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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그리고 땅을 산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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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의 신호음이 갈 때, 저만치 다가오는 루나를 발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루나는 전에 봤던 하얀 푸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앉은 벤치로 와서 옆에 앉았다.
“또 뵙네요? 고수 오빠.”
“아, 안녕하세요.”
루나는 이른 아침 맨얼굴인데도 뽀얗고 상큼했다.
눈동자는 밝고 부드러운 빛의 갈색이라서 그녀의 뽀얀 피부와 어울렸다.
높게 묶은 긴 머리,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애교 머리가 귀엽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전에 봤던 하얀 푸들이 헥헥 거리며 앉아 있었다.
“아침 드셨어요?”
“아뇨, 아직.”
“저도 아직.”
루나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넘실대는 한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자주 나오시나 봐요.”
“음, 거의 매일 나오는 것 같아요. 그림 마감이 걸려 있을 땐 못 나오고요.”
“마감이요?”
“네. 저에게 돈 주고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 사람이 마감을 정해놨거든요.”
“혹시 웹툰 그리세요? 매일 연재하는 분처럼 마감이 있나 봐요.”
“웹툰은 아니고. 그냥 매번 다급하게 제 그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다지 재밌는 말을 한 건 아닌데, 그녀는 작게 웃었다.
“매번 다급하게 그림을 필요로 한다고요?”
“네. 마감을 어기면 원고료를 막 깎아대서 저 똥줄 타게 만드는 사람이죠.”
“흐흐흥.”
별말 안 해도 루나는 재미나게 웃는다.
“고수 오빠는 어떤 그림을 그리세요? 책 삽화? 아니면 게임 캐릭터? 예술적인 그림인가?”
“책도, 게임도 아니고. 예술적인 목적으로도 그림 그리는 건 아녜요. 좀 더 실용적인 목적으로.”
“아.”
루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실용적이라기보단 생존을 위한 목적이라고 해야 하나.”
“흐흫.”
내 말에 그녀는 또 웃는다.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한 건 줄 알고 웃는 건지.
원래 잘 웃는 아가씨인가 보다.
그러다 넌지시 말하는 그녀.
“오빠는 인기 많으실 것 같아요.”
“저요? 아닌데.”
“그림도 잘 그리고 잘 생기셨잖아요."
"그건 루나 씨가 좋게 봐주시니까."
"그냥 루나라고 불러요. 언제 또 ‘라멘사랑’에 오세요. 언니가 서비스 많이 준다고 벼르고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소 띤 얼굴이라 덩달아 나도 웃는 표정이 된다.
그녀는 뭔가 비타민 같은 여자다.
“내일 아점으로 먹으러 가겠습니다.”
“와, 그럼 기다릴게요.”
뭐, 오늘도 그녀는 내게 영업하고 간 것이지만.
루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강아지를 데리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이모부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가만!
땅을 사고 쉘터를 짓는 일은 돈이 많이 들어가고 큰 문제인데.
이제부터 슬슬 적당한 땅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벙커 노릇을 할 집을 지을 생각이 내게 있는 탓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언젠가 김수호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2050 : 네가 만일 미래를 대비하려고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먼저 내게 검증받는 게 좋을 거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핸드폰으로 김수호에게 톡을 남겼다.
- 고수 : 김수호? 대화할 수 있어?
- 2050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수호님이 조금 후에 답하실 겁니다.
- 고수 :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한강 변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몇 가지 먹을거리를 샀다.
집안에 들어서서, 씻으려고 준비하는데.
까톡!
톡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김수호다.
- 2050 : 무슨 일이지?
- 고수 : 네가 전에 말했었지? 넌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게 할 거라고. 내가 사는 세상은 아포칼립스를 겪지 않게 될 거라고.
- 2050 : 그래.
- 고수 : 네 말대로 그렇게 될 거라 믿기는 하는데. 널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래도 아포칼립스 이야기를 들었는데. 불안할 수밖에 없잖아?
- 고수 : 혹시 일이 잘못되어서 2024년에 아포칼립스가 올 수도 있고.
- 고수 : 그래서 뭔가 대비를 하고 싶거든.
- 2050 : 혹시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벙커나 쉘터를 마련할 생각인가?
금방 알아채네.
아니, 당연한 생각인가?
누구든 벙커나 쉘터 마련은 생각해볼 테니까.
- 고수 : 그래.
- 2050 : 후, 역시 그렇군.
왜 한숨을 쉬고 그래.
- 고수 : 그 반응은 뭐지?
- 2050 : 내가 사는 세상에 영향을 줄까 봐 아직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
- 고수 : 그게 뭔데?
- 2050 : 내가 있는 쉘터. 실은 네가 만든 거야.
- 고수 : 응?
이건 또 생각지 못한 내용이네.
내가 쉘터를 만들었다고?
김수호가 준 블랙카드를 사용해서 쉘터를 만들었나.
- 고수 : 내가 만들었다고? 블랙카드로 긁어서 만든 쉘터인가?
- 2050 : 아니. 미래의 너에겐 블랙카드가 없었지. 내가 있는 곳은 창고 건물을 쉘터로 사용하고 있는 거다.
- 고수 : 창고 건물?
- 2050 :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어떤 기업에서 창고 용도로 사용했던 건물이라 들었다. 그런데 그또한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더군.
- 고수 : 뭐? 그걸 어떻게 알아?
- 2050 : 후에 이 장소를 쉘터로 보완한 것도 너고 . 어쨌든 이곳 덕분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니까. 개인적으로 너에겐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아직 하지도 않은 일로 인해서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 고수 : 근데 그 쉘터 내가 만들었다는 거 어떻게 알아? 혹시 미래의 내가 거기에 있나?
만일 그렇다면 대박인데.
설마 죽었다는 그런 무서운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니겠지.
- 2050 : 이래서 내가 너에게 말을 안 한 거다. 여기에 너는 없다.
- 고수 : 뭐?
- 2050 : 네가 죽었다는 말은 아니고. 네 생존을 모르는 거지. 애초에 너는 이곳에 없었던 것 같다.
- 고수 : 그럼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쉘터를 내가 만들었다는 걸. 혹시 거기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어?
- 2050 : 아니. 없어. 이 쉘터를 네가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이 기묘한 핸드폰을 발견한 직후였으니까.
- 2050 : 이 핸드폰, 네 것이다. 이 핸드폰에 있는 메모장 기록 덕분에 이곳을 네가 쉘터로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오른다.
- 2050 : 언제 내가 대화를 못 하는 상황이 될지 알지 못하니, 본론부터 말하지.
- 2050 : 네 멋대로 쉘터나 벙커 만드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중간에 미래를 비트는 행동을 하려고 한 바람에, 내가 머무는 쉘터에 이상 현상이 생겼다.
- 고수 : 이상 현상?
- 2050 : 이건 나만 느낄 수 있는 건데. 이곳 쉘터가 사라지게 되는 기미를 조금씩 보이는 거지.
- 고수 : 아.
- 2050 : 이곳 쉘터가 아닌 다른 곳에 쉘터나 벙커를 마련하게 되는 거니까.
여기 창고도 들어서지 않게 되는 거지.
- 고수 : 그렇군.
그런 식으로 미래가 변하게 되어 김수호가 처한 상황도 바뀌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싸해졌다.
- 2050 : 나는 미래를 바꿔서 네가 사는 시대에 아포칼립스가 오지 않게 할 생각이지만. 네가 불안한 마음 탓에 대비하려고 하는 건 존중한다.
- 2050 :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굳이 미래를 대비하고 싶으면 내가 찍어주는 주소로 마련하는 게 좋을 거다.
- 2050 : 그래야 서로 좋을 수 있는 거니까.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에게도 차질이 생길 거고. 아포칼립스를 막는 계획도 무산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는 게 좋아.
- 고수 : 그래.
- 2050 : 우선은 내가 찍어준 주소로 땅만 확보해둬. 가능한 한 넓었으면 좋겠군.
- 2050 : 하지만 지금은 능력 레벨 올리는 것이 중요하니 블랙카드를 이용해 서 계약만 우선 해둬. 나는 이만 가야겠다.
- 2050 : 경기도 A시 G동*** 번지.
김수호는 주소만 남기고 사라졌는지 더 말이 없었다.
나는 그와 했던 대화를 다시금 읽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모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이모부가 전화를 받았다.
<어, 고수야. 네가 웬일이야?>
“이모부,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잘 지내지. 네가 비행기 표와 호텔 예약했다며? 덕분에 너의 부모님하고 하노이를 다녀오게 생겼구나.>
“하하, 휴가를 너무 늦게 다녀오시게 되는 거 아닐지 모르겠어요.”
<아니야. 네 덕에 좋은 곳으로 여행 다녀올 수 있어서 우리야 고맙지. 네 이 모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언니랑 여행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요즘 너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들었다. 대견하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고맙습니다, 이모부.”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이모부, 실은 이렇게 전화 드린 이유는요. 땅을 알아볼까 해서요.”
<땅?>
“집을 지으려고요.”
<오! 네가 집도 지으려고? 그래, 땅은 몇 평이나.>
“음, 우선 땅만 사려고 하는데. 제가 살 땅의 주소는 이모부에게 문자로 넣어드릴게요.”
<오, 사고 싶은 땅이 있는 모양이구나.>
“휴가 다녀오시면 회사로 찾아뵐게요. 부모님께는 당분간 말씀드리지 마세요.
이모한테도요. 나중에 제가 부모님께는 직접 말씀드릴게요.”
<음, 그러려무나. 내일부터 휴가이고 이번 오는 금요일부터 출근할 거야.>
나는 옅게 웃었다.
“휴가 잘 다녀오세요. 제가 찾아뵙는 건 금요일로 할게요. 그때 회사로 찾아 갈게요.”
<그래. 그래라. 여행은, 내가 네 부모님 잘 챙겨드리고 잘 다녀오마. 네가 비행기 표와 호텔 비용을 댔으니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게>
“고맙습니다, 이모부.”
* * *
일요일에도 혼자서 그림만 그리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을 불렀다.
집들이 겸이라고 해야겠다.
혼자 집에 있다 보면 적막해서 내 마음이 허해지는 게 있었다.
늘 모이는 멤버인 강재와, 진구, 준호.
그 외에 가끔 만나는 민석이와 우진이까지.
그들이 내 집에 오자 떠들썩해졌다.
아마도, 나는 시끌시끌한 거로 내 마음을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은 프리랜서로 하던 일을 다 그만둔 상태라서, 사람 만날 일이 더욱 적어진 상태다.
나는 그들을 위해 배달 어플로 이것저것 잔뜩 주문했다.
전날에 맥주와 소주, 음료까지 잔뜩 배달해두었었다.
요리하는 건 내가 바빠서 안 되겠고.
배달 어플을 애용하는 나다.
친구들은 화장지와 술, 과일, 간식 같은 걸 집들이 선물로 가져왔다.
내가 화초를 잘 못 키운다는 걸 아는 친구들은 알아서 화분을 사 오지 않았다.
그들과 잠시 대화하다가 방에 들어가 타블렛 앞에 앉았다.
그들은 거실에서 알아서 잘 놀 테고.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림을 그리면 된다.
나는 전에 김수호가 보냈던 자료 사진.
통조림, 쌀포대, 생수통 그림을 그렸다.
몇 시간만 이걸 그리다가 다시 18레벨 그림인 텃밭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 재능 능력은 창의력을 한 번 더 올렸다.
17레벨에서 긁을 수 있는 금액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그림 재능을 한 번 더 올렸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림 작가 11레벨
그림 속도 : 4
그림 기교 : 5
창의력 : 4.』
창의력 수치를 올릴 때, 블랙카드로 무려 5억 1200만 원이나 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