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Track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네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일까.
붉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전각 안을 걸으며 여우는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 인간들처럼 사고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의 머릿속을 미성숙한 다른 이가 지배하기 시작하기라도 한 듯이.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 살아온 그로서는 처음 직면한 인간의 감정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폭발적이고 성가신 것들이었다. 집착― 고통― 분노 같은. 그중에서도 애정이라는 것은 특히나 비생산적인 감정으로 여겨졌다. 인간들이 왜들 그렇게 맹목적으로 서로를 위해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는지 비로소 이해하면서, 이해하는 자신을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이에게 집착하고 그 상대를 위해 존재를 포기하려는 스스로야말로 이해 불능의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뜻을 되돌릴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처음 배운 감정들을 있는 대로 흡수하고, 휘둘리는 대로 따라 흐른다. 그뿐이었다.
품 안에 말아 넣어 둔 한지가 옷감에 쓸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여우는 치솟는 광기를 달랬다.
그 방 안에 깨진 유리 조각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갈라진 틈으로라도 네 얼굴을 보았을 터인데. 흐릿하게 비치는 네 얼굴을 그려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것에 지독히도 한이 맺혔다. 신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내 짝 얼굴 하나 비춰 볼 수도 없는데.
가끔은, 자신의 안에 여전히 아이가 남아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그랬듯이 자신이 잠들면 제 짝이 깨어나고, 제 짝이 잠들면 자신이 깨어나는 것이라고. 더 이상 깨어난 그의 머리맡에 꽃이 장식되는 일은 없었지만.
억눌려 구류되었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니, 자신은 인간들의 말대로 이미 미쳐 버려 액신이 된 것이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그 짧은 날 동안 속절없이 홀려 버린 것을 보면 확실히 너는 신의 제물이 맞았다. 신을 위해서 태어났으며 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태어난다는 산 족쇄인 제물.
멀리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권속이 된 인간들이 살육을 벌이는 소리다. 뾰족하게 세워진 귀가 인간의 비명 소리를 털어 내듯 흔들렸다. 그가 궁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매일같이 들리는 것이다. 비명 소리는 잠시 그쳤다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왕의 군사인가. 용케 살아남은 잔당들이 왕을 구해 내려 퍽 공을 들이고 있었다. 감복할 만한 충심이었지만 그래 봤자 전각에 닿기 전 바닥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을.
심드렁하게 하늘을 건너보던 여우는 천천히 몸을 물려 용 문양이 부조되어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에는 간신히 사물을 식별할 만한 등불 몇 개만 켜져 있었다. 최음을 돕는 달콤한 향과 호흡으로 인한 열기가 커다란 공간에 가득했다. 침상에 불투명하게 드리워진 천 안쪽으로 여인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 아, 아.’
정사 중인 남녀는 막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높은 신음 소리, 빨라지는 움직임, 파정의 때가 가까웠다. 여인의 입에서는 쾌락에 싸인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반대로 아래에 깔려 있는 사내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이 짧게 토해졌다.
‘신……, 허억…… 나의 신……. 신…… 신…….’
자신을 부르며 헐떡이는 소리에 여우의 단정했던 미간이 일그러졌다. 교미에 차질이 없도록 그에게 욕망하는 어떤 상대든 투영하는 환술을 걸었더니 사내는 내내 저만을 부르며 정사를 치르고 있었다. 여인의 부드러운 허리를 더듬으면서, 엉덩이를 움켜잡으면서 애달픈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여우는 품 안에 말아 뒀던 것을 꺼내며 천을 손으로 걷고 침상으로 들어갔다. 교접하고 있는 남녀는 여우의 등장에도 반응하지 않고 행위를 계속 이었다. 이미 완전히 환술에 홀려 주변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각자가 욕정하는 대상에 빠져 있을 뿐이다. 다만 남자는 귀찮은 버릇이 하나 들어 있었다.
‘신……, 신…….’
아름다웠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고통을 호소했다. 사내의 달뜬 표정은 누가 보아도 황홀했을 미모였지만 여우의 눈에는 역겹기 그지없었다.
‘예. 아버지.’
진짜인 자신이 건드려야만 비로소 파정을 하는 귀찮기 그지없는 버릇.
여우는 가만히 몸을 낮춰 이지헌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속살거렸다.
‘그만 끝내 주십시오.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그의 명령이 떨어지고, 거짓말처럼 이지헌은 반복적으로 쳐 대던 몸짓을 멈췄다. 그대로 경직하며 여인의 몸 안에 정을 쏟아 낸다. 여우가 싫어하는 인간의 체취가 화악, 하고 사방에 퍼졌다. 정사가 끝나고 여인은 조심스레 들어온 시비들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섰다. 여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금침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신수들에 비하면 사정은 나았지만 역시 인간들의 번식은 번거롭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며.
‘수고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사내는 텅 빈 얼굴을 하고 자신을 올려다본다. 못 들을 것을 들은 표정을 하고. 아마도 제 손으로 죽음에 내몬 왕자를 떠올리는 듯해 여우는 일부러 더,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지헌이 결국 어째서 그리 칭하시는 거냐 물어 왔을 때, 인간들은 자신을 만든 이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냐며 웃었다. 이 몸을 만든 것이 당신이니 어찌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새 그림을 받아 왔습니다. 이번 화공은 실력이 제법이더군요.’
체액으로 젖은 금침에 닿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며 여우는 이지헌의 옆에 앉아 옆구리에 소중히 끼고 있던 한지를 펼쳤다. 아직 채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이지헌이 숨을 크게 내쉬며 그런 여우를 향해 고통에 가득 찬 눈을 들었다.
‘확인해 보세요. 얼마나 닮았습니까?’
태어나길 제 제물이 되기 위해 태어난 왕자. 귀한 핏줄을 타고나고도 평생을 별채에 갇혀 있어 이기하의 용모를 보았던 이가 귀했다. 그나마 목도한 이들도 학살에 휘말려 대부분 죽어 버렸던 터라 의존할 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여우는 이지헌과 몇 없는 목격자들의 말을 조합해 화공에게서 뒤늦은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내고 있었다.
‘종정부(宗正府)의 주사(主事)는 지금까지 중 가장 흡사하다고 했습니다만……. 아버지께서 보아도 그러합니까?’
눈앞에 드밀어진 초상화를 보고 이지헌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벌써 수없이 많은 초상화를 보아 왔던 눈이 제대로 상을 맺지 못한 채 흐릿해졌다. 확실히 실력이 제법이었다. 별채에 얌전히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린 아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
‘많이 닮았나 보군요.’
여우가 웃었다. 히죽, 하는 소리가 날 것처럼 길게 입가를 찢으면서.
볼일이 끝나고 몸을 일으키는 옷자락을 이지헌이 급하게 잡았다. 그가 선물했던 얇은 비단옷이 그 손길에 무참하게 구겨졌다. 이것을 입히고 신을 끌어안으면서, 이지헌은 신이 선녀 같다고 생각했었다. 설화 속의 선녀가 꼭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가지 마십시오. 가지 마세요, 나의 신.
흐트러진 머리와 나신 위에 야장의(夜長衣) 하나만 걸친 초라한 모습으로 이지헌은 굴복하며 매달렸다. 그의 앞에서는 왕의 체면도 권력도 자존심도 소용없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이 지고한 존재에게는 어떤 것이든 무용했다.
다행히 그의 선녀는 자비로웠다.
‘가지 않아요.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다정다감히 속살거리며 여우는 이지헌의 뺨을 쥐었다. 와 닿는 손길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드랍고 차가웠다.
‘지금 내게 제일 귀한 것이 여기에 있는데.’
소중한 듯, 여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지헌의 드러난 허벅지를 살며시 쓸었다. 그 손길 하나만으로도 이지헌의 양물은 곧장 또 발기했다. 살갗 위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완전히 부풀어 부들부들 떨린다. 다급하게 여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상 위에 눕혔다. 아래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지헌은 몇 겹이나 되는 얇은 옷자락을 들추고 아직 덜 여문 가슴을 덥석 물었다. 뽀얀 피부를 빨아 당기며 허겁지겁 아래를 파헤쳐 가느다란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듣기 좋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여우가 간드러진 미소를 짓는다. 얼른 제 안으로 들어오라며 이지헌의 곧추선 성기를 끌어당겼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신……. 나의 신……. 연모하옵니다. 무력한 제가 감히 전능한 당신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구멍을 뚫으며 이지헌은 쾌락에 도취되어 고백을 읊조렸다. 그의 연인은 웃음으로 화답하며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힘을 주었다. 다른 건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존재가 내 품 안에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쾌감에 이지헌은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을 감는 손길이 좀 전과 달리 뜨겁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여우는 환각에 빠져 새로운 여인의 몸을 탐하고 있는 사내를 침상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아직 인간의 정욕을 배우지 못한 눈에는 그 행위가 야만적으로만 여겨졌다.
아아, 정말 싫다. 저 감정만은 결코 배우고 싶지 않아.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귀가 썩을 것 같은 말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등을 돌렸다. 사내가 환각 속에서 본인을 어떻게 파헤치고 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번 화공에게는 큰 상을 내려야겠다고 주억거리며 소중하게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이지헌을 만질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을 실은 손놀림으로 그려진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신음 소리를 뒤로하고 여우는 침전을 가로질러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안의 한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아주 신중한 손길로 비어 있는 자리에 끼워 넣고 천천히 뒤로 몸을 물렸다. 시야가 넓어지며 동공에 한가득, 벽의 모습이 담긴다.
‘…….’
한 장, 두 장, 세 장…… 수십 장.
벽에 걸려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초상화가 여우를 내려다보고 있다. 제각기 다른 화풍이었지만 하얀 얼굴에 붉은 눈이 그려진 것만은, 모두가 같다. 그 수많은 아이의 얼굴들을 마주하며 여우는 그것들을 빨아들이듯 몸을 부풀리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 얼굴을 학습해. 언제 만나게 되더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설령 기억을 잃는다 해도 본능이 먼저 알아보도록 눈에 새겨 넣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자색의 눈동자가 초상화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가늘게 좁혀졌다가 커지길 반복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아직도 네가 이 안에 함께하고 있는 것 같으니. 어디를 가더라도 네 기척이 곁에 있는 것만 같아.
역시 운명이라서일까.
여우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그날 그랬던 것처럼 달빛 쪽으로 뻗어 보았다. 풀물도, 핏물도 없이 하얗고 깨끗한 손가락이 지느러미같이 펼쳐졌다. 그중 한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뺨을 향해 가져갔다. 그리고 타인이 만지는 것처럼 생경한 손놀림으로 쓰다듬었다.
왕이 시해되었다는 비보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을 넘었다. 쇠락한 왕조의 마지막 왕자가 잉태됐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왕의 시해범을 목격한 이들은 많았으나 그 누구도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제대로 증언하지 못했다. 귀신에 홀렸다가 깨어난 것처럼, 혹은 아직도 귀신에 홀려 있는 것처럼, 입가와 앞섶에 온통 피를 묻힌 증인들은 하나같이 왕조의 핏줄을 지켜야 한다고만 중얼중얼거렸다.
단 한 명, 맹인이었던 시비 한 명만이 특이한 증언을 했다. 눈이 멀어 본인이 직접 보진 못했지만 보았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것이 실로 아름다웠으며, 날개와 풍성한 꼬리를 가지고 있었고, 자색 눈을 가졌다 말했다며.
왕을 시해하고 나온 그것이 사람을 불러 모으는 다정한 목소리를 그녀도 들었으며 그것은, 스스로 무기를 든 이들의 앞에 몸을 던져 자결을 했다고.
하지만 자결을 했다던 장소에는 핏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아 그녀의 증언은 다른 자들의 것과 같이 헛소리로 치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