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카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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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0 : 자료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진 한 장을 첨부해 보내왔다.
- 고수 : 그림, 언제까지 그려야 한다는... 기한 있어?
- 2050 : 정해진 기한은 없지만 최대한 빨리 주시는 게 좋습니다.
- 고수 : 좋아, 잠깐 사진 좀 확인하고.
2050이 보낸 사진은 말랑해 보이는 인절미 한 개였다.
사진으로 봐도 부드럽고 쫀득해 보였다.
- 2050 : 최대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주시길 바랍니다.
- 고수 : 오케이, 접수. 내일 1시까지 보낼게.
방금까지 기분이 잡쳐 있었는데, 의외로 2050과 대화 좀 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왜지?
돈이 생겨서 그러나?
역시 여자보다 돈이군.
당장은 푼돈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쏠쏠해질지 모를 일이다.
거기다 블랙 카드.
폼 나지 않은가!
저녁 먹은 걸 소화할 겸 한동안 거리를 산책했다.
집에 들어가서 먹으려고 쭈쭈바 아이스크림 몇 개도 샀다.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털레털레 조금 걷다 보니 빙수 가게가 보였다.
전에 유라와 자주 오던 곳이었다.
괜히 기분 그래서 돌아서려는데, 까만색의 c클래스 벤츠 한 대가 근처에 멈춰섰다.
운전석에서 명품을 빼입은 느끼한 남자가 나오더니 보조석에서 내린 여자의 손을 맞잡았다.
“여기야? 우리 유라가 맛있다던 빙수가?”
“응, 오빠. 여기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유라였다.
일전에 그렇게 가지고 싶다고 노래하던 샤넬 백이 손에 들려 있다.
유라가 얼어붙은 것처럼 나를 보자 곁에 있던 남자도 내게 시선을 주었다.
“왜? 누구 아는 사람이야?”
나는 홱 돌아서서 있던 곳에서 멀어졌다.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명품으로 차려입은 그에 비해 나는 단벌 츄리닝 차림이었다.
잠잘 때와 일할 때, 외출할 때에도 내내 입던 후줄근한 츄리닝.
거기다 머리는 감지 못해서 눌리고 떡졌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몰골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유라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오빠, 우리 들어가자.”
* * *
그날 나는 밤늦게까지 타블렛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늦은 밤에도 어찌나 더운지, 내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대야 날씨라서, 늦은 밤에도 후끈거렸다.
근처에서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훅 끼치고 있었고.
내 입에는 쭈쭈바 아이스크림이 물려 있다.
근처에는 다 먹은 쭈쭈바 비닐이 두어 개가 나뒹굴었다.
내일까지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삽화 작업도 해야 되어서, 새벽이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2050에게도 완성한 그림을 보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그림을 분석하는 데 3분이 소요됩니다.
그림 분석 결과를 확인하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는데...
쏴아아아-
잠결에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군.
지난밤, 너무 더웠는데 지금은 시원해서 좋다.
다만 많이 눅눅...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창문을 열어두고 잠든 게 생각났던 것이다.
벌떡 일어나 창가를 보니 물이 한강이다.
으아아! 엄청 퍼붓는 소나기가 방안으로 다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씨잉...
재빨리 문을 닫고, 방안의 조명을 켠 후에 대야와 수건을 가져왔다.
첨벙.
수건을 적셔 대야에 짜내려는데.
흥건해진 물 위를 헤엄치고 있는 생명체 하나가 발견되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바퀴벌레다.
극한 혐오스러움에 충격을 받은 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진짜 이 집에서 못 살겠네.
으윽, 이걸 어떻게 치우냐?
아래층이 식당이라 심심하면 바퀴벌레가 올라오곤 했지만.
좀처럼 이 혐오스러움은 익숙해지질 않는다.
나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아!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우.
적당한 도구를 사용해서 방안에서 헤엄치던 바퀴벌레를 간신히 잡아 산 채로 창문 밖에다가 버렸다.
창문을 다시 닫자, 내 머리카락이 그새 흠뻑 젖었다.
제길.
그나마 다행인 건, 타블렛은 창가에 두지 않았다는 것.
작업할 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고약해서 책상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 두긴 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블렛은 흠뻑 소나기 샤워를 하게 되었을 거다.
아래층의 냄새 폭탄에 고마워해야 하나.
까톡!
정신없는 와중에 톡 알람이 울렸다.
누구야! 이 시간에.
나는 대충 손을 닦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 2050 : 형편없군. 그림이 사실적이지 않아. 이래서는 맛없어. 내가 말하지 않았나? 사실적으로 그리라고.
AI가 아니라, 김수호다.
내가 짐작하는 바로는 재벌 또라이.
- 고수 : 맛없다니?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라는 이유가 설마 먹으려는 건 아닐 테고.
그놈의 그림 퀄리티는 어딜 가나 듣는 이야기니.
김수호가 형편없다고 말하는 건 인정하는 바다.
나는 메시지를 연이어 적었다.
- 고수 : 퀄리티가 부족하다면 보완하지.
- 2050 : 중요한 건 사진처럼 그리라는 거야. 조금만 보완하면 돼. 아직 2레벨이니까.
- 고수 : 한 가지 물어볼게. 그쪽이 준 블랙카드 2만 원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합친 금액으로 긁을 수 있어?
- 2050 : 아껴뒀다가 3레벨 때의 금액과 합쳐서 긁겠다는 건가?
- 고수 : 뭐, 그렇지.
- 2050 : 안 돼. 레벨이 넘어가면 그걸로 끝이야. 합산은 없어.
- 고수 : 근데 계속 묻고 싶었는데. 지금 그림 의뢰를 게임처럼 생각하시나 봐?
- 2050 : 이게 게임이라면 좋겠군. 분명히 말해두지. 나에겐 삶이 달려있어.
생각보다 심각하게 반응해온다.
약간 중2병처럼 반응하지 않을까 했는데.
- 고수 : 좋아. 그럼 레벨 때마다 주어진 금액을 충실히 긁어야겠네. 3레벨은 얼마야? 3만 원?
- 2050 : 아니, 4만 원.
- 고수 : 오! 금액이 두 배로 오르는 거군. 3레벨은 네가 지금 내가 보낸 그림을 오케이하면 도달하게 되는 거고?
-2050 : 그래.
- 고수 : 레벨이 올라갈수록 그림 난이도도 올라 가겠구만. 그래서 내가 무한까지 갈 수 없을 거라고 여겼나?
- 2050 : 네가 무한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고는 말 안 했다.
- 고수 : ㅋㅋ 내 능력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나 봐?
만약, 김수호가 내 그림을 곧바로 승인했으면, 2만 원은 미처 긁지도 못하고 고대로 날아가 버렸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 이상한 놈이긴 한데.
왠지 좋은 놈일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웃기지만.
그나저나 당장 2만 원을 써야 한다면 어디 가서 긁을까?
사실, 써야 할 돈은 많았다.
공과금도 내야 하고 당장 생필품도 다 떨어졌고 냉장고도 비었다.
그동안 친구들 만나도 얼굴에 철판 깔고 매일 얻어먹기만 해서 욕도 많이 얻어먹었는데.
조만간 한번은 사야겠다.
그놈들 뱃속은 거의 블랙홀과 다름없으니.
좀 더 높은 금액을 긁을 수 있을 즈음에 약속을 잡아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부지런히 흥건해진 방바닥을 닦았다.
* * *
오전 무렵, 나는 마트로 나왔다.
블랙 카드를 긁을 생각을 하며 나왔더니 기분이 좋다.
오전에 김 대리에게서 좋은 소리 듣지 못했어도 콧노래는 나왔다.
- 김 대리 : 그림 작가님께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리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에게는 이번 건을 마지막으로 의뢰 드리게 될 것 같아서요.
사실, 생각나면 한숨이 나오기는 한데.
짜증도 나고 내가 한심한데.
앞으로 블랙 카드를 긁을 수 있을 거라는 믿는 구석이 생겨서인지, 생각보다 타격이 덜하다.
오늘도 츄리닝과 슬리퍼 행색으로, 나는 마트 카트에 계란 10개, 라면, 비누등등을 담았다.
그러고는 계산대에 이르자.
“18,000원입니다.”
“아, 2000원! 채워 넣어야지.”
“예?”
“잠깐만요.”
나는 황급히 달려나가 음료수 한 개를 집어왔다.
“이거 딱 2000원이죠?”
점원 아가씨가 바코드를 찍었다.
삑-
“네, 2000원이네요.”
“잘 되었네요. 그거 아가씨 드세요.”
“네?”
“날도 무덥고 힘내시라고.”
그러면서 싱긋 웃었지만 점원 아가씨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그런 표정.
나는 점원 아가씨에게 블랙 카드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그러자 블랙카드를 본 점원의 표정이 달라지는 게 보였다.
블랙카드는 딱 봐도 화려하고 럭셔리하다.
“어머, 블랙 카드.”
“훗.”
“이런 건 처음 봐서 저도 모르게 신기해했네요. 음료수 잘 마실게요.”
조금 전까진 분명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블랙카드를 봤다고 사람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나 싶다.
“아닙니다.”
점원 아가씨는 블랙 카드를 결제하면서 내게 물었다.
“이 근처 사세요? 여기 자주 오셨던 것 같은데.”
“네, 이 근처에서 당분간 지내고 있긴 합니다. 비즈니스 차.”
“아, 그렇구나. 아침에도 낮에도 종종 뵈어서 직업이...”
그녀는 말끝을 흐린다.
그래, 백수인 줄 알았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겠지.
“암튼 편한 차림으로 오시곤 하셔서. 소탈하고 검소하신 분 같아요.”
“하하, 제가 좀 그렇습니다.”
띠리리리링-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액정을 보니 친구 녀석 중 한 놈이다.
그냥 무시하고 싶은데 이놈 특성상 끈질기게 전화할 것 같다.
일단 전화를 받았다.
“네.”
<불금 보내야지. 오늘 저녁에 진구 집에서 게임이나 하자. 진구 집에 술도 있대. 내가 안주 사 간다.>
“아, 오늘 저녁 미팅 장소가 잡혔습니까?”
<뭐? 미팅 한다고?>
“네, H호텔. 거기서 뵙겠습니다.”
<헐, 너 소개팅...>
뚝-
친구 녀석이 말하는 도중에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점원 아가씨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깔끔하게 돌아섰다.
“그럼 이만.”
띠리리리링-
핸드폰의 벨소리가 다시금 울린다.
나는 마트를 나오며 전화를 받았다.
“아, 왜, 또?”
<고수! 너, 소개팅 하냐?>
“소개팅은 무슨. 나 오늘 바빠. 게임은 너네끼리 해라.”
오늘부터 나는 확실히 바쁘다.
지금부터 게임 캐릭터의 레벨이 아니라 블랙카드의 레벨을 올려야만 하니.
화르르르! 열의가 타오른다.
* * *
까톡!
까톡 알림 소리가 울려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AI 2050에게서 온 톡이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블랙 카드의 레벨이 3레벨로 상승합니다.
- 고수 : 이제 블랙카드 4만 원을 긁을 수 있는 거지?
- 2050 : 네, 그렇습니다.
- 고수 : 혹시 카드로 현금은 뽑을 수 있어?
- 2050 : 네, 그렇습니다.
- 고수 : 오!
- 2050 : 3레벨에 곧바로 도전하시겠습니까?
- 고수 : 당근 도전이지. 사진 보내! 아참, 근데...
- 2050 : 말씀하십시오.
- 고수 : 이 블랙카드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페널티라든가. 주의사항 같은 건 없어?
- 2050 : 페널티나 주의사항은 특별히 없습니다.
- 고수 : 오 그래? 그럼 김수호가 도중에 연락 두절 된다던가 그럴 일은 없겠지? 계약서 같은 건 안 쓰나?
- 2050 : 계약서 여부는 수호님이 톡 대화를 읽어보신 후 결정하실 겁니다.
- 고수 : 그래, 알았다. 사진 보내.
- 2050 : 3레벨 자료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곧, 자료 사진이 전송되었고.
나는 그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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