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하는 날 2
------------------------------------------------------------------------
“진짜 너무해. 네가 매일매일 생각나잖아.”
기가 막힌다.
유라, 나와 헤어진 거 까먹었나?
술 취한 척 이러는 거, 정말 내가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는데.
그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더욱 팔을 감고 매달렸다.
야, 그만 좀 달라붙어! 날도 더운데.
헤어지고 다른 놈한테 가 놓고는 나에게 이런다는 게 열 받는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김유라!”
유라는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서도 내게 안 떨어졌다.
“왜에?”
토끼 눈을 하고 애기 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녀.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가져왔다.
그리고 핸드폰에 걸려 있는 패턴을 풀었다.
내가 전에 걸어준 패턴이 여전히 그대로다.
단축키 1번을 누르자 내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단축키도 바꾸지 않았어?
그렇다면 2번.
유라의 새 남자친구의 이름이 뜨고 신호음이 갔다.
유라는 핸드폰을 도로 가져가려 했다.
“이리 줘!”
나는 핸드폰을 쥔 손을 높이 들었다.
그녀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었는데도 팔이 내가 쥔 핸드폰에 닿지 않았다.
"줘!"
"이동훈. 네 새 남친 이름이지?"
"이리 주라니까!"
"맞나 보네. 지금 여기서 네 남친 보고 데리러 오라고 할까?”
“미안. 가면 되잖아. 이리 줘.”
그때 이동훈이 전화를 받았다.
<유라야, 저나해쪄?>
순간, 내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하마터면 유라의 핸드폰을 내던질 뻔.
나는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끄고 그의 폰번호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그녀에게 주자 내게 말했다.
“진짜, 나빴어.”
“나쁜 건 너야. 다신 찾아오지 마. 찾아와도 나 여기 없어.”
이사 갈 거니까.
"잠깐 얘기해. 그것도 안돼?"
"방금 네 남친 번호 외워두었다. 또 이러면 그놈에게 전화걸 거야."
나는 돌아서서 도로 원룸으로 들어갔다.
아차! 편의점에서 살 물건 있었는데.
뒤늦게 생각나서 주춤하는 사이.
유라는 이런 내 등 뒤에 대고 외쳤다.
“미안해. 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었단 말이야. 흑.”
편의점이고 뭐고,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원룸으로 들어와버렸다.
* * *
어느덧 이사하는 날이 되었다.
내가 굳이 이사하는 날짜를 주말로 잡은 건,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토요일 새벽아침부터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 그림을 제대로 그리진 못할 것 같아서 마감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굳이 포장 이삿짐센터를 부르진 않은 건, 원룸에서 가져갈 만한 짐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침대, 옷장, 책상, 냉장고, 세탁기는 어차피 원룸의 옵션 물건일 뿐이었다.
침구와 옷가지는 전부 낡아서 버릴 생각이었다.
컴퓨터는 진구에게 주기로 했다.
아침 10시 즈음 되자 진구와 준호, 강재가 차를 몰고 원룸으로 왔다.
“고수야, 짐은 다 쌌냐?”
“아직.”
“아, 여태 안 하고 뭐 했냐?”
“새벽부터 일어나서 움직였거든?”
“야, 우리는 뭐하면 돼?”
“저기 책들만 박스에 넣어서 포장해주면 돼.”
“어, 그래?”
“강재는 나랑 물건 좀 밖에다 내다 놓자.”
“그런데 고수야, 오늘 오마카세 먹는 거 맞지?”
이놈들이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런치 오마카세에 홀려서다.
나는 이들에게 사시미 오마카세를 사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늘 내가 이사하는 것보다 오마카세 먹는 여부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래. 오늘 사시미 오마카세, 쏠 거니까 빨리빨리 움직이자.”
“아싸! 후딱 끝내버리고 오마카세 먹으러 가자!”
친구 놈들의 행동이 갑자기 빠릿빠릿해졌다.
그들의 손놀림에 신바람이 일었다.
우리는 준호의 SUV에 박스 몇 개를 실었다.
전부 버리고 가는 거라 박스 몇 개면 끝이 났다.
나는 준호의 차에 탔고 나머지는 진구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잠시 후, 우리는 내가 이사할 집에 도착했다.
신축 투룸.
이미 그곳엔, 내가 구매했던 침대와 책상, 컴퓨터가 놓여 있다.
옷장, 침구류와 식기는 오늘 중으로 배송될 거고.
나머지는 차차 채워 넣을 생각이다.
친구들은 가져온 짐을 대강 풀고 정리를 해주었고.
우리는 오마카세 맛집으로 향했다.
런치로 1인당 8만 원 하는 곳이었다.
사시미 오마카세는 스시와 사시미가 함께 나오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약에 룸에 자리하니 곧 음식이 나왔다.
나는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어서 조금 어색했다.
전복이 조금 썰어 나오고 계란찜도 나왔다.
와, 이런 데서 먹는 계란찜은 집에서 먹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맛있는 건, 참치 뱃살.
물론 고등어도 살살 녹는다.
그리고 디저트까지.
런치라서 가볍게 맥주를 마셨지만 차를 가져온 강재와 진구는 음료를 마셨다.
새벽부터 이삿짐 싸느라 피로했던 게 싹 풀리는 순간이다.
친구들과 대화 좀 하다가 그곳에서 헤어진 후, 나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직은 이 집이 낯설다.
대강 집안을 청소하고 타블렛 앞에 앉았을 때, 김수호에게서 까톡이 왔다.
- 2050 : 생각해봤는데.
생각해봤다고 운을 떼는 게 어째 불안하다.
- 2050 : 내가 그동안 마감 기일을 넉넉하게 줬던 것 같아.
나는 급하게 톡을 보냈다.
- 고수 : 그게 무슨 소리야?(깜짝 놀라는 이모티콘) 전혀 안 넉넉해. 지금 충분히 촉박해.
- 2050 : 마감이 촉박했다면 금액이 차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능 레벨을 올리는 걸 우선으로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 고수 : 미안. 이번 레벨만 봐줘. 이번에 15레벨 통과하면 재능 레벨 제대로 올릴 생각이었어.
- 2050 : 그래, 한번만 봐주지. 내게 중요한 건 돈보다 네 재능이니.
- 고수 : 고맙다.
나는 그렇게 톡을 적다가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질문했다.
- 고수 :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2050년의 세상에서 어떻게 나에게 톡을 보낼 수 있는 거지? 그 시기엔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는 건가?
- 2050 : 아니. 시간 여행 같은 건 할 수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굳이 이런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겠지.
- 고수 : 흠, 하긴.
- 2050 : 내가 너에게 톡을 보낼 수 있는 건 내가 가진 핸드폰 때문이다.
- 고수 : 핸드폰?
- 2050 : 29년 전의 핸드폰을 얼마 전에 우연히 습득했거든.
- 고수 : 헐. 29년 전? 그게 작동이 돼?
김수호가 사는 세상에서 29년 전이라면 2021년도에 나온 핸드폰이겠군.
- 2050 : 2050년의 세상에서는 29년 전의 물건을 충분히 복구할 기술이 되니까.
- 고수 : 그렇군.
- 2050 : 암튼 이유와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핸드폰을 통해 너와 연결될 수 있었다. 정확히 2021년의 너와 연결된 거지.
- 고수 : 신기하네. 네가 가진 핸드폰 기종이 뭔데?
- 2050 : S사에서 나온 핸드폰이군.
- 고수 : S사? 내 것도 그런데.
설마 핸드폰 기종까지 똑같은 건 아니겠지.
- 고수 : 그런데 오래된 핸드폰을 습득했다고 해서, 그 핸드폰이 출시되었던 시대와 연결이 될 수도 있는 건가?
- 2050 : 보통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어떻게 이런 일이 나타날 수 있는지 아직 나도 모른다.
- 고수 : 흠, 또 궁금한 게 있는데.
- 2050 : 말해.
- 고수 : 그, 미래에선 말이야. 사람들이 막 초능력 같은 걸 쓸 수 있나 봐?
김수호는 그림을 실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고 그러고.
나는 김수호와 연결된 덕분에 그림 재능이 레벨업이란 것도 한다.
김수호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 2050 : 내가 사는 세상은 ‘죽음’이 우글대는 구렁텅이다.
- 고수 : 응?
- 2050 : 모든 희망은 메말라 부스러지는 백골 더미와 같아졌지.
늘 담백한 태도이던 김수호답지 않게 심각한 말을 늘어놓아서, 나는 듣기만 했다.
- 2050 : 이런 세상인데도 한 줄기 빛은 주어졌더군. God lives. 몇몇 사람에게 능력이 나타났지. 대부분 초인적인 육체적인 힘이고.
- 2050 : 그중에서 내게 나타난 능력은 독보적이다.
김수호, 이런 녀석이었군.
자기 입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독보적이라고 하네.
- 2050 : 그림을 실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내가 사는 세상에선 유일하지.
- 고수 : 이열, 대단한데? (엄지 척 이모티콘)
엄지 척! 요런 반응을 기대한 건가?
- 2050 : 하지만 내 능력은 반쪽짜리다.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으니까.
- 고수 : 그렇겠군.
- 2050 : 그러다 너를 만난 거다. 우리에게 나타난 능력은 숙련도가 올라가기 위해선 조건이 있어.
- 고수 : 어떤 조건?
- 2050 : 코인을 투자해야 하지. 네가 있는 세상에선 돈을 투자해야겠군.
- 고수 : 아, 그래서.
- 2050 :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블랙카드를 만들었다.
- 고수 : 그럼 너는 그 특별한 핸드폰을 습득한 후에 곧바로 나에게 접근한 건가?
- 2050 : 아니. 여러 밑 작업이 필요했지. 이를테면 너를 낚을 블랙카드를 발급받는 일이라던가.
- 고수 : ㅎㅎ 나를 낚는다고? (펀치 날리는 이모티콘)
- 2050 : 아무래도 너의 신뢰와 동의, 협력을 끌어내야 했으니까.
- 고수 : 가만. 시간여행은 불가능하고, 핸드폰으로 2021년도의 내게 연결된 거라면. 블랙카드는 어떻게 만든 거지?
나는 의자에 앉은 채 등받이에 기대며 한동안 핸드폰 까톡 창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놈, 대답이 없다.
이대로 대화가 끊어지는가 싶다가 김수호가 톡을 보내왔다.
- 2050 : 그건 나중에 말하지. 고수, 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을 그리게 될 거다. 나는 이만 가야겠군.
김수호는 뜬금없는 말을 하더니 멋대로 대화를 끝내버렸다.
나는 타블렛 펜을 잡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오늘 밤샘해야 블랙카드 금액이 덜 차감될 것 같은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이고 뭐고.
지금은 갑자기 피곤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 * *
내가 15레벨을 통과한 건 수요일 오전 11시였다.
원래 마감 시간은 토요일 저녁 7시여서 금액은 3번이나 차감되어야 했다.
정말이지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그렸는데도 이런 식이면.
진짜, 마감에 관해서 김수호와 심각하게 협의 좀 해야겠다.
15레벨이 1억 6232만 원이었으니까, 1회 차감 금액은 1600만 원이었다.
그래서 차감되고 내가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은 1억 1432만 원.
실컷 차감되고도 후덜덜한 금액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던 대로 재능 레벨업을 시도했다.
계약서 파일을 열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2050 고수. 그림 속도 레벨업.”
블랙카드로 1600만 원이 차감된다.
“그림 기교 레벨업.”
이번엔 3200만 원이 차감되었다.
재능 레벨업에 소모되는 금액도 갈수록 부담된다.
변화된 내 그림 재능 스탯은 이러했다.
『그림 작가 7레벨
그림 속도 : 4
그림 기교 : 4
창의력 : 1.』
이렇게 돈으로 재능을 사고 나니, 15레벨에서 내가 쓸 수 있는 금액은..
6632만 원이다.
다음 재능 레벨업 금액은 어차피 6400만원.
한 번 더 재능을 레벨업을 해야 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정하고서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림 기교 레벨업.”
다시금 6400만 원이 블랙카드로 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