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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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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동안은 이모네 가족과 그 외 친척들을 만나면서 여유롭게 지냈다.
나는 친가 쪽 친척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외가 쪽 식구들과 교류하고 지냈던 기억만 있다.
화요일 늦은 오후, 부모님은 수서역으로 모셔다드린 후.
운동하기 위해 한강 변으로 나와 한동안 뛰었다.
그림을 빡세게 그리다 보면 체력이 제법 요구되어서, 잘 먹고 운동도 잘 해줘야 할 듯했다.
나는 늘 앉던 벤치에 털썩 앉았다.
어느덧 어둑해지는 사위.
하지만 연휴라서 그런지 오늘은 사람들이 산책을 많이 나왔다.
아이들도 보이고 연인도 보이고.
평화로운 일상이다.
사람들을 그저 멍하니 물끄러미 보다가, 친구들의 단톡방을 무심히 확인했다.
- 김준호 : 요즘 고수 지린다. 얼마 전에 이사하고 아우디까지 뽑더니, 친구 들한테 추석 선물까지 돌리는 클라스. 크으, 멋지다!
- 박강재 : 고수, 너튜브 영상도 대박 났다며? 일이 한번 잘 풀리기 시작하니까 다 잘되는 것 같어.
- 이진구 : 요즘 고수, 그림 실력에도 물올랐잖냐. 진짜 ㅎㄷㄷ 해.
- 박강재 : 그림 실력도 물오르고 이것저것 일이 잘 풀려서, 요즘 고수 주머니에 돈이 샘솟는 거 아니겠어?
- 김준호 : 부릅따. ㅠ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톡을 남겼다.
- 고수 : 이번 주중으로 한번 보자.
그때 2050에게서 톡이 들어왔다.
2050이 영상 파일을 보내온 것이다.
나는 그 파일을 열어보았다.
영상 파일이 열리자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이 나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이게 과연 성공할까요? 이제까지의 경우와 다르잖아요.”
“여긴 샘이 나올 만한 곳도 아니고. 무엇보다 땅이 오염되어서 무척 깊은 곳에서 물을 끌어 올린다 해도 오염되지 않은 물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어요.”
“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할 게 아니지 않나요? 이제까지 수호 씨가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번에도 될 겁니다.”
“그 와중에 그림은 참 명작이네요. 그림 따위는 모르는 제가 봐도 그림이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게 보입니다.”
“고수님의 그림은 이제 사진 기술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료 사진보다 그림이 더 실제 같고 훌륭하니.”
그들이 모여있는 장소는 쉘터 외부, 방어벽 안이다.
그들의 말대로 그곳은 옹달샘 같은 게 생겨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언뜻 사과나무도 보인다.
그런데 이전보다 조금 시든 듯했다.
전에는 그토록 싱그럽고 아름답더니.
마침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인쇄된 내 그림이 보였다.
이 시기의 인쇄술은 지금과 다른지, 워낙 선명해서 그림의 분위기가 더욱 살아 보였다.
나는 그림이 아니라 진짜 옹달샘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그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김수호가 능력을 발현하는가 보다.
갑자기 사람들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아!”
“와아아!”
그나저나 김수호는 어디에서 능력을 행하는 거지?
그 녀석 얼굴도 궁금하긴 한데.
“세상에! 이건 기적이야! 기적!”
나이 든 한 남자가 몹시 흥분했는지 울부짖듯이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물이 흘러!”
“대체 어떻게? 어디서 물이 나오는 거지?”
졸졸졸.
촬영은 드론으로 하는지 허공에서 조금 더 화면이 클로즈업 되었다.
정말로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옹달샘이 생겨나 있다.
나는 내심 감탄했다.
그림을 그리는 능력도 신기하긴 하지만.
그림을 저렇듯 실물로 만드는 능력도 놀랍기 짝이 없다.
도저히 맑은 샘이 나올 수가 없는 땅.
그곳에 샘이 솟게 하는 건, 조금 전 누군가의 외침처럼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불현듯 언젠가 꿨던 꿈이 떠오른다.
김수호를 만나고 블랙카드를 얻게 되고 나서 꿨던 기묘한 꿈.
꿈속의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맞잡았었다.
꿈속에서 김수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멀다. 하지만 금세 도달하게 될 거야. 나는 행복한 세상을 보게 될 거고. 너는 변함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거지.”
* * *
행복한 세상.
평화로운 삶.
그거 좋지.
나는 벤치에 앉은 채 잠시 눈을 감고 등을 기댔다.
가을 저녁의 바람이 왠지 기분이 좋아서.
오랜만에 누리는 여유를 더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얼굴이 간질간질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긁적인 다음, 다시 이 기분을 느껴보려는데.
여전히 얼굴이 간질간질.
미간을 찌푸렸다가 눈을 살짝 떴다.
그러자 눈앞에 은회색의 작고 보드라운 깃털이 보인다.
저게 내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던 것.
나는 오른손을 들어 깃털을 들고 있는 이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얗고 가냘픈 손목이 내 손안에 간단히 붙잡혔다.
킥, 하고 웃는 루나.
언제 다가왔던 건지 그녀는 내 옆에 다가와 앉아 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끈에 달려 있던 깃털로 내게 장난을 쳤었나 보다.
참 신기한 머리끈이네.
깃털이 달려 있다니.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자주 묶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끝에만 살짝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어깨너머로 넘실거렸다.
그녀가 참 맑게 웃고 있어서 나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는데, 그녀는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빠. 웃는 게... 참, 예쁘네요?”
웃는 게 예쁘다고?
그건 네가 나에게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우아. 방금 심쿵할 뻔. 생각지 못한 포인트에서 확 들어오시네요?”
“들어오다니, 어딜.”
“흫. 여기서 뭐 해요? 혼자.”
“그냥 잠깐 쉬고 있었어.”
저번에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루나에게 말을 놓기 시작했었다.
아무래도 루나는 나보다 한참 어리니까.
“오늘 날씨 좋은 것 같아요. 적당히 선선해서.”
“그러네.”
“오빠, 그거 알아요? 저 여기 되게 자주 와요.”
“여기? 여기 벤치 말하는 거야?”
내가 묻자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겠어요? 가끔 마주치려고 오는 거지. 여기가 누구 지정석이라서.”
그러면서 눈웃음을 짓는 그녀.
“저번에 오빠가 아침 먹으러 와줘서 너무 좋았어요. 치즈케이크도 설레고. 근데 왠지 셈나요.”
“뭐가?”
“오빠가 언니랑 친해지는 거 같아서. 오빠가 언니 요리 솜씨 막 칭찬하고 그래서.”
“그럼 너도 칭찬해줄게. 뭐 칭찬해줄까?”
“그걸 물어보면 어떡해요? 그냥 알아서 해야지.”
그녀의 말에 수긍한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알아서 칭찬... 음, 네가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 귀엽더라.”
“아, 뭐야. 방금 그거 칭찬? 강아지 말고 날 칭찬해요.”
“전에 네가 줬던 캔디가 참 맛있더라.”
“치.”
“영업도 잘하는 것 같고.”
“내가요?”
“먹는 것도 잘하고.”
“너무해.”
나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일어나자. 저녁 되니까 쌀쌀해지네.”
“오빠, 저기 편의점 갈래요? 쌀쌀하니까 컵라면 먹고 싶어지지 않아요?”
“아닌데. 거봐, 지금도 먹을 생각하네. 너 먹는 거 잘한다니까?”
“이 오빠가 진짜.”
“그래. 컵라면 먹으러 가자.”
“삼각 김밥두.”
우리는 한강 변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무튼, 너 딱 한 가지만 칭찬하자면.”
“됐어요. 안 들을래.”
“비타민 같아.”
그러자 루나는 고개를 돌려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예쁘게 웃는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잘 웃곤 해서 보는 사람까지 덩달아웃게 만들어. 그래서 비타민 같아.”
“우아, 이 오빠 안 되겠네. 꼭 방심할 때 훅 들어 와.”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조금 앞서서 걷는다.
애교 머리 사이로 드러난 하얀 귓불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짧게 웃었다.
* * *
다음날 오전, 나는 차를 몰고 외출하여 어느 작업실로 향했다.
그곳은 대학 선배가 사용하는 작업실인데 오늘부터 3일간 작업실을 사용하겠다고 허락을 맡았었다.
마침, 선배는 여행 일정으로 작업실을 비우게 되어 나로서는 마음 편히 그림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작업실은 지하에 있었다.
여기저기 미술 도구와 선배의 작품이 어지럽게 놓인 작업실의 풍경.
그리고 작업실 특유의 냄새.
오래간만인 것 같다.
나는 영상을 찍을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림을 그릴 세팅을 했다.
김수호에게 내어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나면 내 작품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완성되는 걸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공유도 하고 싶었다.
커다란 캔버스를 그리기 좋게 위치를 고정했다.
“후우, 이제 그림 좀 그려볼까?”
오랜만에 물감으로 그릴 생각을 하니 설레는 기분이 든다.
그때, 내 핸드폰에서 까톡 알림이 들려왔다.
까톡!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 2050 : 고수님, 이번 21레벨 금액은 22레벨로 이월할 수 있도록 해주신답니다.
- 고수 : 오, 그래?
- 2050 : 네. 아무래도 다음 그림 재능 레벨업 비용은 21레벨 금액으로 충당이 되지 않으니까요.
- 고수 : 그렇지. 그런데 나 21레벨에서 얼마 정도를 쓸 예정이거든.
- 2050 : 양평 주택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 고수 :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 2050 : 수호님께선 이미 알고 계십니다. 고수님이 그곳의 주택을 구매하신다는 것을요. 수호님이 묵과하신다는 건 그 돈을 쓰셔도 된다는 의미라서 쓰셔도 괜찮습니다.
- 고수 : 흠, 수호는 미래의 그곳 상황을 통해 알게 된 건가?
- 2050 :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수호님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뭔가 비틀리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고수 : 그래.
나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다시 캔버스 앞에 섰다.
작업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검정 마스크를 하고 안경을 썼다.
조금 불편하지만, 모자도 썼다.
그런 후에 스케치하기 위해 연필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재능이 레벨업한 이후, 이제껏 내가 그려왔던 그림들은 전부 극사실주의 그림이었다.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그러하다.
그림을 사진처럼 그려냈다.
주로 사진을 보고서 그대로 그리는 거다.
하지만 나는 오늘 사진을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에게 머무는 창의력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다.
맑은 별빛이 무수히 총총히 박힌 하늘.
그 아래 우뚝 솟은 황금빛 나무.
그 주변을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반딧불들이 만들어낸 신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밤의 빛깔로 덧입혀진 초록빛 언덕.
이 모든 걸 극사실주의로 그려낼 생각이다.
나는 눈을 떴다.
새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예기로 빛났다.
이내 내 손이 폭풍처럼 움직였다.
슥슥, 스스슥-
타블렛으로 그림을 그릴 때처럼 내 손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캔버스에 이런 속도로 그림을 그려보는 건 처음이라 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 금방 익숙해진 얼굴로 거침없이 스케치를 해 나갔다.
아직 스케치 중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선 이미 완성된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너울거렸다.
연필이 금세 닳아지곤 해서 다른 연필로 바꿔 그리기도 했다.
미리 연필 몇 개를 깎아두었었다.
내가 구상했던 이미지가 한순간에 캔버스 안에 채워졌다.
내가 세팅해둔 카메라는 이 광경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