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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그리고 땅을 산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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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못 되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가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 된다고 일찍 돌려보낸 거다.
물론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한두 시간 미리 촛불을 끈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그나저나 수연이가 내 생일을 직접 챙겨주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는데.
내가 일찍 보낼 때, 뭔가 서운한 기색이였던 그녀.
사실, 나는 그녀가 왜 서운한 기색인지.
왜 나에게 자주 연락하고 집 앞까지 찾아오는지.
대략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내가 연애하거나 그럴 만한 준비가 안 되어 있는 탓이지만.
사실, 지금은 누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도 내 마음은 외로운 게 싫고 자주 허한 마음이 들곤 했으니까.
어쨌거나 대충 씻고 타블렛 앞에 앉고서 조금 전에 왔던 2050의 톡을 다시 확인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 블랙카드의 레벨이 19레벨로 상승합니다.
“훗.”
다시 보는 거지만 흐뭇하다.
18레벨이 무려 12억 9856만 원이니까.
나는 19레벨의 자료 사진을 열었다.
이번엔 어떤 풀밭 위에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 사진이다.
사과나무엔 150개 정도의 탐스러운 사과가 열려 있다.
붉은빛의 열매와 싱싱한 초록빛 잎사귀가 꽤 아름답다.
나무 아래엔 들풀이 많이 자라 있고 가끔 들꽃도 보였다.
자세히 보면 사과나무 주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나방도 보이고.
잎사귀에 붙은 조그만 벌레들도 보였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19레벨은 좀 어렵겠는데.
18레벨은 왠지 보너스 레벨이었던 것 같은 기분.
18레벨은 원래 마감이 일요일 밤 11시까지였는데.
일요일 지금은 0시 30분.
18레벨을 일찌감치 통과해버린 거다.
설마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마감이 널널했던 건 아니겠지.
나는 펜을 잡았다.
오늘은 새벽 3시까지만 그리자.
블랙카드 레벨 자료 사진은 닫아두고, 통조림과 쌀 포대 사진을 열었다.
오늘 중으로 이걸 완성해서 보내야겠다.
아! 이거 그리기 전에 능력을 올려야지.
나는 계약서 파일을 꺼내 펼쳤다.
“2050 고수.”
작게 읊조리자 나타나는 그림 재능 스탯.
『그림 작가 11레벨
그림 속도 : 4
그림 기교 : 5
창의력 : 4.』
내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런가.
속도를 올리고 싶다.
빨리빨리 그려서 내 작품도 남기고 싶은 그런 마음.
하지만 지금은 속도보다 창의력을 올려야만 할 것 같다.
19레벨의 자료 사진을 보면 창의력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확 든다.
싱싱한 초록빛 잎사귀에 붙은 작은 벌레들까지 보다 보면.
싱그러운 생명력이 넘실대는 것 같으니까.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창의력 레벨업.”
결국, 창의력을 올렸다.
10억 2400만 원이 블랙카드로 결제되며 스탯에 변화가 왔다.
『그림 작가 12레벨
그림 속도 : 4
그림 기교 : 5
창의력 : 5.』
세상 사람들은 알까?
창의력을 돈 주고 사겠다고, 무려 10억이 넘는 돈을 한방에 결제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아무튼 이 통조림 그림 완성하면 3000만 원을 더 추가로 블랙카드를 긁을 수 있다.
후후, 3000만 원은 왠지 딴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 같아서.
뭔가 기분이 다르네.
* * *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다.
여느 날과 똑같이 하루가 흘러갈 뿐.
그저 평소보다 톡이 더 많이 쌓이고.
연락이 조금 더 오는 거다.
나는 옷을 차려입고 축의금까지 준비해서 오랜만에 미술 전시회를 다녀 왔다.
선배가 개인전을 열었는데 안 갈 수가 없었던 것.
전시회장에서 만난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잠시 부러움으로 내 마음이 확 들끓어 올랐었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김수호에게 톡을 남겼다.
- 고수 : 김수호, 네가 지내는 쉘터. 사진으로 보내줄 수 있나?
- 2050 : 쉘터 사진을 요청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AI 2050이로군.
- 고수 : 참고해두려고.
- 2050 : 그럼 제가 임의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수호님은 외부로 출타 중이십니다.
- 고수 : 그래? 일단 보내줘.
- 2050 : 제가 마음대로 사진을 보내는 건 수호님께 안 비밀입니다.
- 고수 : 안 비밀?
- 2050 : 고수님이 사는 세상에선 종종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쓴다고 하더군요.
- 고수 : 그딴 걸 누가 가르쳐준 거냐?
곧, 2050이 사진을 보내오자 나는 그것을 열었다.
뭔가 음습한 풍경이 보이고 전투 흔적이 군데군데 남은 창고 건물이 보였다.
여러 방어 시설이 있는 것도 보였다.
창고 건물이라고 해서 별로 기대 안 했더니.
외양은 형편없어도 내구성이 좋아 보이는 철골 건물이었다.
높이는 4층 정도.
건물 주변으로 방어벽이 있긴 한데.
제대로 된 방어벽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금요일 날에 봤던 풍경과 사진 속의 배경 풍경은 확연히 차이가나 보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만큼 황폐해졌다는 거겠지.
나는 다시 타블렛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해서 내내 그림을 그렸다.
늦은 밤까지 작업해서 통조림과 쌀 포대, 생수통이 산더미처럼 쌓인 그림을 완성해서, 2050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아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 그림을 사용하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2050 : 블랙카드로 3000만 원을 추가로 긁으실 수 있습니다.
후후, 그럼 18레벨에서 3000만 원이 더해져서 긁을 수 있는 금액은...
13억 2856만 원인데, 여기서 능력 레벨 비용이 차감되었으니.
남은 금액은 3억 456만 원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긁적였다.
이 돈으로 땅을 사둬도 되겠는데?
이제 슬슬 자려고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데.
까톡!
까톡 알림이 울렸다.
나는 2050만 알림 설정을 해둔 상태라서 이 시간에 까톡을 했다는 건.
김수호일 가능성이 컸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 2050 : 고수.
나는 핸드폰으로 문장을 작성했다.
- 고수 : 왜?
- 2050 : 아까 쉘터 사진을 가져갔더군.
- 고수 : 응. 필요할 것 같아서.
- 2050 :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네가 그 땅에 지을 건물의 설계를 보낼 거다.
그리고 전문가는 누구를 만나야 할지 알려줄 생각이다.
- 고수 :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 2050 : 말해.
- 고수 : 너와 내가 능력을 올려서 최종적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엇이지? 너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아포칼립스를 막을 생각인 거냐?
- 고수 : 너의 그 계획, 나에게도 공유할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묻자 김수호는 한동안 침묵했다.
대답할 말을 고민하는 건가?
그러다 그가 내게 톡을 보내왔다.
- 2050 :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회복인 동시에 변화다. 아포칼립스를 막을 방도는 너와 나의 능력에 있어.
- 2050 : 네 그림 능력은 업그레이드할수록, 내가 바꿀 수 있는 실물은 스케일이 점점 커질 수 있다.
- 2050 : 능력이 향상될수록 큰 스케일, 그리고 복잡하고 섬세하며 생명력이 깃든 실물로 전환할 수가 있는 거다.
- 고수 :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네가 사는 세상, 그러니까 미래만 좋아지겠지.
- 고수 : 그림을 실물로 바꾸는 능력은 네가 사는 세상에나 적용되는 거 아닌가?
- 고수 : 그림을 실물로 바꾸려면 네가 여기 있어야 하는데. 내가 사는 세상에서 능력을 발현될 수 없잖아? 네가 이곳에 올 수 없으니.
어쩌면 오염된 숲이나 땅을 그림으로 복원하고 회복하는 일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김수호는 그게 목적일 테지.
- 2050 : 여긴 2050년도다.
- 고수 : 알아. 왜 다시 알려주고 그래?
- 2050 : 네가 사는 곳보다 미래라는 거다. 아무래도 여긴 그곳에 없는 기술이 있어. 전에 기억나나?
- 고수 : 몰라. 기억 안 나.
- 2050 : 나는 네가 보낸 계약서를 어떻게 받았을까?
- 고수 : 어, 그러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때 2050이 택배 박스가 전송될 거라는 식으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 2050 : 조만간 나는 너에게 미래 물건을 그리게 할 거다.
- 고수 : 미래 물건? 그게 뭔데?
- 2050 : 아바타를 사용하는 걸 가능하게 만드는 기계지.
- 고수 : 아바타라니?
나는 얼른 그가 말하는 목적을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놀라운 말을 내게 했다.
- 2050 : 언젠가 너에게 말했었던가?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거라고.
* * *
19레벨은 거의 26억이다.
이 정도의 카드 대금을 감당하는 김수호도 참 대단한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차려입고 이모부의 회사에 와 있다.
사무실에 앉아 핸드폰으로 잠시 내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18레벨에서 남은 금액을 모조리 현금으로 빼서 통장에 넣어두었었다.
그래서 잔고는 3억 1000만 원.
이 정도의 돈이 내 통장에 들어있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다.
그동안 어마어마한 금액을 블랙카드로 긁을 수 있었어도.
곧바로 재능 레벨업 비용으로 빠져나가서 별로 풍족함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뭐, 이 돈도 곧 빠져나갈 돈이긴 하다.
잠시 앉아 있으니 이모부가 누군가와 함께 왔다.
내가 계약한 땅, 과수원의 주인을 오늘 만나서 계약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를 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라멘 사랑’의 사장, 루나의 언니 ‘한나’ 였다.
한나는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고수 씨?”
한나는 루나와 자매지간이지만 루나보다 좀 더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짙은 쌍꺼풀이 진 큰 눈, 오뚝한 코, 입체적인 얼굴형의 미인이다.
“아, 예. 한나 씨가 과수원 주인이셨군요.”
“어머, 이런 곳에서 아는 얼굴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모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예. 고수 씨는 저희 라멘 집에 몇 번 오셔서 알아요. 그림을 잘 그리신다는 것도 아는걸요.”
“아.”
우리는 의자에 마주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제가 팔려는 과수원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 중 하나인데요. 임대를 했었다가 최근엔 과수원을 할 사람도 없어서 조만간 팔 생각이긴 했어요.”
“그러셨군요.”
“근데 그 땅을 고수 씨가 사시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하, 그러게요.”
“이렇게 얽히기 쉽지 않은데. 인연인가 봐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냥 적당히 답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언제고 꼭 만날 인연.
김수호가 사는 세상에선, 내가 이 땅에 창고를 짓게끔 했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나는 한나, 루나 자매와 어떤 식으로든 알고 지내게 된다는 의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