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재능을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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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타블렛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친구들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 고수 : 모레 저녁, 시간 되는 사람? 내가 소갈비 쏜다.
- 김준호 : 진심?
- 박강재 : 오늘 만우절이냐? 고수가 소갈비를 쏜다고?
- 이진구 : 진짜 소갈비 쏘는 거냐? 너 에어컨이나 어떻게 해봐, 임마!
- 고수 : 에어컨 고쳤다. 월세도 냈고.
- 박강재 : 오! 돈 좀 들어왔나 봐?
친구들은 내가 한턱 낸다는 것을 선뜻 믿지 못하면서도, 반응이 요란했다.
한동안 단톡방이 시끌시끌한 것을 내버려 두고.
나는 그림이나 그렸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나서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유라와 헤어지고 그동안 심적으로 평안치 못해서 안부 전화를 못 드렸었다.
신호음이 가고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수야, 우리 아들. 그러잖아도 엄마가 전화해보려 했어.>
“별일 없으세요?”
<별일 없지. 너는 어디 아픈 데 없고?>
“네. 엄마,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버지랑 엄마는 건강하세요?”
<우리는 괜찮아. 네 아버지, 치아가 안 좋은 것만 빼면.>
나는 조금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엄마, 죄송해요.”
<뭐가?>
“그냥요. 엄마, 조만간 저 내려갈게요. 시장에서 반찬 장사하시는 것도 이젠 쉬엄쉬엄하세요.”
<아들, 내려오게? 바쁠 텐데. 언제 내려오니?>
내가 조만간 집으로 간다고 하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내가 오랜만에 집에 가곤 할 때면, 며칠 전부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셨다.
그러면서 온갖 음식을 장만하시는 거다.
“다음 주말 즈음에 내려갈게요. 엄마, 음식 같은 거 하실 필요 없어요. 이번에 제가 가면 끼니마다 맛있는 거 사드릴 테니까.”
<호호. 네가 그렇게 말하니 엄마 너무 기다려진다. 그래, 그림 그리는 일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잘 챙겨.>
“예.”
통화를 끝내고 타블렛 모니터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 온기가 어렸다.
내 입꼬리는 미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푸근하고 평안해지는 모양이다.
모니터를 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림의 고수다. 할 수 있다!”
* * *
다음 날 오후, 겨우 10레벨을 통과했다.
마감을 이틀이나 못 지킨 탓에 100만 원이나 차감되어, 이번에 긁을 수 있는 금액은 412만 원이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블랙 카드의 레벨이 11레벨로 상승합니다.
AI가 이런 톡을 보내고 나서, 10분 정도 지났을 때.
김수호에게서 톡이 왔다.
- 2050 : 고수. 곧 택배가 도착할 거다.
- 고수 : 계약서입니까?
- 2050 : 그래. 읽어보고 원하면 사인하면 돼.
- 고수 : 네, 그러죠.
그렇게 답변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택배가 온 모양이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보니 택배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것을 개봉하자 안에 계약 문서가 나왔다.
나는 침대로 와서 털썩 앉으며 계약서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갑은 김수호였고 을은 나였다.
『상기인 ‘갑’과 ‘을’은 아래와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1. 갑은 을이 블랙 카드로 긁은 내역을 달마다 결제해야 한다.
2. 을은 블랙카드 레벨업을 할 때마다 보상 금액을 카드로 긁을 수 있다.
3. 갑은 도중에 계약 내용을 철회할 수 없다.
4. 블랙 카드의 레벨 금액은 이전 레벨의 두 배이다.
5. 갑은 임의로 마감 날짜를 정할 수 있다. 을이 마감을 지키지 못할 경우, 결제 금액의 10% 해당하는 금액을 차감할 수 있다.
6. 계약서 갱신이나 종료는 갑과 을의 상호 합의하여 정할 수 있다.
7. 을은 갑과 블랙카드에 관한 정보를 타인에게 누설하지 않는다. 정보를 누설할 경우 이 계약은 자동 해지된다.
8. 을은 블랙카드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을은 블랙카드를 사용할 권한을 상실한다.
9. 을이 블랙카드를 분실할 경우, 갑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
10. 블랙카드와 재능을 레벨업 하는 부분은 을이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
.
.
15. 을이 도중에 계약을 파기해도 갑은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다만, 을은 블랙카드와 업그레이드된 재능을 상실하게 된다.』
계약서 내용을 보니, 날인을 해도 별문제 없을 듯했다.
그런데 재능을 레벨업 한다는 내용이 눈에 걸렸다.
재능 레벨업에 관한 항목도 몇 가지 있다.
김수호에게 톡을 보냈다.
- 고수 : 김수호 씨, 지금 계약서를 읽어봤는데. 재능을 레벨업한다는 내용은 뭡니까? 블랙카드 레벨업 말고도 다른 게 또 있었습니까?
- 2050 : 계약서 받으면 얘기하려고 했어. 말 그대로 네 재능을 레벨업하는 거다. 블랙카드의 레벨이 오르는 것처럼.
- 고수 : 하.
블랙카드도 모자라서, 내 재능도 레벨업한다고?
무슨 수로?
아! 그림 노가다를 시켜서 내 실력이 향상되면 레벨업 했다고 말하려는 건가?
- 2050 : 현재 네 그림 재능은 1레벨이다.
- 고수 : 아, 그렇습니까?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쯤 되니, 어떤 얘기가 나올지 내심 궁금해지기도 했다.
- 2050 : 지금으로선 네 실력으로는 블랙카드의 12레벨 이상은 넘기 힘들어 보여.
- 고수 : 그래서 재능을 레벨업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 아니죠?
- 2050 : 맞아. 네 그림 재능을 레벨업해야 해.
또, 이쯤 되니 이 사람... 나를 놀리려는 게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이놈 장난질에 내가 거기에 덜커덕 걸려든 게 아닐까 생각도 들고.
- 고수 : 레벨업이라... 하하. 김수호 씨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갑자기 막, 회의가 드는데.
- 2050 :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그래서 말인데, 계약서를 봐.
- 고수 : 계약서?
계약서는 겉보기에 평범한 종이로 된 문서였다.
- 2050 : 시동어가 있어. 시동어는 ‘2050 고수’. 그걸 말하면 계약서에 뭔가 보일 거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문서를 붙들고 시동어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중2병 환자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미친 척하고 시도해보았다.
“2050 고수!”
그러자 이제껏 평범하던 계약서가 뭔가 변화를 보였다.
계약서 한쪽 여백에 이런 글귀가 스르르 나타난 거다.
『그림 작가 1레벨
그림 속도 : 1
그림 기교 : 1
창의력 : 1.』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가락으로 눈을 비벼가며 보았지만, 글귀는 여전히 내 시야에 또렷했다.
김수호에게 톡을 보냈다.
- 고수 : 이게 뭐야?
- 2050 : 분명 그림 작가 1레벨이라 떴을 거야.
- 고수 : 무슨 수를 쓴 거지?
- 2050 : 그새 말이 짧아졌군. 그럴 거면 그냥 계속 반말해.
- 고수 : ...
- 2050 : 여전히 믿기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보여주도록 하지. 이번에 네가 긁을 수 있는 블랙카드 금액은 412만 원.
- 고수 : 412만 원이 왜?
계약서 항목에 이에 관한 내용이 있었는데, 금액 차감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 2050 : 거기서 100만 원을 차감하면...
- 고수 : 또 100만 원을 차감한다고?! (버럭 하는 이모티콘) - 2050 : 말을 끝까지 좀 듣지? 100만 원을 투자해서 그림 작가의 레벨을 2레벨로 올리는 거다.
- 고수 : 허, 그림 노가다로는 레벨이 안 오르고 돈을 써야 레벨이 오른다고?
혹시 이놈, 사기꾼 아닐까?
- 2050 : 한 번 시험해보는 건 어때? 어차피, 블랙카드의 돈은 내가 주는 거잖아?
- 고수 : ...
- 2050 : 그림 작가 2레벨로 올려서 그림 속도의 스탯을 올려보는 거지. 그게 체감이 확실히 될 테니. 이건 너에게 이득일 거다. 재능을 얻는 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거 아니던가?
하긴, 그의 말이 맞긴 하다.
타고나지 않으면 재능이 어디 쉽게 높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 고수 : 좋아. 한번 속는 셈 치고 네 말대로 해볼게. 어떻게 하면 스탯을 올릴 수 있지?
- 2050 : 네가 보관하게 될 계약서를 들고 아까처럼 시동어를 외치면, 네 스탯이 나타나. 일종에 스위치가 켜진 거지. 그 상태에서 ‘그림 속도 레벨업’을 말하면 저절로 블랙카드에서 100만 원이 차감돼. 그림 능력은 레벨업되면서 속도 스탯이 향상되는 거지.
- 고수 : 그대로 해보긴 하겠는데. 계약서 보면서 레벨업 외치는 내 모습이 왠지 병X 같아 보이는데? 무슨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상황도 아니고. 마법이라도 되나?
- 2050 : 마법은 아니다. 미래 기술이라고 해두지.
- 고수 : 뭐?
- 2050 : 그건 차차 설명할 거고. 일단, 내 말대로 스탯을 올리면 네가 블랙카드 레벨을 올리는데 어려움이 덜해질 거다.
나는 김수호의 말대로 시험을 해보았다.
계약서에 조금 전에 나타났던 스탯 정보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2050 고수.”
그러자 아까처럼 글자가 스르르 나타나 조금 전에 봤던 내용이 보였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에 신중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림 속도 레벨업.”
계약서를 붙들고 레벨업이라고 중얼거리는 내 모습이 어이없긴 했지만.
정말로 재능이 좋아지면 내겐 굉장한 이득이었다.
계약서에 까만 글자로 적혀 있던 내용이 홀연히 변하더니 레벨 수치가 바뀌었다.
『그림 작가 2레벨
그림 속도 : 2
그림 기교 : 1
창의력 : 1.』
나는 곧바로 타블렛 앞에 앉아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슥슥-
11레벨 자료 사진을 보고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
어? 정말 내 손놀림이 빠르다.
혹시 착각인가?
빠른 것처럼 느껴지는 건가?
사실, 나는 그림 그리는 능력이 탁월한 편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 그리는 만큼 그리던 수준.
작업 속도도 빠르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빠르다.
이야~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스케치를 하면서 감탄을 했다.
“와.”
그때 김수호에게서 다시 까톡이 왔다.
까톡!
까톡!
- 2050 : 시험해본 건가?
- 2050 : 마저 이야기를 끝냈으면 하는데? 나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
나는 그림 그리던 걸 멈추고 핸드폰을 들었다.
김수호에게 답변을 적었다.
- 고수 : 김수호 씨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사실, 지금도 믿기진 않지만.
- 2050 : 그렇다면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지. 날인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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