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31화 (3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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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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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2레벨 그림을 1차로 완성한 건 토요일 밤.

AI 2050은 내 그림을 받자 이와 같은 메시지를 보냈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리 분석하는 데 26시간이 소요됩니다.

결과 나오려면 일요일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감은 목요일 오후까지니까 넉넉하다.

주중 내내 정말 그림만 열렬하게 그렸다.

22레벨 그림은 섬세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형태라서 조금 수월할 것 같지만.

기계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던가.

금속 느낌의 광택이 나는 색감이라던가.

형태, 비율, 각도, 그 외의 요소가 사진과 싱크로율 100%에 이르러야 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나에게 요구되는 창의력은 내 멋대로 상상해서 그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작품에 녹아 들어가게 될 내 재능이 그야말로 고품격의 재능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내 창의력 수치는 어느 정도 높아야 했던 것 같다.

늦은 밤, 침대 위에 올라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김수호가 말을 걸었다.

- 2050 : 고수.

- 고수 : 왜?

- 2050 : 전에 말했던 전문가를 만나게 해주지.

- 고수 : 응? 전문가?

- 2050 : 네가 산 땅에 쉘터 건축할 전문가 말이다.

- 고수 : 아아.

과수원에 쉘터 짓는 일은 잠시 잊고 있었다.

한동안 유튜브와 양평 주택에 정신이 팔렸던 탓이다.

- 2050 : 너 이루나, 라는 여자를 알고 있지?

- 고수 : 이루나? 한나 여동생 루나 말하는 건가? 내가 루나와 친하다는 건, 네가 가지고 있다는 2021년도의 핸드폰 덕분에 아는 거냐?

- 고수 : 와, 생각해보니까 이거 완전 사생활 침해네.

- 2050 : 네가 만나야 할 전문가가 이루나야.

- 고수 : 뭐?

약간 졸음이 왔던 내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졸음도 싹 달아났다.

- 고수 : 내가 아는 그 이루나? 전혀 전문가처럼 안 보이던데? 나이도 어리고.

- 2050 : 2021년도에는 아직 학생일 뿐이지만. 나중에 그 여자가 쉘터와 벙커를 설계하게 돼. 그 여잔 건축 설계 분야에서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어. 하지만 그녀가 그리는 설계는 주로 벙커와 같은 지하 건축 설계여서, 당시 그 여자의 천재성은 빛을 발하지 못했었지.

- 고수 : 미래의 나는 한나와 루나 자매와 접점이 있었던가?

- 2050 : 그래. 미래의 넌 이한나 소유의 창고 건물을 쉘터로 삼아. 그리고 이루나의 도움으로 창고 건물을 방어에 용이하도록 보완하고 개조하지.

- 고수 : 미래의 나는 한나와 루나 자매를 어떻게 알게 되는데?

전부터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 2050 : 그것까지는 알지 못해. 다만 내가 짐작하는 바로는, 넌 아포칼립스가 나타나기 전 즈음 한나와 루나 자매를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 고수 : 흠.

- 2050 : 현재 나에겐 이루나가 설계한 벙커 설계도가 있어. 하지만 절반 정도 훼손이 된 상태지.

- 2050 : 우리는 그녀의 설계대로 벙커를 건설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여건이 되질 못 한다. 무엇보다 이곳엔...

- 2050 : 설계자인 그녀가 없어.

- 고수 : 혹시 루나가 죽은 건가?

나는 그에게 질문하면서도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 2050 : 그래. 이루나는 2025년도에 사망한다. 이한나는 2027년에 사망.

- 2050 : 이루나는 벙커와 탁월한 쉘터를 설계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걸 활용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설계도에 관심이 없었고 당시 이루나는 어렸으니까.

김수호가 답한 말은 생각보다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나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김수호는 내게 계속 톡 메시지를 남겼다.

- 2050 : 고수. 넌 원래 삶보다 일찍 이한나와 이루나 자매를 만난 거다. 이건 너의 삶에서 달라진 부분 중 하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다.

- 2050 :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요청할 일은, 미래를 비틀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될 일이야.

- 2050 : 물론, 나는 애초에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게 할 것이지만. 쉘터 짓는 건 만약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50년도에 머무는 내 쉘터가 더 안전하게 바뀌게 되는 일이기도 하고.

- 2050 : 고수. 내가 너에게 이루나의 설계도를 보낼 테니. 너는 그것으로 이루나에게 접근해.

- 2050 : 그녀에겐 미래의 일을 말하지 말고. 다만 설계도만 보여줘. 그 설계 도는 2023년도에 그려진 거니까 2021년의 이루나는 자신이 그린 설계도라는 걸 알지 못할 거다.

- 2050 :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 훼손된 그 설계도를 완벽하게 완성해낼 수 있을 거다.

나는 묵묵히 있다가 그에게 답했다.

- 고수 : 그래. 알았어. 그리고 한 가지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 2050 : 말해.

- 고수 : 저번에 미래 물건 중에 아바타 기계인지 뭔지 하는 게 있다고 했었지?

- 2050 : 그래.

- 고수 : 그걸로 우리는 만날 수 있다고 그랬었고.

- 2050 : 그래.

- 고수 : 그러면 땅에다 돈 들여서 쉘터나 벙커 건축하는 게 의미 없어질 것 같은데. 내가 그리고 넌 실물 전환하면 되니까.

- 2050 : 아니. 돈 들여 건축해야 한다.

- 고수 : 되게 단호하게 답하네; 왜 돈 들여 건축해야 하는데?

- 2050 : 아바타 기계가 완성되어서 실행해도 그 기계는 2021년도에선 사용할 수 없어. 규모가 있고 복잡한 물건이니 시공간 초월 전송 기계로도 아바타 기계를 2021년으로 보낼 수 없거든.

- 고수 : 헐. 그래? 아바타 기계가 완성된 것도 아니었군.

그렇다면 김수호가 이곳 시대로 올 수 있는 건 아니었던 거군.

김수호는 더 말하지 않고, 다만 설계도 파일을 보내왔다.

나는 피로했기에 파일을 받아두기만 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 * *

나는 일요일 아침, 한강 변에 나와 운동 좀 하다가 늘 앉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9시.

9시 반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루나는 이따가 나올 거다.

나는 핸드폰으로 수호가 보내준 설계도 파일을 열어보았다.

여러 장의 설계도.

봐도 어떤 설계인지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이걸 루나가 그렸다는 게 의외다.

핸드폰으로 인터넷 창을 열어 내가 올렸던 동영상을 확인했다.

구독자 수가 어느덧 60만 명이다.

영상 두 개밖에 안 올렸는데.

이 사람들 대체 어디서 와서 내가 올린 영상을 찾아보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전에 유명한 예술 평론가가 SNS로 나를 극찬한 데다가, 그 사람이 이후 내 그림을 언급하고 해서 ‘애플 수’ 이름은 더욱 어그로가 끌렸던 것 같다.

두 번째 영상의 댓글은 이제 올린 지 며칠 밖에 안 되었는데 2000개가 넘게 달렸다.

나는 좋아요 수가 높은 댓글만 우선 확인했다.

└ 애플 귀환 : 애플 수! 젠장 믿고 있었다구! 애플 수의 유화 그림을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ㅠㅠ(좋아요 1.7천, 답글 220개)

└ 존잘 영접 : 와 얼굴이 1도 안 나왔지만 개잘생겼다. 뒤태 개잘생김. (좋아요 350, 답글 31개)

└ 수혁 : ㄹㅇ 저거 그림도 그림이지만 애플 작가 손 봐봐. 저렇게 빠른데 저런 퀄리티가 나온다고? (좋아요 1.1천, 답글 467개)

└ 애플 소다 : 애플 작가 피지컬이 굿이었네. 180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좋아요 200, 답글 26개)

└ 강하다 : 저게 가능해? 저건 주작이다! (좋아요 26, 답글 190개)

└ Hanho Lee : 영상으로 봐도 믿기질 않네요. 어떻게 저런 손놀림이 가능하지? ㄷㄷ 하긴, 애플 수는 그림 자체가 믿기 힘들지. (좋아요 670, 답글 50개)

└ dhflqkf : 솔직히 저 정도면 조작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사람 손이 저렇게 빠를 수는 없지 않나 (좋아요 670, 답글 50개)

└ K-애플 : 애플 작가의 그림은 세상 널리 널리 알려야 합니다. 애플 작가는 우리 대한민국의 보배임. (좋아요 207, 답글 38개)

└ K-애플 : 애플 작가의 움직임하고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비교해 봐요. 그림을 그리는 손을 제외한 다른 움직임은 보통이잖아요? 그런데 그림 완성은 겁나 빠르구만. 뭐가 조작이라는 건지! (좋아요 692, 답글 80개)

나는 이메일도 확인해봤다.

이번에도 비즈니스 협업 메일이 수두룩하게 와 있었다.

저번에는 사과 음료 회사와 자잘한 협찬 제의 메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전보다 굵직한 컨택 메일이 와 있었다.

게임 회사에서 온 광고 제의.

그 외에 영어로 온 메일들이 있다.

나는 영어가 약해서 이건 나중에 진구에게 물어보던가.

번역기라도 돌려 읽어야겠다.

그때 루나가 저만치서 하얀 푸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머리카락을 길게 푼 모습.

등을 덮을 만큼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그녀는 유명 브랜드의 트레이닝복을 입었는데 꽤 날씬해 보였다.

오늘도 그녀의 미소는 아침 햇살 같다.

“오빠, 일찍 와 있었네요?”

“응. 왔어?”

“오빠가 먼저 나를 불러내기도 하고. 저 오늘 완전 행복. 헤헤.”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지?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자 루나는 내게 먼저 조잘조잘 말했다.

“오빠, 오늘도 여기서 조깅한 거예요?”

“응.”

“아침은 먹었어요? 오늘 언니가 순두부찌개 한다고 했는데. 같이 아침 먹어요.”

“매번 얻어먹기 미안해서.”

“왜요오. 언니랑 나는 오히려 너무 좋은데. 오빠, 오늘은 뭐해요?”

“오늘 가구 좀 사려고.”

“네? 웬 가구?”

“아, 부모님 집에 필요한 새 가구를 살까 하거든. 가전제품도 좀 사고.”

“와, 오빠가 그런 것까지 사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 예쁜 가구에 완전 관심 많아요! 오빠, 언제 사러 갈 거예요? 혹시 혼자가요?”

“응, 혼자.”

“그럼 내가 오빠 도와줄까요? 아니, 따라가게 해주세요. 제가 이쁜 가구 잘 알아요.”

“너, 언니 가게는 안 도와줘?”

“아, 몰라. 언니 오늘은 가게 쉬라고 할 거야.”

음, 네 언니가 고생이 많겠구나.

“오빠, 가구는 뭐 살 거예요?”

그녀의 조잘조잘 말을 듣다 보니 내 머릿속은 더 백지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루나, 너 혹시 건축 전공해?”

그러자 루나는 동그랗게 떠진 눈을 깜박였다.

가구 이야기를 하다가 대뜸 건축 전공을 묻는 건 맥락이 없긴 하다.

“어? 제가 건축 전공한 거 어떻게 알아요?”

정말 그녀는 건축 전공자였다.

내가 그녀의 미래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녀의 불행을 아는 거라서 착잡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토록 티 없이 맑아 보이는 그녀이건만.

“너 건축하는 애 같이 생겼어.”

“진짜요? 나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너 약간 땅 파는 거 좋아하게 생겼어. 지하에다 집 짓고 먹을 거랑 이것저것 쟁여놓는 거 좋아하게 생겼어.”

그러자 루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난스레 말한 건데.

내가 혹시 잘 못 말했나?

“너무 해. 저 오빠 말대로 그런 거 정말 좋아해서 방금 깜놀했는데. 이상하게 오빠한테 들으니까 기분 나빠요.”

“아, 미안. 장난이었는데. 근데 너 진짜 그런 거 좋아해? 지하 벙커 같은 거.”

나는 은근슬쩍 벙커 이야기를 꺼냈지만, 루나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건 제가 안 예쁘게 생겼다는 말이잖아요? 어둡고 쟁여놓는 거 좋아하는 욕심 많게 생겼다는 말이잖아요.”

아니, 왜... 안 예쁘고 욕심 많은.

결론이 그렇게 나지?

내가 대뜸 벙커 좋아하냐고 묻는 건 안 이상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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