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48화 (4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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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핀 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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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터의 분위기는 이전과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곳은 변화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어둡지 않았고 웃음을 되찾고 있었으며, 그들의 눈에는...

희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두려움에 떨며 잠들지 않아도 되었고.

언제 쉘터가 무너질지 몰라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이곳 세계는 회복되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생겼다.

겨울처럼 오랜 세월 얼어붙었던 그들의 삶에 연초록빛 싹이 돋고.

꽃이 피며 부드러운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에서도 찾아오는 생존자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하지만.

테이는 우울한 얼굴로 지팡이를 짚은 채 간혹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테이,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같이 채소 수확하는 거 보러 가요.”

“아, 난...”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

오랜 세월을 이렇게 살았어.

절망 속에서.

젊었던 날, 능력 있고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던 그때의 시간이.

지금과 너무 비교되어서 더 비참하고 더 괴롭게.

끝도 나질 않을 악몽을 꾸듯 그렇게 살았어.

왜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네는 건데? 라고 생각하다가.

“어?”

여자가 테이의 손을 잡고 이끌자 테이는 앉았던 곳에서 일어나며, 놀라서 자신의 눈을 만져보았다.

조금 전까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손에 있는 줄 알았던 지팡이도 없다.

테이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어리벙벙한 얼굴로 걸었다.

그러다 그녀는 홀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함께 가던 여자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테이, 왜 웃어요?”

“아니, 그냥. 방금 내가 너무 바보 같이 느껴져서.”

“네?”

“방금 나 왜 우울해했지?”

그러자 여자는 조금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러게요. 테이 그동안 우울하게 지내긴 했...”

“응?”

“아니. 내가 왜 테이가 우울하게 지냈다고 생각했지? 테이는 왼팔이 자유롭지 못해서 가끔 히스테리한 것만 빼면, 활기찬 분인데. 아까는 왜 우울해했어요?”

“그냥 좀, 긴 악몽을 꿨던 것 같아.”

테이는 그렇게 말하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악몽이어서 다행이야. 그 악몽에서 깨어나서 다행이야.”

“악몽이요?”

“영원한 겨울에 갇힌 기분이었거든.”

* * *

조만간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어제 밤새 드론을 그리고, 6시간 정도 잔 나는 오랜만에 백화점으로 나왔다.

평소 시간에 쫓기는 편이라 마트나 백화점은 잘 가질 않았었다.

옷을 사도 인터넷으로 적당히 사버렸고.

선물을 사거나 생필품도 인터넷으로 배달을 시켜버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백화점에서 부모님 선물로 두 분이 쓸 명품 가방을 샀고.

내가 입을 겨울 외투와 옷도 한 벌 샀다.

그리고.

한나와 루나에게 줄 선물로 향수를 샀다.

여자에게 줄 선물로 향수밖에 떠오르는 게 없다.

진구 녀석에게 줄 선물로 명품 지갑을 사고 나니까.

자기 선물 산 거를 알고 전화한 건지.

진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야, 어디냐? 시끄럽네.>

“여기, 밖인데.”

<오래 걸려? 나 너네 집 가는 길인데.>

“이제 들어가.”

나는 전화를 끊고서 주차장으로 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친구들과 지인들에겐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바일 상품권을 보내야겠다.

주차된 아우디에 오른 후, 잠깐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러 톡을 확인하다가 2050이 보냈던 이전 톡을 다시 봤다.

- 2050 : 고수님, 현재 2021년도는 안전한 것을 확인됩니다.

- 2050 : 드론을 만들어 고수님과 고수님의 지인을 염탐했던 자는 생명과 건강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시력만 손상되었습니다. 그의 컴퓨터와 드론까지 파손시켜서, 그는 다시 미래형 드론을 만들기 어려울 겁니다.

- 2050 : 그래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드론으로 그를 지켜볼 예정입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했다.

잠시 후, 집으로 들어가자 진구는 벌써 와서 자기 집처럼 TV를 보고 있었다.

리모컨을 든 채 그가 말했다.

“왔냐?”

“어째 네가 집주인 같고 내가 손님으로 온 것 같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흐, 뭘 그렇게 많이 사 들고 왔어. 집에 올 땐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

“뭔 개소리야.”

“흐, 너 들어오면 먹으려고 김치찌개 사 왔어. 여기 맛집인데 계란말이랑 김치찌개 조합이 끝내줘.”

“오! 잘되었다. 나 김치찌개 땡겼는데.”

사 온 물건을 정리하러 방에 들어가자 진구가 외쳤다.

“집에 햇반 있냐?”

“어!”

“그럼 내가 데울게.”

나는 진구에게 줄 선물이 든 종이가방만 들고 주방으로 나왔다.

그는 내가 든 것을 힐끔 보더니 물었다.

“그거 뭐야? 먹는 거?”

“넌 먹는 거밖에 모르냐?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 건데. 네가 오늘 집에 오는 바람에 미리 주는 거다.”

“오!”

“그동안 나 때문에 바빴잖아. 고맙다고 주는 거.”

“이야, 진짜 고수밖에 없네. 크리스마스 선물은 진짜 백만 년 만에 받아보는 것 같다.”

진구는 입이 찢어지며 좋아했다.

우리는 식탁 앞에 앉아 김치찌개에 밥을 먹다가, 진구가 말을 꺼냈다.

“고수야, 오늘 연락을 받았었는데. 일본 라이브 드로잉 콘서트는 취소되었어.”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대신...”

진구는 씨익 웃었다.

“한일 공동 주최로 변경되었어.”

“한일 공동?”

“네 그림 좋아하는 우리나라 팬들이 하도 난리니까, 일본 단독으로 추진이 아니라 한일 공동 주최로 가게 된 거지. 콘서트 공연 장소는 부산이고,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와 일본 아이돌 가수와 유명 아티스트들도 섭외될 거래.”

“음...”

“그리고 네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주겠대. 그러지 않으면 애플 수가 취소한다니까.”

“그래?”

“응. 요구사항대로 네가 현장으로 직접 참석하는 건 아니고. 너는 다른 무대에서 그림을 그리는 걸 실시간 생방으로 콘서트 공연장으로 내보내는 거야.

네 신상 노출도 없을 거고, 네가 있는 장소도 비공개가 될 거고.”

“근데 한일 공동 주최하니까 부담되네. 난 그냥 그림만 그리는 건데.”

“더 규모가 커진 것 같지.”

“거기서 나 생쇼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붓을 들고 춤추면서 그린다거나.”

“큭큭, 설마 그런 걸 시키려고.”

진구는 밥을 먹다가 내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계약할 때 요구사항 까다롭게 관철할 거야. 나 믿어.”

“하하, 그래.”

“그럼 라이브 콘서트, 하는 거지?”

“그래. 내가 원하는 요구사항 전부 문제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오케이. 좋아좋아. 그리고 나 이번에 휴직 신청 냈어.”

“어? 그래?”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직장 다니면서 매니저 일 하는 게 쉽지 않아서.”

“음, 그래. 네가 애써준 거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게.”

“흐흐, 기대할게. 우리 잘해보자.”

진구가 손바닥을 내밀며 들어 보이자, 나는 씩 웃으며 그와 손을 마주쳤다.

* * *

크리스마스 이브.

이날 저녁 시간을 빼려고, 그 이전에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거고.

아포칼립스를 막을 방도는 그림과 재능 업그레이드에 있다고하니.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2050년의 쉘터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상으로나마 얼굴을 봐서 그런지.

그들이 이젠 낯설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만찬 식탁을 대형으로 그림을 그렸다.

비록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데에는 쓰잘데기 없는 일이라 해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겨울을 살고 있어도, 그 계절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그림을 정성들여 완성하여 2050에게 보낸 후, 나는 집밖으로 나왔다.

백화점에서 산 향수 선물과 와인 한 병.

그것을 챙겨 아우디에 싣고 루나가 찍어준 주소로 향했다.

한나와 루나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들의 어머니는 미국에 계시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매들만 아파트에 사는 거다.

내가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까지 왔는지, 루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수! 조용히. 조용히 안하면 맛있는 거 안줄 거야.”

강아지는 금세 조용해졌고 나는 쓴웃음이 났다.

얘는 왜 강아지 이름을 내 이름과 같게 해서.

현관문이 열리고 루나의 말간 얼굴이 보였다.

나를 보고 활짝 웃는 그녀.

여전히 비타민처럼 상큼한 그녀다.

“오빠, 와줘서 고마워요!”

안으로 들어서니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한나는 스테이크를 굽고 여러 요리를 한 듯했다.

거실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다.

유하준 박사도 와있다.

“고수 씨, 오셨어요.”

“예. 안녕하세요.”

잠시 후,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무리할 무렵, 나는 가지고 왔던 usb를 꺼내 유하준에게 내밀었다.

그는 의아한 눈길로 내게 물었다.

“이게 뭐죠?”

“유하준 씨가 연구하고 완성해야 할 내용입니다.”

쉘터에 들어갈 만한 미래 기술들이 그 안에 있다.

그에게서 전송 기계 기술을 빼앗은 것이 되었지만.

그 외에 그가 개발할 AI 기술, 미래형 디스플레이 기술 개발은 시간을 앞당겨 준 셈이었다.

그는 엉거주춤 usb를 받았다.

“그건 유하준 씨 몫이지만 그래도 부탁드릴 것은, 아직은 그 내용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예.”

그때 루나가 뭔가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빠에게 어울릴 만한 스웨터를 샀어요.”

“이야, 고마워. 루나가 준 거 매일 입을게.”

그때 한나가 내게 물었다.

“고수 오빠. 과수원 땅, 봄에 본격적으로 공사 들어간다면서요?”

“응, 그럴 것 같아.”

“그럼 내년 이맘때면 그곳에 루나가 설계한 건물이 들어서 있겠네요.”

“그 건물이 특수해서 오래 걸릴 것 같아. 내년 이맘때 아니면 그다음 해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네.”

루나는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 집에서 살면 진짜 멋질 것 같아요. 오빠, 가족은 좋겠다.”

“너도 살면 되...”

나는 무심코 그렇게 말이 튀어나왔다가 멈췄다.

다들 나를 보는 눈빛이 기묘해진 게 눈에 들어왔다.

반짝반짝해졌거나 흥미롭다거나.

루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다.

평소 그런 생각을 해왔었다.

2024년도, 그날은 아직 어찌 될지 모르니.

2024년도가 가까워지면 내가 아는 사람들 그 건물로 피신하게 해두면 좋을 텐데, 라고.

그래서 방금 그 말이 튀어나온 것 같다.

“아니, 내 말은...”

“오, 고수 오빠. 그런 거였어요?”

“그런 거라니?”

한나가 말하자 유하준도 한마디 거들었다.

“루나가 마음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고수 씨도 같은 마음이었군요.”

“아니, 그 집에 한나도 유하준 씨도 전부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러자 한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고수 오빠 당황하니까 귀엽네요.”

덕분에 그 이후로 루나와 내 관계는 묘해졌다.

루나가 의외로 많이 부끄러워해서 더 당황스럽기도 했던 것 같다.

* * *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2022년 1월.

나는 29세가 되었다.

아마도 그곳, 2050년에도 해가 바뀌었겠지.

그리고 몹시 추울 테고.

TV를 켜면 가끔 ‘애플 수 라이브 드로잉 콘서트’를 홍보하는 광고 영상이 흘러나오곤 했다.

광고 영상으로 ‘겨울에 핀 봄’이라는 제목으로 그림 작업했던 너튜브 영상이 사용되었다.

라이브 콘서트 날짜가 가까워지는 동안, 나는 재능을 한 번 업그레이드 했다.

이번엔 속도를 높였다.

『명화 작가 23레벨

명화 속도 : 7

명화 기교 : 7

창조 창의력 : 11

코인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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