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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살라져야 얻을 그림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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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우리는 계약서에 날인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라 내가 모는 아우디로 그녀를 라멘 집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주차장까지 이르러, 한나는 보조석에 타기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고수 씨, 내일 아침은 저희 가게에서 드세요.”
아, 라멘은 요즘 그다지 안 땡기는데.
못 들은 척하고 싶다.
내가 운전석 문을 열었을 때 한나는 다시 말했다.
“일식 말고 한식, 만들어 드릴게요. 된장찌개랑 차돌박이 부추 무침 어때요?
오시면 루나도 좋아할 텐데.”
오, 확 땡기는데.
나는 금세 입맛이 돌았으나 표정 관리하며 그녀에게 답했다.
“제가 얻어먹어도 될지 모르겠네요. 저야 감사하죠.”
“좋아요. 그럼 내일 아침은 같이 먹는 걸로.”
그러면서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
* * *
19레벨 마감은 다음 화요일 오전 11시까지다.
나는 집에 있는 동안은, 계속 자료 사진을 보며 충실히 그림 작업을 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정성스럽게 그리는 거다.
과수원은 곧바로 잔금을 치를 생각이다.
그런데 참 기묘한 것이, 이곳 과수원도 사과나무를 기르는 곳이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저번엔 땅을 살 때, 텃밭을 그리기도 했었군.
우연히 카테고리가 비슷하게 일치한 거겠지?
나는 아침 9시 즈음 ‘라멘 사랑’에 방문했다.
한나가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서 정말 오랜만에 집밥으로 아침을 먹게 되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차돌박이 부추 무침, 버섯 볶음, 오이 김치, 두부 조림.
그녀는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았다.
너무 맛있어서 2그릇이나 먹고 말았다.
염치는 그냥 내다 버리고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얼굴도 예쁘지, 음식 솜씨도 좋지.
나중에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는 아마도 행복할 거다.
문득, 한나가 내게 물었다.
“고수 씨, 혹시 라이브 드로잉 해보실 생각 없어요?”
“라이브 드로잉이요?”
“네. 제 지인이 이번에 강남 미술 전시장에서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거든요.
지금 작가 섭외 중인데. 혹시 관심이 있으신지 해서요.”
저번에 여기 와서 한번 밥을 먹은 적 있었는데.
나는 그때 이들 자매에게 내가 그리던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림 원본은 아니고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저장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었는데.
그때 일로 한나는 내게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거였다.
“그런 행사는 아무 작가나 섭외하지 않을 텐데요.”
“고수 씨의 그림 사진들을 보여주면 당장에 좋다고 할 거예요. 고수 씨는 손이 굉장히 빠르잖아요. 거기서 고수 씨가 라이브 드로잉 쇼를 보이게 되면, 분명 대단히 주목받을 거예요.”
“음, 생각해볼게요.”
식사가 끝나자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정리를 하며 내게 말했다.
“고수 오빠, 과일 드실래요? 되게 달달한 포도 있어요.”
“오, 맛있겠네요. 오늘 엄청 잘 얻어먹었는데. 제가 치우는 거 좀 도와줄게요.”
나 역시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느덧 여름은 지나간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졌다.
요즘 내리 이틀 동안 3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그 전날에는 4시간 잤던 것 같다.
그동안 외출할 일도 많고 해서, 그만큼의 작업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수면 시간을 포기해야 했다.
19레벨 마감 시간이 화요일 오전 11시인데, 지금이 월요일 밤 10시다.
나는 완성한 그림을 2050에게 보냈다.
그러자 뜨는 메시지.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8시간이 소요됩니다.
하, 8시간.
이 시간은 별수 없이 기다려야 하네.
모처럼 꿀잠을 잘 수밖에 없는 건가.
나는 8시간 후를 알람 맞춰두고 비틀비틀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로 벌러덩 쓰러지자마자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띠리링, 띠리링-
방금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설마 그사이에 8시간이 지났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 알람을 끄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6시다.
와, 이렇게 잠을 잔 것 같지 않게 잘 자본 거는 처음이네.
나는 정신을 차리며 타블렛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 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2050의 톡이 와 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한 결과, 퀄리티를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11%만 보완해주세요.
흠, 이번 레벨은 마감 시간을 지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커피를 마셔야겠다.
내 정신 좀 일깨우고.
이제부터 그림 작업을 하며 쭉 달려야 하니, 에너지 비축도 해야겠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리고 뜨거운 커피 한잔을 타서 타블렛 앞으로 가져왔다.
의자에 앉아 2050이 보내온 파일을 열자 군데군데 붉은 표시가 나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흠, 이 부분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여긴, 좀 더 매끈하게 처리했어야 했나.
이 부분은 빛을 더 표현해야겠다.
그러면 더 나아 보이겠지.
여기 잎사귀 부분은 더 짙게.
싱그러운 느낌은 어떻게 해야 더 느낌 있게 나타낼 수 있으려나?
기교를 올린 후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저절로 터득된 게 많았다.
뭔가 영감이 얻어지기도 하고.
이렇게 해야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깨달음도 생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지곤 했었다.
나는 펜을 잡고 수정 작업에 돌입했다.
슥슥-
펜 끝이 거침이 없다.
내 손놀림은 4배속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한동안 작업을 하고 보니 나는 샌드위치를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
시간은 오전 9시 30분.
나는 수정한 그림을 다시 2050에게 보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50분이 소요됩니다.
50분 휴식.
나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저 먹었다.
* * *
찰칵!
나는 그림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그러고는 완성된 그림을 응시했다.
현재 오전 10시 50분.
마감 시간까지 10분 남았다.
두 차례 보완 작업을 거치고 2050에게 다시 보내는 걸 앞두고 있다.
지금 보내서 19레벨이 통과하게 된다면 저 그림이 사라질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레벨에서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그저 블랙카드를 긁는 것이 더 내 관심이 가 있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아쉬움이 생겼다.
엄청난 명작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그냥 영영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하니까 아쉽다 못해서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나는 그림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그린 거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새삼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만.
이 그림의 예술성과 가치는 블랙카드로 긁을 수 있는 금액과 거의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26억 원의 가치.
이 그림은 그만큼의 예술적인 가치를 머금고 있는 거다.
물론 예술적인 가치 외에도 저 그림으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살고 회복될 수 있기에.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거다.
오염되고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 땅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심길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앞서 말한 거에 비해 보잘것없지만.
밤잠 못 이루며 그린 내 수고와 시간과 다투며 그림을 그려내던 내 치열함도.
작게나마 그림에 보탠 가치였고 소중함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게 있는데.
이 생각은 좀 어이없기도 하지만.
26억 원 만큼의 가치가 사람들의 필요 충족을 위해 단 한 순간에 소모되고.
희생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이젠 보내줘야지.”
나는 그림 파일을 까톡에 첨부하여 2050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림 분석 시간 7분을 소요하고 가까스로 19레벨을 통과했다.
- 2050 : 고수님이 그림을 분석한 결과, 블랙카드의 레벨이 20레벨로 상승합니다.
드디어 블랙카드 20레벨에 진입했다.
그때 김수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20레벨 통과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레벨 진입하자마자 말을 거는 그다.
- 2050 : 고수.
- 고수 : 왜?
- 2050 : 블랙카드 20레벨을 통과하고 나면 너에게 뭔가 혜택을 주려 한다.
- 고수 : 오! 혜택. 그게 뭔데?
- 2050 : 집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
- 고수 : 어, 나?
그걸 어떻게 알았지?
사실 애초에 땅을 살 생각을 했던 것도, 부모님을 모실 집을 마련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출발했던 거였다.
- 고수 : 설마 집을 사주게?
김수호, 이 녀석 통 큰 녀석이군.
블랙카드를 주고 ‘무한’이라는 단어를 쓸 때부터 알아봤다.
- 2050 : 집을 사주는 건 아니고. 보너스, 추가 보상이라고 해두지.
- 2050 : 2억 원을 추가 보상으로 줄게.
- 고수 : 2억 원?
아, 2억 원.
2억 원이라고 하니까 이젠 살짝 소박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 2050 : 그 정도면 이번에 재능 레벨업을 하고 나서 남은 금액과 합해서 네가 원하는 전원주택을 구매할 정도 될 거다.
내가 원하는?
김수호,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네.
내가 양평 전원주택을 나중에 돈 벌면 부모님께 사드리고 싶다고, 늘 생각하긴 했었는데.
정말 생각만 했던 곳인데.
아! 그가 가진 기묘한 핸드폰이 내 것이었다고 했었지.
나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뭔가를 기록해두는 일을 잘 하지 않는 편이긴 한데.
혹시, 거기다가 뭔가를 기록해두었던가?
그러면서 핸드폰의 메모장을 확인해봤다.
내가 메모해둔 기록은 달랑 1개.
잊고 있었는데 석 달 전에 적어둔 거다.
『쉽지 않네.
돈을 벌면 부모님에게 양평 전원주택을 사드리고 싶었는데.
과연, 그런 좋은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실은 원룸도 못 벗어나는 내 처지다.』
헐, 역시.
김수호는 내게 이런 말도 했었다.
- 2050 : 하지만 20레벨은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난이도가 좀 있어. 작업기간은 보름 주겠다.
- 2050 : 이번엔 속도나 기교를 올리는 것이 유리할 거다.
그러고서 그는 더 말이 없었다.
나는 20레벨 자료 사진 파일을 열었다.
사진은 놀랍게도 김수호가 지내는 2050년도의 쉘터 풍경이었다.
쉘터 위 허공에서 찍은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전에 사진에서 봤던 풍경과는 달랐다.
쉘터를 둘러싼 외부 방어벽.
이게 달라졌다.
전보다 비교하기 어렵게 거대해졌다.
방어벽은 무척 두께가 있어 보였고.
제법 높아서 정면에서 봤을 땐, 안에 있을 쉘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방어벽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서는 거대한 철문 같은 게 있다.
그 외에 방어벽에 설치된 무기나 첨단 시설 같은 건 딱히 보이지 않다.
음, 간단하긴 해도 스케일이 좀 있는걸.
나는 사진을 확대해서 봤다.
어휴, 디테일을 보니 외벽 질감을 일일이 표현해줘야 하는데.
이게 꽤 커서 몇날 며칠을 노가다해야 할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조금은 비슷한 카테고리.
이번엔 쉘터 방어벽을 그리고, 집을 살 돈을 얻게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