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49화 (49/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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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핀 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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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2050이 보낸 영상을 봤다.

크리스마스의 만찬, 그걸 먹는 풍경.

화기애애하고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음식을 먹으며 다들 행복해진 얼굴을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미처 몰랐는데.

이 맛에 그림을 그리는구나.

수호를 만나지 못했다면 영영 몰랐을 기분이긴 하다.

실물 전환을 위해, 수고하며 피땀 흘려 그린 그림이 영영 사라졌어도.

대신 저들의 웃음과 만족이 남아있으니.

내 마음도 덩달아 한가득 채워지는 게 있어서 족하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재능 업그레이드를 해서 더욱 빨라진 속도로, 초소형 드론을 600대 정도 그려냈었다.

오늘 콘서트에서 선보일 장대한 겨울 풍경도 타블렛으로 작업해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라이브 콘서트가 있는 당일이 되었다.

나는 준비된 의상을 입고 페라리 광고 때처럼 블랙 색상의 가면을 썼다.

조금 전에 헤어 전문가가 내 머리를 만져주고 간 상태.

지금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그림을 그리기에 불편한 블랙 수트 차림이라.

이런 옷에 물감을 튀겨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진구는 오늘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했다.

“오늘은 청심환 두 개 먹었는데. 여전히 막 떨리네.”

“후, 네가 떠니까 나까지 막 떨리잖아.”

그러자 그는 울상을 지었다.

“미안. 콘서트홀에 모인 관객 수를 보니까 울렁증이 일어서.”

“이그.”

“3500석이 만석이 되었대. 저 사람들, 다 어디서 몰려왔지?”

“......”

“콘서트홀 건물 밖에는 기자들이 진을 쳤다네. 오늘 아침만 해도 네 기사가 도배를 했어.”

“......”

“와, 저들이 다 고수를 보러 왔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믿기지 않는다. 후우.”

“주접 그만 떨어. 그리고 저들은 내가 아니라 아이돌 보러 왔을걸.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걱정되네.”

“뭐가?”

“아이돌 보고 와아 하다가 막상 내가 딱 나타나고 분위기 싸해지면 어쩌지?

아니면, 내가 그림 그리는 동안 사람들 지루해하거나.”

진구는 진지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대꾸했다.

“내 생각엔 저들 대부분은 애플 수에게 관심이 있을걸. 그리고 네가 그림 그리는 광경은 전혀 지루하지 않아.”

“지루하지 않다고?”

“어. 네 작업 속도는 어마어마해서 마치 서커스 보는 기분이랄까.”

“허, 서커스라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비유가 좀 그렇긴 한데. 그림이 워낙 후덜덜해서 신기하고 경탄스러운 걸 보는 느낌인데. 거기다 속도까지 엄청 스펙타클해. 지루하진 않아. 그러니까 걱정 마.”

“음, 네 말 들으니 조금 용기가 나긴 하네. 고맙다.”

“어쨌든 이번 라이브 콘서트는 우리나라와 일본 TV 방송으로도 나와서 네 인지도가 꽤 오르게 될 거야.”

그의 말을 듣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진구야, 사람이 명성을 효과적으로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지?”

“명성? 너 바쁘다면서 요즘 게임 하냐?”

“아니, 게임이 아니고 실제 명성을 높이는 거 말이야.”

“음... 일단 유명해져야겠지? 그리고 그 유명해진 이름의 평판을 잘 관리해야겠지.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이루어도 되고. 대중이 호의적인 평가를 할 만한 옳은 일을 해도 되고.”

“업적과 옳은 일이라... 이를 테면?”

“네 경우를 놓고 보자면, 네 그림이 대한민국 화가 중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게 되면, 네 명성이 올라가겠지? 그리고 유명인들 보면 기부도 많이 하잖아?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진구야, 그쪽 콘서트홀 책임자에게 연락 좀 넣어 줄래?”

“응?”

“오늘 그리게 되는 그림, 경매에 부쳐서 판매된 수익을 전액 소외 아동과 난 치병 아동에게 기부하겠다고 전해줘.”

그러자 진구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너 미쳤어? 네 그림이 얼마짜린데.”

“부탁할게.”

“야야, 네 그림을 팔면 분명 억대일 건데. 어휴, 명성과 인지도에 환장한 놈아. 언제부터 고수가 이리 되었지.”

“흐흐. 그러게."

진구는 이런 나를 보다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오늘 즉석에서 전액 기부 그런 얘기 꺼내면 효과는 좋긴 하겠다.”

“그렇지?”

“근데 너, 오늘 라이브 콘서트 있는 거 부모님 모르시지?”

“응.”

“왜 부모님에게까지 비밀로 하냐? 부모님 아셨으면 분명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하셨을 텐데.”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게. 이런 날,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긴장하고 초조해한다는 걸 가까운 사람들이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 아니었으면 되게 외로울 뻔했다.”

조금 있으니, 스태프가 와서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을 나섰다.

이제 내가 그림을 그릴 무대로 나아가는 거였다.

반년 전만 해도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역시 사람 앞일은 모르는 일인 것 같다.

나를 안내하던 스태프가 가면서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그러다 어느 곳에 이르자 내 앞에 문이 하나 보였다.

저곳을 나가면 무대였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나 자신에게 되뇌었다.

저곳에 나가도 그림 그리는 것만 생각하자.

어차피 내가 그림을 그리고 명성을 얻으려는 이유는...

이제 모두가 비극 없이 살게 되는 걸 바라기 때문이지 않던가.

나는 문을 열고 나아갔다.

* * *

김주혜는 콘서트홀 VIP석에 앉아 유명 아이돌의 공연을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곳에 와있는 건, 순전히 애플 수를 보기 위해서다.

H그룹 총수의 손녀, 김주혜.

29세가 되는 내년까지는 자유롭게 사는 걸 허락받아서 그녀의 뜻대로 평범한 기자 노릇을 하는 그녀다.

애플 수가 페라리 광고 촬영을 하는 장소를 취재하러 갔던 날.

그날에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한 남자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이돌을 덕질하는 여고생처럼.

애플 수에 관한 내용을 매일 찾아봤고.

평소 잘 알지도 못하던 그림에 관해 공부까지 했으며.

그를 위해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어떤 인물에 빠져보는 건 처음이라 자신도 놀랍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주혜는 옆 좌석에 앉은 한 여자를 힐끗했다.

그녀도 아이돌 가수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지 심드렁한 얼굴이다.

주혜는 다시 무대를 응시했다.

아이돌 가수는 퇴장하고 유명 아티스트가 나와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양 사이드의 대형 스크린에 애플 수가 그린 겨울 풍경이 한가득 채워졌다.

“오오!”

“와아!”

콘서트홀에 앉은 무수한 사람들의 경탄이 이어졌다.

주혜는 애플 수의 겨울 풍경 그림이 스크린에 뜨자 전율이 일었다.

어째서 그의 그림은 날로 진화하는 것만 같을까.

매 순간 그림 작품이 나올 때마다 천재 위의 군림하는 천재로서, 그 탁월함을 경신하는 듯하다.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또 아름답다.

여느 극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다르다.

마치 실물 같지만, 그보다 아름답고 누구도 흉내 못할 격조가 있다.

아티스트를 비추던 정면 스크린마저 겨울 풍경 그림으로 채워졌다.

그러자 관객의 탄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와아아!”

관객의 박수가 이어졌다.

애플 수를 외치는 목소리가 곳곳에 튀어나오기도 했다.

옆좌석에서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생기가 돌아서 힘입게 손뼉을 쳐댔다.

유명 연주자의 아름다운 선율은 이미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게 된 지 오래.

주혜는 소녀처럼 감동했다.

이윽고 위에서 또 하나의 대형 스크린이 내려왔다.

스크린이 내려오는 동안, 그 화면에 애플 수가 무대 위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의 등장을 알리는 임펙트 있는 선율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그의 등장은 더욱 신비로워졌다.

슈트를 입고 가면은 쓴 젊은 남자.

훤칠하고 몸의 비율이 좋아서 품격있는 슈트가 잘 어울렸다.

관객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애플 수!”

옆좌석에 앉은 여자가 흥분했는지 소리쳤다.

“수! 넌 잘 해낼 거야!”

마치, 애플 수와 친하다는 듯 외치는 그녀.

그녀의 이름은 ‘김수연’이다.

* * *

나는 터져 나오는 군중의 환성에 깜짝 놀랐다.

나를 향해 들려오는 이런 환성은 처음 겪는 일이기에.

이곳 무대에 설치된 커다란 화면에 관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브 콘서트가 이루어지는 무대와 전혀 다른 공간.

나는 비공개 장소인 이곳에서 관객과 소통하게 될 터.

침착하려 애쓰며 무대 위에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스태프에게 들었던 대로 카메라를 보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잠시 잠잠해졌던 사람들의 환성은 다시 들려왔다.

박수 소리와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

그들의 환성.

더 격렬해졌다.

덩달아 내 심장이 쿵쿵 울리는 듯하다.

나는 이제 돌아서서 내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외침과 박수 소리는 이제 잦아졌고, 어느새 고요해졌다.

이젠 음악 연주만 우아하고 잔잔하게 들려올 뿐이다.

타블렛으로 그렸던 그림.

3개의 대형 캔버스 천에 겨울 풍경이 인쇄되어 있다.

거기에 나는 유화 물감으로 봄 풍경을 덧칠하게 될 거였다.

집중하기 위해 잠시 겨울 풍경을 응시하다가 물감을 배합한 후, 붓을 들었다.

이번엔 스케치는 필요 없다.

붓을 든 내 손이 이전 페라리 광고 작업을 할 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자, 군중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붓끝에서 앙상해진 나뭇가지에 연초록빛 잎사귀가 피어났다.

마치 내 손에만 시간이 7배속으로 흐르는 것처럼.

금세 초록빛 잎사귀들이 나뭇가지에 덧입혀졌다.

그리고 다른 색의 물감을 사용하여 벚꽃을 하나씩 섬세하게 그려나갔다.

내가 이 부분은 얼마 정도 걸릴 것 같고, 그림 그리는 순서는 이러하다고 사전에 얘기를 해두어서 그런지.

채색하는 부분이 바뀔 때마다 음악이 달라지고 선율이 변화했다.

벚꽃잎이 꽃비가 되어 내리는 풍경을 그릴 때는, 홀로그램 조명이 솜사탕 같은 분홍빛으로 관객들이 있는 콘서트홀에 드리워졌다.

콘서트홀에 홀로그램 조명으로 꽃비가 흩날리니 신비로움이 더해졌다.

무대는 화려하고 화려했다.

사람들의 탄성이 마치 추임새처럼 때마다 이어졌다.

그러다.

얼어붙은 물이 다시 흐르는 부분을 그릴 때는 클래식 가수가 우아함으로 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음악과 미술이 앙상블을 이루어나가는 느낌.

그중에서 메인은 완성되어 가는 내 그림이었고, 관객의 목전에서 피어나는 ‘봄’이었다.

관객의 박수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지만, 나는 그림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림 때문에 박수치는 건지 아니면 노래에 박수를 보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중간에 2부 순서로 아이돌 공연이 있었을 때 10분 정도 쉬긴 했었지만.

다시 긴 작업에 돌입해야만 했다.

작업 막바지에 이르자 어깨와 팔에 이제는 고질병 같아진 통증이 일었다.

조금도 내색할 수 없었다.

카메라는 근접해서 촬영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던 걸까.

“애플 수! 힘내요!”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이르러서, 내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마침내, 그림 작업을 다 마치고 등지고 있던 카메라를 향해 돌아섰다.

카메라와 스크린을 통해 나를 지켜보던 관객들.

고요한 침묵이 그들에게 내려앉아 있다.

제법 긴 시간이 지났던 터라 사람들이 지루해하고 있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다스리며 내리눌렀다.

그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할 뿐.

그 순간, 천지가 울리는 듯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휘파람 소리, 격한 함성.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관객들을 비추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마치 감동했다는 듯이 경탄했다는 듯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그들의 박수는 오래도록 지치지도 않고 이어졌다.

조금 후에, 콘서트 홀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유명 MC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즉석에서 라이브로 완성된 작품의 퀄리티가 대단해서 놀랍습니다. 방금 그려진 이 작품은 ‘겨울에 핀 봄’이라는 제목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애플 수 작가님은 이 작품을 경매에 내놓으시겠다고 합니다. 애플 수의 작품으로는 미술품 시장에 발을 내딛는 첫 작품이 되는 거죠.

애플 수 작가님은 이 그림이 판매되어 얻게 된 수익을 소외 아동과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아동을 위해 전액 기부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맺자마자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다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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