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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카드로 내 삶도 레벨업한다(소제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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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스탯이 다시 바뀌었다.
『그림 작가 8레벨
그림 속도 : 4
그림 기교 : 5
창의력 : 1.』
이제 남은 금액은 232만 원.
내 계산은 이러했다.
다음 레벨은 이번 레벨보다 긁을 수 있는 금액이 클 테니.
그때 마감 기일을 어겨서 많이 깎이는 것보다 이번에 능력을 올려두어서 수월하게 넘어가자는 식이었다.
우선은 통장에 블랙카드로 인출 해둔 돈이 조금 있으니.
그것으로 당장 필요한 물건을 살 생각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인터넷 쇼핑 중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카드를 긁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집안 방구석 안에서 카드는 얼마든지 긁을 수 있다.
백화점이나 아울렛 같은 곳에 가서 옷을 사도 되겠지만 시간을 아끼고 싶다.
우선 남은 한도, 232만 원으로 자잘하게 내 옷가지를 사고.
생필품을 구매 결제했다.
새 베개와 이불을 주문하고 바지와 운동화, 티셔츠와 가방, 속옷 등을 샀다.
이렇게 뭔가를 한꺼번에 사보는 건 처음인데.
카드 긁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새 블랙카드를 긁는 일에 익숙해졌는지 가슴이 벌렁벌렁하지도 않다.
조만간 내집 현관문 앞에 택배 박스가 한가득 쌓이겠군.
이제 블랙카드 남은 금액은 15만 원.
나는 인터넷으로 가전제품을 검색했다.
대충 뭘 살지 생각해두고 강재한테 연락할 생각이었다.
강재는 가전제품 매장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웬만하면 그놈 실적 좀 올려줄 생각이었다.
부모님 집에 있는 냉장고 좀 바꿔드려야지.
내가 쓸 것도 몇 가지 사고.
어머니는 분명 싫다고 하시겠지만, 냉장고가 배송되어 오면 마지 못해 즐거이 쓰실 거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을 들었다.
어머니에게 전화 좀 할까.
내가 핸드폰을 들었을 때, 갑자기 수연이에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덜컥 받아져 버렸다.
<고수야. 나 수연이. 전화 바로 받네? 그동안은 통 연락 안 되더니.>
“아, 응. 핸드폰으로 어디 전화하려다가.”
<그 말은 얼결에 받았다는 거냐?>
“하하, 그건 아니고. 마침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는 얘기지.”
<너 오늘 바빠?>
“왜?”
<진구가 그러는데. 너 요즘 매일 일만 한대. 그래서 잠깐 쉬기도 하면서 일하라고. 내가 너 바람 쐬어주려고 하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거참 고맙네.”
<나와. 저녁 먹자.>
그동안 계속 그림만 그리긴 했었다.
잠깐 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대학 친구 수연이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음, 어디로 갈까?”
<나 곧 퇴근하거든? 내가 너의 집 앞으로 갈게. 차 있으니까. 주소 찍어서 보내줘.>
수연이는 나와 같은 미대를 나와서 출판사에 취직을 했었다.
그곳에서 편집 디자인 업무를 한다고 들었다.
나는 통화를 끝내고 집 근처 위치를 수연이에게 까톡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대강 씻고 집 밖으로 나갔다.
도로변으로 나가 조금 기다리니 경차를 몰고 수연이가 집 앞으로 나타났다.
차창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미는 그녀.
“고수야, 타.”
끝에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머리가 귀엽게 잘 어울리는 그녀다.
내가 그녀의 차에 올라타자, 수연이는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여기 사는구나? 한강변이 가까워서 좋네. 우리 이따가 거기서 맥주 마시자. 참, 나 차 가져왔지.”
“후후, 산책하면서 커피 마셔도 되고. 저녁 뭐 먹을래? 내가 산다.”
“올, 그럼 나 비싼 거 먹어도 돼?”
“그래, 비싼 거 먹자.”
“그럼 나 대박 비싼 거! 그동안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거 있는데. 헤헤.”
“뭐? 한우 스테이크?”
여자들은 보통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거 좋아하지.
비싼 거라면 스테이크 먹고 싶은 거 아니겠나.
“아니. 나 떡볶이 먹고 싶었어. 요 근처에 오다가 떡볶이집 있는 거 봤어. 거기 갈래?”
“그래, 가자. 나도 오랜만에 떡볶이 먹어보자.”
“그럼 출발한다!”
수연이는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였다.
그런 점이 좋아서 학교 다닐 때도 꽤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수연이는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잘 지냈어도 유라는 유독 싫어했었다.
우리는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가, 저녁 후에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니 한강 공원은 산책하기 좋게 선선해졌다.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거닐다가 수연이가 이런 말을 했다.
“너 한동안 여친 만들지 마.”
“왜?”
“그래야 내가 너랑 이렇게 놀기도 하지.”
수연이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유라하고도 다시 안 만났으면 좋겠어.”
나는 피식 웃었다.
“걔는 너무 이기적이야. 제멋대로에다 여우 같고.”
“당분간 여자 안 만나. 지금은 그림만 그릴 생각이야.”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름밤을 시원케 해주던 바람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날렸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수연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이란 건 어떤 그림을 말하는 걸까?”
수연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으니 뭔가 진지한 대답을 해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 으음...”
그녀는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저만치 어둠에 잠긴 한강과 불빛으로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다가 내게 입을 열었다.
“행복하게 하는 그림이 아닐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행복해지는. 어차피 예술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존재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수연이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가장 위대한 그림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그림이 아닐까 싶어. 더 거창하게 말해보면, 인간의 삶에 선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해야겠네.”
“그렇군.”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김수호는 내게 가장 위대한 그림을 그리게 될 거라는 소리를 했었는데.
그림으로써, 불행으로 예정된 미래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는 의미인 걸까?
* * *
이번에 그림 재능 중에서 속도 스탯 1을 올리고 기교 스탯을 2를 올리니.
확실히 내 실력이 달라졌다.
속도는 뭐, 전부터 내 손에 모터를 단 기분이긴 했는데.
거기에다 더 빨라졌다.
내 손놀림에 머무는 시간이 4배속으로 흐르는 기분이랄까.
물론, 내 두뇌 회전과 감각, 눈썰미도 그 놀라운 속도에 편승한 것 같았다.
이번에 2단계 껑충한 그림 기교.
확실히 체감이 되긴 했다.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어떻게 그려야 할지 스스로 터득이 되고 깨달아졌다.
이런 경험은 재능 레벨업을 한 이후 겪는 일이다.
그림 선과 채색, 명암, 표현, 그 모든 것이 유려해지고 매끄러워졌다.
내가 잡은 펜 끝은 거침이 없어졌고.
슥슥 나아가는 그림의 선이 지극히 아름다워졌다.
이 정도로 레벨업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그림 기교는 천재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걸 나 혼자 목격하고.
나 혼자 누린다는 사실이 새삼 아깝고 아쉽게 여겨질 지경.
나는 그림 그리던 걸 멈추고 컴퓨터에 저장된 폴더를 열어보았다.
내가 이제까지 블랙카드 레벨마다 그렸던 그림들.
놀랍게도 그 그림들은 전부 다 사라졌다.
얼마 전에 김수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2050 : 그림이 사라지는 이유는, 그것이 실물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 고수 : 뭐?
- 2050 : 내 능력이 그러하다. 그림을 실물로 바꾸고 나면 그림은 존재함이 사라지는 거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그림은 남겨둬야 하는데.”
언제 타블렛이 아닌 종이와 물감으로 직접 그림을 그려서 남겨두어야겠다.
흐음, 그림 그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남겨둘까.
그것도 괜찮을 듯한데.
나는 그림 작업을 하던 걸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입던 옷 그대로 차림으로 외출했다.
집 밖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근처 가전 제품 매장으로 향했다.
강재가 일하는 가전제품 매장에 방문한 것이다.
그에게는 나를 아는 척하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해두었다.
막상 매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강재는 점장에게 실적이 좋지 못하다고 깨졌던 모양.
얼굴이 허여멀건 한 직원이 먼저 내게 다가와 응대했다.
강재는 여기 매장에서 일하면서 꽤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강재의 스트레스 요인, 아마 저놈일 거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것저것 살 게 많은데 먼저 냉장고부터 보려고요.”
“아, 그러시군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 직원분이 설명을 더 잘하실 것 같은데.”
“아, 저 직원은 아직 신입이라 제품 설명을 들으실 때 좀 불편하실 수 있어요. 그래서 고객들에게 컴플레인도 들어오고 그렇습니다.”
“어, 그래요?”
신입은 개뿔.
경력은 둘이 비슷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놈이 번번이 고객도 가로챈다고 했었지?
평소 이런 식으로 했었나 보군.
이름은 정진수.
강재는 나를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반갑게 아는 척하려다 멈칫했다.
내가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던 게 뒤늦게 생각난 거다.
“부모님에게 보내드릴 건데. 4도어 냉장고는 가격대가 얼마나 하죠? 제가 전에 봐둔 모델이 있거든요. TV에서 무슨 컬렉션 하면서 광고하는 거 있죠? 한 120만 원이면 사려나? 가격은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하는데.”
나는 정진수에게 그렇게 말하다가 어떤 냉장고 모델을 발견하고서 외쳤다.
“아! 이거, 이 모델. 이걸 사고 싶은데.”
“아, 이거요. 이 모델이 맞는데요. 이건 좀 가격이 셉니다. 다른 걸 보시는 게.”
“아뇨. 이거 사고 싶어요. 가격이 있더라도 부모님 드릴 거니까.”
“이건 가격이...”
“한 150만 원 해요?”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보일 듯 말 듯 피식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꼬투리 잡았다.
“어? 방금 웃으셨어요? 비웃으신 거 같으네.”
“아뇨. 그게 아니라... 이게 가격이 거의 400만 원 하거든요.”
그러면서도 계속 입가에 웃음기를 매달고 있는 그다.
“지금 무시하세요? 왜 가격을 말하면서 계속 웃으시지?”
“아니 무시한 게 아니라 고객님이 사시기엔 가격대가 있다고 말씀드린 건데.”
“내가 왜 저 냉장고를 못살 거라 단언하죠?”
“그럼 저 냉장고로 하시겠습니까? 괜히 나중에 반품이라도 하시면...”
그의 말투에 짜증이 살짝 스며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정말로 내 마음이 언짢아졌다.
“와, 열 받네. 반품이요?”
내가 언짢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자 점장이 다가와 정진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당장에 점장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 이 분이 저 모델 냉장고 가격을 말하면서 고객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네요. 무슨 고객 응대가 이따위인지. 저 기분 나빠서 다른 곳에서 사야겠네요.”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제품 설명도 해드리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혹시 음료나 커피 괜찮으신지.”
“아아요.”
“네?”
내가 그 와중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달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자, 점장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정진수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인다는 게 오해하신 듯합니다.”
“고객을 보며 피식하고 웃는 게 친절한 미소인가 보죠? 나는 왜 빈정 상했지.”
그때 강재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잽싸게 준비해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고객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제품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아, 고마워요. 이쪽 직원분은 센스 만점이시네.”
“감사합니다.”
“암튼 저 냉장고를 살까 하는데 좀 크기가 있네요. 저희 부모님 집이 현관문이 크지 않아서 냉장고가 잘 들어갈지 모르겠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송기사님이 냉장고를 분리해서 안전하게 설치해드리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리고 제가 쓸 냉장고도 보려 하는데. 가격대는 150만 원 정도?”
“그렇다면 고객님에게 보여드릴 게 있는데 잠깐 이쪽으로...”
“예.”
우리는 점장과 정진수를 왕따시키며 구매할 제품에 관해 화기애애하게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나는 냉장고 외에도 부모님께 드릴 무선 청소기와 내가 쓸 로봇청소기를 구매했다.
크으, 로봇청소기.
이런 거 정말 사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