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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그리고 땅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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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분석하는 데 4시간.
그럼 시간을 절약할 겸, 그 4시간 동안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 전에, 불편한 점 한 가지는 해결해야겠다.
나는 핸드폰으로 톡을 적었다.
- 고수 : 김수호.
- 2050 : 수호님은 지금 메시지를 남기실 수 없습니다. 저에게 질문하시면 답해드리겠습니다.
- 고수 : 김수호가 이따 확인하고 톡을 남기는 게 좋겠군.
- 고수 : 아무래도 뭔가 조정이 필요해. 레벨마다 정해진 금액을 써야 하는거 불편해. 금액이 이월되고 그러면 좋겠는데.
- 고수 : 지금 16레벨에서 긁을 수 있는 금액이 거의 1억 9000만 원인데. 재능 레벨업 다음 비용은 2억 5000만 원이 넘잖아.
- 고수 : 너도 생각해보면 알겠지? 이러면 재능 레벨업 하는 게 애매해진다고. 넌 내 재능 레벨 올리는 게 목적이라 하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톡 메시지를 적고 나서 전에 김수호가 보내왔던 자료 사진을 열었다.
산더미 통조림과 쌀 포대, 생수가 찍힌 사진이다.
17레벨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건데.
창의력을 올리니 미미하게 뭔가 달라진 게 있긴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사진 보고 복사하듯 그림을 그리는 거라서 창의력보단 속도와 기교를 중시했었다.
속성으로 능력 올릴 생각만 했던 거다.
그런데 창의력을 ‘2’로 올리고 나니 미미하게 달라지는 게 보였다.
창의력을 올리기 전까진, 내 그림 작품은 그냥 잘 그려진 작품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완벽하게 잘 그려진 그림이랄까.
워낙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그린 그림이라서 퀄리티가 높아질수록 그냥 사진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작품으로 보인다.
이전엔 그냥 기계적으로 잘 그린 그림이었다면 지금은 ‘작품’인 거다.
뭔가 예술적으로 격이 올라간 느낌이다.
그냥 보면 별 차이가 없는데.
은연중에 풍기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심미안을 지닌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거다.
17레벨 그림을 완성해놓고 2050에게 보내기 전, 나는 잠시 내 그림을 감상했다.
“후후.”
믿기지 않네.
이게 내가 그린 거라니, 이러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그리게 되는 건 아닐까.
흡족해져서 내가 그린 그림을 사진 찍어두었다.
김수호가 이 그림을 사용하고 나면 사라질 거라는 게 아쉽다.
다시 펜을 잡고, 한동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3시간쯤 후에 김수호에게서 톡 메시지가 왔다.
까톡!
- 2050 : 고수.
나는 그림 작업 삼매경이었다가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 고수 : 어. 말해.
- 2050 : 나 역시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네 말대로 이전 레벨에서 미처 못 쓴 금액은 다음 레벨에서 이월할 수 있도록 해주지.
- 고수 : 오! 잘 생각했어. (눈을 반짝이는 이모티콘) - 2050 : 대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 고수 : 뭐? 왜?
- 2050 : 만약 이월하게 되면 그 레벨에서 긁을 수 있는 금액은 20% 깎는 거지.
- 고수 : 깎는다고? 정말 이럴 거야? 이래저래 깎을 생각만 하네.
- 2050 : 네 편의를 봐주는 대신, 뭔가 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 고수 : 됐다. 그냥 이월 안 하고 다 쓰련다.
- 2050 :
김수호는 할 말을 잃은 건지 아니면 고민하는 것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작성했다.
- 고수 : 근데 말이야. 재능 레벨업 비용은 계속 그렇게 두 배씩 올라가게 되어 있어? 네 능력도 그래?
- 2050 : 그래.
- 고수 : 헐. 엄청나구먼.
나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그림이나 그려야지.
김수호와의 협의도 틀어졌으니.
그때 김수호로부터 다시 톡이 왔다.
- 2050 : 고수.
- 고수 : 왜?
- 2050 : 좋다.
- 고수 : 뭐가?
내 이름 불러놓고 왜 대뜸 좋다고 말하고 그래.
앞뒤 말 좀 붙여가면서 말하지.
- 2050 : 이대로는 네가 또 블랙카드를 흥청망청 쓸 것 같아서.
- 고수 : 내가 언제 흥청망청 썼다고.
김수호는 침묵하는 동안 내가 했던 제안에 관해 고민했었나 보다.
- 2050 : 이번 한 번만 아무런 조건 없이 다음 레벨로 이월하는 걸 수락하지.
- 고수 : 후후, 고맙네. 네가 조건 없이 금액을 이월해서 쓰게 안 해주면. 이번에 그 얼마더라. 거의 1억 9000만 원을 울며 겨자 먹기로 홀라당 쓸 뻔했어.
그러자 김수호는 한참 만에 톡을 보내왔다.
- 2050 : 속 편해서 좋겠군.
후, 이 녀석... 내가 마냥 속편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누구한테도 털어놓지도 못하고, 앞일에 관해 고민하면서 날밤 까며 그림 그리고 있건만.
다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즈음.
까톡 알림이 왔다.
까톡!
그림 분석이 끝났나 보다.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한 결과, 퀄리티를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12%만 보완해주세요.
음, 생각보다 보완할 부분이 적게 나온 것 같다.
15%에서 20% 정도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었는데.
아마도 창의력을 올린 탓에 그림에 스미게 된 예술적인 미가 다른 흠을 상쇄했었나 싶다.
나는 다시 확인하듯 AI 2050에게 물었다.
- 고수 : 이번에 16레벨에서 못 긁은 금액은 17레벨로 이월되는 거 맞지?
- 2050 : 예, 맞습니다. 17레벨을 차감 없이 통과하시면 금액이 합산되어 총 8억 3828만 원을 쓰실 수 있습니다.
- 고수 : 오! (경탄하는 이모티콘)
17레벨만 거의 8억 4000만 원.
어마어마하다.
이 정도면 미친 듯이 돈 지랄을 해줘도 될 것 같은 금액인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네.
- 고수 : 2050. 김수호는 계속 블랙카드 결제 대금 감당할 수 있나 봐?
- 2050 : 물론입니다. 고수님은 카드 결제 대금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고수 : 그거참, 좋은 말이군. 카드 대금 결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근데 재능 레벨은 몇 레벨이 만렙이지?
- 2050 : 능력 레벨의 한계는 없습니다. 무한입니다.
그렇군.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2050이 보내온 그림 파일을 열었다.
이제 수정 보완을 해야 한다.
펜을 잡은 채 눈을 번뜩였다.
가자! 이번엔 8억 3828만 원이다!
* * *
저녁 7시 3분.
마감을 맞추느라 점심과 저녁을 먹질 못했다.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사람 몰골이 아니다.
머리는 못 감아서 떡 졌고.
면도도 못 해서 꺼칠했으며 눈가는 다크서클로 퀭하다.
나는 대강 세수를 한 뒤에 나와서 거실에 있는 2인용 소파에 앉았다.
얼마 전에 적당한 가격으로 인터넷에서 산 소파다.
뭐 먹을까?
오늘은 주말인데.
급 외로워지네.
핸드폰으로 단톡방으로 들어가 친구들에게 톡을 남겼다.
- 고수 : 뭐하냐? 우리 집으로 안 올래? 맛있는 거 쏜다.
- 준호 : 얌마, 뒤늦게 나타나서 쏜다고 하면 다냐? 이제껏 톡도 안 읽은 주제에.
- 강재 : 고수야, ㅊㅋㅊㅋ 한다! 너 아우디 샀다며?
- 진구 : 나 지금 저녁 먹고 있는데?
- 준호 : 나도 이제 저녁 먹으러 왔다.
- 강재 : 나는 형 집에 왔어.
씁, 혼자 밥 먹어야겠군.
조금 전에 레벨 통과해서 기분이 좋았던 게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5분 전에 2050에게서 받았던 톡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블랙카드의 레벨이 18레벨로 상승합니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차감 없이 레벨을 통과했으니 오늘은 조금 누려도 되겠지.
나는 혼자 히죽 웃으며 배달 어플을 검색했다.
오늘은 돼지 갈비다!
석갈비 3인분, 물냉면 ‘소’자 추가, 공기밥 추가, 반찬이랑 상추 추가, 파채 추가.
추가 메뉴에 다 체크한 다음 블랙카드로 결제했다.
그러고는 냉장고 앞으로 가서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18레벨 자료 사진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무슨 거창한 무기일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사진이었다.
조그만 텃밭 사진이었다.
주변 풍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다.
한 평 정도 되었을까.
흙이 꽤 보드랍고 비옥해 보였다.
하지만 텃밭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비어있다.
나는 의아해져서 2050에게 톡을 보냈다.
- 고수 : 자료 사진 잘못 온 거 아냐?
그러자 마침 김수호가 있었는지 2050이 아닌 그가 답했다.
- 2050 : 18레벨부터는 창의력 수치가 많이 필요할 거다. 자료 사진의 주변 풍경은 됐고. 텃밭만 그리면 된다.
- 고수 : 텃밭 사진은 뭐하게?
- 2050 : 텃밭이 왜 필요하겠나? 뭔가를 심으려는 거지.
- 고수 : 음, 그렇군. 근데 아무것도 없는 밭에 창의력이 많이 필요한 이유는 뭔데?
18레벨 자료 사진은 생각보다 간단해 보였다.
배경 풍경도 없고 그냥 흙만 있는 텃밭만 있어서 내가 그려야 할 그림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보드라운 흙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긴 했다.
- 2050 : 그건 네가 그려야 할 자료 사진이 오염되지 않은 땅이기 때문이다.
- 고수 : 응?
- 2050 : 내가 사는 세상의 땅은 이미 오염되고 죽은 땅이거든. 그런 땅에 뭔가를 심어봤자 기괴한 식물밖에 자라지 않는다.
- 고수 : 그렇군.
- 2050 : 하지만 네가 그릴 땅은 오염되지 않았고 살아있는 땅이지. 거기에 무엇이든 심으면 생명력을 한껏 머금은 싹이 움트게 되는 거다.
- 2050 : 그러니 이후로는 재능 수치를 올릴 때 창의력 위주로 올려.
- 2050 : 창의력은 전에 없던 것에서 새로운 걸 창조해낸다는 부분에서 창조능력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지.
- 고수 : 창조 능력?
내가 묻자 김수호는 조금 느리게 답했다.
- 2050 : 넌, 18레벨 이후로는 생명력이 깃든 뭔가를 그리게 될 거다.
* * *
일요일 아침 일찍, 한강 변으로 나왔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그나마 무더위가 많이 가셨다.
아침 운동으로 조깅을 한 후에, 늘 앉던 벤치에 앉았다.
나는 지난밤에 재능을 레벨업했던 일을 떠올렸다.
17레벨에서 긁을 수 있는 금액, 8억 3828만 원.
창의력 수치를 올리니 2억 5600만 원이 결제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돈이 그냥 한순간에 사라지니까.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픈 기분이다.
다음 레벨은 더 어마어마할 텐데.
창의력을 올려서 변한 내 재능 스탯은 이러했다.
『그림 작가 10레벨
그림 속도 : 4
그림 기교 : 5
창의력 : 3.』
이제 17레벨에서 긁을 수 있는 금액은 5억 8228만 원이다.
재능을 한 번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비용은 된다.
하지만 워낙 거금이라 결제하기가 무섭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고 이모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부는 부동산 중개법인 회사에 꽤 오래 일한 거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