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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카드로 내 삶도 레벨업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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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밥솥도 부모님 것과 내 것까지 사고 에어컨도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재는 슬슬 이런 내가 무서워지는지 소곤거렸다.
“야, 너 이거 다 사는 거 아니지?”
“너도 와봐서 알잖아. 우리 집에 아무것도 없는 거.”
“진짜 살 거야? 아무리 그래도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막 지르냐? 고수이자식, 이런 캐릭터였나.”
나는 대충 둘러댔다.
“실은 얼마 전에 공모전에 당선되어서 상금 받은 게 있어.”
“뭐? 진짜?”
“얌마, 표정 관리해. 우리 모르는 사이잖아. 크흠, 저기 부모님이 보실 TV도 사고 싶은데요.”
점장이 근처로 다가오자 나는 의식하며 강재에게 말했다.
그러자 강재는 내가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넵,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상금, 아니 TV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날 강재가 일하는 매장에서 내가 구매한 금액은 다해서..
15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결제는 계좌이체.
가전제품 쇼핑을 마친 내가 매장을 나서자 점장은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 안내해주신 직원분 정말 친절하시더군요. 저 여기서 전부 살 생각 없었는데. 직원분이 너무 친절하셔서 그냥 여기서 다 구매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정진수 씨라는 분이요.”
“예.”
“그분 그래도 되나요? 애초에 제가 박강재 씨에게 설명 듣고 싶다니까. 그분이 그러더군요. 박강재 씨는 신입이라 뭘 모른다고 하고 고객에게 컴플레인 받는다고 하더니. 저는 오히려 저분 때문에 불쾌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불쾌하셨다니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암튼 배송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매장을 빠져나왔다.
* * *
타블렛 앞에 앉은 나는 전에 김수호가 보냈던 톡을 다시 확인했다.
- 2050 : 16레벨 마감 날짜는 월요일 오전 10시까지로 하지.
휴, 이번에도 마감 기일이 촉박한 건 마찬가지.
하지만 저번에 재능 레벨업을 제법 해서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하루 정도 밤새다시피하면 말이다.
나는 16레벨에 그릴 자료 사진을 응시했다.
이번엔 전투용 드론이다.
제법 덩치가 있어서 소형 미사일도 탑재했다.
생김새는 복잡했고 굉장히 섬세해서 조금 난이도가 필요해 보이는 피사체다.
이번에 16레벨을 차감 없이 통과한다면 블랙카드로 긁을 수 있는 한도는...
3억 2464만 원.
정말 후덜덜한 금액이지만, 재능 레벨업 비용도 그만큼 오르니.
이제는 막 가슴이 설레거나 그러지는 않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점심 무렵, 츄리닝 차림으로 집 밖으로 외출했다.
옛날 돈까스 가게로 와서 주문을 한 뒤, 생각에 잠겼다.
흠, 돈을 조금씩 모아서 부모님이 거처할 만한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좀 달리해야겠다.
2024년에 뭔가 일이 생긴다면, 삐까번쩍한 집이나 빌딩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수 있다.
물론, 김수호는 미래를 바꾸겠다고 했지만.
앞일은 모르는 일.
우선 적당한 곳에 땅을 사둘까?
그래서 튼튼한 집을 짓고, 그 집의 지하에는 비밀 벙커를 만드는 거다.
블랙카드라면 그런 집을 짓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그러다 며칠 전에 그와 대화했던 일이 떠오른다.
- 고수 : 김수호. 2050년도의 서울 풍경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주었으면 좋겠는데.
- 2050 : 이곳 세상의 풍경은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고수 : 왜?
- 2050 : 네 멘탈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될 테니.
- 고수 : ㅋㅋ 설마 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닐 테지.
- 2050 : 적이 없는 풍경 사진으로 보내도록 하지.
그러고서 보내온 사진은 서울을 멀리서 찍은 사진과 폐허가 된 도시 일부분을 찍은 사진이었다.
생각보다 2050년도의 세상은 파괴된 정도가 심했다.
생존자 모습도 얼핏 보였는데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었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 고수 : 여기 한반도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지? 네가 사는 세상에서 그나마 멀쩡한 곳.
- 2050 : 미래 정보를 통해 안전한 장소를 미리 물색하려는 모양인데.
- 2050 : 그건 의미 없는 행동이다.
- 고수 : 어째서?
- 2050 : 왜냐면 앞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안전하던 곳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위험하던 곳이 안전한 곳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지.
- 고수 : 흐음.
- 2050 : 그러니 내가 당분간 그림만 그리고 재능을 레벨업하라고 한 거다.
나는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다가 식당 홀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테이블 두세 군데에 사람들이 앉아 돈까스를 먹고 있었다.
20대 젊은 사람도 있고 아이와 아기 엄마도 있다.
식당 밖으로 보이는 거리를 내다보면, 지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저 일상적인 모습들.
그런 일상이 가능한 세상에서 나는 그저 그림이나 그리고.
지금처럼 친구들을 만나고 한강을 근심 없이 산책하기도 하면서.
계속 그렇게 지내고 싶다.
가만! 부모님, 여행 보내드리는 건 어떨까.
이제껏 비행기 한번 못 타보셨는데.
미래는 어찌 바뀔지 모르니, 부모님도 좋은 곳에 많이 가보고 그러셨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바쁘세요?”
<아니. 지금은 한가해. 아들은 뭐 하고 있었어?>
“점심 먹어요. 엄마, 며칠 후에 집으로 냉장고하고 TV, 청소기, 밥솥이 배송될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배송 가기 전에 배송기사가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할 거예요. 그리고 이모 요즘 바쁘지 않죠?”
<아들, 또 돈 쓴 거야? 대체 얼마나 산 거야?>
어머니는 내가 돈을 쓴 것에 대해 걱정하며 잔소리를 할 참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쾌한 목소리로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껏 못해본 효도를 할 생각에 신바람이 나 있었다.
“이번에 휴가 가야죠? 그동안 한 번도 못 가셨잖아요? 이모네랑 여름 휴가로 하노이 다녀오세요. 제가 이모 가족 것까지 비행기 표하고 호텔 예약해 둘게요.”
<수야!>
“아셨죠?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나는 통화를 끝내고 마침 나온 돈까스를 먹기 시작했다.
* * *
월요일 새벽 3시.
새벽까지 쉬지 않고 그려서 완성한 그림을 2050에게 보냈다.
AI 2050에게 그림을 보내자 곧바로 톡이 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3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3시간이나 걸린다니.
나중엔 며칠씩 걸린다는 소리가 나오겠다.
분석 결과는 이따 확인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나는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웠다.
퀸사이즈의 모션 베드 침대.
확실히 비싼 침대인 만큼 잠을 자는 게 행복하다.
거기에다 보송하고 부드러운 새 이불을 덮고 푹신한 베개를 베니.
천국이 따로 없다.
“흐아, 좋다아.”
나는 서늘한 이불의 감촉을 만끽하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다.
그러다.
까톡!
까톡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마감을 맞추려면 보완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한 결과, 퀄리티를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11%만 보완해주세요.
11%.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면 양호하다.
하지만 레벨업을 3번이나 했는데도 이런 식이면 다음 레벨도 어렵겠는걸.
2050이 보내온 그림 파일을 열어보았다.
여기저기 붉은 표시가 나 있다.
전부 손을 봐야 할 부분이다.
“흐음.”
나는 타블렛 앞에 앉아 전원 버튼을 켜고 펜을 들었다.
심혈을 다해 수정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아침 6시.
마감 시간이 오전 10시까지인데 이번에는 맞출 수 있을까.
내가 수정한 그림을 2050에게 보내자 곧바로 답톡이 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20분이 소요됩니다.
휴, 이제 마감까지 3시간 남았는데.
20분 소요.
배고프니까 우선 밥이나 먹고 오자.
나는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먹던 음식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데운 음식으로 대강 배를 채운 다음, 타블렛 앞으로 갔다.
현재 시각, 6시 20분.
까톡!
메시지가 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한 결과, 퀄리티를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2%만 보완해주세요.
나는 눈을 번뜩 빛냈다.
내 눈앞에 3억 2464만 원이 어른거렸다.
이번엔 차감 없이 통과한다!
* * *
결국, 나는 16레벨을 차감 없이 통과했다.
고스란히 긁을 수 있게 된 3억 2464만 원.
후후, 인간 승리한 기분인데.
한숨 자고 저녁 무렵에 한강변으로 나왔다.
요새 운동을 많이 못 해서 조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훗, 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집을 마련했었지.
츄리닝을 입고 한강변으로 나가 한동안 뛰었다.
저녁이라도 아직은 더운 날씨라서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간혹 한강변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배가 슬슬 고픈데 오늘 뭐 먹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하얀 푸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나이는 어려 보인다.
이제 22세 정도?
긴 머리를 올려 똥머리를 했는데, 피부가 하얗고 몸매가 날씬해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그녀는 걷더니 내가 앉은 벤치에 와서 턱 하니 앉았다.
나는 태연한 척하려 하는데, 옆에 앉은 그녀가 자꾸 신경쓰였다.
아래 앉은 하얀 푸들이 나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인다.
왜, 뭐?
꼬르륵.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이놈의 눈치 없는 뱃속이 밥 달라고 요동을 쳤다.
그러자 나를 쳐다보던 푸들의 입매가 실룩였다.
으르렁 거리려고 폼잡는 거다.
꼬르르.
"크르릉."
으르렁 거리는 푸들.
이 멍멍이 자슥이!
내 뱃고동 소리가 언짢은 거냐.
분명 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렸을 터.
쪽 팔리는군.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드실래요?”
“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의 손바닥에 초콜릿 캔디가 놓여 있다.
배고파 보였나 보네.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캔디를 받았다.
“하하, 감사합니다.”
“근처 사세요?”
“네.”
“언제 저쪽에 있는 ‘라멘 사랑’에 한번 오세요. 내일 오픈하거든요. 라멘도 맛있고 메밀 소바도 맛있어요. 저희 언니가 하는 가게거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하더니.
“그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푸들과 함께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쁘장한 아가씨가 나에게 말을 거나했더니 영업 당한 거였군.
* * *
김수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까톡!
- 2050 : 고수, 있나?
- 고수 : 왜?
- 2050 : 다음부터는 창의력도 조금씩 올리는 게 좋을 거다.
- 고수 : 왜? 속도와 기교만 올려도 부족한데. 어차피 사진 보고서 고대로 복사하듯 그리는 건데. 창의력이 필요하나?
- 2050 : 필요할 거다. 네 그림에 생명력을 더해줄 테니.
웬 생명력.
나는 일단 대답했다.
- 고수 : 뭐, 그러지. 그런데 김수호.
- 2050 : 왜?
- 고수 : 네 능력, 나도 볼 수 있나? 내 그림이 어떤 식으로 실물로 변하는지 보고 싶군.
- 고수 : 이젠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 2050 : 좋아 보여주지.
김수호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이내 나에게 동영상 파일을 2개 첨부했다.
나는 그가 보내온 파일을 열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