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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희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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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린 후에, 김수호가 보내온 자료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쉘터 방어벽에 나로서는 생소한 방어 무기들이 설치되어 있다.
장거리 방어 무기, 단거리 방어 시스템처럼 보이는 무기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단거리 방어 무기는 쌍열 기관포처럼 보였는데.
상하좌우 모든 방향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무기로 보였다.
아마도, 적을 감지해서 자동으로 발포하는 무기일 테지.
원래 20레벨 그림은 아무것도 없는 그냥 두텁고 견고하며 거대한 방어벽일 뿐이었는데.
추가로 그리게 된 20레벨 그림은 방어 시스템이 구축된 모습이다.
방어벽과 방어 시스템을 한번에 그리지 않게 한 건, 아마도 블랙카드 20레벨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 거다.
생각해보면, 방어벽도 평범한 형태가 아니었다.
그때 까톡 알림이 다시 들려왔다.
까톡!
핸드폰을 확인하니 AI 2050이다.
- 2050 : 지금부터 블랙카드 20레벨의 51억 9424만 원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2050 : 그리고 재능 레벨업은 이후 스탯부터 조금 다르게 나타날 겁니다.
나는 엄지를 빠르게 움직이며 톡 메시지를 작성했다.
- 고수 : 조금 다르게 나타나다니? 어떻게?
- 2050 : 현재 고수님의 스탯은 전부 ‘5’입니다.
- 고수 : 그걸 그쪽에서 알 수 있어? 내 능력 상태.
- 2050 : 원래 타인의 능력은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수호님과 고수님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수호와 내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고수 : 갑자기 궁금해서 묻는 건데, 김수호의 쉘터에선 누가 리더지?
- 2050 : 우리 쉘터의 리더는 3년 전부터 수호님이 리더입니다. 수호님이 지니신 2021년도의 핸드폰은 쉘터의 가장 중심 구역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 2050 :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은 수호님이 유일합니다. 고수님의 정보에 관해 구체적으로 아는 인물은 쉘터 안에선 수호님이 유일합니다.
- 2050 :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올리시면 스탯 수치가 6이 되실 텐데. 그러면 재능 명칭이 변할 겁니다.
- 고수 : 명칭이 변한다고?
- 2050 : 보통 능력 스탯 수치 ‘5’ 단위로 능력 진화가 나타납니다.
능력이 진화하기도 한다는 것은 몰랐던 내용.
2050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 2050 : 그러면 능력이 능력 발현자와 더 일체화된 형태가 나타날 겁니다.
어찌 능력이 진화할지는 저도 모르는 부분이니, 고수님이 지금 해보시면 알수 있을 겁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서랍에서 계약서 파일을 꺼내 펼쳤다.
2050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지, 능력 레벨업을 하는 게 긴장이 되었다.
전에는 블랙카드로 긁어야 할 금액이 후덜덜해서 긴장되었었고.
지금은 어떤 형태로 내 능력이 진화하고 변화를 보일지 몰라서 긴장되었다.
“크흠. 2050 고수.”
그러자 나타나는 재능 스탯.
『그림 작가 13레벨
그림 속도 : 5
그림 기교 : 5
창의력 : 5.』
가만! 이번에 올리면 사라질 금액이 40억 9600만 원이잖아?
거의 41억.
이런 엄청난 금액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니.
이것도 긴장하다 못해 덜덜 떨 일이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봤자, 이 돈은 숫자일 뿐이다.
체감해보지 못하고 내게 스쳤다가 사라질 금액.
내가 번 돈도 아니고 김수호가 준 건데.
“그림 속도 레벨업.”
이번에 재능 레벨업으로 돈이 차감되고 나면 20레벨에서 남은 금액은...
10억 9824만 원.
블랙카드로 지금 결제된 건 10억 2400만 원이다.
아마도 40억 9600만 원이 며칠에 걸쳐서 나뉘어 결제될 건가 보다.
언제부터인가 할부로 긁고 있는 셈.
나는 변화한 재능 스탯을 확인하려고 계약서 파일을 보려는데.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 게 있어서 눈을 깜박였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검지로 눈가를 비볐다.
그러고는 다시 앞을 응시하는데.
여전히 눈앞에 뭔가가 어른거렸다.
그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갈수록 뚜렷해지고 명확해져 갔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뭐야?
『명화 작가 14레벨
명화 속도 : 6
그림 기교 : 5
창의력 : 5.』
내 눈앞에 반투명하게 재능 스탯이 보이고 있다.
나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상태 창도 아니고.
렌즈를 끼거나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내 눈앞에서 보이다니.
재능 스탯을 바라보던 내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재능 명칭이 달라지긴 했다.
전에는 그림 작가였고 그림 속도 그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명화 작가다.
능력 발현자와 더 일체화된 형태가 나타난다고 하더니.
그래서 계약서가 아니라 내 시야에 직접 재능 스탯이 나타나는 모양.
편리해진 부분이 있긴 한데.
이건, 남들 눈에도 보일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
나는 타블렛 앞에서 펜을 들었다.
이제 올린 능력을 시험해볼 차례.
이 순간이 가장 좋다.
얼마나 재능이 향상되었을지 기대도 되고.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한 차이를 느끼게 되었을 때의 희열도 경험하게 되곤 하니까.
어차피, 방어벽 그림은 그림 분석하는 데 12시간이나 걸리니.
그걸 기다리는 동안, 방어벽 그림 위에 무기 시스템을 설치하는 그림을 그렸다.
슥슥-
드로잉을 하는 내 손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이젠 아마도 6배속으로 움직이는 속도일 거다.
내 손놀림을 보는 것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신기하기 짝이 없다.
어쨌든 흡족하다.
훗, 이러면 작업 시간이 조금이나마 짧아지겠군.
* * *
몸이 축나는 느낌에 5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핸드폰에 톡이 쌓여 있고.
부재중 전화가 3통화가 찍혀 있다.
지금 시간이 자정이다.
아무래도 주말이었던 터라, 나를 유혹하는 여러 연락이 있었던 거다.
‘라멘 사랑’으로 아침 먹으러 오라는 톡도 있고.
수연이에게서 온 톡도 있다.
나는 쓴 표정을 지었다.
주말, 휴일은 당분간 반납이지 뭐.
원래는 일요일에 부모님 모시고 집 보러 갈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김수호가 머무는 곳이 신경 쓰일 뿐이다.
나는 주방으로 나가 물을 마시며 아침 식사로 먹을 음식을 챙겼다.
미리 주문해둔 누룽지 삼계탕을 데워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여전히 사과나무 그림 사진이 인터넷에서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런저런 억측도 쏟아졌다.
이를테면.
└ 짜장 라면 : 내가 애플 작가를 아는데, 엄청난 미녀야!
└ 능력자 : @짜장 라면 오오! (제발 하며 손 모으는 이모티콘)
└ wlrn99 : @짜장 라면 ㄴㄴ ‘애플 수’는 웹툰 작가임. 무명 작가 중에 애플수라는 닉넴으로 활동하는 거 봤음.
└ 뚜따123 : @wlrn99 그 웹툰 작가 그림 봤는데. 진짜 개허접함. 요즘 ‘애플수’가 유명해지니까 개나 소나 지가 애플 작가래 ㅋㅋㅋ
└ 구름 과자 : 한국 사람 아니라던데? 중국이 자기네 작가가 그린 거라고 함.
그 외에도 무수한 반응들이 있다.
사과나무 그림이 사진이라는 주장은 집요하게 이어지는 건 물론이다.
심지어 사과나무 그림 사진에 관한 기사도 떴다.
그림을 그린 작가를 궁금해하는 내용이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이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 * *
일요일 늦은 밤, 잠시 숨을 돌리려고 밖으로 산책 나왔다.
이제는 가을바람이 제법 느껴졌다.
한강변, 늘 내가 앉던 벤치에 앉아 핸드폰으로 조금 전에 AI 2050과 대화했던 내용을 훑었다.
- 고수 : 김수호가 말하는 큰 전투는 언제 시작인지 알 수 있어?
- 2050 :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전운이 계속 짙어지고 있어서 언제든 습격이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 고수 : 습격이라면, 그... 사람이 아닌 적을 말하는 거지?
- 2050 : 네. 적에 관한 자세한 부분은 수호님이 아직 고수님에게 말하기를 꺼리십니다. 그림 작업을 하게 될 고수님의 멘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거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고수 : 우선 방어벽 보완 작업까지는 끝냈으니까. 쉘터 상황은 전보다 낫겠지?
- 2050 : 전보다 낫긴 하지만. 이번에는 대규모 습격이라 방어 시스템 구축도 완비되어야 승산이 있습니다.
- 고수 : 흠. 최대한 노력할게. 저기 그래서 말인데. 블랙카드 20레벨 추가로 그림 그리는 거.
- 2050 : 네.
- 고수 : 똑같이 또 51억 9424만 원 주는 거 맞지?
- 2050 : 네, 맞습니다.
- 고수 : 그것도 좀 땡겨서 긁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 김수호가 급하다는데? ㅎㅎㅎ- 2050 : 괜히 수호님 핑계를 대시는 것 같지만 가능한지 한번 요청해보겠습니다.
나는 2050이 보내준 영상 파일도 다시 열어보았다.
방어벽 그림이 완성되어서 그걸 실물 전환하는 장면이 찍힌 영상이다.
쉘터를 둘러싼 방어벽은 쉘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쉘터의 규모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닌데, 방어벽은 굉장히 넓은 셈이다.
나는 방어벽이 생성되는 부분부터 다시 봤다.
쉘터 방어벽 주변으로 몇 미터씩 주변 식물들이 정리되어 있다.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었을 나무와 넝쿨들.
거뭇하거나 잿빛으로 변색 된, 알 수 없는 나무와 가시넝쿨들이다.
사람들 웅성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김수호님이나 고수 작가님의 레벨에 비해 버거운 능력 발현이라 하던데요.”
“김수호 씨가 괜찮다고 한다면 괜찮은 거겠죠.”
그때,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철골 방어벽이 생성되었다.
견고하고도 거대한 성벽.
높이도 꽤 되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새 방어벽은 기존의 방어벽보다 더 너비를 넓힌 거라고 들었다.
방어벽이 생성되는 과정은 여전히 CG를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CG 같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은.
영상 속의 광경은 좀 더 섬세하고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팟! 츠츠츠츠-
그런데 방어벽이 생성되던 도중에 돌연 섬광 같은 게 번쩍이며 방어벽이 사라지려 했다.
“김수호! 괜찮습니까?”
내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외침.
그러다.
츠으츠츠-
방어벽 생성되는 과정이 안정되는가 싶더니 철골 방어벽이 완전해졌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아-!
영상 끝에는 영상을 편집한 자가 넣었는지 글귀가 나타났다.
<당신이 볼 거라고 여겨서 영상 끝에 우리가 하고픈 말을 넣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수 작가님.
이 방어벽은 당신의 손에 있었을 땐 그저 그림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왔을 땐, 앞으로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선 모르겠지만 이곳에선 당신의 이름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던 생존자들이 우리 쉘터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힘을 내서 그림을 그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어쩌면 나는 이제 돈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누군가 때문에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