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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46/47)

Epilogue

아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방울이 구르는 듯한 예쁘고 맑은 웃음소리였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끊기지 않는 웃음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는 양 쫓아갔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옆은 꽃과 갈대가 섞여 탄생한 새로운 종이 거대한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내 우려와 달리 섬에서 발견된 새로운 종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자생하기 위해 변화했을 뿐이다.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

무릎까지 오는 갈대를 손으로 쓸며 좀 더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가 근처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제 몸집만큼 커다란 털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열심히 털실을 쓰다듬으며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뭐가 그렇게 좋으니?’ 하고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걸려고 했다.

“뭐가 그렇게 좋으니?”

그런데 바로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내가 할 말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대신해 주었다. 나는 놀라 그가 부딪치지 않게 옆으로 비키려 했다. 하지만 그 인영은 나를 지나치지 않고 비켜나는 내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중간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이 따스하게 빛났다.

「아버님!」

아이는 나타난 기하를 보고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하는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더니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다가 머뭇머뭇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내 손을 감싸고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그 손에 가만히 딸려 갔다.

아이는 다가온 우리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다리에 매달렸다. 몸집만 한 풍성한 꼬리가 열심히 털 고르기를 한 것이 무색하게 마구 흔들리며 도로 도깨비 풀을 잔뜩 묻혔다.

기하가 웃으며 몸을 굽혀 고개를 숙이자 아이가 두 팔을 벌려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품에 들어온 아이의 엉덩이에 팔을 받쳐 안은 채 기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익숙하게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어르자 아이가 또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는데 아이가 내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게 보였다.

“…….”

안녕?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 정말 귀엽다.

기하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아이는 나를 보고 수줍었는지 얼른 그의 어깨 밑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러더니 다시 살금살금 고개를 내밀어 나를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아이가 손을 내밀어 살며시 흔들기에 나도 따라 흔들며 인사했다. 정말이지 예쁜 아이였다. 과연 기하의 자식다운.

아직도 내게 인사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아니, 뜯어볼 것도 없었다. 새카만 머리칼에 밀빛 피부를 가진 아이는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보석 같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의식하고 본 아이는 마치 기하의 축소판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꿈에서 보았던 너를 이렇게 만나고 있다는 게.

‘명하신다면, 없는 사람으로 살며 아이의 앞에 절대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내가 임신한 것을 알려 주며 기하는 그렇게 말했었다. 죄를 고백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친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아이가 알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근친의 결과물인 것에 사고가 정지해 버린 내 앞에 엎드려 애원하며 그리 반복했다. 혹시라도 내가 제 새끼를 해칠까 봐, 미워할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현아, 아빠 손도 잡아 줘야지.”

기하가 아이를 어르며 속삭였다. 아이는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내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잘못 잡으면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조그만 손을 살며시 잡고 흔들었다. 아이가 눈꼬리를 접으며 생글거렸다. 웃는 모습도 꼭 기하를 빼닮아 있었다.

‘……아이가 붉은 눈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기하에게 그렇게 대답했었다.

‘누가 봐도 아버지가 너인 걸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말대로 아이는 붉은 눈을 타고 태어났다. 붉은 눈뿐만이 아니라 아이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날의 기하 그 자체였다. 뺨은 비단처럼 보드랍고, 별이 박혀 있는 눈과 마주치면 사르르 웃음 치고, 작은 몸으로 언제나 안아 달라고 조르고, 안아 올리면 귓가에 조그만 목소리로 너무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심장이 아프도록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

기하는 늘 아이를 보고 나를 쏙 빼닮았다 말하곤 했지만 이하현을 본 사람들은 모두 가주님의 판박이라고 감탄했다.

연결된 손끝으로, 아이의 생명력이 넘실대며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끼고 손을 뗐다. 손가락이 떨어지자 웃던 아이가 시무룩해졌다.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기하의 품에 안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살짝 숙이고 눈인사를 했다. 아이의 머리 위에 솟은 여우의 귀가 쫑긋쫑긋 내 얼굴이 흔들리는 것에 맞춰 움직였다.

인간과 여우 신의 교합으로 태어난 새로운 종, 우리의 아이는 신인류였다. 인간의 정체성도, 여우의 정체성도, 신의 정체성도 모조리 가지고 태어난. 필요할 땐 언제든지 여우의 꼬리와 귀를 실체화시킬 수 있고 음성은 오직 진음만을 쓸 수 있었다. 인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점만은 아쉬웠다. 그 탓에 우리 아이는 극히 말을 제한하면서 살아야 했으니까.

“가주님― 기현 님―! 다들 어디 계세요?”

멀리서 우리를 찾는 박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있다가 난처한 미소를 흘렸다. 아이를 찾고 바로 내려가야만 소위 심제준 장례식 모임이라 칭하는 약속에 늦지 않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뛰어갈까요?”

기하는 아이를 좀 더 안전하게 고쳐 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꽉 쥔 채다. 아이의 생명력이 감도는 부분을 기하가 가진 어둠이 채워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젠 그 어둠이 빛보다 포근하다면, 나는 이미 틀린 것일까.

나를 회복시켜 주려는 내 아이, 나를 타락시키려는 내 연인. 나는 두 부자의 줄다리기에 기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아니, 좀 더 기다리라지 뭐.”

그렇게 말하며 기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하의 품에 안겨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내 행동을 흉내 내어 제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뜨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신뢰로 충만한 붉은 눈동자 안에 우리가 고스란히 비치고 있다. 평화롭고 행복한 감정이 가슴속에 넘쳐흘렀다.

거의 모든 이야기 속의 여우들은 사악한 존재였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의 여우들은 선한 존재일지 몰라도 사람들이 악인이었다. 여우가 나오는 이야기에서 여우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래오래. 내지는 영원히.

이렇게 끝맺어진 이야기 속의 여우는 어떤 방식으로든 불행해졌다.

영원히 끝맺어지지 않을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나는 언젠가는 습관대로 또 악패를 꺼내 들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되어 버린 삶에 회한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결코…….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말을 속삭였다.

“……사랑해.”

보폭을 맞춰서 걷고 있던 기하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하고 곧 눈이 마주쳤다. 너는 녹아내릴 듯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대답 대신 내 쪽으로 얼굴을 기울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이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가 했던 말을 따라 해 보더니 사랑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기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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