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초월한 만남 2
눈을 감은 루나를 보며 문득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자그만 입술에 시선이 가기도 했지만.
머리카락만 뽑고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크흠. 밥풀 뗐으니까. 가게 들어가면 케이크 맛있게 먹어. 내 머플러 줄까? 추우니까 머플러라도 걸치고 가.”
눈을 뜬 루나.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원래의 낯빛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안쓰러워 보일 지경.
“아뇨. 그냥 갈래요.”
루나는 차에서 그대로 내려 가버렸는데.
왠지 토라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차를 출발하여 작업실로 향했다.
아바타 기계라는 것을 빨리 그려내는 일에 집중할 생각이다.
* * *
AI 2050의 설명에 의하면 아바타 기계는 2022년도와 2050년... 아니, 이제는 2051년도겠다.
양쪽에 기계가 있으면 호환이 된다고 했다.
전송 기계를 만들었던 기술이 가미 되었다고 하는데.
기계와 과학 분야는 알지 못하기에, 어떻게 그런 기계가 가능한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그 기계가 있으면 2051년도의 수호가 2022년도의 세상에서 가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가상의 수호를 2022년도에 실사형 아바타로 구현하는 거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2022년도에서 보고 들을 수 있다.
덕분에,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길이 열린 셈.
미래에서 연구하고 만들었던 기술을 현재로 가져와서 치트키처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유하준 박사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만들 수 없는 기계를 척척 만들어내니 말이다.
“천재라...”
아포칼립스 이후에 그의 천재성이 두드러졌다고 했지, 아마.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핸드폰을 들고 수호에게 톡 메시지를 보냈다.
- 고수 : 수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유하준 박사도 혹시 나처럼 전공 분야로 능력이 각성하거나 그런 거냐?
그렇게 보내자 20분 정도 있다가 답이 왔다.
- 2050 : 맞다. 그는 너처럼 점차 업그레이드되는 능력을 개화했었다.
- 고수 : 허.
나는 헛웃음을 짓다가 다시 문장을 작성했다.
- 고수 : 그렇다면 그에게도 블랙카드가 있어? 그게 아니면 코인? 그는 명성은 아직 없을 것 같은데.
- 2050 : 그는 아포칼립스 이후에 능력을 개화한 거고. 현재 2022년도의 유하준 박사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지.
- 2050 : 그는 아포칼립스와 2050년도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전에 너를 통해 주었던 미래 기술 중에, 아바타 기계를 만들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어.
- 고수 : 그렇군.
- 2050 : 하지만 2022년도의 그는 나름 천재인 터라, 미래에 연구해놓은 기술을 보면 그걸 이해하고 완성해낼 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더군.
- 고수 :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능력이란 거, 아포칼립스 이후에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인 건가?
- 2050 : 그건 아니다. 능력이 있는 자는 극히 드물어. 내가 아는 능력은 어떤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어 퍼진 거였으니까. 그 부분은 이후에 말해주지.
- 고수 : 그래. 그렇게 해.
나는 수호와 까톡 대화를 하고 까톡 창을 끄려다가 수연의 까톡을 읽었다.
두 시간 전에 왔던 톡 메시지다.
- 김수연 : 고수야, 요즘 나 피하는 거 알아. 내가 너무 널 부담스럽게 했나 보다.
- 김수연 : 연락도 안 되네.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나는 한동안 그녀가 보낸 톡 내용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해지는데.
오다가다 가볍게 만난 관계도 아니고.
횟수로 9년째 친한 친구인데, 갑자기 내가 피하면 그녀도 상처받긴 할 거다.
내가 그녀를 조금 피했던 것은 싫어서가 아니라, 친구로 지내왔던 오랜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녀에게 까톡 메시지를 적었다.
- 고수 : 미안. 피했다기보단 요즘 내가 바빴어. 조만간 계속 바쁠 것 같네.
수연이 머리카락도 채취해둬야 할까 싶은 생각도 있었다.
요 몇 달 수연이의 전적이 워낙 화려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전에 키스할 뻔했던 일이나.
그녀가 술 취한 척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던 일을 생각하면...
솔직히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수연이다.
하지만 미래의 테이가 지목한 인물은 김주혜와 이루나였으니.
수연이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 김수연 : 까톡으로 이런 고백은 평소 최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김수연 :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 김수연 : 나 너 사랑하는 것 같아. 오래 전부터.
- 김수연 : 널 우습게 보고 네가 가난하다고 친구에게 험담하기까지 하던, 유라는 되고. 나는 왜 너에게 여자로 안되는 걸까...
- 김수연 : 걔가 너무 싫었어. 걔는 널 힘들게 할 뿐이었으니까.
- 김수연 : 나는 가난했던 널 그대로 좋아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았던 네 그림도 변함없이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네가 잘되길 바랐고.
- 김수연 : 너무도 예쁜 네 사과 그림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인터넷에 올리고 말았어. 멋대로. 허락도 없이. 사람들이 널 알아주길 바라서.
- 김수연 : 미안해.
언젠가 까톡 프로필 사진에 몇 분 잠깐 올렸다가 삭제한 적이 있던 사과나무 그림 사진.
그걸 누군가가 멋대로 올려서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던 일을 떠올렸다.
‘애플 수’라는 이름은, 그래서 만들어졌던 것.
그녀가 보낸 까톡을 보다가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조금 가다가 그녀가 전화를 받긴 받았는데.
수연이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많이 놀랐다.
그녀가 폭풍처럼 쏟아낸 까톡 내용도 놀랐지만.
평소 당찬 모습을 보여주고 눈물을 보인 적은 없었던 수연이라서.
더욱 놀랐다.
그녀가 그 정도로 마음 고생하고 있을 거로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수연이가 사과나무 그림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했던 일을 탓할 수가 없었다.
* * *
어제도 거의 밤을 지샜고, 오늘도 계속 아바타 기계 그림 작업을 했다.
어느덧 일요일 자정.
테이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았다.
이러다 수호의 머리카락이 오지 않아서.
무작정 이루나, 김주혜. 두 여자에게 아이 만들 생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의도를 배제하고 두 여자에게 품은 내 생각만 놓고 보면, 완전 쓰레기 같다.
만일 김주혜가 수호 엄마라면, 더 난감해진다.
김주혜는 겨우 한 번 만난 사이.
이제 막 초면을 면한 관계인데.
이제 이틀이 있으면 2월이 시작되는 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수호의 엄마가 누구인지는 수호도 모른다고 하니.
물어볼 수도 없고.
뭐, 물어도 답해줄 녀석도 아니지만.
나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핸드폰으로 인터넷 창을 켰다.
‘아트 K’에서 경매하는 내 그림.
이제 마감 시간이 되었다.
낙찰가를 보니까, 그림 3점 중 가장 높은 금액은...
12억 5천만 원.
나머지 2점은 각각 10억 원, 9억 7천만 원이다.
이 정도면 젊은 신인 작가치고 정말 높은 금액.
그것도 즉석에서 그린 그림인데 말이다.
내 그림은 애초에 추정가를 낮게 잡았었는데, ‘현재가’는 고공행진을 했었다.
나는 낙찰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마어마하구만.”
기사로 떴을까?
아직 안 떴겠지.
이제 막 마감이 되었고, 지금은 자정이라 너무 늦은 시간이다.
사람들이 내 그림이 낙찰된 거에 그 정도로 관심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사를 검색했는데.
‘김주혜’라는 이름으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이 여잔, 잠도 안 자고 이 시간에 눈을 부릅뜨고 내 그림 경매가 마감되는 걸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그녀의 기사를 읽어보았다.
급하게 쓴 느낌이 아니다.
세세하게 정성 들여 쓴 글이다.
아마도 미리 기사 내용을 작성한 후에 막판에 완성하고 기사를 올린 듯하다.
그의 기사 내용 중에 이런 글귀가 있다.
<그림보다 더 보배 같은 작가, 애플 수. 그는 시작부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유화 그림이 첫 경매에 나왔을 때, 추정가는 3천만 원에서 1억 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낙찰가는 한화로 무려 12억 5천만 원이다.
그의 유화 그림 3점 중에서 가장 높은 금액을 기록한 그림은, 일본 사업가로 알려진 Y 씨에게 돌아갔다.
유화 그림 총 판매 금액인 32억 2천만 원은, 애초에 약속했던 대로 소외 계층의 아동과 난치병 아동을 위해 전액 기부되어 사용될 계획이라고, 이미 애플 수 작가의 대리인, 이진오 씨는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진오’는 진구의 가명이다.
그는 그 이름을 대외적으로 사용하겠다고 했었다.
그나저나 32억 2천만 원이라니!
그저 3억 원 정도만 기부하게 되어도 괜찮겠다고 여겼었는데.
생각지 않게 기부 큰 손이 되어버렸다.
이 늦은 시간에도 기사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애플 응원 : 축하드립니다. 그림 낙찰가가 32억 원이라니 놀랍습니다. 너튜브 영상을 올리실 때부터 지켜봐 왔습니다. 애플 수님, 응원합니다.
└ 우인이 : 대다나다 !!
└ moha99 : 추정가 3천만 원.ㅋㅋㅋ 머하는 놈들이냐. 애플 수 그림 가치는 그보다 백배였네.
└ 나야 : 애플 그림 가격 실화? 그림의 ‘그’자도 모르던 나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 지지지 : 애플 수 작가님, 사랑해요! 32억 2천만 원을 전액 기부하시다니.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명품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셨네요!
└ 김 대표 : 너무 신비주의로 나간다고 생각해서 얼굴 가리고 그러는 걸 욕했었는데. 솔직히 저 큰돈을 전액 기부하는 건 인정 안 할 수가 없음.
코인을 얻고자 하는 얄팍한 마음에서 전액 기부를 생각했던 거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반응하고 심지어 감동도 하는 걸 보니, 나 역시 가슴이 뭉클해지긴 했다.
이전엔 미처 놀랐던 감정.
나는 홀로 머무는 작업실을 물끄러미 보다가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 찍었다.
그리고 수호에게 까톡으로 보냈다.
이전에는 안 하던 짓을 하는 나다.
- 고수 : 수호. 여긴 내가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아무것도 없어. 작업실을 꾸미는 것도 에너지와 시간이 드는 일이라서 못 했네. ㅋㅋ
수호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얄팍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2월이 되기 전에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어졌고.
수호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어 침대에 누워서도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그에게 준 거라고는 부모의 ‘죽음’ 뿐이었다는 게 미안했고.
2월이 지나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까톡!
그때 까톡 알림이 울렸다.
테이에게서 연락이 온 거다.
나는 그녀의 톡에도 알림이 울리도록 해두었었다.
평소라면 직접 전화를 했겠지만 늦은 시각이라 까톡을 보났나 보다.
- 정테이 : 미래에서 수호 씨의 머리카락을 보내왔어요. 지금 제가 잘 보관 중이에요.
- 고수 : 아침 일찍 가겠습니다. 지금도 호텔에 계십니까?
- 정테이 : 회사에서 따로 마련한 숙소로 거처를 옮겼어요. 주소 찍어드릴게요.
- 고수 : 네.
그리고 다음 날 1월 31일 월요일.
나는 마침내 아바타 기계 그림의 1차 완성본을 AI 2050에게 보냈다.
그림 분석 시간은 다행히 길게 나오진 않았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10시간이 소요됩니다.
그 10시간 동안,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먼저, 유전자 검사를 하는 곳으로 가서 검사 의뢰를 하는 것.
알아보니,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일반 검사는 10일에서 16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스피드 검사는 5일에서 10일.
그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이루나와 김주혜.
그녀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쌓아둘 계획이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는 마침 가게를 쉬는 루나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