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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핀 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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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구에게 말했다.
“라이브 드로잉 쇼? 그런 거라면 전부터 섭외 많이 들어왔었잖아.”
<그렇긴 한데. 이번엔 달라. 전에는 그냥 미술 행사 같은 거였고. 이건 라이 브 드로잉 콘서트. 미술과 음악을 합쳐놓은 거야. 아이돌 가수가 나와서 오프닝 클로징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다던데.>
“아이돌 가수도 나온다고?”
<아직 확정이 아니긴 한데. 생각보다 홍보가 잘되어서 대중의 주목을 받으면 유명 아이들 섭외가 될 것 같다고 하더라. 그러면, 기획된 콘서트는 스케일이 커지고 잘하면 방송까지 타게 되는 거지. 판이 엄청 커지는 거야. 그 외에 아티스트들이 나와서 음악 연주가 깔리는 동안 네가 그림을 그리는 건 가봐.>
“혹시 다른 섭외 작가들 있어?”
<그림 작가? 그림 작가는 네가 단독이야.>
진구의 말을 듣는 동안, 솔직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런 제안은, 화가로서 내게 꿈 같은 일이었다.
<생각해봐, 지금까지 왔던 섭외는 그저 초대 작가 개념이었고 그저 미술 행사였는데. 이번에는 오로지 애플 수를 위한 단독 콘서트나 마찬가지야. 굉장하지 않냐?>
“그렇긴 하지.”
<대신, 이번에 올린 그림 작업 영상을 광고 영상으로 쓰겠다고 하네.>
화가로서 도전하고 수락하고픈 충동이 강하게 끓어올랐지만.
반면 2024년도를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하는 나로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음, 이건 바로 결정할 수 없고. 조금 생각 좀 해봐야겠다. 아무래도 이건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그러자 진구는 뜻밖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어? 왜? 이런 기회 더없이 좋은 거 아냐? 페라리 광고 덕분에 이런 기회도 생기는 것 같은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지 않아?>
“나도 하고 싶어. 하지만 더 중요한 일과 겹치지 않는지 확인해봐야 해. 혹시 방해되는 지도.”
<응?>
“다시 얘기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나온 한강 변 벤치에 앉았다.
물끄러미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강물을 보다 보니 또 그걸 그려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외투에서 펜을 꺼내 그걸 가만히 손에 쥐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펜에서 백색 빛이 들어오며 작동했다.
내 앞에 3D 디스플레이가 나타났다.
이걸 여기서 사용해도 행인의 눈에는 이 디스플레이가 보이지 않을 거다.
이건 내 홍채에만 반응하여 시각화된 디스플레이.
그런데.
내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잡은 타블렛 펜이 미미하게 흐릿하게 보인다.
내 눈이 피로한가 싶어 몇 번을 깜박이고 봤지만, 여전히 그렇게 보였다.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얼른 지갑을 꺼내 열어봤다.
블랙카드.
이것 역시 약간 흐릿하다가 다행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펜도 마찬가지.
방금, 왜 그랬지?
나는 황급히 핸드폰으로 수호에게 말을 걸었다.
- 고수 : 김수호! 수호, 있어?
이럴 땐, 그와 까톡으로만 연락할 수 있다는 게 새삼 답답하다.
* * *
무장한 차림새의 김수호.
그는 쉘터 방어벽 파수 탑에서 뭔가를 지시하고 나오는 길에 테이와 마주쳤다.
테이는 그녀의 민감함으로 뭔가 알아챈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시력은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은 기민해져 있다.
“수호, 당신의 기척이 전보다 약해졌어요. 혹시 당신이 태어날 과거의 시간이 문제 생긴 건가요?”
수호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거친 손이 미약했지만 잠시 흐릿하게 보였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수호는 고개를 들어 테이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불안정해진 게 느껴졌다.
“2022년 2월, 그 시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다. 다만 그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그라니요?”
테이는 그렇게 묻다가 손을 뻗어 수호의 얼굴로 가져갔다.
“수호, 많이 동요하고 있군요. 늘 굳건한 요새 같던 사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위험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다면, 위험 요소를 찾아 헤매기보다 차라리 그를 강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수호는 그렇게 말하더니 테이를 지나쳐 쉘터로 향했다.
* * *
내가 그렇게 톡을 보내고, 30분 정도 지난 후에 수호가 대답을 보내왔다.
- 2050 : 고수. 두 번 잃게 하면 용서 안 할 거다.
대뜸 앞뒤 다 잘라먹고 말하는 수호.
나는 혹시 그가 블랙카드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블랙카드를 잃어버린 적은 없었는데.
펜도 그렇고.
그저 흐릿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현상은 이번이 두 번째였을 뿐.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지나도 블랙카드가 다시 흐려지진 않다.
- 고수 : 블랙카드가 흐려진 것 때문에 그래? 블랙카드와 펜에 문제 생긴 거 너도 안 거야?
- 고수 : 이것도 뭔가 연결되어 있어서 2050년도에서 즉각 알 수 있는 건가?
- 고수 : 이게 갑자기 왜 그런 거지? 2050년도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 2050 : 블랙카드가 또 흐려졌던 건, 미래가 뒤틀리는 징조를 보였던 거다.
네 미래가 안 좋게 비틀리기 시작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거다.
- 2050 : 짐작하기로 2022년 즈음에 벌어질 일 같군.
- 고수 : 2022년도라고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
- 2050 : 그건...
수호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 2050 : 그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이젠 상관없어. 어차피 바꿀거고 다 바로 잡을 거니까.
그의 말은 단호했다.
이 와중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 고수 : 그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 2050 : 고수, 지금 확인해보면, 블랙카드가 흐려지는 현상이 더는 없을 거다.
- 고수 : 맞아. 몇십 분째 계속 정상이네.
- 2050 : 너의 미래는 다시 안전하게 흘러가기 시작한 거다.
- 2050 : 내가 지금 실행할 계획이 비틀린 미래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지.
- 고수 : 다행이네. 근데 네 계획은 뭔데?
- 2050 : 블랙카드 25레벨. 900대로 이루어진 초소형 전투 드론 군대, 그걸 그려. 자료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도록 하지.
수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더 말이 없었다.
와, 그나저나 드론 900대.
엄청난 노가다겠구먼.
내가 이메일을 확인하려 할 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며 어떤 나긋한 손길이 내 눈을 감쌌다.
“누구게.”
누군지 딱 들어도 알겠다.
루나지.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늘 불현듯 드는 느낌이지만.
루나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내가 있던 곳에 마치 봄이 다가온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루나는 내게 어떤 인연인지.
루나는 물론, 그녀의 언니와 그 연인까지 깊이 얽힌 인연이지 않던가.
나는 내 눈을 가린 그녀의 손에 손을 가져가 가만히 쥐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게. 너는 누구인 걸까?”
* * *
다음 날 저녁, 나는 작업실에서 수호가 보내온 자료 사진으로 드론 하나를 완성했다.
내가 그린 드론은 유리 금속으로 제작되어 투명했고.
태양열로 충전할 수 있었으며, 크기는 세로 1.5센티, 가로 1센티였다.
이 드론이 전투 드론인 이유는 강력한 전격 에너지를 방출하여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여왕벌 역할처럼 그중에서 덩치가 큰 드론도 있는데.
쉘터에서 그 드론만 조종하면 나머지 899개의 드론은 알아서 따라오기도 했고.
각기 작은 드론을 개별 조종이 가능하다고도 들었다.
AI 2050은 내게 설명했다.
- 2050 : 고수님, 먼저 작은 드론 하나를 그려서 완성했으니, 그다음에 대장 격인 큰 드론을 그려주시면 됩니다.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보내주십시오.
- 고수 : 이건 쉘터에서 전투용으로 사용될 건가?
- 2050 : 아니요. 이건 고수님에게 보내질 드론입니다.
- 고수 : 뭐? 나에게?
- 2050 : 네. 2050년도 중요하지만 2021년도 못지않게 중요해서 방어를 준비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 고수 : 설마 900대 전부 나에게 보내는 거야? 여기 둘 곳도 마땅치 않은데.
- 2050 : 당장은 작은 드론 10대만 전송 기계를 통해 보낼 겁니다. 그 이후, 숫자를 늘려갈 겁니다.
- 2050 : 이메일을 보낼 테니 고수님이 지니신 펜을 작동하여 프로그램 두 가지를 디스플레이에 설치하십시오.
- 2050 : 하나는 드론 조종을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AI 프로그램입니다. 그걸 설치하시면 이후 제가 2021년도에서 드론을 조종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이해했다는 얼굴로 2050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 고수 : 그래. 알았어.
타블렛 펜으로 인해 나타나는 디스플레이.
이게 놀라운 점은 내 핸드폰하고도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2050년도에서 보내는 내용을 타블렛 디스플레이에서도 받을 수 있는 거다.
- 2050 : 우선 드론 5개 이상 완성하고, 제가 말한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나시면, 조금 전에 말씀하신 일본 콘서트 문제는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셔도 될 듯 합니다.
- 2050 : 코인을 얻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수호님도 괜찮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다만 안전에 유의하십시오.
2050과 여기까지 대화했을 때, 진구가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하냐?”
“왔어?”
그는 벌써 롱패딩 차림이다.
패딩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가져왔던 종이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연어 스시 사 왔어. 여기 맛있다더라. 같이 먹자.”
“오, 맛있겠다. 그러잖아도 배고팠는데.”
내가 일어나 다가가자 그는 말을 꺼냈다.
“지금 너한테 엄청 섭외가 쏟아지는 거 알고 있냐?”
“알지.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건, 일본 콘서트겠지.”
“그렇지.”
진구는 젓가락을 뜯다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
“왜?”
“그냥. 고수가 인지도에 이렇게 신경 쓰는 놈이었나 싶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예전엔 명성이나 인지도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지만.
재능 업그레이드 할 코인이 명성으로 인해 들어온다니까.
요즘은 어떻게든 명성과 내 이름의 인지도를 올릴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자세히 얘기 들어보니까 생각보다 규모 있는 기획이 나온 이유가 여기보다 일본에서 반응이 더 뜨거운 모양이야. 네가 오케이만 하면 곧바로 진행될 예정인가 봐.”
“그래?”
“특히, 기획자가 페라리 광고 영상과 이번에 올린 그림 작업 영상에 감명을 받은 것 같더라. 네가 미리 그려놓은 겨울 풍경에 봄 풍경을 덧칠하는 과정을 조명과 음악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방식의 공연을 제안했어.”
나는 초밥을 입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예상보다 코인이 빨리 차오르고 있으니.
오늘 재능을 업그레이드 해야겠다고.
다음은 창의력을 올려야 할까. 아니면 속도를 높여야 할까.
* * *
늦은 밤,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이 시간에 나에 관한 뉴스 방송이 나온다고 했었다.
내가 늦게 TV를 켠 듯하다.
화면에 내가 그렸던 그림이 한가득 채워진 게 보였다.
맑은 강가에 꽃구름처럼 무성하게 핀 벚꽃.
부드러운 바람에 꽃비가 내리는 풍경이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분은 새하얗게 얼어붙은 겨울 풍경.
동쪽 하늘에선 일출로 인해 금빛 구름이 옅게 떠 있다.
아침의 햇살이 눈부시게 아래로 내리쬐면서.
사방의 우중충하고 짙은 구름이 사방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줬다.
아침의 햇살이 겨울이던 세상에 흩뿌려져 화사한 봄 풍경이 한순간에 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겨울 풍경이 일부분 있고, 나머지가 봄 풍경인 거다.
예전에 창의력 올리고 나서 수정했던 스케치 부분이 이것이었다.
겨울을 밀어내는 봄.
리포터의 말이 이어졌다.
“최근 페라리 신차 광고가 국내와 일본에서 TV 방영되면서, 애플 수의 유화그림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하철 역의 전 광판에도 이 그림이 걸려 있는데요. 애플 수의 그림에 감명을 받은 팬들이 그림을 실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