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카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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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하얀 도자기 밥공기에 쌀밥이 담긴 모습이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타블렛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띠리리리링-
또 누구야?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니 주인집 아주머니다.
휴, 독촉 전화고만.
안 받을 수도 없고.
“여보세요.”
<총각. 월세하고 관리비는 대체 언제 줄 거예요? 이번에도 보증금에서 까요?>
“네, 이번에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쯧, 이번 달까지 까면 벌써 200만 원이야. 그렇게 되면 보증금은 300 남는거 알죠?>
“네.”
<어휴.>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새삼 심란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펜을 잡고 그림 그리는 일이 집중했다.
슥슥-
이번에도 분명 사실적이니 뭐니 운운할 게 뻔할 테니.
심혈을 기울여야겠다.
마음만 먹으면 섬세하고도 디테일한 그림을 그리곤 하던 나였으니.
어려울 것 없다.
나는 돈독이 오른 눈에 불을 켜고 종일 그림을 그렸다.
늦은 밤 즈음, 3레벨을 통과를 앞두었을 때,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오늘 하루 내내 수고했으니, 뱃속에 기름칠 좀 해볼까?
핸드폰 배달 어플을 검색하여 치킨과 김치찌개 백반 2인분,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니 4만 원도 훌쩍 사라졌다.
이렇듯 돈 쓰기는 정말 쉽다.
치킨과 내일 먹을 김치찌개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AI 2050으로부터 톡이 왔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블랙 카드의 레벨이 4레벨로 상승합니다.
그로 인해, 나는 4레벨의 자료 사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는 하얀 바탕에 갓 구운 빵 한 개가 찍힌 모습이었다.
4레벨을 통과하고 나면 8만 원을 긁을 수 있을 테니.
내 마음이 흡족하다.
까톡!
그때 김수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2050 : 계약서를 쓰고 싶다고?
- 고수 : 그래. 그래야 서로 신뢰가 생기지.
- 2050 : 계약서는 10레벨이 넘은 후에 작성할 계획이다.
- 고수 : 흠, 뭐 한 가지만 물어보자. 대체 목적이 뭐야? 심심풀이 땅콩? 신개념 돈지... 암튼, 이상하잖아? 나 그림 연습시키는 것도 아니고. 난이도를 높여가면서 블랙 카드를 긁게 하는 건.
- 2050 : 네가 있는 곳에선 신개념 돈지랄로 보일 테지. 하지만 내게는 돈이란 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라서.
돈이 가치 없다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돈이 차고 넘쳐서 가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돈보다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말인지.
- 고수 : 김수호 씨, 재벌 2세나 3세쯤 되나 봐요?
내게 돈 주는 사람이라, 그쪽이 하대해도 나는 계속 반말하기 뭐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높였다.
- 2050 : 너에게 블랙카드를 지급한 건, 네 그림은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네가 사는 곳엔 무수한 그림 작가가 있겠지만. 그 모든 그림에 능력이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음, 내 그림이 특별하다는 말이겠지?
이런 대우는 처음이라 기분이 썩 괜찮네.
- 2050 : 그림, 빨리 부탁해.
- 고수 : 최대한 노력하죠.
나는 다시 타블렛 펜을 잡았다.
4레벨이 될 빵 그림.
이번에도 공을 들이며 그림을 그렸다.
* * *
그날 밤, 묘한 꿈을 꿨다.
내가 영화와 소설을 너무 많이 봤던 탓일까.
꿈속에서 기괴한 좀비들이 나오고 세상은 아포칼립스가 되어 있었다.
악몽을 꾸는 건가 싶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나와 또래였고 키가 컸으며 근육질의 체구를 지녔다.
면도한 지 이틀 정도 되어 까슬하게 자란 수염, 예리한 눈매와 눈빛.
그는 강해 보였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선해 보였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만나서 반갑다. 나 김수호다.”
김수호?
그 재벌 또라이?
하지만 꿈속의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고수’다.”
“그래.”
“이젠 무얼 해야 하지?”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우리가 같이?”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멀다. 하지만 금세 도달하게 될 거야. 나는 행복한 세상을 보게 될 거고. 너는 변함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거지.”
그의 그러한 말을 끝으로 꿈은 끝이 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누운 채로 한참 동안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도, 방금 꿨던 꿈이 묘한 여운 같은 게 남는다.
개꿈이라 치부하기엔 기묘한 꿈.
꿈속에서 봤던 김수호의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설마, 내가 아는 김수호가 꿈에서 봤던 그와 일치하진 않을 테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 * *
다음날 오전 즈음, 블랙카드 4레벨을 통과하게 되었다.
나는 블랙카드를 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오늘 긁어야 할 블랙 카드 금액 8만 원.
카드 긁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일단 미용실로 향했다.
머리가 길어서 덥수룩하다.
미용실 의자에 앉자 헤어디자이너가 내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커트만 하실 거예요?”
“네.”
“이대로 커트만 하시면 머리 스타일이 밋밋해 보이실 것 같아요. 잘생긴 얼굴이 살지 않을 것 같은데...”
“흐흐, 그래요?”
“제 생각엔 가르마 펌을 해보시는 게 어때요?”
“가르마 펌? 그게 뭐예요?”
“배우 공류 씨 아시죠? 그분이 하신 게 가르마 펌이에요.”
“아.”
“손님이 하시면 한결 분위기 살고 더 잘생겨 보이실 것 같아요.”
헤어디자이너인 그녀의 말에 얇은 내 귀가 활짝 열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이번에 펌 좀 해볼까.”
“하시면 정말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제가 특별히 예쁘게 해드릴게요.”
“근데 펌을 하면 가격이...?”
“펌을 하시면 커트는 가격을 안 받으니까 8만 원이에요.”
“오! 딱 좋네. 오케이, 8만 원. 디자이너님이 예쁘셔서 머리도 예쁘게 나올것 같네요.”
“어머, 호호.”
머리를 하며 그녀와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나니 금세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의자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서보니 확실히 인물이 살긴 한다.
확실히 돈을 처들인 값을 하는 거다.
카운터에서 내 머리를 해준 디자이너에게 블랙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디자이너님 명함 좀 받고 싶은데...”
“아, 네.”
그녀가 블랙카드를 보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을 반짝이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내가 받은 명함에는 ‘예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이름도 예쁘네.
가명이겠지만.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되었나?
조그만 얼굴에 새침해 보이는 눈매가 매력적인 여자다.
나는 눈웃음을 살짝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예린 씨? 제가 연락 드려도 될까요?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반응이 아니다 싶으면,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고 다음에 머리할 때 연락드리겠다고 하면 되겠지.
예린은 이내 눈꼬리를 살랑이며 답했다.
“물론이죠. 언제든 연락 주셔도 돼요. 저도 명함 받을 수 있을까요?”
저 여우 같은 눈초리.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명함은 다음에 뵐 때 드리겠습니다.”
“아.”
“여기 미용실 말고 밖에서요.”
예린은 생긋 웃었다.
“네, 그러세요.”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 인사하고는 미용실을 나오며 예린의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러다 전화번호에 가득한 여자들 목록을 보고서 한숨을 쥐었다.
후, 나 뭐 하는 거냐?
예쁜 여자만 보면 번호를 수집하듯 핸드폰에 저장해놓고선.
정작 그녀들에게 연락을 한 적은 없다.
* * *
저녁에 진구란 녀석이 술을 사 들고 원룸으로 찾아왔다.
진구는 지저분한 원룸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후, 이게 사람 사는 집이냐? 돼지우리지. 왜 이렇게 더워? 에어컨 안 나오냐?”
“왔냐?”
“요즘 집에 콕 박혀서 뭐하냐? 주말인데.”
진구는 안주거리를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나는 타블렛 앞에 앉아 5레벨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뚝배기 그림이었다.
죄다 음식 사진만 보내는 걸 보면, 김수호는 먹는 거에 한이 맺힌 놈일 게 분명했다.
“진구야, 온 김에 바퀴벌레 좀 잡아 줘라.”
“뭐? 바퀴벌레 어디 있는데?”
“욕실 문 앞에.”
“히익! 자, 잠깐만! 뭐로 잡지?”
“휴지로 잡아. 뭉개지지 않게.”
“으, 씨벌. 이래서 네놈 집은 오고 싶지 않았는데.”
진구는 괴로워하는 소리를 내며 벌레를 잡는 듯했다.
그는 욕실 변기에 벌레 사체를 집어넣고 물을 쏴아아 내렸다.
“여기 너무 더운데. 안 나가냐? 모기에 뜯기더라도 공원에서 마시는 게 낫겠다.”
“나 그림 그려야 해. 요즘 이것 때문에 바쁘다.”
“오! 요즘은 일이 좀 있나 봐?”
“어.”
“그나마 다행이네.”
“조만간 이 집 뜰 거다.”
“집 옮기게?”
“옮겨야지. 여긴 너도 알겠지만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야, 집은 옮기더라도 먹고 해. 만두 사 왔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진구 녀석, 새우 만두와 갈비 만두를 포장해 왔다.
갈비 만두 한 개를 날름 집어먹으며 맥주 캔을 땄다.
“맛있네. 진구야, 내가 언제 크게 한턱 쏜다.”
“크게 한턱? 돼지갈비라도 사주게?”
“노노. 내가 그동안 너희에게 받아먹은 게 있는데. 소갈비 어떠냐?”
“미친놈.”
내가 소갈비를 쏜다고 해도 믿지를 않는다.
내 사정, 빤히 알기 때문이겠지.
“당장은 어렵고 다음 주 금요일에 싹 다 모여. 내가 소갈비 쏜다.”
“얌마,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취했냐? 그날 괜히 연락 두절 되지 말고 그 돈으로 에어컨 좀 어떻게 해봐.”
“야, 고수를 어떻게 보고. 내가 너희들한테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냐. 내가 쏜다면 쏘는 거야.”
“그래, 그래. 더는 말리지 않으마. 내일이면 제정신 차리겠지.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그러던가.”
나는 만두를 몇 개 더 집어먹은 후에 일어나 타블렛 앞에 앉았다.
슥슥-
그림을 그려서 2배씩 늘어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열의로 불타올랐다.
새벽 1시경까지 그림을 그린 후에, 2050에게 톡을 보냈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피유."
진구 녀석, 내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시끄럽게 코를 코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를 힐끗 보고 있는데, AI 2050가 메시지를 보냈다.
- 2050 : 수호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 분석하는 데 10분이 소요됩니다.
점점 그림 분석 시간이 늘어가는 것 같다.
* * *
다음 날 오전, 나는 진구를 보내면서 집밖으로 나왔다.
블랙카드로 현금 뽑으러 나온 거다.
현금 인출기 앞에서 혼자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손에는 현금 16만 원이 들려 있다.
블랙 카드로 현금 인출을 한 거다.
이제 그리기 시작한 6레벨은 32만 원을 뽑을 수 있을 테고.
7레벨은 64만 원이 될 것이었다.
이대로 김수호가 도중 사라지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액수는 금세 불어날 터.
꽤 괜찮다.
하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니, 당분간 카드를 긁는 것보단 현금으로 뽑아두는 게 좋을 듯하다.
“후우, 슬슬 방 좀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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