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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옹성을 주고 철옹성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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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진구 녀석 나에게 개인 톡을 보내온 게 있다.
그런데 이 녀석, 혼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도배를 해놓았다.
안 읽은 톡이 23개.
톡을 확인하니 진구가 무슨 캡쳐 사진과 글들을 올려놓았다.
‘애플 수’ 이름으로 사칭하는 걸 캡쳐 해놓은 사진.
사과나무 그림 사진을 올려두고 자기 작품처럼 행세하는 내용.
모 기업에서 ‘애플 수’를 찾는다는 내용.
그 기업은 나의 라이브 드로잉하는 영상을 찍어 TV 광고로 쓰고 싶다고 했다.
진구는 그런 내용을 올린 끝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 이진구 : 야!
- 이진구 : 야! 자냐?
- 이진구 : 이ㅅㄲ 이젠 연락이 통 안 돼. 사과나무 그림, 네 그림이잖아?
- 이진구 : 네 그림을, 내 작품이다. 내 거다, 라고 왜 말을 못 해?!!
- 이진구 : 너 설마 ㅎㄷㄷㄷ 나 차단했냐?
진구 녀석, 부재중 통화도 두 차례나 찍혀 있다.
나는 혼자 피식 웃으며 답장을 했다.
- 고수 : 자다가 지금 일어났다.
그러자 단숨에 ‘1’이 사라지고 답장 톡이 올라왔다.
- 이진구 : 너 지금이 몇 신데, 지금까지 처자고 그래.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다.
요즘 잠드는 시간이 불규칙해서 일어나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다.
이러다 몸 안 좋아질 것 같네.
나는 그에게 답장을 했다.
- 고수 : 늦게 잤어. 요즘 바빠.
- 이진구 : 사과나무 그림 사진, 이대로 그냥 둘 거야?
- 이진구 : TV 광고 찍을 기회야, 잡아야지! 돈 벌고 유명해질 기회라고!
- 고수 : 나도 그 기회 잡고 싶은데. 지금은 급할 불부터 꺼야 해.
그렇게 적다가 멈칫했다.
가만, 라이브 드로잉은 아니지만, 사과나무 그림 작업 영상이라면 있다.
전에 사과나무를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두었던 것이다.
사라지곤 하는 그림이 아쉬워서 기록으로 남겨둘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사과나무가 그려지는 과정을 파일 몇 개로 저장해둔 것.
이 영상이라면, 누군가가 애플 작가로 사칭하거나, 사과 그림 사진을 마음대로 이용하는 걸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찍은 영상은 책상 위가 좀 너저분한데.
뒷모습만 찍힌 내 모습도 상당히 후줄근하고,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이 눌리고 떡진 게 고스란히 찍혔을 거고.
나는 진구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 고수 : 진구야, 너 시간 있냐?
- 이진구 : 갑자기 내 시간은 왜 물어. 너 바쁘다며.
- 고수 : 부탁 좀 하자.
- 이진구 : 나 바쁠 예정.
- 고수 : 내 부탁 들어주면 네가 원하는 거 줄게.
- 이진구 : 이번 금요일에 일 끝나고 네 집으로 갈게. 그러잖아도 이번 금요일은 네 집에 가려고 했어. 맛있는 거나 준비해놔.
- 고수 : 그래.
진구와 대화를 한 후에 인터넷 검색을 했다.
어느 기업이 ‘애플 수’의 라이브 드로잉 영상을 찍어서 광고로 쓰고 싶어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떠 있다.
그 기업은 사과 음료를 만드는 회사다.
음료수 만드는 기업 중에선 나름 대기업.
나는 라이브 드로잉 작가가 아니건만.
왜 라이브 드로잉 영상을 찍고 싶다고 하는 건지.
나는 다른 톡 메시지도 확인했다.
루나가 남긴 톡이다.
- 루나 리 : 오빠, 내일 아침 고등어구이, 콩나물국. 사이드 메뉴 김치부침개. 맛나겠죠? 오시면 또 두 그릇 먹을 걸요?
전에는 그냥 아침 먹으러 오라고 하더니.
내가 저번에 한 번 안 가서 그런가.
이제는 음식 메뉴를 적어서 나를 유혹하듯 톡을 남겨둔다.
- 고수 : 내일 말고 다음에 아침 먹으러 갈게요. 전에 치즈 케이크 좋아한다고 했었죠? 그때 그거 사 들고 갈게요.
내가 그렇게 답장했을 때, AI 2050에게서 톡이 왔다.
나는 곧바로 2050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2050 : 고수님, 수호님이 수락하셨습니다. 지금으로선 모레 즈음부터 쉘터에서 전투가 시작될 듯해서, 이번만 다음 재능 레벨을 올릴 만큼의 금액을 앞 당겨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2050 : 오늘 저녁 8시부터 사용 가능합니다.
- 고수 : 아, 그래? 그럼 이번에도 속도를 올려야겠군.
- 2050 : 아닙니다. 이번에는 창의력을 올릴 것을 추천합니다.
- 고수 : 왜지?
지금은 속도가 급한 게 아닌가?
- 2050 : 아무래도 방어벽에 구축할 방어 시스템들은 미래 물건이라서 창의력이 많이 요구될 겁니다.
- 고수 : 그렇군.
- 2050 : 그리고 다음 레벨에서 그리게 될 그림도 창의력이 요구될 거라서 창의력을 업그레이드 해두시는 게 유리합니다.
- 고수 : 그래, 알았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펜을 들었다.
20레벨의 방어벽에 설치된 방어 시스템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 * *
어느덧 금요일 오후.
AI 2050의 말에 의하면 김수호가 있는 곳에선 벌써 전투를 시작했다.
예전에 실물 전환해놓은 소형 전투기도 있고 전격 드론도 있어서, 전투는 외부에서 먼저 벌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일 즈음이면 적들이 쉘터까지 밀려드는 건 시간문제라고 들었다.
방어벽의 방어 시스템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거다.
덕분에 내 마음도 급해졌고.
이젠 마감을 정해놓고 완성작을 받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한 개씩 무기를 완성해낼 때마다 2050이 받아갔다.
- 2050 : 고수님의 두 번째 방어 무기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3%만 보완하면 적정 퀄리티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 고수 : ㅇㅋ 지금 세 번째 거 그리는 중. 두 번째 거 지금 보완 작업해서 보낼게.
- 2050 : 감사합니다.
AI 2050은 김수호가 쉘터를 지키느라 관여하지 않는 동안에도, 충실히 제 역할을 감당했다.
나는 보완 작업을 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나직하게 읊조렸다.
“2050 고수.”
그러자 내 시야에 재능 스탯이 반투명하게 나타났다.
『명화 작가 15레벨
명화 속도 : 6
그림 기교 : 5
초월 창의력 : 6.』
창의력을 높인 상태.
이걸 높일 때 차감된 비용은 81억 9200만 원이다.
이제는 초월 창의력이 된 그 능력은 작업 중에는 그다지 체감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해놓고 보면 뭔가 달라 보이는 게 있다.
전보다 더 생동하고 격이 높아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젠 슬슬 걱정된다.
비용이 이 정도까지 올라서, 다음 재능 레벨업은 상당히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은.
아무리 김수호가 능력이 있다고 해도.
몇백 억대가 되면 쉽지 않을 거다.
김수호가 이번에 땡겨준 금액은 81억 9200만 원.
그건 고스란히 재능 업그레이드 비용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한동안 작업하다가 저녁 7시가 되었을 즈음.
진구가 내 집의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조금 전에 도착했던 보쌈 대자와 맥주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왔냐?”
“불금날에 먹는 시원한 캔맥에 보쌈. 크으, 힐링이겠네.”
“앉아.”
“한주 동안 열일했으니 이런 날은 맛있는 거 먹고 쉬어주어야지.”
“그래. 먹는 동안만이라도 힐링해라.”
그러면서 씩 웃자 진구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어째 웃는 게 사악하다? 참, 너 부탁할 게 있다고 했지?”
“영상 좀 편집해줘.”
“영상?”
“사과나무 그림 그린 거 찍어둔 영상 있거든.”
“오, 잘했네. 그것만 있으면 누가 애플 작가라고 사칭하진 못하겠다. 근데 영상 편집은 맨입으로?”
아마도 사과나무 그릴 때가 내 작업 속도는 4배속 정도 되었을 거다.
“뭐 줄까?”
“뭐 줄 수 있는데?”
“야식 7회 이용권, 어때? 네가 먹고 싶은 거 딱 7번, 내가 배달 결제해 줄게.”
“오! 괜찮은데? 비싼 거 먹어도 되지?”
“응, 얼마든지.”
“좋아. 근데 영상은 어떤 식으로 편집하길 원하는데?”
“영상을 보면 주변 풍경이랑 내 뒷모습까지 나올 건데. 웬만하면 그림과 내 손만 나오게끔 해줘.”
“알았어.”
“파일이 3개가 되거든. 시작 부분이랑 중간 부분, 끝부분 해서 찍어둔 거. 작업 과정이 다 이어지진 않는데. 그걸 어색하지 않게 연결해주고, 작업 속도는 그 상태에서 조금만 더 빠르게 해서 영상을 대강 만들어 주면 좋겠다.”
영상 편집은 내가 해도 좋겠지만.
나는 김수호가 부탁한 그림을 그려주는 일만 해도 지금은 충분히 버거웠다.
“그래. 그럼 일요일 저녁까지 해서 줄게.”
* * *
일요일 새벽 5시.
나는 네 번째 방어 무기를 작업하다가 AI 2050이 보내온 영상 파일 하나를 받았다.
- 2050 : 고수님이 요구하셔서 보내드리긴 하지만. 수호님은 많이 주저하셨습니다. 그래서 적의 형태 부분과 일부 충격을 줄 수 있는 장면은 편집해서 보내드립니다. 소리도 소거했습니다.
- 2050 : 지금 보내드린 영상은 이전 영상과 마찬가지로 1시간 후에 자동 삭제됩니다.
나는 그것을 열어보기 전에 조금 망설였다.
2050의 말로는 토요일 늦은 오후에 있었던 전투 영상이라던데.
“후우.”
깊이 숨을 몰아쉬며 영상 파일을 열었다.
쉘터의 방어벽 풍경이 보였다.
사람들이 뭔가와 전투를 벌이는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는 알 수가 없다.
광경은 치열한 듯한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어벽에 설치된 근접 방어 무기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적을 제거했다.
쌍열 기관포는 1초에 40발 정도 쏘아져 나가는 것 같은데.
신기한 건 쏘아져 나간 탄알은 허공에 잠시 느리게 부유한다는 점이다.
대략 1초 정도.
그러다 유도탄처럼 적을 감지해서 쏘아져 나갔다.
미래 무기는 이처럼 아군과 적을 명확히 구분했다.
적의 형태는 의도적으로 편집되어 투명하게만 보였다.
그저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이는 정도.
얼마나 많이 밀려드는 것인지, 방어 시스템이 일부 있음에도 방어벽 위로 넘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방어벽 내부에 있는 쉘터 사람들이 기관총을 들고 적에게 쏘았다.
방어벽에 또 하나의 방어 무기가 생성되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김수호가 내가 그린 그림을 실물로 전환한 모양이다.
어떤 공간에 ‘무’에서 ‘유’로 한순간에 첨단 무기가 창조되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방어벽을 넘어와 또다시 생존자를 덮치려 하는 적들.
생성된 방어 무기의 총구가 즉각 적을 향해 움직였다.
얼마나 빠른지 저 무기도 나처럼 속도 능력을 업그레이드했나 싶을 정도다.
그것이 발포되자, 허공에 금빛 탄알들이 수놓아졌다.
치열하고 절박하며 생사를 오가는 그 와중에.
허공엔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수백 발의 탄알이 금빛으로 무수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생존자가 당하려던 찰나, 수십 개의 탄알이 적의 머리를 각각 뚫었다.
영상은 그 부분에서 끊겼다.
“후우.”
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광경을 보고나니 내 마음이 동요한다.
이건 영화가 아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일어날 일이고.
수호 입장에선 이미 일어난 일이다.
2050에게 톡 메시지를 작성했다.
왠지 문장이 빠르게 작성되질 않는다.
- 고수 : 지금은 무사해? 김수호는?
- 2050 : 쉘터는 아직 무사합니다. 수호님도 무사하십니다. 지금은 다행하게도 조금이나마 소강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