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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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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톡!
새벽 4시가 다 되어갈 무렵, AI 2050에게서 까톡 메시지가 왔다.
- 2050 : 고수님, 전투는 이제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2050에게 물었다.
- 고수 : 피해 사항은? 쉘터는 괜찮아?
- 2050 : 피해는 없었습니다. 고수님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 고수 : 지금은 전투가 끝났으니 그곳 쉘터의 상황을 드론으로 보여줄 수 있어?
- 2050 : 수호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언짢은 심기가 일었다.
피곤한 중에 바싹 속이 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수호는 뭐든 항상 온전히 내보이질 않는다.
눈앞에 있었으면 언성을 높였을지 모르겠다.
- 고수 : 수호는 대체 뭘 숨기는 거지?
- 2050 : 평화로운 시대를 사는 고수님에게 참혹한 전투 흔적이 남은 곳을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것 뿐입니다. 이후 부분 편집한 영상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조금 전, 새벽 내내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을 거듭했었다.
그럴 리 없다고 몇 번이고 무시하고 외면했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하나의 가정.
수호의 부친이 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2050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수호가 태어난 연도가 2022년 12월이라고.
수호의 부모는 수호를 2월 즈음에 임신했었을 거다.
지금이 1월.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도 없다.
그러니 내가 수호의 부모일 리가...
자꾸만 생각이 오락가락하는군.
몹시 피로하니 눈을 조금이라도 붙여야겠다.
나는 침대로 가서 쓰러지듯 누웠다.
죽은 듯이 그대로 잠들었다가.
4시간 정도 잠들었을까.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탓인지.
꿈속에서 수호의 말을 들었다.
“이곳 세계를 구해줘.”
하지만 그의 절박한 호소는, 이내 다른 장면과 이어졌다.
어느 작은 남자아이.
그 어린아이가 전쟁터처럼 폐허가 된 곳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를 구해서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보는 이의 마음이 미어질 만큼, 아이는 애달프게 울다가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나를 보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로 달려왔다.
공포와 겁에 질린 눈빛.
“아빠아!”
하지만 아이의 뒤로 빌딩만 한 거대하고도 시커먼 용이 나타나더니.
빠르게 다가와 아이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렸다.
“안돼!”
나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실이다.
커튼이 쳐진 창문으로 밝은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서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려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하는 모양이다.
무슨 악몽을 이리 살벌하게 꾸는지.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 반이다.
악몽 탓인가.
내 마음이 더욱 번잡해졌다.
나는 목이 타서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런데 어제 어머니가 지나가듯 하신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수야, 나중에 아들 낳으면 이름을 수호라고 짓는 건 어떻겠니?’
‘우리 아들 정도면 당장 내일이라도 여자친구 생기지. 앞일은 모르는 거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왜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셔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데.
소중한 걸 잃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방금 꿨던 악몽이 내 마음을 계속 흔들어대서 견딜 수가 없다.
아무래도 수호가 내 아들일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미미한 가능성이라 해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중요하고 무거운 문제다.
수호가 이토록 숨기는 것도 이상하고.
애초에 내가 수호와 연결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고.
그런데 만일 수호가 내 아들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인데.
내 시간이 원래 시간과 많이 달라져서 이미 비틀린 거라면.
수호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선 확인이라도 해두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해두자.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2050에게 다시 질문했다.
- 고수 : 2050. 수호의 모친 이름도 알려줄 수 없나?
- 2050 : 죄송합니다, 고수님.
- 고수 : 휴, 그래. 눈앞에 있었으면 한 대 때려줬을 거다.
- 2050 : 네? 저를 말씀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톡 창을 끄고, 대신 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3일 전에 다시 입국한 거로 알고 있다.
그녀가 지금 한국에 있어서 다행이다.
한동안 신호음이 가고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정테이입니다.>
“정테이 씨.”
<네, 고수 씨가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러잖아도 쉘터 건축 진행 사항 때문에 미팅 일정을 잡으려고 했었어요.>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H 호텔에 묵고 계신 가요?”
<네, 이번에도 여기서 묵고 있어요. 저는 여기가 익숙하고 편하더군요.>
“그럼 지금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시죠.”
<네? 갑자기요? 10시에 팀 미팅이 있었는데.>
“......”
<음, 알겠어요. VIP 고객의 요청인데. 제 일정은 조금만 미루도록 하죠. 이참에 고수 씨와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욕실로 들어가 대강 씻고 나와서 니트에 검정 캐시미어 롱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핸드폰과 지갑, 차키를 챙겨 집 밖으로 외출했다.
* * *
잠시 후, 나는 H 호텔 로비로 급히 들어섰다.
브런치를 하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음, 커피숍은 어디인지 알겠는데 레스토랑은 어디였더라.
이곳은 다 좋은데 너무 넓다.
두리번거리다가 마주 오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앗!”
툭!
나와 부딪힌 여자가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나는 핸드폰을 주우며 사과의 말을 하려 했지만.
핸드폰 액정이 깨져 있다.
이런 낭패가!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봤...”
그러면서 그녀의 얼굴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
그녀는 전에 페라리 광고에서 본 적 있던 여기자, 김주혜였던 것이다.
김주혜는 핸드폰을 받으면서 내게 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급하게 걷느라 부딪히긴 했는데. 이거 참 공교롭네요.”
“핸드폰은 지금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연락처 주시면 연락드릴게요. 보상을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받아야할지 모르겠네요."
"그럼 제가 넉넉하게..."
나는 그녀에게 말하다가 그냥 명함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일부러 세컨드 폰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주었다.
그녀가 기자라서 내키진 않았었지만, 내 정체는 알지 못할 테니 상관없겠지.
김주혜는 명함을 받더니.
"그럼 연락드릴게요."
내게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김주혜와 그렇게 헤어지고.
나는 마침내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테이가 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테이는 여유로운 태도로 내게 말했다.
“여기 브런치 맛있어요. 코스 메뉴로 구성되어 있는데. 코스마다 취향에 따라 음식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어요.”
생각지 않게 아침부터 코스 요리를 먹게 되었지만.
나는 테이가 건네는 여상한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막상 그녀를 보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었다.
“전 아무거나 먹으면 됩니다.”
“훗, 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테이 씨, 전에 2050년도의 본인을 만났던 일. 기억하시죠?”
내가 심각한 태도로 미래의 일을 꺼내자, 조금 느슨해 보였던 테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 기억하죠. 그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미래의 나를 만났던 일인데.”
“그럼 테이 씨는 아실 겁니다. 2050년도의 테이 씨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네, 미래의 나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혼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테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미소를 지었다.
붉은빛 도는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얼마 전에 이메일 하나를 받았어요. 미래의 내가 보낸 짧은 영상 편지랄까. 그 영상을 보고서 한동안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나이 든 내 모습을 보는 건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감동이었고 다행이었고.”
“......”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그때의 내 심정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는 게 아쉽더군요. 내 부모에게조차도 말하지 못했어요. 그냥 혼자 울었고 웃었어요.”
“테이 씨 심정, 이해합니다.”
테이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오늘 고수 씨에게 얘기하니까 좋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고수 씨를 알게 되어 다행이고. 미래의 나를 만났던 일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예.”
“고수 씨와 수호 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미래의 내 모습을 보니까. 절실히 결심되는 게 있더군요.”
“그게 뭡니까?”
“피부 관리요. 미래 상황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음 너무하더라고요. 그렇게 내가 훅 가버리게 될 줄이야. 솔직히 충격이었어요.”
“하하.”
내가 가볍게 웃는 동안,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포크를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그림 그리는 일 외에 딱히 없었습니다만. 테이 씨의 불행을 막을 수 있었던 건 수호의 역할이 컸습니다.”
“만일 만날 수 있다면 수호 씨에게 크게 한턱냈을 텐데요.”
“저 역시 수호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호를 돕고 싶습니다. 제 삶이 달라졌던 것처럼, 테이 씨의 미래가 달라졌던 것처럼. 그렇게 수호의 불행도 조금 덜어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테이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내가 지금 테이 씨에게 말을 꺼내는 이유는, 2050년도의 테이 씨가 수호와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훗날이 되겠지만 지금 제가 하는 말을 테이 씨가 기억해줬으면 해요.”
“기억해달라고요?”
“예. 기억해서 2050년도의 그곳에서 나에게 알려줘요. 2050년도의 테이 씨라면 수호가 어떤 상황인지 저보단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음, 네.”
“2050년 1월 오늘 날짜. 그 무렵에 테이 씨가 수호를 살펴줘요. 2022년도 2월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시점인데. 그 시간이 어그러지면...”
테이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 건데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테이에게 말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순전히 제 짐작이고 노파심이긴 한데. 수호에게 안 좋은 상황이 생길것 같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짐작만 할 뿐이지만. 2050년도의 테이 씨는 수호를 잘 알 수 있고 지켜볼 수 있으니까 부탁드릴게요.
그 무렵에, 수호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걸 내게 알려주는 게 옳다고 판단하신다면, 내게 알려줘요. 아니, 반드시 수호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수호를 도울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기억할게요. 전 기억력이 좋은 편이니 지금 고수 씨가 한 말. 토씨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했다가 2050년도의 그 시기에 고수 씨에게 알려줄 방도를 마련할게요.”
“고마워요, 테이 씨.”
나는 비로소 표정을 풀며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제까지는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한 내 여정은 뭔가 수동적이었다.
그저 주어진 부분만 감당하며 따라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어진 대로 걷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번 한 번 만큼은 잠잠할 수가 없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며 외면하면서도.
수호가 내 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습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지금도 끊임없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김수호는 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