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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4화 (4/153)

블랙카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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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어플로 여러 집을 검색해봤다.

투룸을 알아보는데, 생각보다 집 가격이 비쌌다.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이 정도 집을 구하려면 대체 몇 레벨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지?

반전세를 구하면 투룸 보증금이 1억 가까이 할 텐데.

까톡!

마침 김수호에게서 톡이 왔다.

- 2050 : 고수.

- 고수 : 예, 말씀하십시오.

- 2050 : 마감을 정해야겠어.

- 고수 : 마감?

마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인데.

- 2050 : 낼모레까지 10레벨 가능한가?

- 고수 : 모레까지요? 지금이 6레벨인데? 많이 급하신가요?

- 2050 : 모레가 안된다면 글피까지로 양보하지.

- 고수 : 최대한 날짜를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만. 만약 그때까지 안되면요?

- 2050 : 깎이는 거지.

- 고수 : 까, 깎이다니요?

- 2050 : 생각해봤는데. 나만 초조한 건 불공평한 것 같아서.

- 고수 : 그동안 초조하신 줄은 몰랐네요.

내 똥줄을 태우고 싶단 얘긴가.

- 2050 : 글피까지 10레벨을 통과하지 못하면 마감 날짜에서 하루 초과 될 때마다 블랙카드 긁을 수 있는 금액을 10%씩 깎도록 하지.

- 고수 : 네?

- 2050 : 깎이는 건 10레벨부터.

6레벨은 간단한 백반 한 상 차림이었다.

찌개, 밥, 김치, 두 가지 밑반찬이긴 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레벨이 오를수록 난이도가 커질 테니, 3일 후에 10레벨에 도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항변하고픈 말이 솟구쳤지만 꾹 내리눌렀다.

가만! 10레벨이면 계약서를 쓰겠다고 했는데?

계약서를 쓰는 일이 급했던 건가?

- 고수 : 속히 10레벨을 넘겨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 2050 : 그건 그때가 되면 알려주지.

마음에 안 들게 계속 신비 컨셉이다.

문득 전에 꿨던 꿈이 떠오른다.

꿈속에서 봤던 김수호를 생각하며 질문했다.

- 고수 : 10레벨이면 계약서를 쓴다고 했죠? 혹시, 그때 만나 뵐 수 있습니까?

- 2050 : 아니. 만나는 건 좀 더 나중이다. 하지만 계약서는 10레벨을 넘기면 쓸 거다. 이만, 가봐야겠군. 다음에 또 연락하지.

김수호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투룸 검색하는 걸 그만두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당분간 부지런히 그림만 그려야겠다.

그가 누구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계약서를 쓸 때면 뭔가 좀 알 수 있겠지.

* * *

그 후로 이틀이 지나갔다.

밀린 월세와 관리비 중에서 100만 원을 입금했더니 대번에 에어컨을 고쳐주었다.

에어컨을 켜니 좀 살 만 해졌다.

하루에 4시간정도 밖에 자지 못 했는데.

이제 겨우 8레벨일 뿐이었다.

워낙 섬세하게 그려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퀄리티도 꽤 요구했던 것이다.

AI 2050은 내 그림을 두세 번씩 퇴짜를 놓곤 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20분이 소요됩니다.

- 고수 : 20분이나 걸려? 나 잠깐 눈 좀 붙일 테니까 결과 나오면 깨워.

그러고는 금세 곯아떨어지고 나면, AI 2050은 정직하게 20분 후에 깨웠다.

AI가 나를 깨우는 방식은 나름 충실했다.

까똑!

까똑!

까똑!

곤히 잠든 내가 몸서리 치며 일어날 정도의 까톡 폭탄.

까똑!

까똑!

까똑!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2050이다.

생각해보니, 2050의 톡만 알람 설정을 해둔 상태였다.

- 2050 : 고수님의

- 2050 : 그림을

- 2050 : 분석한

.

.

.

- 2050 : 9레벨로

- 2050 : 상승합니다.

한 문장으로 쓸 내용을 여러 번에 걸쳐서 톡을 나눠 보냈다.

만일 이번에도 퀄리티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지껄였다면, 핸드폰을 집어 던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짜증 어린 얼굴로 톡을 적었다.

- 고수 : 후우, 깨워주어서 고맙다. 2050.

- 2050 : 고맙다고 하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 고수 : 네가 기분이 좋다니 기분이 상당히 끓어오르는군.

- 2050 : 좋은 기분이 끓어오른다는 것입니까?

- 고수 : 됐고. 9레벨 사진이나 보내.

- 2050 : 자료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2050이 보낸 자료 사진을 열어보았다.

이번에는 쌀 20킬로그램 한 포대와 20리터 생수통, 라면 한 박스였다.

나는 쓰게 중얼거렸다.

“후우, 내일까지 10레벨은 어림없겠는데. 50만 원 이상은 깎이겠군.”

* * *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느라 다크서클이 짙어진 몰골로 내 계좌를 확인했다.

8레벨 때 인출했던 돈은 128만 원이었다.

그 돈을 뽑았을 때, 사실 행복했었다.

누런 5만 원권 뭉치를 보니 갑자기 피곤이 날아가는 기분이랄까.

이제껏 뽑은 현금만 240만 원이다.

월세로 나간 100만 원을 제외한 140만 원은 고스란히 통장에 넣어두었다.

아침을 먹지 않았더니 허기진다.

어차피 늦어버린 마감이니, 조금이나마 한숨 돌려야겠다.

대충 있는 거로 챙겨먹고 밀린 집안 일도 하고.

조금은 쉬어야겠다.

내내 그림만 그리려니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저녁무렵부터 작업을 시작한 내가 9레벨 그림을 완성한 건, 다음날이었다.

나는 김수호에게서 이와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림을 퇴짜 놓는 말이었다.

- 2050 : 10레벨에서 카드 긁을 수 있는 금액은 512만 원인데, 많이 깎이겠군.

- 고수 : 나도 알아.(심통이 난 이모티콘)

- 2050 : 이대로는 계속 더딜 거야. 10레벨 넘어가면 레벨업하기 버거울 듯하군.

- 고수 : 혹시 마감이 한없이 늦어지면 사용할 금액이 마이너스가 되기도 합니까?

- 2050 : 마이너스? 그렇게 야박하진 않아. 다만 0원이 될 뿐이지.

- 고수 : 0원. 참으로 후하군요.

손가락을 꾹꾹 눌러 문장을 작성하는 내 마음에 빈정거림이 피어올랐다.

- 2050 : 일단 이 부분은 방도가 있으니까. 10레벨을 넘기기나 해.

- 고수 : 네, 그러죠.

그에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요즘 며칠간 쉬지 않고 그림만 그렸더니 눈이 피로하고 손목도 아프다.

잠이 부족해서 퀭해진 눈.

면도를 하지 않아도 까칠해진 몰골.

요 며칠 그림만 그리고 있으려니 내 삶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태블릿 앞에 앉아 9레벨 완성 그림을 불러왔다.

“흐음.”

한동안 내가 그렸던 그림을 지켜봤다.

확실히, 내가 봐도 퀄리티가 떨어지긴 하다.

피곤한 상태에서 촉박하게 그려서 그런가.

디테일이 많이 뭉개졌다.

일반인이 보기엔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그림일지라도.

예리한 눈썰미를 지닌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흠이 보일 터였다.

나는 펜을 잡고 그림 보완에 들어갔다.

김수호가 요구한 대로, 최대한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리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내 실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기분을 받는다.

이제 겨우 9레벨.

벌써 막힌다면 김 새는데.

김수호가 10레벨을 넘기면 계약서를 쓰겠다고 한 것도 이런 걸 염두에 둔 건 아니겠지.

꼬르륵.

배가 고팠지만 식욕이 일지 않았다.

한동안 그림을 그리다가 수정한 그림을 2050에게 보냈다.

그러자 이내 2050의 답변 톡이 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25분이 소요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샤워도 하고 면도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보니 2050에게서 그림 분석 결과가 도착해 있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퀄리티를 조금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5%만 보완해주세요.

미간이 찌푸려졌다.

레벨 넘어가는 게 더디다.

역시 10레벨 이후부터는 뭔가 쉽지 않을 듯하다.

계약서 쓸 때, 생각 잘 해야겠는걸.

나는 의자에 앉아 톡을 보냈다.

- 고수 : 이럴 거면 아예 사진을 찍지. 그림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

- 2050 : 사진과 그림 작품은 엄연히 다릅니다. 수호님이 필요하신 건 고수님의 재능입니다. 그림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자료 사진과 90% 이상 일치하도록 그림을 그리십시오.

- 고수 : 허, 사진을 그려내라는 거군. 그냥 사진에다가 약간 덧칠하면 안 되는 건가?

- 2050 : 중요한 건 고수님의 재능 여부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그림 분석 결과는 90% 이상 보완이 필요하다고 나올 겁니다.

- 고수 : 휴우, 그렇다는 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한 건 내 노가다라는 말씀? 그, 김수호는 이런 그림이 필요한 목적이 뭔데? 블랙카드까지 주고?

- 2050 : 그건, 계약서를 쓰실 때 수호님이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 자정까지 10레벨이 통과하지 못할 시 보상으로 주어질 카드 한도 금액이 차감됩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펜을 잡고 그림을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단 10레벨을 통과하고 보자.

* * *

저녁 무렵에, 현금을 뽑으러 나왔다.

블랙카드 9레벨을 통과한 것이다.

이번에 인출한 금액은 256만 원에서 253만 원.

나머지 3만 원은 스시를 배달해 먹느라 결제했었다.

“후후.”

어제보다 많아진 누런 지폐들을 보니 흡족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혼자 실실 웃다가 조금 전에 까톡으로 온 10레벨 자료 사진을 들여다봤다.

수백 개가 되어 보이는 통조림 더미와 각종 라면, 그리고 몇 판으로 쌓인 달걀 사진이었다.

자정까지 그릴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조금 걷다가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타블렛 앞에 앉았다.

옆에 모니터에 자료 사진을 띄워놓고 의욕에 불타는 눈빛으로 펜을 잡았다.

이번엔 512만 원이다!

최대한 깎이지 말자!

...라고 결연하게 의욕을 불 태웠지만 어느덧 자정이다.

결국 10레벨 그림은 완성하지 못한 거다.

까톡!

자정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수호에게서 톡이 왔다.

- 2050 : 고수. 마감을 못 지켰군. 512만 원에서 462만 원으로 차감이다.

- 고수 : 50만 원 차감이군요. 김수호 씨는 흡족하겠습니다?

내 태도는 띠꺼워졌다.

- 2050 : 그 반대다. 네가 마감을 지켰다면 흡족했겠지.

- 고수 : ...

- 2050 : 나중에 너도 알게 되겠지만 내 상황이 그다지 평안하지 않거든. 10레벨을 통과할 때 다시 연락하지.

그러고서 김수호는 더는 말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가서 털썩 드러누웠다.

어차피 못 지킨 마감.

지금은 몹시 피곤하니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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