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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그리고 땅을 산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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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레벨은 감히 올려도 될까 싶어지는 금액이다.
아니, 무서워지는 금액이다.
지금 긁을 수 있는 17레벨 블랙카드 금액은 6990만 원.
그 금액은 이제 곧 아우디가 출고되면 긁을 생각이었다.
나머지는 월세 내고 생활비에 보태야지.
슥슥-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준호 녀석이 붉어진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준호는 맥주를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는 친구였다.
그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대박.”
“얌마, 나가서 마셔. 집중 안 돼.”
“대박, 야야! 다들 와봐! 고수, 그림 그리는 거 진짜 죽인다.”
그러자 다들 우르르 안으로 몰려왔다.
“이야, 이게 고수가 그린 거라고?”
“이거 사진 아냐? 쓸데없이 그림이 디테일한데?”
“합성한 거 아냐.”
“근데 무슨 통조림이 이렇게 많아. 무슨 통조림에 한 맺힌 거 같다. 큭큭.”
"통조림이 종류 별로 다 있는데? 참치, 스팸, 장조림, 황도, 피클, 스위트콘, 그리고..."
진구는 내가 그린 그림을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이거 전부 고수가 그린 거야. 한땀 한땀 노가다로 그린.”
“우오! 진짜?”
“역시 요즘 고수한테 일거리가 밀려드는 이유가 있었구나. 쓸데없이 고퀄이네.”
“얘 원래 이렇게 잘 그렸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그들의 말에 장난처럼 대꾸했다.
“내가 최근에 각성했거든. 레벨업하는 그림 그리는 능력으로.”
“진짜 그런 능력이라도 각성한 것 같다. 이 그림만 보면.”
그들은 한동안 그림을 보면 감탄하다가 자기들끼리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진짜 그런 능력 있으면 재밌을 것 같지 않냐?”
“소설 읽다 보면 그런 생각 한 번쯤 해보긴 하지. 나는 돈 버는 능력이나 생겼으면 좋겠다.”
“나는 쫌 잘생겨졌으면 좋겠는데. 큭큭.”
그런 그들을 보다가 대뜸 말을 꺼냈다.
“정말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냐?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가 소설처럼 아포칼립스가 오는 이유라면 어떡할래?”
“음, 그러면 사양한다. 그냥 능력도 사양하고 아포칼립스도 사양할래.”
“그래. 이제 나 그림 좀 그려야 하니까 나가서 놀아.”
“고수, 이런 날도 그림을 그리다니. 질려버렸다. 수고해라.”
그들은 내가 몰아낸 후에야 거실로 나갔다.
친구들이 떠드는 말소리를 들으며 혼자 피식하다가, 문득 김수호를 떠올렸다.
2050년의 인물, 김수호.
2021년이라면 그의 부모가 살고 있을 시기겠다.
혹시, 내 또래이거나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겠지.
언제 기회 되면 물어봐야겠다.
* * *
금요일 오전, 나는 18레벨을 2050에게 넘겼다.
이번에는 이전 레벨보다 꽤 수월하게 그린 편이다.
흙만 있는 텃밭 그림이라 단순하고 간단해서 그런가 보다.
AI 2050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6시간이 소요됩니다.
6시간이나 걸린다니!
미리 완성해서 넘기길 잘했다.
이모부 회사에 후딱 다녀와서 수정 작업을 해야지.
집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 이르니 차 한 대가 멋스럽게 서 있는 게 보인다.
사흘 전에 받아 가지고 온 흰색 아우디 신차.
이게 내 차라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온전히 내 차가 된 이걸 몰고 서울 시내로 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나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저번에 친구 결혼식 때 산 정장을 입고 아우디에 올라타니.
뭔가 완성되고 갖추어진 기분.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오랜만에 운전하는 거라서 마음에 부담감이 있긴 하다.
일단 차가 비싸기도 하고.
아직 운전하는 게 낯설어서 자칫 잘못하다가 어디 긁어 먹으면 골치 아프다.
한동안 운전하다가 어느 빌딩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려다가 룸미러로 내 얼굴을 확인했다.
머리카락이 그새 긴 게 보였다.
조만간 머리카락 좀 잘라야겠군.
아냐, 머리 이발하는 것도 시간 아까운데 그냥 기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어느 사무실 안에서 이모부와 마주 앉았다.
이모부는 멀끔해진 내 차림새를 눈여겨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보이는구나. 이게 얼마 만이지?”
“몇 달 된 거 같네요. 여행은 괜찮으셨어요?”
“그럼 좋았지. 너의 어머니도 그렇고. 네 이모도 그렇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 하더라. 허허.”
“하하.”
나는 짧게 웃었다.
대화가 잠시 끊어지자 이모부는 조용히 본론을 꺼냈다.
“네가 사고 싶다는 그곳, 과수원이구나.”
“그래요?”
“대략 2000평 넘는 곳이야. 그런데 왜 거길 사려는 건지 물어도 되니? 전원주택을 알아보는 거라면 다른 괜찮은 매물도 많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오늘 한 번 땅을 보러 갈래?”
“예. 그런데 그 땅 살 수 있는 거예요?”
“거긴 매물로 나온 토지가 아니라서 확답하기 어려운데. 가격만 맞으면 주인이 팔 의향이 있다고는 하더라.”
“그래요?”
“일단 보러 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부가 모는 차로 목적지를 향해 제법 오래 달렸다.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곳으로 차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했다.
이모부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이 근처인데.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된다.”
“예.”
과수원은 인가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외진 곳이라서 2000평이나 되어도 가격은 싼 편이라고 했다.
주변은 산과 들이었고, 과수원은 제법 널찍했으며 땅은 평평했다.
나는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공기가 맑고 경치가 좋은 편이다.
한동안 과수원 전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드는 생각들.
이곳이 미래에 김수호가 지내는 쉘터가 생기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미래의 내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쉘터를 만들다니.
어떻게 내가 여기에 창고 건물을 짓도록 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가만히 서서 이곳을 상상해보았다.
창고 건물을 개조하고 보완한 쉘터.
이곳에서 막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김수호를 마음으로 그려보았다.
그때 근처에 서 있던 이모부가 내게 말했다.
“여긴 과수원도 살 사람은 없어 보이고. 보통 이런 곳이 매물로 나오면 창고 부지로 팔리는데. 여긴 교통도 좋은 편도 아니라서 창고 부지로도 별로 안팔릴 거야.”
창고 건물.
원래 내 계획은 안전한 집을 짓는 거다.
벙커 시설이 있는 그런 집.
“그렇군요. 이 땅은 얼마 가격이면 살 수 있어요?”
“음... 2억 6000만 원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땅 주인은 2억 9000만 원을 부르더라.”
“그래요?”
“그런데 너 정말 이곳을 사도 괜찮겠어? 집까지 건축하려면 꽤 돈이 들 텐데.
교통도 그렇고. 생활권도 썩 좋은 편이 아닌데.”
“괜찮아요. 제가 보기엔 여긴 경치도 좋고 집을 짓기에 딱 좋은데요. 저는 어떻게든 여기를 살 의향이 있어요. 하지만 이모부가 적당히 가격 흥정 좀 잘해 주세요.”
“그래. 그래야지. 내가 최대한 2억 6000만 원에 받도록 해볼게. 고수야, 내가 잘 아는 맛집이 있는데 점심 먹으러 가자. 이모부가 산다.”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낮 12시 15분.
이따 3시면, 2050에게 보냈던 그림 분석이 끝이 난다.
그러면 재빨리 보완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빠듯하긴 하지만 점심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예, 가요. 이모부.”
* * *
집에 들어와 후다닥 타블렛 앞에 앉으니 2시 57분이다.
휴우, 나는 숨을 골랐다.
전원 버튼을 켜고 그림을 그릴 세팅을 했다.
이내 까톡이 왔다.
까톡!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한 결과, 퀄리티를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23%만 보완해주세요.
흠, 완성작을 너무 성급하게 넘겼었나.
23%.
그래도 오늘이 금요일 오후이고, 18레벨 마감 시간은 일요일 밤 11시까지니.
충분하다 못해 널널하다.
이번에도 차감 없이 통과다!
12억 9856만 원! 가자!
나는 펜을 잡고 눈을 번뜩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남은 시간에 김수호에게 넘겨서 없어질 그림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남겨 둘...
내 작품도 그려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마어마한 걸작 몇 작품만 남겨둬도 내 이름 석 자 충분히 남길 수 있지 않겠나!
* * *
주말 밤 9시 반 즈음, 수연이가 집 근처로 오는 바람에 함께 한강 변으로 나왔다.
나는 마침 블랙카드 18레벨도 통과한 참이라서 여유롭게 나올 수 있었다.
마감일보다 일찍 통과한 건 이번이 처음.
아마도 텃밭 그림은 단순한 데다 능력도 바짝 올려두고 그려서 그런 것 같다.
후후, 긁을 수 있는 돈은 나로선 기절초풍할 만한 금액이다.
12억 9856만 원.
김수호, 정말 능력 있는 놈이다.
나는 수연이와 함께 한강 변 벤치에 앉았다.
아이스 커피를 홀짝이는 그녀를 힐끗 봤는데.
그녀는 아까부터 종이가방 하나를 들고 다닌다.
오면서 뭐 샀나?
“나 어제 소개팅 했었다?”
그녀가 뜬금없이 꺼내는 말.
하지만 나는 무심히 들었다.
“소개팅? 괜찮았어?”
“응. 괜찮은 편. 근데 별로...”
“그 말은 괜찮다는 거냐? 별로라는 거냐?”
“말 그대로지. 괜찮은데 나에게는 별로라는 거야.”
“흐이그, 이제 드디어 수연이도 모쏠 탈출인가 싶었는데.”
그러자 째릿! 하고 째려본다.
“누구보고 모쏠이라고 하는 거야?”
“너 모쏠인 거 내가 모를까봐?”
“됐다. 내가 이래 봬도 엉. 그동안 좋다고 했던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래그래. 내가 알지.”
“내가 누구 때문...”
“응?”
“아냐, 커피나 마셔.”
그러면서 그녀는 커피를 입에 들이붓는다.
안 차갑냐?
수연이랑은 대학 다닐 때 친하게 지냈지만 내가 졸업 후로는 한 3년은 못 보고 지냈던 것 같다.
내가 학교 다니는 동안은, 다 같이 볼 때 먼저 졸업한 수연이도 종종 와서 만나긴 했었는데.
유라도 같은 학교다.
전공은 달랐지만 동아리 활동하면서 알고 지낸 사이.
그래서 내 친구들도 유라를 잘 알았기에.
가끔은 다 같이 어울리기도 했었다.
생각해보면 유라를 알고 지낸 건 오래되었어도 사귄 건 3년 정도다.
아, 왜 또 갑자기 유라가 생각나지?
나는 상념을 떨치듯 수연이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자.”
집에 가서 그림이나 그려야지.
“고수야.”
“응?”
“내일.”
“내일 뭐?”
“그 날이잖아?”
“그날?”
“응.”
“너 혹시 생일이야?”
“헐.”
“왜 그런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그래. 그럼 너 승진해? 월급 올라?”
“아니야!”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 어제 소개팅한 별로인 남자와 사귀기로 한 건...”
째릿.
“...아닐 테고. 모르겠다. 난 여자들이 오늘 무슨 날이게? 하고 물을 때마다 참 그랬는데. 넌 내일이 무슨 날이냐고 묻냐?”
“이 멍충아.”
“왜! 가 아니고. 내가 왜 멍충이냐?”
“흐흐흫.”
내가 왜! 라고 언성을 높이는 게 웃겼는지 그녀는 갑자기 배를 잡고 웃는다.
그러다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는지 손가락으로 닦으며 종이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게 뭐야?”
“너 내일 생일이잖아. 넌 니 생일도 모르니?”
“아.”
“조그만 걸로 생일 케이크 사왔어. 12시 되면 초 불어주고 싶은데. 벌써 일어나자고 하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