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블랙카드가 레벨업을 한다-1화 (1/153)

그림 그려 밥 벌어먹기 힘들다.

종일 그림 노가다를 해도 들어오는 푼돈.

하지만 나가는 돈은 목돈.

살기 팍팍하다.

어제부터 에어컨이 나오질 않아서 원룸 안은 사우나가 따로 없다.

더워서 창문을 열면, 온갖 시끄러운 소리와 음식 냄새가 역하게 올라와 창문 안으로 들어온다.

바로 아래층은 삼겹살 가게였다.

장사가 어찌나 잘 되는지, 손님이 떠드는 소리가 항상 시끌시끌했다.

가끔 술 처먹은 손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면,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원룸 보증금과 월세가 워낙 저렴해서 들어왔지만, 정말이지 싼 게 비지떡이었다.

이런 엿 같은 원룸을 돈을 벌어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나저나 무더운 한 여름날 에어컨 고장이라니!

집주인에게 말해봐도 함흥차사다.

월세가 밀려서 그러한가?

창문을 열 수도 없고.

지금은 한창 저녁 타임이라 기름 냄새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올 텐데.

“하아.”

그냥 코 막고 창문을 열어야겠다.

나는 휴지를 조그맣게 말아 콧구멍에 쑤셔 넣고 귓구멍까지 막은 다음, 창문을 열었다.

드륵-

창문을 열자 곧바로 기름진 냄새와 소음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시원한 저녁 바람은 들어오질 않는다.

젠장.

날이 더우니 그림 작업에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결국,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람 소리가 울렸다.

까톡!

까톡!

누운 채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톡을 확인했다.

- 김 대리 : 그림 작가님, 그림 다시 수정해주세요.

- 김대리 : 작품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하네요. 퀄리티도 좀 신경 써주시고요.

내 표정이 팍 구겨졌다.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 고수 : 네.

- 김 대리 : 내일까지 될까요?

- 고수 : 노력해보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듯 내려놨다.

그때 다시 톡 알람이 울렸다.

까톡!

“아, 이번엔 또! 뭐?”

성질내듯 톡을 확인했다.

- 2050 : 그림을 그려줘. 그럼 블랙 카드를 줄게.

음? 이 건방진 메시지는 누구야?

나는 미간을 좁혔다.

2050의 프로필을 확인해봐도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

프로필 사진 같은 것도 없고.

톡, 톡, 톡, 톡.

핸드폰을 붙들고 엄지로 날렵하게 문장을 작성했다.

- 고수 : 누구냐, 너?

- 2050 : 너, 도와줄 사람.

누가 장난치는 건가?

‘2050’, 이름만 봐서는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 고수 : 아, 눼눼. 그러시군요. 저는 관심 없으니 다른 게 가서 알아보시죠.

나는 그렇게 톡을 보내고는 차단을 했다.

하지만 2050에게서 톡은 계속 왔다.

- 2050 : 차단해도 소용없어.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말씨름할 여유도 없어.

정 그렇다면 읽씹이다.

- 2050 : 너에게 사진 자료 보낼게. 그걸 그림으로 그려줘.

2050이 사진을 첨부해왔다.

사진은 서리태 콩알 한 개였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바탕에 까만 콩 한 알.

사진을 본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톡을 적었다.

- 고수 : 장난하냐? 장난칠 기분 아니라며? 너 누구야? 확 신고해 버린다.

- 2050 : 말했잖아. 너 도와줄 사람이라고. 그림 완성해서 톡으로 보내. 네가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아서 블랙 카드는 지금 보낼게.

- 고수 : ㅎㅎㅎ 미친놈.

내가 그렇게 적고 있는데.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보니 문 앞에 조그만 택배 상자가 놓여 있다.

보낸 이름은 ‘김수호’.

받는 이름은 나였다.

일단 택배를 뜯어보자 안에는 놀랍게도 신용카드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그것도 시커먼 블랙카드다.

새카만 바탕에 깨알 같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금테까지 둘러서 블링블링하다.

나는 재빨리 침대로 가서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썼다.

- 고수 : 야 2050! 블랙 카드 네가 보냈어? 이걸 왜 나한테 보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너 나 알아?

- 2050 : 블랙 카드는 오늘부터 긁을 수 있어. 카드 결제는 내가 할 거고.

- 고수 : 어? 카드 결제를 그쪽이 하신다고요?

나도 모르게 경어가 튀어나왔다.

-2050 : 시작은 1레벨부터 하도록 하지.

- 고수 : 뭐?

- 2050 : 그 콩알을 완벽하게 그려오면 2레벨로 넘어갈 거야. 지금은 1레벨.

긁을 수 있는 금액은 1만 원까지.

- 고수 : 이 중2병 걸린 새키가.

나도 모르게 필터 없이 손가락이 움직였던 것 같다.

- 2050 : 너 말투가 일관성이 없군. 암튼 그 이상 긁으면 결제할 수 없는 카드로 나올 거야. 그리고 그 카드의 앱도 깔아. 지문 등록해서 로그인하면 정보를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그의 말대로 핸드폰에 어플이 깔고 그가 불러주는 개인 정보로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로그인을 했다.

블랙카드 가입자 이름은 김수호.

자동이체 계좌는 H 은행.

아직 사용한 금액은 0원이다.

나는 다시 메시지를 적었다.

- 고수 : 당신이 김수호?

- 2050 : 그래. 네가 염려할 건 없어. 그 블랙카드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고 계좌도 내 계좌로 인출돼. 넌 그냥 쓰기만 하면 돼.

- 고수 : 왜 이렇게 하는 거지? 그림 의뢰할 거면 의뢰한 후에 입금해도 될텐데.

- 2050 : 그건 이후에 말하도록 하지. 이제부터 이 톡은 AI가 받을 거야. 너는 그냥 그림만 그려주면 돼. 그림 그릴 자료 사진을 보내는 것도 AI가 보낼 거다.

그나저나 이 자식, 계속 말이 짧네.

게임 좋아하는 중2병 걸린 재벌 3세인가?

이러면 나 역시 말이 계속 짧아질 수밖에.

- 고수 : 아, 근데 블랙 카드로 쩨쩨하게 만원이 뭐야?

- 2050 : 대화 이만하도록 하지. 가봐야 해.

- 고수 : 잠깐! 아직 물어볼 게 있는데.

- 2050 : 고수님의 질문은 수호님의 AI 2050이 답해드립니다.

- 고수 : 잉?

- 2050 : 고수님의 블랙카드 1레벨은 1만 원이라 그렇습니다.

아, 그래.

꼬르르르륵.

“......”

꼬르르르륵.

음, 확실히 지금 내 상황이 이것저것 따질 만한 상황이 아니긴 하다.

여기 그지 같은 원룸도 월세가 세 번이나 밀린 상태였고.

생활비도 얼마 안 남아서 요즘 고기를 먹어본 적이 오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림 수입도 시원치 않아서, 이대로라면 보증금 다 까먹고 고시원을 전전해야 할 판.

까짓것 콩알 하나 그리는 게 뭐 대수라고.

상당히 수상쩍은 데다가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공짜로 카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림 그려주는 대가로 만 원짜리를 긁는 건데.

뭐 어때.

나는 타블렛의 펜을 잡았다.

꼬르르르륵.

아무래도 먼저 먹고 해야 할 듯하다.

잡았던 펜은 내려두고 핸드폰을 들고서 배달 어플을 검색했다.

침대 위에 럭셔리하게 반짝이는 블랙 카드를 힐끗 봤다.

한번 시험해볼까?

정말 만 원 이상은 결제가 안 되는지.

부지런하게 손가락을 놀려 메뉴를 선택하고 블랙카드를 어플에 등록했다.

그러고는 결제를 시도했다.

만이천 원짜리 메뉴, 결제!

역시 결제는 승인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시도를 해봤지만 결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딱 만원으로 결제할 수 있는 메뉴를 골라야겠다.

메뉴를 고른 후에 결제 버튼을 눌렀다.

“어? 결제가 되네.”

김수호가 말한 대로 만원은 되고, 그 이상을 긁을 수가 없다.

대체, 카드에 무슨 수를 쓴 거지?

배달 주문을 완료한 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슥슥 그림을 그렸다.

콩알 한 개라서 금방 뚝딱 그린 후에 2050에게 톡으로 보냈다.

그러자 금방 ‘1’ 숫자가 없어지며 AI가 대답했다.

- 2050 : 고수님의 그림을 확인합니다. 확인 결과, 퀄리티를 조금 높여야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10%만 보완해주세요.

- 고수 : 뭐?

- 2050 : 퀄리티가 부족합니다.

그놈의 퀄리티.

이제는 AI에게서도 들을 줄은 몰랐네.

혹시, 이놈이 AI인 척하는 거 아냐?

일단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 고수 : 그런데 이 블랙 카드 몇 레벨까지 있어?

- 2050 : 블랙 카드의 레벨은 무한입니다.

- 고수 : 헐, 무한? 그럼 무한으로 카드를 긁을 수도 있다는 얘기냐?

- 2050 : 그렇습니다.

-고수 : 와. 그 말의 의미는 내가 무한으로 쓰면 김수호가 그만큼 결제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 2050 : 수호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만 고수님이 레벨이 올라야 한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 고수 : 그, 김수호는 뭐하는 사람이냐?

-2050 : 답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수호님은 고수님을 도와줄 사람입니다.

- 고수 : 그래. 그럼 콩알 그림이나 다시 수정해서 보낼게.

더는 정보를 얻을 수 없겠다고 여겨져서 나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펜을 잡고 콩알 그림을 손봤다.

* * *

배달온 음식으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수정한 그림을 톡으로 보냈다.

방안이 너무 더워 저녁 바람을 쐬러 산책을 나가려는데.

까톡!

띠리리리링.

톡과 전화가 동시에 왔다.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니 친구 녀석이다.

나는 집 현관을 나서면서 전화를 받았다.

<야, 고수. 들었냐? 유라 시집간다더라.>

“......!”

대뜸 다짜고짜 소식을 전하는 친구 녀석.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소식이다.

김유라는 내 전여친이다.

궁상떠는 내가 싫다고 다른 남자 만나더니 금세 시집가는 모양이다.

나쁜 계집애.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친구 녀석은 내가 묻지도 않는 말을 줄줄 읊었다.

<희수가 유라와 친하잖아? 유라가 희수한테 그랬대. 실은 너가 지금도 생각난다고. 만일 네가 지금이라도 괜찮은 직장이 떡하니 생겨서 너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미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했다.

유라는 나와 연애 시작하던 순간부터 그러했다.

내가 그림 그리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안정적이지 못한 데다 수입도 시원치 않아서 그랬을 거다.

<너, 유라 많이 좋아했잖아? 조만간 시집가게 생겼는데 괜찮아?>

“안 괜찮으면? 하, 됐다. 그런 잡소리 할 거면 끊어라.”

나는 핸드폰 통화 종료를 하고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려다가...

“아, 맞다.”

까톡을 확인하려 했던 것을 떠올렸다.

2050에게서 톡이 와 있다.

- 2050 : 수호님의 그림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인 결과, 블랙 카드의 레벨이 2레벨로 상승합니다.

AI를 이런 식으로 설정해서 까톡을 보내도록 해놓다니.

신기하네.

김수호, 어지간히 게임을 좋아하는 놈인가 보다.

돈은 많고 할 일이 없는 또라이인 듯한데.

나야 돈만 생긴다면 땡큐다.

적당히 맞춰주지 뭐.

- 고수 : 2레벨은 얼마 긁을 수 있냐?

- 2050 : 2만 원입니다.

2만 원이라...

1레벨이 서리태 콩알이었던 것처럼, 2레벨도 간단한 그림이겠지.

나는 기분 좋게 메시지를 적어넣었다.

- 고수 : 괜찮네. 콜! 이번엔 뭐 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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