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초월한 만남 3
루나가 전화를 받자 그녀에게 말했다.
“루나야, 너 오늘 시간 돼?”
<오빠,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가게에서 일하는 점심 타임이라도 오빠 전화면 엄청 한가하다고 했었는데.>
“기억나지. 네 말 들으면 한나가 서운하겠다고 내가 답했었지.”
내가 말하자 루나는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를 냈다.
“루나야, 오늘 나 좀 놀아줄래? 한동안 바쁘다가 시간이 났는데. 혼자 보내기 심심하네.”
<오빠, 영화 보여줄까요? 요즘 엄청 재밌는 공포 영화가 나왔는데. 아무도 저랑 영화 안 보려고 해요.>
“하하, 공포 영화라고?”
그건 나도 사양하고 싶은데.
데이트하려면 별수 없네.
루나는 로맨스 영화를 좋아할 것처럼 생겼는데.
안 어울리게 공포 영화 좋아하나 보다.
“그래. 공포 영화 보자. 음, 내가 지금 어딜 좀 다녀와야 하거든? 네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네, 오빠. 준비하고 있을게요.>
나는 통화를 끝낸 후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테이가 찍어준 주소로 차를 운전하며 향했다.
* * *
머리카락은 모두 네 사람의 것이었다.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수호.
그리고 주혜와 루나의 것이다.
유전자 검사 의뢰를 하면서 최대한 빨리 결과 나오도록 여러 번 부탁을 했다.
공교롭게도 월요일부터 설날 연휴인 바람에 연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었으나.
다행하게도 유하준 박사와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의뢰를 넣을 수 있었다.
유전자 검사 의뢰를 한 후에, 나는 루나가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루나야, 여기 아파트 주차장이거든.”
<지금 나갈게요!>
루나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급하게 나온 듯했다.
얼마 안있어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나오더니 구두 신은 모습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조수석에 올라탄 후에도 한동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보리색 코트에 앙고라 티, 치마를 입은 그녀.
평소엔 말간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화장을 열심히 한 티가 났다.
눈가에 은은한 펄 같은 게 반짝거린다.
그러잖아도 쿼터 혼혈이라 피부색이 하얗고 눈이 커서 예쁜 얼굴이었는데.
작정하고 꾸미니 요즘 여자 아이돌 못지않은 미모다.
그녀는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와, 오늘 오빠 왜 이렇게 멋있어요? 배우 같아요.”
“배우는 무슨. 너는...”
예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갔다.
“음, 아니다. 가자.”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려니 어색하다.
영화도 1년 만에 보는 거다.
잠시 후, 루나와 나는 영화관에 도착하여 간단한 간식을 사 들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고.
전날 그림 작업하느라 피곤했던 터라 등장 인물과 괴물의 괴성, 비명이 쉬지 않고 터지는 그곳에서 나 홀로 꿀잠을 잤다.
이날 늦은 점심으로 스위스 레스토랑에 가서 구운 양 갈비로 식사도 했다.
그곳은 스위스 가정식 메뉴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호텔 셰프가 하는 유럽 분위기의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데이트 목적이 아니었으면 이런 곳은 애초에 올 일이 없었을 터.
식사를 다 하고 디저트를 먹는 동안, 루나가 내게 물었다.
“오빠, 오늘 무슨 날이에요? 오늘 하루를 서프라이즈로 선물 받은 것 같아요.”
“그냥... 미리 잘해두려고.”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어쩌면 너와 나 사이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거든.”
“제가 혼자 착각하는 거일 수도 있는 데요. 혹시 고백 같은 거예요?”
루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본다.
“글쎄. 문득 궁금해지는데, 내가 만일 한강 변이 있는 그 동네로 이사 오지 않았었다면 나는 너와 마주칠 수 있었을까?”
“음, 언니가 그러는데요. 정말로 만날 인연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된대요. 나는 오빠와 어떻게든 만났을 것 같아요. 과수원 땅을 오빠가 우연히 사게 된 것도 인연이라서 그랬던 것 같고. 암튼 그래요.”
이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루나는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었든.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을 거라고.
“그럼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도 그러할까?”
“네?”
“정말로 만날 인연이라서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래야 행복해질 방도도 생길 것 같으니까.
나만이 아니라 루나도.
지금은 그저 서운하고 힘들어서 울었던 수연이도.
만일 수호의 존재가 이대로 사라진다면, 내가 그와 함께 이룬 것들은 어찌 될까?
그 때문에 희망을 품었던 미래의 사람들은?
업그레이드 된 쉘터, 방어 시스템과 방어벽, 희망의 시작 같았던 사과나무.
하지만 그 모든 게 신기루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면...
모두의 행복을 바라고 수고하는 나의 작은 노력은 버려지지 않게 될 거고.
결국은 운명처럼 만나야 할 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거라...
지금은 그렇게 믿을 뿐이다.
* * *
다음 날 아침, 까톡 알림 소리에 깼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수호가 보낸 톡이 와있다.
핸드폰에 2022년 2월 1일. 이라는 날짜가 오늘따라 유독 눈에 들어온다.
- 2050 : 고수, 아바타 기계 그림을 실물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 고수 : 그래? 다행이네.
- 2050 : 그곳은 이제 명절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늘 어디에 있을 예정이지?
- 고수 : 그냥 집이나 작업실에 혼자 있을 거야. 오늘은 부모님 집에 가지 않아.
- 2050 : 그럼 오늘 유하준 박사에게 연락해서 그가 만든 아바타 기계를 가져왔으면 한다. 너는 그의 후원자이니 어렵지 않게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 고수 : 그 아바타 기계라는 건 어떤 식이야?
- 2050 : 그 기계는 사람의 뇌 속 전기 신호, 뇌파를 컴퓨터 데이터로 전환하는 기계라고 들었다. 거기에 증강 현실 기술이 더해져서 아바타 기술이 가능해진 거지.
- 고수 : 그래. 음, 집이 좁아서 그 기계를 침실에 두면 꽉 차겠는데ㅋㅋ
- 2050 : 조만간 임시로 지낼 넓은 집으로 옮기는 걸 추천하지. 어쨌든 그걸 가져오면 톡 메시지를 남겨. 그러면 나는 아바타 기계로 너를 만날 거다.
- 2050 : 그때 블랙카드 26레벨에서 두 번째로 그릴 그림에 관해선 만나서 이야기하지.
- 고수 : 알았다.
나는 까톡 창을 끄고 유하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동안 가고 난 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유하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유하준 박사님. 고수입니다.”
<예, 고수 씨. 설 연휴네요. 즐거운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박사님도 즐거운 연휴 되길 바랍니다만. 명절에 갑작스러운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오늘 잠시 시간이 되시는지...?”
<고수 씨의 부탁이라면 시간을 내야지요. 어차피 명절은 집에서 보내서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나는 유하준 박사에게 후원금뿐만 아니라 그가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연구비도 지원해주고 있었다.
연구비는 2억 정도 선지급.
연구 성과가 있으면 3억을 더 지급하기로 했었다.
“박사님이 연구하시는 것 중에 아바타 기계 말입니다.”
<아, 그러잖아도 연구보고서를 드릴 참이었습니다. 아바타 기계를 완성했거든요.>
“잘 되었군요. 명절이라 죄송하지만. 오늘 급하게 그걸 확인해야 할 상황이라서 그런데. 볼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면 그 기계를 제가 쓰고 싶습니다. 또 가능하다면 그 기계를 여기서 쓸 수 있는지...?”
<고수 씨가 그 기계를 쓸 수는 있습니다. 음, 제가 오전 중에만 시간이 되어서 그런데. 그러면 지금 기계를 가져다 드릴까 하는데 어디로 가면 되죠?>
“주소 알려드릴게요. 저의 집으로 가져와 주시면 고맙겠네요.”
<그럼 지금 바로 연구소 들러서 기계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와 통화를 끝낸 후, 나는 핸드폰으로 까톡에서 선물하는 코너로 들어갔다.
그동안 정신없어서 명절 선물을 못 챙긴 것 같다.
이모에게 한우 세트 40만 원짜리를 선택해서 선물하기를 눌렀다.
요즘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일도 편해졌다.
손으로 한 번만 터치하면 가능해지니.
그리고 진구에게도 한우 세트.
유하준 박사와 한나, 정테이에게도 한우 세트를 보냈다.
아무래도 명절 선물이다 보니 가격 있는 선물 중에선 한우만 한 게 없다.
수연이에게도 선물했는데.
그녀에게는 좀 더 좋은 것으로 했다.
50만 원대의 명품 카드 지갑.
그 외에 친구들과 지인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명절 선물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마음을 얻어두어야 하는 루나와 주혜에게는.
온라인 선물보다 나중에 기회될 때 직접 선물을 주는 게 좋을 듯하다.
주혜는 아직 까톡를 몇 번 주고받는 관계일 뿐이어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선물을 다 보낸 후에, 나는 새삼스럽게 집안을 둘러보았다.
평수가 넓지 않은 투룸.
급하게 구했던 집이라서 좁고 주차하는 것도 불편하다.
만일, 수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잠시 살 집으로 더 넓은 집을 구하는 걸 생각해볼까.
대강 아침을 해결하고 로봇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려놓고.
오랜만에 운동 좀 다녀오니.
유하준 박사가 집을 찾아왔다.
그는 내 집에서 기계를 컴퓨터와 연결했고, 한동안 기계 작동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점심 무렵, 그가 돌아간 후에 나는 수호에게 까톡 메시지를 보냈다.
- 고수 : 아바타 기계 설치 완료. 너와의 만남, 기대된다.
메시지 보내고 15분 정도 지나자 그에게 답이 왔다.
- 2050 : 컴퓨터 전원과 기계 전원을 켜두고 작동해두고 있어. 5분 후에 실행할 거다.
- 고수 : 그래.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집안을 다시 둘러봤다.
일부러 조금 전에 청소를 해두었던 상태.
이만하면 깔끔해 보이겠지.
옷도 평소에 입던 츄리닝이 아니라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냥 사람을 만나는 거라면 이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미래의 아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긴장되고 기대가 되었다.
어떤 모습일까.
나와 닮은 모습일까.
결혼도 안 한 내가 아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니.
반년 전만 해도... 아니, 얼마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젠 아바타 기계가 있으니까 종종 볼 수 있겠지.
물론 2월이 무사히 지나가고 그의 존재함이 위협받지 않는다면.
그때 갑자기 아바타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위잉-
황급히 나는 유하준 박사가 가져온 스마트 안경을 착용했다.
그 안경은 증강 현실 안경으로 아바타 기계와 연결되어 있다.
이걸 써야 보인다고 했으니, 안경을 쓰고 앞을 응시했다.
이내 내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내 앞에 어떤 입체적인 형상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그것은 사람 형태를 갖추었고 실제처럼 보이는 어떤 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수호?”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그 남자는 정확히 내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2051년도에 존재하는 그가 비록 가상이긴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놀랍고 경이롭게 여겨졌다.
하지만 더 놀란 건.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처럼 큰 키.
아마도 나보다 3센티는 더 큰 것 같다.
186센티 정도?
약간 마른 듯하지만 다부진 체구.
강해 보이면서도 선한 듯해 보이는 눈매.
면도한 지 사나흘 정도 되어 까슬하게 자란 수염.
그는 나와 또래로 보였다.
수호가 내게 블랙카드를 건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꿈을 꿨었다.
그때 보았던 외모와 거의 비슷해서 내심 놀랐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선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그가 반갑다는 말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저 나를 응시하고만 있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눈빛, 표정을 하고서.
그래서 내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김수호, 반갑다.”
수호는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가상으로 악수함으로 첫인사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