바타 기계를 들여놔서 더 좁아진 거야.”
역시 듣기 좋은 저음이다.
그를 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사실 그 전까진 일말의 의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가 혹여 내 아들이 아닐 수도 있진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의구심은 수호를 본 순간 다 사라졌다.
굳이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그가 나를 닮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의 체구와 이목구비, 나보다 살짝 더 저음이지만 목소리까지.
형제처럼 닮았다.
사실 우리는 또래였으니 형제처럼 닮았다고 표현해야겠다.
이래서 수호는 영상을 보여도 내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가.
지금은 2월이 되어서 급하게 나를 볼 생각을 했던 거고.
그런데 엄마는 누구 닮은 거지.
피부색을 봐도 잘 모르겠다.
외모는 내 유전자 쪽이 더 강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날 닮았다는 거 외엔 잘 모르겠네.
성격은 루나와 닮지 않은 것 같다.
수호는 그런 귀염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김주혜의 성격은 별로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말수가 없고 무뚝뚝한 건 내 아버지를 닮은 듯한데.
수호는 리더답게 단호하고 강한 면모도 있어서 내 아버지와는 또 다른 성격이다.
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만나자마자 첫 마디가... 집이 좁다는 얘기냐.”
“커다란 집으로 바로 이사할 줄 알았거든.”
“날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었던 거냐?”
“네가 블랙카드 처음 생기고 나서 했던 행동이 생각나서.”
음, 할 말이 없다.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뿐.
현재, 블랙카드 24레벨과 25레벨을 통과한 상태라 1310억 7200만 원을 두 번 긁을 수 있는 금액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굳이 현금으로 빼놓지 않았었다.
수호가 금액을 이월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전 블랙카드 금액도 남아있었는데, 그건 쉘터 벙커 건축을 위해 계약금과 일부를 선지급하고.
과수원 근처 땅을 추가로 매입한 데다, 유하준 박사에게 연구비 지원까지 하느라 전부 소진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통장은 너튜브 영상으로 수익이 들어오는 거 외에 비어있다는 얘기.
수호는 다시 입을 뗐다.
“네가 26레벨에서 두 번째로 그려야 할 그림의 자료 사진. 이메일로 보내두었다. 그걸 지금 확인해.”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펜을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3초 정도 쥐고 있으니 내 앞에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손으로 터치해서 이메일을 열어 수호가 보낸 3D 사진 파일을 확인했다.
이내 눈앞에 입체적인 어떤 형상이 펼쳐졌다.
커다래진 눈으로 그걸 보다가 수호에게 말했다.
“이건 뭐지? 로봇 같기도 한데 총 3대네.”
수호는 3D 사진을 보면서 내게 설명했다.
“원격 조종이 가능한 전투 비행 로봇이다. 초소형 유도 미사일을 한 번에 여러 개 발사할 수 있고, 레이저 빔으로 적을 벨 수도 있다. 비행하며 전투할 때는 전투기 형태, 지상에서 전투할 때는 인간형 로봇 형태지.”
“왠지 건담 로봇이 생각나는데. 이런 게 현재 미래에 있어?”
“아니. 실재하진 않지만, 대략적인 설계는 있어. 하지만 자원도 그렇고 여건도 되지 않아서 제작할 수 없는 무기였지.”
“음, 그래?”
“이건 완성될 전투 로봇을 실사형 이미지로 구현한 거다.”
내가 사진을 보고 있자 수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고수, 네 재능 명칭 중에 창의력 말이다.”
“응.”
“‘창조’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했으면,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게 가능한 물건을 실물 전환하는 게 용이해져.”
“어, 그래? 암튼 저 전투 무기가 실물 전환되면 크게 유리해지겠네.”
“아마도 쉘터 근처 지역은 탈환이 가능해질 거다. 이제까지 오랜 시간 우리는 방어만 해왔지만.”
수호의 눈에 호전적인 빛이 스쳤다.
“...이제는 반격이다. 이제는 우리가 원수 갚을 차례지. 오랜 세월 쌓아왔던 비극의 일들. 다 갚아줄 생각이다.”
그의 눈빛이 예리한 칼날을 드러내는 것처럼 차갑게 빛났다.
“그래.”
“나는 주변 지역부터 탈환할 거고. 그 땅들을 전부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생각이야. 생존자들을 그곳에 모으는 거지. 그들에게 약속했어.”
“네가 사는 곳을 전부 정복하는 게 아포칼립스를 막는 방도인 건가?”
“아니. 내가 사는 곳의 정복은 내 오랜 원한을 푸는 것이기도 하고. 코인을 얻기 위함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포칼립스를 막을 방도는 너의 능력에 있어."
"음."
"네가 그린 전투기로 적을 섬멸하면 아무래도 너에게 많은 코인이 떨어지게 될 거다.”
재능 업그레이드를 위한 코인. 중요하지.
하지만 내 관심사는 지금 그에게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넌...”
“......?”
“넌 괜찮은 거냐?”
“뭘 묻는 거지?”
“넌 부모를 찾지 않아도 돼? 조금 있으면...”
수호는 내 말을 끊고 말했다.
“나는 괜찮아. 난생처음으로 누굴 믿기 시작했으니까.”
그의 어조가 문득 부드럽게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근데 누굴 믿는다는 거지.
방금도 의도적으로 내 말을 끊은 것 같은 기분.
“이만 가겠다.”
가다니! 난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는데.
나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김수호, 너 여기 모습 보고 싶다지 않았나? 여기 봐. 창밖 풍경을 보여줄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 창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수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거실 밖의 풍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표정이 거의 없는 편이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때?”
내가 묻자 그는 웃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얕은 소리를 냈다.
“후.”
“뭐야? 반응이 그게 다냐?”
“저 풍경은 드론으로도 충분히 봤었다. 아바타 기계를 통해 멀쩡한 이곳을 보면, 내가 평화로운 이곳에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했는데. 별다를 게 없군.”
“......”
그러냐. 하긴.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김수호, 당연한 거겠지만 네 아버지는 김 씨겠지?”
“아니.”
“그럼 어머니가 김 씨?”
“기억이 없어. 그냥 나를 키운 사람이 김 씨라서 내 성씨가 김씨가 되었던 것뿐. 날 키웠던 사람이 내 부모에 관해 한동안 얘기해주지 않았거든. 그러다 최근에 들은 게 있어."
"그게 뭔데?"
"내 부모님, 두 분은 서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이만 가야겠다.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그는 일방적으로 아바타 접속을 끝내버렸다.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거다.
인정머리 없는 놈.
나는 스마트 안경을 벗고 아바타 기계의 전원을 껐다.
* * *
이번 명절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양평에 잠시 다녀오기만 했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전투 로봇 그림을 그리다가 그다음 날.
나는 김주혜를 만났다.
저녁 무렵, 그녀가 술을 마시자고 해서 소주를 마셨다.
평소 맥주만 가볍게 즐기던 나라서 소주를 정말 오랜만에 마셔보게 되었다.
우리가 간 그곳은 안주로 꼬치와 어묵탕, 쭈꾸미 볶음과 파전. 그런 걸 파는 곳이었다.
날이 추워서 우리는 어묵탕을 주문했고 덤으로 꼬치와 파전을 시켰다.
김주혜는, 루나와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의외로 열정이 과하다고나 할까.
술도 잘 마시고.
나는 그녀에게 애플 수에 관해 지겹도록 들었다.
귀에서 피가 날 지경.
“고수 씨도 애플 수의 그림 좀 자세히 봐요. 그의 그림은 선 하나하나를 따로 봐도 예술의 극치에요.”
“선을 따로 보면 그냥 선이지. 어떻게 예술의 극치가 돼요?”
“그건 자세히 봐야 한다니까요.”
“나는 애플 수 별로던데. 얼굴은 왜 가리는지.”
“가릴 만한 이유가 있겠죠. 유명세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주혜 씨, 애플 수 엄청 팬이신가 보네.”
“네. 저 이번에 그림 하나 소장했어요. 난생처음으로 미친 짓 했다니까요.”
“애플 수 그림 10억 정도까지 올라갔다던데. 그걸 주혜 씨가 샀다고요?”
그녀와 대화하면서 줄곧 드는 생각은, 내가 과연 김주혜와 사귀었고 아이까지 가졌었을까, 하는 거였다.
“아, 고수 씨 호감 사기는 틀렸네. 계속 애플 수 얘기만 해서. 실은 제가 있는 집 딸이거든요. 안 믿기겠지만 제가 정략 결혼할 남자까지 있어요. 29세까지 자유고요. 그 후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남자와 결혼해야 해요. 그래서 전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확 사고 쳐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어요.”
나는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 사고 치는 거요.”
"네?"
수호가 김 씨라서 김주혜가 그의 모친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좀 기울었었다.
그래서 김주혜를 만나러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무수히 결심했었다.
만일 그녀가 수호 모친이 된다면 감정 상관없이 그녀를 만나야지.
결혼도 해서 수호에게 온전한 부모가 되어줘야지.
그래서 그녀에게 물었다.
“무례한 말이긴 한데. 그 사고를 나와 치자고 말한다면 어떡하겠어요?”
"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괜찮은 제안이긴 한데. 이왕이면 연애하자는 말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 * *
테이는 수호에게 이상 현상이 나타나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잠시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본 것이다.
테이는 너무 놀라고 두려워져서 그에게 언성을 놓였다.
“수호! 수호의 몸이. 왜 이 지경까지 두는 거예요? 설마 포기하려는 거예요? 당신의 삶을?”
“......”
“수호가 사라지면 많은 사람이 수호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그저 꿈에서 존재했던 희망 같았던 존재로만 기억하게 될 거라고요! 그래도 좋아요?”
“......”
“왜 처음 계획했던 대로 드론을 보내 어머니를 찾고 그 시간에 관여하지 않았어요? 수호를 잃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
“나는 괜찮을 겁니다. 그저 조금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뭐를요?”
“한 번 버림받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나를 놓지 않는 그를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보다 수호가 사라지면 여기 쉘터도 사라지게 될 거예요! 내 불행도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요.”
테이는 격해져서 언성을 높였지만, 수호는 담담했다.
“알고 있어요. 테이, 저를 너무 무책임하게 보시는군요. 저는 쉘터가 사라지고 그동안 내가 이룬 일이 사라지도록 두지 않습니다. 나는 이 일을 대비하려고 일이 틀어질 경우, 한 달 전의 나에게 전송 기계로 대비책이 전송되도록 해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요.”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테이는 갑작스레 힘이 풀렸는지 근처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 * *
늦은 밤, 집으로 진구가 야식으로 햄버거를 사 들고 왔다.
그는 사 온 햄버거를 식탁에 놓으며 내게 말했다.
“이번에 크리스티 홍콩에서 연락이 왔었어.”
“경매사?”
“응. 이번에 네가 그린 유화 그림을 단독 경매로 판매하고 싶대. 전에 우리나라 추상화 작품이 132억에 팔렸었잖아. 크리스티 홍콩에서. 그게 한국 미술 경매 최고가라더라.”
“음.”
“어떡할래? 지금 고민하는 중이냐?”
“아니. 지금 다른 문제로 고민하는 게 있거든.”
“무슨 고민?”
“미래에서 본 어떤 아들을 태어나게 하려고, 그 아들의 어머니가 될 여자를 택해야 할 상황이 있다면 말이야.”
“너는 무슨 고민을 판타지하게 하냐?”
“두 여자 중에서 한 사람이 아들의 엄마라는데.”
“근데?”
“개인적으로 끌리는 사람은 A와 B중에서 B거든.”
까톡!
그때 까톡 알림이 울리자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런 내 행동을 본 진구는 혀를 찼다.
“쯧쯧, 저 빠릿한 행동 보니 여자구만.”
테이에게서 온 까톡이다.
- 정테이 : 방금 전송 기계로 메모가 왔는데요. 지금 수호 씨가 위험하데요. 어떡하죠?
나는 침실로 가서 외투를 꺼내 걸쳤다.
밖으로 나가면서 진구에게 말했다.
“진구야, 너 이만 가줄래?”
“넌 어디 가는 데?”
“여자 만나러.”
그러고는 집 밖을 나섰다.
어제 수호를 만나지 않았었다면.
오늘 이 순간 연락하는 사람은 김주혜였을 것이다.
수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를 키운 사람이 김 씨라서 내 성씨가 김씨가 되었던 것뿐. 최근에 들은 게 있어. 내 부모님, 두 분은 서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내가 쭉 호감을 품었던 여자는 루나였다.
아직 유전자 검사 같은 건 나오지 않았지만.
수호의 존재가 위험해진 이 순간, 그를 지키기 위해.
나는 수호가 했던 말과 내 마음을 믿어보려 한다.
루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를 반기는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 들려왔다.
<오빠. 지금 텔레파시가 통했나 봐요. 오빠가 만일 이 시간에 전화를 준다면 정말 기쁠 텐데, 라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