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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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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 작업하는 걸 잠시 그만두고 한동안 인터넷을 찾아봤다.
사과나무 그림은 지금도 퍼지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반응은 커져만 갔고, '애플 수' 혹은 ‘애플 작가’에 관한 궁금증과 추측도 난무했다.
└ 얄라리얄라송 : 백퍼 사진임.
└ 팬다 : @얄라리얄라송 ㅇㅇ
└ 우리 만남은 우연이야 : 사진 보고 금손이네 마네 하네. ㅂㅅ들.
이런 댓글 보니까 노가다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밝히고픈 충동이 인다.
그러다가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뭐, 그러다가 말겠지.
누가 저 그림을 인터넷에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사진은 인터넷에 퍼졌고, 사람들은 잠시 관심을 가지다가 말 거다.
나는 핸드폰으로 김수호에게 톡을 했다.
- 고수 : 김수호, 저번에 사과나무 그림. 실물로 바꾼 모습을 찍은 영상이 있나?
그러자 김수호 대신 AI 2050이 대답했다.
- 2050 : 수호님이 그림을 실물로 전환하는 광경은 항상 영상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영상 파일을 보내드릴까요?
- 고수 : 응. 보내줘.
이내 2050이 영상 파일을 보내왔다.
나는 그것을 열어보았다.
장소는 아마도 쉘터 밖 방어벽 안인 것 같았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웅성대는 소리만 들려온다.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가득해 보였다.
내가 그렸던 그림은 노면에 놓여 있다.
원래는 주차장이었던 듯, 다른 부근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으나.
그림이 놓인 장소만 부드러운 흙이 있었다.
아마도 이전에 내가 그렸던 텃밭이 실물로 변해서 그런 보드라운 흙이 깔리게 된 것 같다.
그림은 제법 큰 종이에 인쇄되어 있다.
“커다란 식물로 전환하는 건 처음인 거죠?”
“그렇죠. 저번엔 텃밭이었으니까.”
“부디 능력 발현이 성공적으로 되기를 바라면서도, 저 그림이 아까운 생각도 드는군요.”
“이쯤 되니까, 그림을 그려주는 화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던데요.”
“저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수!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나는 이미 팬입니다!”
그런 말소리가 들려오던 중에, 김수호가 능력을 발현했는지.
그림이 있던 장소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림은 홀연히 백지가 되고, 대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커다란 나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생명력을 지닌 뭔가가 한순간에 창조되는 광경.
백지가 된 종이는 생성된 나무 옆으로 밀려났다.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 굵직한 줄기가 위로 뻗었고 무수한 가지가 사방으로 드리워졌다.
그리고 싱그러운 잎사귀가 무성하게 돋아났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생겨난 거다.
주렁주렁 열린 탐스러운 사과 열매가 싱싱해 보인다.
‘무’에서 ‘유’로 창조되는 과정.
마치 CG를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김수호!”
“그림이 그토록 아름답더니, 역시 실물도 아름답네요!”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 나무로 다가갔다.
역시 마르고 꾀죄죄한 행색이다.
“와우! 사과나무를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사과나무는 원래 이렇게 다 예뻐요?”
“예쁘긴 하지만, 저 나무가 유독 예쁜 거긴 해.”
17세 소년이라면, 아포칼립스 이후에 태어난 아이일 테니.
어쩌면 싱싱한 사과나무는 처음 봤을 수도 있겠다.
“제가 한 번 먹어봐도 되죠? 열매가 하나, 두울, 셋... 엄청 많으니까. 우리 쉘터 식구들, 전부 한 개 이상씩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먹어도 되지! 맛이 어떤지 소감도 말하고.”
쉘터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따뜻한 편이었다.
아포칼립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이니 삭막하거나 타락했거나 절망적이이지 않을까 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쉘터를 이끄는 리더가 올곧고 능력 있는 자인 듯했다.
아삭.
소년은 가장 낮은 가지에 매달린 사과 하나를 똑 따서 한입 베어 물었다.
상큼해 보이는 과즙이 소년의 입가에 한가득 머물렀다.
그 모습을 보니 나까지 사과를 먹고 싶어진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등으로 입을 슥 닦으며 감탄하는 말을 외쳤다.
“이런 건 처음 먹어봐요! 엄청 달고 맛이 신선해요. 이런 건...”
소년은 입가를 닦았던 손등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이런 건... 처음. 흑. 처음 먹어봐요. 이렇게 맛있는 건.”
영상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나는 영상 파일을 닫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내 안에 뭉클해지는 게 있다.
* * *
양평 전원주택을 알아보는 건 이모부에게 부탁했다.
먼저 이모부가 몇 군데를 추리고, 그다음에 일요일 즈음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보시는 거로 결정했다.
아마도 일요일 하루는 거의 그림을 많이 못 그릴 테니.
그 전에 밤샘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종일 그림을 그리다가...
까톡!
까톡 알림 소리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김수호다.
- 2050 : 애플.
응?
김수호가 아닌가?
- 2050 : 수?
- 고수 : 2050?
- 2050 : 원래 흐름에서 틀어진 부분이다.
- 고수 : 김수호?
- 2050 : 어제 사과나무를 실물로 전환하는 영상을 봤으니 너도 알 테지. 내가 머무는 쉘터에서 너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저 나를 통해 ‘고수’라는 이름만 알뿐.
- 고수 : 혹시 ‘애플 수’라는 이름을 네 쉘터에서 아는 사람이 있어?
- 2050 : 그래. 그건 어제부터 달라진 부분이다.
인터넷에 내 그림 사진이 떠도는 걸 가볍게 생각했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김수호의 쉘터 사람이 알 정도면 꽤 그 이름이 유명해지는 듯한데.
- 2050 : 분명 그는 그 영상을 찍을 때만 해도 사과나무 그림과 ‘애플 수’를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했는데.
- 2050 : 오늘은 알더군. 그는 그동안 잊고 있다가 생각난 거로 생각했을 거다.
- 고수 : 흐음.
- 2050 : 하지만 뭔가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니 걱정할 건 없겠지. 이후로는 본 명보다는 차라리 가명을 사용하는 게 나을 거야.
- 2050 : 그리고 내가 사용한 그림은 외부로 유출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 외의 그림은 괜찮다.
- 고수 :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후에 컴퓨터의 인터넷 창을 켰다.
사과나무 그림 사진과 ‘애플 수’, 혹은 ‘애플 작가’ 이름으로 검색했다.
그러자 생각보다 많은 내용이 검색되는 걸 보고서 깜짝 놀랐다.
“후우.”
나는 전보다 기른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검색된 내용을 훑었다.
대체, 왜 내 그림 사진이 이토록 많이 퍼진 거지?
게시물 중 하나는 이런 내용이었다.
그는 유명한 예술평론가인데, 그의 SNS에 사과나무 그림에 관한 극찬을 써놓았다.
『내 평생에 이렇듯 고결한 작품은 처음 만나보았다.
피사체는 평범한 사과나무일 뿐이지만, 작가는 생동하는 아름다움의 절정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이 만일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었다면, 미술품 수집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작품이다.
경매에 부쳐졌다면 최고가를 경신했을 작품이다.
나는 이 그림을 그린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
그의 작품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가 그린 또 다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다.』
이런 내용들 덕분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미 인터넷으로 유출된 그림 사진이니,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 * *
일요일인 내일 아침에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신다고 했다.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셔야 해서, 아침에 오셨다가 다음날 새벽에 가실 예정이었다.
나는 여러 날 뜬눈으로 지새우며 그림 작업을 하다가 토요일 오후 3시에 20레벨 그림을 완성했다.
아, 정말 이거 그리느라 토하는 줄 알았다.
AI 2050에게 그림 완성한 걸 보내자 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12시간이 소요됩니다.
12시간, 내 이럴 줄 알았지.
20레벨이 통과되면 긁을 수 있는 블랙카드 금액은 51억 9424만 원.
이전 레벨의 두 배 금액이다.
분석 완료 톡은 일요일 새벽 3시에 도착하겠다.
그때까지 잠을 자야지.
까톡!
김수호에게 톡이 왔다.
이번에 그가 보낸 톡의 내용은 평상시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늘 담담하던 그였는데, 이번엔 어딘가 긴장감이 돌았다.
- 2050 : 고수. 블랙카드 21레벨로 넘어가는 건 당분간 보류해야 할 것 같다.
- 고수 : 왜?
- 2050 : 지금 많이 급하다. 조만간 여기 쉘터에선 큰 전투가 벌어질 것 같다.
- 고수 : 큰 전투?
나는 절로 표정이 심각해졌다.
- 2050 : 이번에 완성한 그림 넘기면 21레벨로 넘기지 말고 20레벨에서 그림하나를 더 그려주었으면 해.
- 고수 : 무슨 그림?
- 2050 : 20레벨에서 그린 방어벽에서 방어 무기 설치를 더 추가하는 그림이다.
- 2050 : 그게 있어야 우리 쉘터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껏 겨우 버티던 우리 쉘터는 무너질 거야.
- 고수 : 그래. 알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서 그림을 그려볼게. 20레벨에서 추가로 그릴 자료 사진 지금 보내줄래?
- 2050 : 알았다. 지금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내가 급해서 그러니. 이번엔 20레벨에 긁을 수 있는 금액을 미리 긁게 해줄게.
- 고수 : 미리 긁게 해준다고?
- 2050 : 20레벨을 통과하면 긁을 수 있게 될 금액. 51억 9424만 원을 지금 긁게 해준다는 말이다. 대신.
- 고수 : 대신?
- 2050 : 재능 레벨은 이번에 속도를 올렸으면 한다.
- 고수 : 그래. 그렇게 하지.
김수호는 곧 자료 사진을 보내왔다.
그는 다시 내게 말했다.
- 2050 : 내가 이런 말을 한 번도 안 했던 것 같은데.
- 고수 : ?
- 2050 : 고맙다. 네가 있어서 나 역시 다행이라 생각해.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다.
- 2050 :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내지 못했을 거다. 너는 우리에게 그림으로 희망을 주었고. 쉘터를 지킬 수 있는 힘도 주었다.
평소 안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까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슨 마지막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 고수 : 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불안하게.
- 고수 : 넌 별일 없는 거지? 그 무슨... 큰 전투인지 뭔지 있어도 별일 없이 다시 나에게 마감 독촉도 하고 그럴 거지?
김수호는 한참 만에 답했다.
- 2050 : 물론.
- 고수 : 그럼 됐어. 네 말대로 우리는 아포칼립스를 겪지 말아야지. 너, 무슨 아바타인지 뭔지 만들어서 우리 한 번은 만나야지 않겠냐?
- 2050 : 후.
후. 이건 한숨짓는 소리가 아니다.
이제껏 겪어왔던 바에 의하면, ‘후’는 김수호가 짤막하고도 어색하고도 뻣뻣하고 투박하게 웃는 말이다.
- 2050 : 그래. 분명 네가 사는 세상은 아포칼립스를 겪지 않게 될 거다. 그럼 다음에 대화하지.
김수호화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나는 그가 보낸 자료 사진을 확인하다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내일 부모님이 올라오시는 건 취소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