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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블랙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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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표정은 굳어지고 있고 그는 혼자 재미나게 웃는 상황.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해서 그런지.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미처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수다는 멈추질 않았다.
이 사람, 일할 생각이 없나 보군.
왜 여기서 수다를 떨려고 그래.
“이번에 애플 수, 뒷모습 공개되었는데요...”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나를 눈여겨봤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른 가전제품을 돌아보는 척했다.
“...딱 손님이랑 비슷하네요. 체구가.”
안 되겠다.
화제를 돌려야지.
“아, 그래요? 저 물건 좀 구경했으면 하는데.”
“아, 제가 손님 붙들고 제 얘기를 늘어놨네요. 죄송합니다. 뭐,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일단 제품 구경만 하려고 왔습니다. 사는 건 다음에 하려고요. 건조기를 보려고 하는데요.”
“건조기는 저쪽에 있습니다.”
그래. 이왕 살 거면 강재가 일하는 매장에서 팔아줘야지.
여긴 구경만 할 거다.
방금 당혹하긴 했었지만, 나는 안내하는 그를 따라가면서 내심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듯 전혀 낯선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서 팬이 되었다고 말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 *
화요일인 다음날, 나는 핸드폰으로 계좌 잔액을 확인하고 있었다.
5억 7800만 원.
아까 낮에 외출했을 때, 은행에 들러서 블랙카드로 현금을 모조리 빼서 계좌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아까 통과한 22레벨에서 블랙카드로 긁을 수 있는 금액은...
327억 6800만 원이다.
이건 뭐, 액수만 천문학적이지.
내 피부에는 와닿지도 않은 금액이다.
까톡!
그때 까톡 알림이 울리며 김수호에게 톡이 왔다.
- 2050 : 고수. 새로운 블랙카드를 보내주겠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 고수 : 새로운 블랙카드? 아, 이번 그림을 실물 전환하는 데 성공했구나.
그 시공을 초월해서 전송할 수 있다는 기계.
- 2050 : 그래. 블랙카드 외에 한 가지 물건을 더 보낼 거다.
- 고수 : 한 가지 더? 어떤?
- 2050 : 그건 보내고 나서 설명하지.
이 녀석은 언제쯤이면 부드러워지려나.
매사 딱딱하네.
이 정도 서로 대화도 했으면 친해질 때도 되었건만.
- 고수 : 그래, 알았다.
그에게 답하고는 내가 올렸던 너튜브 영상을 열어봤다.
동영상의 조회수와 구독수를 본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조회수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뛰었네.
뉴스 한 번 나오더니, 이게 매스컴의 힘인가.
댓글이 8000개가 넘었다.
댓글의 가장 높은 좋아요 수는 1만 대.
조회수는 1000만이 다 되어갔다.
와, 이거 동영상 수익도 꽤 되겠는걸.
동영상에 광고도 붙었는데.
동영상을 올린 지 걸 오래되지 않은 걸 감안하고.
어제부터 조회수가 큰 폭으로 늘어난 걸 생각하면...
조회수가 앞으로 더욱 어마어마해질 듯했다.
해외에서의 유입도 꽤 있다.
영어로 된 댓글의 비율이 전보다 높아졌던 것.
비즈니스 메일에선 광고 제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액수도 전보다 굵직해졌다.
댓글 내용을 대강 살펴보니 여전히 내 작업 속도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래도 내 작업 속도는 일반적인 범주를 크게 벗어난 탓이겠다.
그 외에 골수팬을 자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의 닉넴도 애플과 연관된 게 많았다.
└ 애플링 : 점심 나가서 먹을 것 같애! 이 영상만 500번째 돌려보는 중. (좋아요 2.1천, 답글 79개)
└ 골드 애플 : 쑤 님! 다음엔 얼굴도 보여주세요! 애플 쑤 님 얼굴이 혹시 만들다 만 찐빵 같이 생기셨어도 내겐 존잘. (좋아요 72, 답글 19개)
└ 김지훈 : ㄷㄷㄷ 손놀림 봐라. 마스터 급이네. (좋아요 905, 답글 30개)
└ 애플나무 : 정말 아름답네여... (좋아요 220, 답글 17개)
댓글을 한동안 살펴보는데.
2050에게서 까톡 메시지가 들어왔다.
- 2050 : 고수님, 집 현관문 밖을 확인해보세요.
- 고수 : 잠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러자 문 앞에 조그만 상자 2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상자를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열어보니.
이전에 블랙카드가 들어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카드 하나가 있다.
금테가 두른 블랙 색상의 신용카드.
0.23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기도 하다.
나는 다른 박스도 개봉해봤다.
그 안에는 든 것은 은색 빛의 타블렛 펜.
왜 타블렛 펜을 주는 거지?
그런 의아한 생각이 들 즈음.
까톡!
까톡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톡을 보낸 이는 김수호다.
- 2050 : 고수. 이전 블랙카드는 파기해.
- 고수 : 야, 이게 뭐냐? 타블렛 펜이 들어있네.
- 2050 : 그건 그냥 펜이 아니다. 이곳의 기술로 특별히 제작된 펜이지.
- 고수 : 미래 기술로?
- 2050 : 내가 있는 쉘터에선 다행하게도 탁월한 기술의 인력이 있어서 제작이 가능했다.
- 고수 : 오.
나는 기대된다는 얼굴로 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걸로 내가 쓰던 타블렛에 그림을 그리라는 건가.
- 고수 : 이거 어떻게 쓰는 거냐? 그냥 기존의 펜보다 뭐가 좋지?
- 2050 : 이후로는 타블렛을 사용하지 말고 이걸로 써. 이제 너는 그림 작업을 입체적인 형태로 해야 할 경우가 많을 거다.
- 고수 : 응? 입체적인 형태? 그리고 타블렛을 쓰지 않으면 뭐로 그려?
- 2050 : 내가 준 펜으로 그리면 돼. 그 펜은 너의 정맥과 홍채 인식으로 작동할 거다.
- 고수 : 헐. 정맥?
- 2050 : 그림 그릴 때처럼 펜을 잡고 3초 이상 있으면 정맥 인식이 되어 펜이 작동하게 되지.
나는 그의 말대로 펜을 잡고 한동안 있었다.
대략 3초가 지나자, 펜의 어느 부분에 빛이 들어오더니.
갑자기 내 눈앞에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영화에서 보던 미래형 디스플레이 형태.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눈앞에 화면이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 평면적인 형태가 아니라 입체적인 형태로 내용이 보이는 화면이다.
- 고수 : !! 이게 뭐야?
- 2050 : 그림 그릴 화면이 나타났나?
- 고수 : ㅇㅇ 깜놀했네.
- 2050 : 깜짝 놀랐다는 건가?
- 고수 : 그래. 근데 이건 집에서만 사용할 수 있겠다. 남들이 보면 다들 이게 뭐냐고 할 거 아냐?
- 2050 :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형태의 디스플레이다. 오직 너의 홍채에만 반응해서 나타나는 형태지. 너에게만 시각화해서 나타나는 거다.
- 고수 : 허. 네가 사는 곳에는 그런 기술이 가능해?
- 2050 : 이곳이라고 해서 전부 가능한 건 아냐. 그리고 새로운 블랙카드 말이다.
- 고수 : ㅇㅇ
- 2050 : 네가 2050년도와 2021년도에서 동시에 명성을 얻을 수 있고. 그 명성으로 코인이 들어올 수 있는 건, 그 블랙카드가 있어서 가능한 거다. 네가 블랙카드를 분실하지 않도록 카드에 추적 장치를 심어 두었어.
- 고수 : 아.
- 2050 : 펜도 마찬가지.
나는 펜을 사용하여 눈앞에 나타난 화면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보았다.
사용법은 기존의 타블렛과 거의 비슷했다.
다만 이건 허공에다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 같아서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불편하군.
그래서 왼손으로 디스플레이를 붙들어보았다.
이게 터치가 되는 거라서 내가 붙드는 손에 반응했다.
아마도 내게만 반응하는 디스플레이일 거다.
나는 디스플레이를 붙들어서 다른 장소로 옮겼다.
화이트 톤의 벽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어, 이거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가 입체적인 그림 형태로.
이런 건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다.
펜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그림의 위치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만일 집을 그린다면...
그 집의 정면만이 아니라 옆면 후면까지 그릴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집안 내부까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화면 속 그림은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크기도 자유롭게 조절되었다.
크기를 얼마든지 늘리거나 줄일 수 있어서 가장 섬세한 부분도 세밀하게 그릴 수 있었다.
와, 이런 식이면...
쉘터도 완벽하게 그릴 수 있겠는데?
물론, 그래 봤자 실물로 전환할 수 있는 건 수호가 있는 2050년이나 가능할 거다.
아포칼립스가 올지도 모를 2024년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안전한 쉘터를 건축해두어야 했다.
김수호는 내게 톡 메시지를 이어서 보냈다.
- 2050 :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네가 완성해야 할 그림은 모든 선과 점 하나에도 너의 재능과 능력이 녹아 들어가야 해. 그래야 실물로 전환될 실체의 성능이나 질이 좋아지게 될 테니.
- 고수 : 알고 있어.
- 2050 : 새로운 물건은 잘 사용할 수 있겠나?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손가락을 움직여 그에게 할 말을 문장으로 작성했다.
- 고수 : 금방 익숙해질 것 같아. 근데 김수호.
- 고수 : 생각해보니까 나 역시 너에게 이런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보고 무뚝뚝하다 여겼는데, 사실은 내가 더했는지도 모르겠어.
- 고수 : 고맙다. 여러 가지로.
- 고수 : 나는 너를 만나고 나서 삶이 바뀌었어.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게 바뀌었지.
- 고수 : 네 덕분에 이 모든 걸 누리고 있어. 고맙게 생각해. 가장 고마운건, 네 덕분에 얻게 되었던 돈이 아니라 내 가치인 것 같아.
- 2050 : 가치?
- 고수 : 사실 널 만날 즈음, 내 삶이 바닥이었거든. 내 삶도 그렇고 내가 그리는 그림도 쓸모없다고 여겨졌었어. 그런데 네가...
- 고수 : 네가 내 그림을 절실하게 사용해주고 있잖아. 그게 내게는 엄청난 동력이 되더라고. 내 그림이 가치 있게 느껴졌어.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의 가치가.
- 고수 : 내가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조금씩 회복되었던 것 같아. 여러 상실감에서.
수호는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말이 없었다.
- 고수 : 너의 사정이 생존이 달려 있기도 해서 열심히 그렸다. 너만이 아니라 세상의 생존이 달려 있기도 하니까.
- 고수 : 이처럼 그림을 열심히 그려본 건 내 삶 통틀어 별로 없을걸?
김수호, 이 자식.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반응이 왜 이리 없어.
혼자 말하는 것 같네.
듣든지 말든지, 그래도 일단 할 말은 한다.
- 고수 : 암튼, 고맙다. 김수호. 아니,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너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군. 넌 세상의 불행을 막으려고 지금도 애쓰는 중이니까.
김수호는 계속 조용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가버리고 나 혼자 떠드는 줄 알았다.
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까톡!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2050 : 고수. 모든 이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 고수 : ?
- 2050 : 그건 너야.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의 시작은 너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 고수 : 그게 무슨 소리야?
- 2050 : 나중에...
- 고수 : 지금 말하지?
- 2050 : 나중에 말하겠다.
- 고수 : 야!
김수호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더 말이 없었다.
* * *
다음날 나는 양평 주택에 왔다.
인테리어 공사와 정원관리, 입주 청소까지 전부 끝난 상태.
내가 주문했던 가구 일부가 들어와 있기도 했다.
집을 돌아본 후에,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도 적당하게 정돈되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릴 세팅을 했다.
오늘과 내일은 시간이 비어있다.
블랙카드 22레벨 마감을 빡세게 했었던 덕분.
나는 이전처럼 모자를 쓰고 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했다.
뒤에는 카메라가, 캔버스 옆에는 초침이 움직이는 시계를 놔두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비어있는 캔버스를 응시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의 뇌리에 떠오르는 하나의 풍경.
하늘 호수.
너무 맑아 고스란히 하늘이 비치는 호수.
투명한 호수 안에 언뜻 보이는 은빛 물고기.
튀어 오르는 물방울.
호수를 둘러싼 초록빛 싱그러운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