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54화 (54/153)

시공을 초월한 만남

- 김주혜 : 저는 얼마 전에 H 호텔에서 부딪혀서 핸드폰 액정이 깨졌던 사람입니다.

- 김주혜 : 이런 말씀은 실례될까 싶지만, 핸드폰 액정에 대한 보상보다는, 괜찮다면 그냥 커피 한 잔을 사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 김주혜 : 혹시 원하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한동안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김주혜가 썼던 기사들.

내게 호의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가 수호의 모친이 될 사람이 아니라 해도.

본래 만날 인연이었고, 그것도 깊은 인연으로 엮일 사람이라면 만나보는 게 좋다.

김주혜에게 톡 메시지를 작성했다.

- 고수 : 핸드폰 액정에 대한 보상으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원하시면 커피를 사겠습니다.

- 고수 : 그런데 그 커피 한잔, 혹시 온라인 선물권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저는 전에 마주쳤던 H 호텔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그녀에게 작업 거는 기분이다.

- 김주혜 : 선뜻 답해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저는 직접 사주시는 걸 원했습니다. 내일 오후 2시 즈음 괜찮으세요?

- 고수 : 네.

- 김주혜 : 내일 2시에 H 호텔 커피숍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다가 문득 든 생각에 메인 핸드폰으로 테이에게 까톡 메시지를 남겼다.

- 고수 : 테이 씨, 지금 드는 생각인데. 이후에 테이 씨가 수호를 만나게 되면요. 수호의 머리카락 한 올을 채취해서 보내줘요. 김주혜와 이루나의 머리카락도 구해서 유전자 검사를 하려고요.

- 고수 : 테이 씨가 언제 수호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후 2050년까지, 테이 씨가 기억만 해준다면 많은 기회가 생길 거로 생각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테이의 답장이 바로 왔다.

- 정테이 : 아, 머리카락이요. 고수 씨에게 수호 씨 부모를 알려달라는 얘기 들었을 때 잠시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후 제가 그걸 잊었었나 봐요.

- 정테이 : 머리카락. 그걸 잊지 않도록 할게요. 이런 제 결심이 미래의 내 행동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 고수 :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톡 메시지를 적고는 다시 드론을 그리는 작업에 집중했다.

현재 내가 그리고 있는 드론 900대는 블랙카드 25레벨로 주어졌던 미션.

여느 블랙카드 레벨 그림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 조만간 26레벨에 돌입하겠다.

* * *

드론 그림을 전부 완성하려고 새벽까지 작업실에 머물렀었다.

마지막 드론 그림을 AI 2050에게 보내자, 곧바로 이런 메시지가 왔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했습니다. 블랙카드 25레벨의 그림인 드론 900대를 전부 적정 퀄리티로 완성해서, 블랙카드의 레벨이 26레벨로 상승합니다.

집에 들어가서 오전까지 잠들었다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켰다.

그리고 내 그림이 경매되고 있다는 ‘아트 K’로 접속했다.

‘겨울에 피는 봄’이라는 이름의 내 그림 3점이 걸려 있다.

‘추정가’는 3천만 원에서 1억 원.

‘시작가’는 3천만 원이다.

그런데.

‘현재가’는 가장 높은 금액이 1억 8천만 원.

다른 두 개의 그림도 각각 1억 7천만 원, 1억 6천만 원.

응찰한 사람들이 다수 몰려든 거다.

아직 경매 마감이 꽤 남아있어서 앞으로 더 오를 듯하다.

즉석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억대의 돈을 주고 사려는 사람들이 많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의 응찰자까지 몰려서 경쟁율이 올랐던 걸까.

내 그림을 사갈 낙찰자.

요즘 이슈다 보니까 확 질렀다가 사놓고 나중에 후회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인터넷 기사를 찾아봤다.

역시나 경매로 걸린 내 그림에 관한 기사들이 여러 개가 떠 있다.

가장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기사를 택해서 보려는데.

까톡!

수호에게서 까톡 메시지가 왔다.

- 2050 : 고수. 블랙카드 26레벨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첫 번째 그림은 마감 시간을 촉박하게 잡아야 할 듯하다.

- 고수 : 이번엔 뭘 그려야 하는데?

이번엔 자연환경을 그리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창의력을 올리라는 말도 했었으니.

- 2050 : 첫 번째로 그릴 그림은 아바타 기계다.

- 고수 : 아바타 기계? 그건 미래에서도 완성되지 못한 기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 2050 : 그 기계가 완성되지 못했던 건, 여기에 유하준 박사가 없는 탓이었지.

- 2050 : 전송 기계를 통해 2022년도의 유하준 박사에게 도움을 받았었다. 미래의 그가 어느 정도 이뤄놓은 기술을 그에게 주고 2022년 그가 있는 곳에서 완성하도록 한 거지.

- 고수 : 그랬군.

- 2050 : 완성된 아바타 기계를 찍은 자료 사진, 너에게 보낼 테니 그림으로 그려. 그러면 2050년도에서도 아바타 기계가 생길 거다.

- 고수 : 알았어.

- 2050 : 시간이 별로 없으니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 2월 초를 넘겨선 안 돼.

나는 그가 적은 문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담담한 문장에서 조급함이 느껴진다.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 고수 : 2월 초를 넘기면 안되는 이유, 혹시 있어?

- 2050 : 고수, 우리 한 번쯤은 봐야지 않겠나.

그가 한 말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설마 각오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최악의 경우, 2월이 지나고 나면 그의 존재가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침묵하자 그는 다시 말했다.

- 2050 : 넌 내 얼굴을 알지 못할 테니 한 번쯤 봐야지 싶었다. 나 역시 궁금하기도 하고.

- 고수 : 그것뿐이야? 서두르는 이유가.

- 2050 : 한 번쯤 평화로운 세상을 보고 싶기도 했지. 나는 망가지기 전의 세상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 고수 : 수호야.

마치, 마지막으로 내 얼굴과 평화로운 세상을 보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 고수 : 언젠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 고수 : 2024년도가 지난 후에도 이곳의 평화는 지켜져야만 하는 건...

- 고수 : 나중에 아이를 키우게 되면, 그 아이에게 평화로운 세상과 삶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 고수 : 내가 그렇게 만들게. 내 재능을 업그레이드하다 보면 아포칼립스를 막을 방도가 보일 거라고, 네가 그랬었지.

- 고수 : 나는 아포칼립스를 막을 방도를 얻을 거고. 그래서 이후 세대인 네가 평화로운 세상을 보게 할 거다. 반드시.

네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러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생각이야.

수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짧은 한마디를 했다.

- 2050 : 고맙다.

그에게 우리가 부자 관계인 것에 대해 묻는 건 보류해두고 있다.

수호는 왠지 부모, 특히 아버지에 대해선 차가운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오후 1시 50분쯤, 나는 H 호텔 커피숍으로 왔지만.

김주혜는 나보다 더 일찍 와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그녀와 마주 앉았는데.

오랜만에 멋도 내고 가장 좋은 옷으로 입고 오기까지 해서.

왠지 소개팅 나온 기분이다.

나는 그녀에게 입을 뗐다.

“커피로 핸드폰 보상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 김주혜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커피로는 보상이 안 되죠. 하지만 고수 씨를 뵙게 되어서 충분히 보상이 된 것 같은데요?”

“절 만나서요?”

“그냥 어떤 분과 닮은 느낌이라 호감이 느껴졌어요.”

“음, 저는 주혜 씨가 언제고 만나게 될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주혜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래요? 음... 그럼 우리가 이런 식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주치게 되었다면 어떤 만남이었을까요?”

“아마도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난 여름쯤 많은 걸 훌훌 털어버리고 여행을 했었을 겁니다. 그때 여행하다가 혹시 마주쳤을 지도 모르고.”

“저도 여행 좋아해요. 사실 전 지난여름에 혼자 기차 여행을 했어요. 보통 그 시기엔 휴가를 간다는데. 저는 혼자 자유롭게 다니는 걸 좋아하거든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때 만나게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저도 혼자 기차 여행을 떠나곤 했거든요.”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은 사실이다.

만일 지난여름에 수호를 만나지 못했다면,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던 나는 훌쩍 여행을 떠나 마음을 추스르려 했을지 모른다.

그녀와 한동안 대화하다가 내게 말했다.

“오늘 맛있는 커피 사주셔서 감사했어요. 저는 기자로 일하고 있어요. 고수 씨는...”

내 직업을 묻는 거겠지.

그림을 그린다고는 아직 말하기가 그래서 대충 둘러댔다.

“전 너튜버입니다.”

너튜브 영상을 올려 수익을 내고 있으니 아주 거짓말도 아니다.

“아, 그러시구나. 왠지 미대 오빠 같은 이미지라서 혹시 그림을 그리시나 했어요.”

그녀의 말에 그저 미소만 지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호텔을 나올 때.

나는 그곳의 디저트를 사서 포장했다.

여긴 호텔 커피숍이라 그런지 커피도 그렇고 디저트도 꽤 비싸다.

호텔 입구에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시만요. 머리카락에 작은 날벌레가 앉았어요.”

“네? 벌레요? 이 겨울에.”

“제가 털어내 줄게요.”

그녀는 생각보다 깜짝 놀라며 움찔했다.

벌레를 무서워 하나.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뽑느라 가까이 다가간 터라, 은은한 향 같은 게 났다.

여자 화장품 향인지, 향수인지 잘 모르겠다.

“아야.”

하나만 뽑으려 했는데 급하게 뽑느라 3올이나 뽑혔다.

아, 미안하네.

나는 괜히 멋쩍게 웃으며.

“음, 벌레는 날아갔어요. 이건 커피만으로는 내가 미안해서 디저트를 좀 샀어요.”

주혜는 머리카락이 뽑힌 부분이 아팠는지 손이 그곳으로 올라가려다가 내가 주는 디저트를 받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런데 괜찮다면 다음에 또 뵙고 싶어요.”

“네, 다음에 연락드리죠.”

* * *

그날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 잠시 ‘라멘 사랑’ 앞에 차를 잠시 세웠다.

아까 호텔에서 디저트를 한 개 더 산 게 있어서 루나에게 줄 겸.

머리카락을 뽑아두려는 거다.

김주혜의 머리카락은 ‘김주혜’라고 적은 흰 봉투에 잘 넣어뒀다.

그나저나 만일 수호의 모친이 김주혜면 어쩌지?

벌써 이제 곧 2월인데.

2월 즈음에 나는 그녀와 어떻게...

“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단, 루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녀를 불러냈다.

“루나야, 지금 라멘 사랑 앞인데. 줄 게 있거든. 잠깐 나올래?”

<오빠아. 지금은 손님 없어서 들어와도 되는데요?>

“금방 작업실로 가야 해서.”

<지금 나갈게요.>

통화를 끝내고 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라멘 사랑’ 가게를 바라보았다.

새삼 생각하니 현타가 왔다.

내가 아직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아이 엄마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게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참 우습게 여겨졌던 것이다.

가게 문이 열리고 루나가 외투도 걸치지 않고 나왔다.

그녀는 금방 내 차를 알아보고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조수석 문이 열릴 때 찬바람이 훅 들어왔고.

루나는 뭐가 좋은지 나를 보며 해실 웃으면서도 오들오들 떨고 있다.

너무 추워 보여서 붉게 상기된 그녀의 뺨에 나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갑네. 외투도 안 걸치고 나와.”

“오빠가 바로 앞에 있는 걸요.”

“너 홍시 같아.”

더 얼굴이 붉어진 루나.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창피해. 너무해요.”

“금방 따뜻해질 거야. 오다가 치즈케이크 샀는데 너 주려고.”

“어, 정말요?”

금세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에 짧게 웃으며 포장된 디저트를 건넸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너 머리카락에 밥풀 묻었어.”

“밥풀이요? 흐흫. 거짓말.”

내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해맑게 웃기만 했다.

"진짠데. 잠깐 기다려봐.

나는 머리카락을 뽑으려고 다가갔다.

넓지 않은 공간이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나 보다.

루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루나야, 왜 눈을 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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