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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8화 (8/153)

집도 업그레이드 해보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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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가 고장 나서 손빨래를 하시는 생각났던 터라.

인터넷으로 제법 큰 용량의 드럼 세탁기를 주문했다.

블랙카드로 120만 원을 결제했다.

그러다 전에 김수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엇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데? 미래엔 식량 부족이 심한가 봐? 혹시 환경오염? 전쟁?’

‘비슷해. 너에게 분명하게 말하지. 내가 식량과 무기가 필요한 건 세상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

그는 내게 말했었다.

그림 의뢰하는 이 일에 그의 삶이 달렸다고.

왠지, 그 말이 자꾸 내 마음에 맴돌았다.

나는 그의 말대로 내 실력을 키우고 싶다.

이건 전부터 생각해오던 바.

사실, 재능은 물질적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메고 왔던 백팩을 뒤져 그 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파일 안에 든 계약서.

그것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2050 고수.”

그러자 계약서에 어떤 글귀가 홀연히 나타났다.

내 재능 스탯이다.

『그림 작가 2레벨

그림 속도 : 2

그림 기교 : 1

창의력 : 1.』

나는 재능 스탯을 보면서 또다시 중얼거렸다.

“그림 기교 능력 레벨업.”

내가 중얼거린 말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블랙카드에서 200만 원이 결제되더니 글귀가 스르르 바뀐 것이다.

『고수 / 28세

그림 작가 3레벨

그림 속도 : 2

그림 기교 : 2

창의력 : 1.』

나는 타블렛으로 내 능력을 시험해보았다.

12레벨 자료 사진을 열고 스케치를 해보는데, 확실히 내 안에 자신감이 깃드는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림의 선이 훨씬 유려해지고 섬세해진 게, 내 눈으로도 보였다.

나는 새삼 신기하고 어이없어져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

돈으로 재능을 살 수 있다니.

내가 지금 이 순간 겪는 일인데도 믿기지 않는다.

* * *

화요일 새벽에 srt 기차에 올랐다.

창가에 앉아 아직 동이 트지 않아서 새까맣게만 보이는 창가를 무심히 응시했다.

집을 나오기 전, 나를 배웅하는 어머니에게 말했었다.

“엄마 통장으로 300만 원 넣었어요.”

“뭐? 아니, 왜?”

“아버지, 임플란트 하시라고 넣었어요. 어제 갈비 드실 때요. 치아 때문에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잖아요?”

“수야.”

어머니는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다.

“엄마, 조금 더 있다가 돈을 더 넣을 테니까. 아버지, 이번에 인플라트 다 하시라고 해요.”

“이번 한 번이 아니라 전부? 네 아버지, 인플란트 많이 해야할 것 같은데. 돈이 많이 들 거야."

"네, 전부 다 하시는 게 좋겠어요. 한꺼번에 말고 기간을 조금씩 두고."

"수야, 엄마가 미안해. 그동안 너 고생만 했는데.”

“고생은 무슨. 아버지, 어머니가 더 고생하셨지.”

“남들처럼 너한테 좋은 거 못 해주고. 너 혼자 대학 졸업하게 하고. 아들은 서울에서 고시원, 반지하에서 지내는데 부모라고 아무것도 못 보태줬잖니? 오히려 아버지가 진 빚을 네가 다 갚았지.”

어머니는 왜 또 그런 옛날이야기를 해서 울컥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사실, 학교 다닐 때 나는 많이 궁색 맞긴 했었다.

밥값 아끼느라고 라면 한 봉을 끼니마다 나눠 끓여 먹기도 했었으니까.

데이트 비용 아낀다고 사귀던 여자랑도 헤어지곤 했었으니까.

나는 상념을 그치며 괜히 차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위이이이잉-

준호 녀석이다.

나는 심드렁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어.”

<이번 토요일에 유진이 결혼식 가냐?>

“가야겠지. 아, 정장 좀 사야 하나?”

<그래, 좀 사라. 임마. 봄에 진아 결혼식 때, 너 너무 추레했어.>

“이 자식, 팩폭하네.”

피식하며 대꾸하는데 준호는 여전히 진지했다.

<이번에 유라도 결혼식 올 건데. 좀 약오르지 않냐? 걔, 새 남친 데리고 올거 아냐?>

“데려오든 말든.”

<넌 열 안 받냐? 난 내가 약오르는데? 야, 너도 예쁜 여친 만들어서 데려와.

근사하게 빼입고.>

“얼씨구. 전 여친 약오르라고 새 여친 만드냐?”

<내가 정장 빌려줄게. 요번에 새로 장만한 거 있어. 넌 여친만 구해.>

“됐다. 할 짓도 없네.”

<넌 내 친구지만 참 이해가 안 간다. 폰에 여자 번호도 많으면서 왜 그러고 사냐? 나 같으면...>

“엄한 데 낭비할 에너지 없다. 집도 장만해야 하고.”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블랙카드를 떠올렸다.

“...그게 내 손에 들어온 동안, 열심히 돈도 재능도 만들어 놔야지. 그래야 앞으로 먹고살 거 아니냐?”

<흐음,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이번엔 네 말대로 쫙 빼입고 갈게. 기대해.”

그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핸드폰으로 부동산 어플을 열었다.

보증금 5000만 원에서 7000만 원의 투룸을 검색해 보았다.

부동산 어플에 올라와 있는 투룸 사진들을 훑어보면서, 나는 혼자 히죽 웃었다.

전부터 꿈꾸었던 게 있긴 했다.

드레스 룸과 작업실이 따로 있는 신축 빌라.

돈이 더 모이면 아파트도 상관없고 경치 좋은 곳의 전원주택도 상관없다.

작업실을 마련하면 책상과 타블렛, 컴퓨터, 모니터, 의자까지.

전부 좋은 것으로 싹 바꿀 생각이었다.

조만간 그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지니 괜히 설레기까지 한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작업 돌입이니, 지금은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

* * *

어느덧 날이 기울었다.

나는 12레벨 그림을 작업하다가 잠시 쉬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그러면서 모니터의 그림을 응시했다.

“음.”

확실히 훨씬 수월해졌다.

속도와 기교를 높여놓은 상태라서 그런지.

그림을 그리는 내 손놀림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평소라면 이 정도 퀄리티를 몇 시간 만에 그릴 수 없을 거라서.

나는 괜히 흡족해져서 그림을 응시하게 되었다.

12레벨을 통과하면 블랙카드로 2048만 원을 긁을 수 있다.

마감 날짜는 내일 저녁까지.

이번엔 절대 깎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른다.

그러다 주말에 참석할 결혼식을 떠올렸다.

“아, 귀찮네.”

여름 정장 하나를 사긴 해야 했다.

밖에 나가 쇼핑할 시간은 없으니.

인터넷으로 대강 구매해야겠다.

나는 컴퓨터의 인터넷 창을 켰다.

그러고는 브랜드의 정장을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아르마니 여름 정장도 눈여겨봤다.

내가 아는 명품 브랜드는 이것 밖에 없다.

한 번 질러볼까.

내가 언제 나를 위해 이렇듯 투자해본 적이 있었던가.

돈도 생겼으니 이 정도는 나를 위해 좀 해보자.

정장 가격이 150만 원에서 200만 원 사이였다.

그중에서 180만 원짜리 슈트 한 벌을 블랙카드로 결제했다.

그리고 역시 아르마니 구두를 70만 원 결제하고 주문했다.

안에 입을 셔츠와 평소 쓰지 않았던 남성용 화장품, 면도기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이제 11레벨 블랙카드로 긁을 수 있는 잔여 한도는 250만 원.

나머지는 현금으로 인출해야겠다.

“훗.”

이걸 빼입고 그날 결혼식 가면 친구 녀석들 뒤집히겠군.

그날 마주칠 유라는 어떤 눈으로 나를 보게 될까.

솔직히, 유라에게 미련은 없다.

하지만 그날 마주치게 된다면 예전처럼 내 초라함 때문에 상처받고 싶진 않아서.

나를 위한 방패로 이 모든 걸 지른 셈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깍지 끼고 위로 늘리며 스트레칭하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이제 또 작업 좀 해볼까?”

* * *

이틀 후 오전.

나는 큰맘 먹고 외출하여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방문했다.

오늘 아침에 드디어 12레벨을 통과한 상태였다.

물론, 마감은 하루 어겨서 200만 원만 깎였고.

무려 1800만 원을 블랙카드로 긁을 수 있게 되었다.

1800만 원이라니.

이 돈을 내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긴 하다.

블랙카드 11레벨까지는 잘 실감이 안 났는데.

12레벨이 넘어가니까 돈의 액수에 내 심장이 벌렁벌렁해지기 시작했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있는 의자에 앉으니까 공인중개사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방은 원룸 구하시게요?”

“아뇨. 투룸으로.”

“아, 투룸. 가격대는 어느 정도...”

“보증금 5000만 원에서 7000만 원 정도면 좋을 것 같네요.”

“월세는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원하시는 조건 말씀해 보세요.”

“음... 월세는 50에서 70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조건은 신축이 고요. 주변이 조용했으면 좋겠네요. 아래층이 식당인 곳은 안 되고요. 수압좋고. 남향이면 좋겠고,”

“예.”

“주차장도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교통도 좋으면 좋고. 주변에 어느 정도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좋겠죠.”

조건을 많이 늘여놓기는 했어도, 공인중개사 아저씨는 군말없이 내가 말하는 것을 메모했다.

그는 내가 말한 조건을 가늠해보더니 입을 뗐다.

“지금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5군데가 있어요. 7000에 65만 원짜리가 있는데. 이것부터 보실래요?”

“그 집은 어디에 있는데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지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지도의 어느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깁니다. 10층짜리인데 이 집은 8층이고요. 엘리베이터 있어요. 지은 지 4년 되어서 신축이나 마찬가지예요. 주차장은 차 1대는 댈 수 있을 겁니다. 걸어서 5분 거리 안에 지하철역이 있는데. 다소 흠은 투룸치고 좁아요. 골목도 좁고. 아무래도 보증금이 저렴하다 보니.”

“흐음, 일단 거기부터 보죠.”

“그럼 거기부터 가보겠습니다.”

우선 1년만 살고 블랙카드 레벨이 오르면 빌라나 아파트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안내한 집을 돌아보았다.

막상 그곳으로 가보니 집이 너무 좁고 신축답지 않게 지저분했다.

그래서 좀 더 가격이 센 집을 돌아보고, 그 집을 덜컥 계약하고 말았다.

보증금 8000만 원에 월세 70만 원짜리.

그 집은 10분 거리에 한강변도 있어서 좋았다.

블랙카드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집을 구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계약금 800만 원을 지불하고 저녁은 밖에서 해결하면서.

나는 두둥실 떠오르는 내 마음을 한동안 꾹꾹 내리눌렀다.

드디어 원룸을 벗어난다는 희열.

조만간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기쁨.

그러면서도 동시에 고개를 드는 부정적인 감정도 다스렸다.

내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가격의 집을 계약했다는 두려움.

블랙카드를 잘 사용해서 보증금과 월세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싶은 염려.

그런 감정들이 내 안에서 얽히고 섥혔다.

나는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당분간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거다.

그림을 잘 그려내면 나도 좋고, 김수호도 좋을 일이 되지 않겠는가!

* * *

그날 밤, 나는 잠시 김수호와 대화를 나누었다.

- 2050 : 고수. 13레벨의 마감 날짜는 모레 저녁 9시까지다.

- 고수 : 이번엔 4056만 원을 결제할 수 있는 거지?

- 2050 : 깎이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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