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5화 (1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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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거쳐가는 차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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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6, 7천만 원?”

“6, 7천? 이야, 상금이 꽤 되나 본데?”

나는 일단 아우디 A5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비싸고 럭셔리하며 뽀대나는 억대 명품 카를 사볼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블랙카드로 얼마든지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나이에 굳이 요란한 차를 몰고 다닐 필요도 없고.

아우디 A5만으로도 충분히 과하다.

무엇보다 지금은 재능 레벨업을 하고 그 외의 돈도 조금씩 마련해서.

벙커 노릇도 겸할 집 마련이 더 중요하기도 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딜러가 우리를 응대했다.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카탈로그를 보며 딜러의 상담을 한동안 받았다.

“A5, A6 두 차종 모두 할인이 꽤 높습니다. 가격은 큰 폭으로 차이 나진 않고요. 고객님께서 일시불 구매를 하신다고 하시니 좀 더 할인 혜택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고객님 취향에 따라 선택하시면 됩니다만. 아무래도 고객님의 연령이 젊으신 편이니 A5 하셔도 좋고요. 가족용 세단으로는 A6가 괜찮으실 겁니다. 디자인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예쁘게 빠졌어요.”

우리는 한동안 설명을 듣다가 전시장에 있는 차량을 구경했다.

딜러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 생각이 계속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처음 생각대로 A5를 구매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당장 결정하려고 하자 진구가 슬며시 물었다.

“야, 이렇게 금방 결정해도 괜찮냐?”

“요즘 그림 그리느라 깊게 고민할 시간도 없다. 마감에 치이는 인생이야.”

“그러게. 너 요즘처럼 그림을 빡시게 그렸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만 빼면.”

그의 말대로,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학교 다닐 때는 열정도 있었다.

그러다 내 재능과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보니 그 열정도 어느 순간 시들해졌던 것 같다.

블랙카드와 김수호를 만나기 전까진 그러했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신차 무료 시승을 신청해두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우디 세단 시승도 해볼 수 있었다.

1일 1인 1차량만 시승해볼 수 있었지만, 진구가 동행한 덕분에 2개의 신차를 시승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승을 해보고 나서 바로 계약을 진행했다.

차는 이미 풀옵션이었고 딜러가 선팅과 광택을 해준다고 했다.

계약금을 우선 계좌이체로 지급하고 출고 날짜에 블랙카드를 긁을 생각이다.

진구는 매장을 나오면서 내게 말했다.

“이야,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고수야, 부럽다.”

“흐흐. 요즘 며칠 사이 많은 게 획획 변하고 있어서 솔직히 실감이 안 난다.”

“하긴 그러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 나한테 바퀴벌레 잡아달라고 그랬는데.”

“실은 지금 지내고 있는 집도 아직은 낯설다.”

“친구로서 좀 안타깝긴 했어. 계속 뭔가 애쓰긴 했어도 네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잖냐. 역시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야.”

앞일은 모르는 말이라는 말에 나는 쓴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 다가올 2024년.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그날 영상 파일을 통해서 봤던 사람들의 몰골이 자꾸만 떠오른다.

비쩍 마르고 한없이 초라해 보였던 그들.

24년도부터 50년도가 되기까지 숱한 공포와 고생과 슬픔을 겪어냈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김수호는 그러한 미래는 바뀌게 될 거고.

내가 사는 세상은 아포칼립스를 겪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니.

나는 그의 말을 믿으며 기대를 걸어보려 한다.

* * *

한동안 집밖에 나가질 않았다.

이번 토요일 저녁까지 17레벨을 통과해야 한다.

이번에 통과하면 6억 4928만 원.

금액은 완전 후덜덜하다.

이걸 감당하는 김수호도 후덜덜하다.

그는 대체 무슨 수로 블랙카드 대금을 감당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짐작으로는 그가 아는 미래 지식으로 뭔가 자금을 마련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나는 배가 고파져서 밖으로 나왔다.

바람도 잠깐 쐴 겸, 조금 걷다 보니 ‘라멘 사랑’ 간판이 보였다.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홀에서 서빙하던 여자가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에 한강 변에서 내게 초콜릿 캔디를 줬던 여자다.

“어? 오셨네요.”

“네, 그냥 지나다가.”

“여기 앉으세요.”

굳이 ‘라멘 사랑’을 찾아온 건, 한강변에서 마주쳤던 그녀가 예뻐서라기보단 마침 배도 고프고 라멘도 먹고 싶어서였다랄까.

나는 그녀가 안내한 테이블에 자리했다.

핸드폰으로 힐끗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시 반이다.

식사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조그만 홀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다.

그녀가 메뉴판을 내게 가져왔다.

“조금 전까지 바빴는데 딱 좋은 시간에 오셨어요. 안 그랬으면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눌 뻔했어요.”

나는 메뉴판을 받아들며 그녀에게 대꾸했다.

“바쁘셨으면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을 것 같은데. 점심 드셨어요?”

“아뇨. 실은 이제 막 대충 때우려던 참이었어요.”

“대충 때우면 쓰나요. 잘 드셔야죠. 혹시 식사하실 거면 지금 드세요.”

“음, 그럼 같이 먹어도 돼요? 언니는 점심 전에 밥을 먹어서. 저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럼요. 같이 먹어요.”

빙긋 웃으며 답하자 그녀는 냉큼 내 앞에 앉았다.

그녀는 메뉴판을 보며 내게 메뉴 추천을 했다.

“요거랑 요거, 맛있어요. 이것도. 다 제가 먹어봤는데. 저희 언니 솜씨 끝내 줘요.”

“음, 그럼 돈코츠라멘 2개, 메밀 냉소바, 소고기 초밥, 교자 만두. 이렇게 주시면 되겠네요.”

그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다 드시게요?”

“같이 먹을 건데요. 물론 제가 사는 거예요. 그때 초콜릿 캔디 고마웠어요.”

“아, 초콜릿은 별거 아니었는데. 암튼 잘 먹을게요. 오늘 점심은 푸짐하네요.”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작은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찼다.

돈코츠 라멘은 반숙 달걀, 버섯, 생숙주가 적당히 들어가서 맛있어 보였다.

수저로 국물부터 홀짝 마셔보니 진한 맛이 나쁘지 않다.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전 루나에요. 루나 리.”

“저는 고수요. 이름이 외자에요. 근데 루나 씨는 미국서 살다 왔어요?”

“네. 제 외할머니가 미국 사람이에요. 저의 엄마는 혼혈이시구요.”

어쩐지 피부가 되게 하얗고 얼굴이 조그맣다고 생각했다.

쌍꺼풀이 진하거나 하진 않지만 코는 꽤 오뚝했다.

“음, 고수 오빠는 학생이에요? 오빠는 꼭 미대 오빠 같이 생겼어요.”

미대 오빠같이 생긴 건 뭐냐?

근데 이쁘장한 애가 오빠라고 부르니 듣기는 좋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미대 졸업했는데.”

“와, 진짜요? 딱 분위기가 그래요. 미대 오빠 같아.”

“후후.”

“그러면 그림 되게 잘 그리시겠다. 그림 그린 거 볼 수 있어요?”

얘는 밥 먹는데 계속 말 시키네.

나는 초밥을 씹으며 생각했다.

핸드폰에는 레벨업한 재능으로 그린 그림이 없으니, 어쩐다.

“그림 그리는 거 보여줄까요?”

“어, 진짜요? 음, 지금은 밥 먹는 중이니까 다 먹고 보여주세요.”

“좋아요. 이따 보여줄게요.”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무렵, 루나는 식탁을 정리한 후에 종이와 볼펜 하나를 가져왔다.

“지금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요. 이걸로 보여주세요.”

밥 먹으러 왔다가 난데없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생겼다.

생각해보니, 재능 레벨업을 한 후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타블렛으로 블랙카드 레벨 올리느라 바빴던 탓이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예전에 즐겨 그리던 캐릭터 그림을 떠올렸다.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건 그런 거다.

나는 볼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그러자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오빠 엄청 빨라요!”

음? 나도 모르게 습관대로 빠르게 그렸던 것 같다.

루나는 꽤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마침 가게 홀로 들어오는 손님이 있자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이미 내 그림에 마음이 팔린 듯, 대강 주문을 받고서 내 앞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빠, 손이 진짜 빨라요. 그런데도 이렇게 잘 그린다고요?”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았던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어? 그림 그리시네요? 저희도 봐도 돼요?”

“아, 네. 물론입니다.”

내 손놀림이 평소 속도에 4배속으로 움직이는 셈이니 엄청 빠르긴 하다.

사람들 눈을 의식하며 속도 조절을 하려고 하는데.

루나는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흥분하며 외친다.

“어, 오빠. 왜 갑자기 느리게 그려요? 방금 엄청 빠르게 그렸는데.”

여자 손님들도 내가 그림 그리는 광경이 신기했는지 자리에 앉을 생각을 안한다.

그녀들도 연신 감탄했다.

“와, 진짜 잘 그리시네요.”

“솜씨가 정말 좋으세요. 벌써 다 그리셨어.”

주방에 있던 루나의 언니까지 홀로 나와서 내 그림을 구경했다.

어느새 내 주변으로 여자들이 빙 둘러 있다.

어?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지.

이만 집에 가고 싶은데.

“다른 그림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너무 신기해요. 그림 그리시는 거 촬영해도 되요?”

“하하. 제가 시간이 없어서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는데.

루나의 언니가 내게 말했다.

그녀 역시 꽤 미인이었다.

“오늘 덕분에 멋진 구경을 했네요. 유명한 작가님이신가 봐요.”

“아뇨. 무명 작가입니다.”

“드로잉이 엄청 빠르신데 이 정도 퀄을 그리시는 분이 아직 무명이시라니. 금방 유명해지시겠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개인전 하시면 인기 많으실 것 같아요. 그림 그리시는 모습을 라이브로 선보이셔도 주목받으실 것 같고요.”

“하하, 네.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은 미처 못 드렸지만, 다음에 오시면 서비스많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루나가 카운터에서 계산했다.

그녀는 주변 눈치를 보더니 소곤거렸다.

“이건 저희 가게 개업 선물인데요. 수건이에요. 오늘 점심 맛있게 얻어먹은 답례로 오빠한테만 많이 드릴게요.”

그러면서 종이 가방에 수건을 5개 담았다.

“고마워요.”

종이 가방의 맨 아래는 미처 못 먹어서 포장한 만두와 초밥이 있다.

그걸로 저녁을 때워야지.

식당을 나오니 3시 25분이다.

* * *

마감 날인 토요일 오전.

나는 드디어 완성한 17레벨을 2050에게 보냈다.

16래벨에서 긁을 수 있는 금액은 현재 1억 8900만 원 정도 남은 상태다.

부모님에게 하노이 여행 가시라고 비행기 표와 호텔을 예약해서 블랙카드를 조금 긁었었다.

남은 금액은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

재능 레벨업도 할 수 없고.

다음 재능 레벨업 비용이 2억 5000만 원이 넘는다.

그때 2050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4시간이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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