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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45/47)

Adam

이기현의 차가 정원에 도착하는 소리를 들은 이기하는 즉시 하던 것을 중단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통상적인 퇴근 시간보다 세 시간 정도 빠른 시간이었다. 이기하가 1층에 닿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고 이기현이 잰걸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다녀왔어.”

조급하게 중얼거리며 빨려들 듯 품으로 안긴다. 이기하는 계단 중간에 서서, 팔을 벌리는 형의 허리를 들어 올려 꽉 끌어안았다.

“어서 오세요. 형님.”

그날 밤에는 외출하지 않고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영화를 봤다. 원하는 때에 언제든 영화관을 비울 수 있었지만 이기현은 몇 번 그렇게 출입하더니 영화관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괜히 불편한 좌석에 붙들려 있는 것보다 자기는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뒹굴거리면서 보는 쪽이 더 좋다고 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서재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곳을 영화관 삼고 있었다.

오늘의 영화는 최근에 개봉했다는 스릴러 영화였다. 형제가 함께 읽은 적이 있는 추리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라 선택했다. 피곤했던 건지 이기현은 처음 몇 분은 잘 보고 있나 싶더니 이내 고개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

눈치챈 이기하가 얼른 허리를 세워 무너지는 형의 몸을 받아 냈다. 밀려드는 잠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이기현은 몇 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품에 안고 있던 아이스크림 통을 빼내는데도 깨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섹스를 한 게 무리를 줬던 걸까. 이기하는 음료수가 떨어지지 않게 밀어 두고 조심스럽게 형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 쪽에 기대도록 끌어당겼다. 툭, 머리의 무게가 쏠리며 이기현은 완전히 이기하의 가슴에 늘어졌다. 스크린 속에서는 막 총격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이기하는 리모컨으로 볼륨을 최소로 낮췄다. 곧 서재 안은 거슬리지 않는 백색 소음과 이기현이 숨을 고르게 쉬는 소리만 들렸다.

형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면서 이기하는 언제쯤 그를 침대로 옮기는 게 좋을까를 가늠했다. 바로 옮기는 것도 괜찮겠지만 이대로, 조금 더 같이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맞닿은 형의 손바닥을 조물거리고 잠들어 있는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누르면서 이기하는 그렇게 욕심을 내보았다.

달콤한 고민이었다. 전 같았으면 잠든 형을 옮기는 일도,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었으니. 이렇게 형이 자신의 품에서 잠들고 그것을 자신이 옮길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 말도 안 되게 행복했다. 낙원에 이주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꿈을 꾸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더구나 최근은, 이기하에게는 정말로 꿈결을 걷는 듯한 일들만 일어났다.

요즘 들어 이기현이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착각하는 것도 아니고 환상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기현은 분명히, 집착을 하고 있었다.

집착의 촉매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고였다. 완전히 회복된 이기하와 달리 사고의 당사자도 아닌 이기현이 사고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사고가 난 이후에 집에 돌아온 이기하를 붙잡고 이기현은 그에게 스스로 운전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기하가 말한 운전 미숙이라는 말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듯해 이기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현의 그다음 요구는 당분간 아예 차를 타지 말아 달라는 말이었다. 당분간, 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권능을 행사하러 바깥을 출입해야 했던 이기하로서는 좀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도 수긍했다. 섬의 운용을 늦추더라도 형의 불안이 빨리 해소되는 게 낫겠다 싶었으니까.

다음의 요구는 더 놀라웠다.

이기현은 다음 날 반차를 내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오더니 이기하에게 앞으로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면 안 되냐고 잔뜩 겁에 질려 매달렸던 것이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본가에 있었을 때처럼 신이 집 안에 유폐되는 것이었다. 결국 저주를 반복하려는 신의 명에 이기하는 전신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나는 완벽하게 네 마음을 이해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기하의 소매를 움켜쥐면서 이기현은 물기 어린 목소리로 한탄했다. 그날 치러진 정사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탐욕스러웠고 이상하리만큼 흥분하고 있었다. 한계까지 들이박는데도 이기현은 이기하의 허리를 끌어당겼고 심지어 피가 비치는데도 멈추는 걸 원하지 않았다. 몸 안쪽을 관통하면서 이기하는 이기현의 마음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체의 쾌감이다. 형의 몸을 끝없이 탐하고, 계속해서 갈구하며 텅 비어 있던 몸이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체력이 다해 이제 매달리지도 못하고 아래에서 흔들리기만 하던 이기현이 가늘게 숨을 내쉬면서 땀에 젖은 손바닥을 이기하의 뺨에 가져가 그러쥐었다.

‘너를 이해해.’

꼭 감고 있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너를 이해해, 그 말은 이기하에게 위로로 다가왔다. 기갈에 시달리다 미쳐 버린 너를 이제 이해한다고, 이기현은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짐승은 그 말에 화답하듯 혀를 내밀어 눈물을 핥아 올렸다.

“…….”

어느새 스크린 속에서는 살인을 공모한 조연이 시체를 은닉하는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진짜를 보았던 이기하의 눈에는 아무리 분장을 잘해 두고 소품에 신경을 썼어도 그저 조악하게만 보였다. 그나마 책으로는 괜찮던 반전의 장치도 영상으로 구현하니 조잡하기 그지없었고. 예나 지금이나 저런 게 대체 어디가 재밌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척을 하며 물으면 눈을 빛내며 설명해 줄 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기하는 내일도 조금, 멍청한 척을 할 예정이었다. 성실한 그의 형은 이해를 돕겠다고 도서관에 가서 원작 소설을 빌려 올지도 모르겠다.

밤이 깊어졌다. 이기하는 신중하게 이기현의 무릎 뒤에 팔을 넣고 축 늘어진 그의 몸을 안아 올렸다. 꺼지지 않은 스크린에서 번쩍번쩍 요란한 빛이 새어 나와 이기현의 뺨 위를 다채롭게 물들였다.

* * *

이기현은 아픔에 눈을 떴다.

그것은 배 속을 찌르는 듯한, 이상스러운 둔통이었다. 최근 들어 아랫배가 아린 느낌이 가끔 있기는 했었다. 살짝 불편했다가 몇 분 참아 내면 사라지는 가벼운 증상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했는데, 오늘은 좀 심한 듯했다.

이기현은 신음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누워 있는 채로 배 위를 조심스레 눌렀다. 금세 고통이 잦아들길 바랐지만 어째선지 정신이 든 뒤로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한다.

“…….”

이를 물고 참아 봐도 속을 후벼 파는 생소한 통증에는 결국 견디지 못해 끙끙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당연히 그 소리에 옆에 누워 있던 이기하가 잠에서 깨 버렸다.

“……형님?”

상체를 일으켜 상황을 파악한 이기하가 당황한 얼굴로 웅크린 형의 몸을 확인했다. 통증을 참고 있던 이기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괜찮아. 그냥 복통이 좀…….”

“잠시만 참으세요. 곧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야, 어디 가지 말고 옆에만 있어 줘.”

이기현이 다급히 일어나려는 동생의 가운을 잡아당겼다. 살짝 털어 내기만 하면 떨어져 나갈 미약한 힘이었지만 이기하는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형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런, 이마가 뜨거워요.”

“그러게, 네 손이 시원할 때도 있었네.”

잠깐 상태만 보고 떼어 내려 했던 손이 그 말에 떨어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렀다. 이기현은 통증이 가라앉는지 아까보다 편안한 얼굴로 숨을 고루 내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말씀해 주세요.”

“별거 아냐. 몸을 좀 혹사시켰나 보지. 속이 좀 아릿한 게 다야.”

그 말에 이기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제 무리시킨 게 본인이었으므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기현은 밭은 숨을 내쉬며 이기하의 손바닥을 뺨으로 끌어 내려 얼굴을 비볐다.

“아― 기분 좋다. 네 손은 커서 진짜 좋아.”

열이 올라 메마른 입술 표면이 손바닥에 느릿하게 입을 맞췄다. 이기현은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이기하는 손에 와 닿는 형의 체온이 평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을 내뿜고 있어 식은땀이 솟아났다.

“입술이 다 말랐어요. 적어도 물이라도 가져오면 안 될까요.”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놔준다. 이기하는 거의 뛰듯이 방을 빠져나와 긴급 호출 버튼을 누르고 의료 센터를 불러들였다. 스쳐 지나가며 본 벽시계는 새벽 4시 30분을 가리켰다. 늦어도 10분 내로 대기하던 의료진이 집에 도착할 것이다.

주방에서 미온수를 담고 간단한 상비약이 담긴 구급상자를 찾아 침실로 돌아갔을 때 이기현은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일어나지 말고 누워 계세요.”

“괜찮아졌다니까.”

이기하가 건네는 컵에 입을 대더니 눈을 찌푸렸다.

“찬물로 가져오지 그랬어.”

“몸이 안 좋을 때 누가 찬물을 마셔요.”

이기하가 건네주는 진통제 두 알을 삼키고 이기현은 물을 들이켰다. 이제 진짜 괜찮아져서 약도 안 먹어도 되는데, 하고 끝까지 말을 보탠다.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 들어 올리고 이기하는 짝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아직 미열이 남아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지만 정말로 괜찮아는 보였다. 일단은.

“그러게 괜찮다니까 유난은.”

동생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보고 이기현이 피식 웃었다. 아직 평소에 끈질기게 붙어 있던 둔통이 남아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자다가 잠깐 컨디션이 안 좋아진 것뿐이라고. 이걸로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지금껏 이런 적이 없으셨잖아요.”

“네가 몰라서 그렇지 컨디션 안 좋은 적은 꽤 많아.”

“형님.”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아프면 바로바로 말할게. 됐지?”

“…….”

“아직 해도 안 떴네. 나 좀 더 자면 안 될까? 너도 일어날 시간 안 됐잖아. 그만하고 좀 더 자자.”

이기하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얼른 어르며 이기현이 앞에 서 있는 동생의 가운을 끌어당겼다. 앉은 채로 여전히 석연찮아 하는 이기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앞섶이 벌어져 있던 상태라 드러난 복근에 이기현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비벼졌다. 이기하는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대로 그냥 재우는 것이 나은 것인지, 당장 진료를 받도록 만드는 게 나은 것인지.

저울질은 의외로 손쉽게 끝났다. 이기현이 물기에 젖은 입술로 이기하의 장골 부근에 쪽 키스를 했던 것이다.

이걸 거역할 재간은 없지. 이기하는 한숨을 쉬며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형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럼 잠시만요. 아래층 불을 켜고 와서.”

이기현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가운 아래로 어젯밤 혹사시킨 자국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을 보고 또 후회의 감정이 뭉글거렸다. 두 번째로 싫다고 했을 때 말을 들을 것을.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해서 후유증이 있을 만큼 건드려 버리다니.

무드 등 하나만 켜 두고 이기하는 방 밖으로 나와 아까 했던 행동들을 번복했다. 구급상자를 제자리에 놔두고 물잔을 돌려 두었다. 긴급 호출을 취소하기 직전,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위층에서 언제 오냐는 형의 목소리가 들려와 금방 간다고 대답하고 버튼을 눌렀다.

이기하는 형의 허리를 끌어안고 두 시간 정도 더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새벽의 일도 있었으니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형의 이마에 살짝 손을 대 보았다.

손바닥에 와 닿는 건, 다행히 평소와 같은 온도다. 보통 사람보다는 차가운 이기현만의 체온. 이기현이 아프지 않다고 우겼던 것이 맞았던 모양이라며, 이기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에서 이기현이 아픔에 잠을 깬 적은 없었기에 걱정스러웠다. 정기 검진 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었지, 이기현에게 붙여 둔 자들도 그가 특이 행동은 보인 적 없었다고 했으니.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은 왜일까. 거스러미 하나가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고 자꾸 신경을 거슬리고 있는 것처럼.

바늘구멍만 한 변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남자는 등을 보이고 있는 형을 지켜보며 평소보다 더 오래 자리를 지켰다. 이기현이 분당 몇 번이나 숨을 내쉬는지 세며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임을 확인했다.

―복통 말씀이십니까.

새벽에 호출을 번복했던 이유를 설명하며 이기하는 머리의 물기를 털어 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취소 명령이 떨어져 진입을 멈추고 밤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분이 통증으로 잠을 깰 정도면 꽤나 심했을 겁니다.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진통제 두 알 먹이고 자는 중이고, 열은 내린 상태야.”

―아무래도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기현이 저렇게 싫어하니 밀어붙일 수는 없지.”

어차피 그분은 신의 소유물이지 않냐고, 전처럼 그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뜻대로 하시면 되는 것 아니냐고, 듣던 이는 의문을 가졌지만 당연히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럼 혹시 모르니 차후에 다른 명을 내리실 때까지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탈의한 상체에 타월을 걸친 이기하는 옷을 갈아입기 전 침실 문을 열고 이기현이 자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흔한 잠버릇 하나 없는 연인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매번 이기하가 떠나기만 하면 그가 누웠던 자리로 이동해 있었다. 이기하가 썼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기하가 떠난 자리에 폭 안겨 몸을 말고 잠드는 것이다. 이기하의 체취와 남아 있는 체온을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는 그 행동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이기하는 늘 이렇게 몇 번이고 이기현이 자는 것을 확인하곤 했다. 오늘은 그 사랑스러움에 걱정도 얹어진 확인이었지만.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 지켜보고만 있는데도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뭉글거렸다. 불안이라기엔 애틋하고 초조함이라기엔 설레기도 한.

단단하게 쳐 뒀던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다. 이기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오전에만 두 개가 와 있었다. 하나는 광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최근 이기하가 꽤 신경 쓰고 있는 사업이었다.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자금들 대부분은 제1 세계 사업가들에게서 나왔다. 혈족들은 그것을 속되게 ‘낚는다’고 표현했다. 낙원에 오고 싶어 하는 이들은 발에 차이게 많았다. 썩어 나도록 돈이 많은 작자들.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쌓아 두고 살다가 돈이 썩는 냄새를 맡아 보았냐며, 그 냄새는 시체 썩는 것보다 심하다고 너스레를 떨어 대는 천박한 자들은 아예 대상 외였다. 돈만 가지고는 낙원에 올 수 없었다. 이기하는 자본은 기본으로 등에 업고 낙원의 운용에 도움이 되는 적확한 인물들만을 신중하게 선별했다.

시간의 절실함, 비밀을 유지 가능한 배경과 충성심, 그리고 절대적인 약점.

오전 중으로 혈족들이 몇 차례의 검증을 거쳐 추려 낸 ‘낚을’ 이들의 명단을 살펴봐야 했다.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걸맞은 인재를 낚아 올려 적재적소에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기현이 기묘한 집착을 시작한 이후에 이기하의 일도 서서히 쌓여 가고 있었다. 집을 나가지 말아 달라는 말에 일주일가량을 외출하지 못해 예의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스란히 남아 처리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이기하는 오늘도 일을 처리하는 대신 적당히 훑어보고 밀어 두었다. 그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선순위가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본 이기하는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집무실에서 내려왔다.

이미 완전히 동이 터 전면창 거실에서 햇빛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채광을 신중하게 고려해 지은 집이었다. 마침 공기도 깨끗하고 맑은 날이다. 외출하기에 좋은 날씨라며 이기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식사를 준비했다. 볶아 둔 원두를 덜어 내 그라인더에 갈고 포트에 물을 끓였다.

반쯤 열어 둔 전면창으로 여우들이 낑낑 난리를 치는 소리가 들리기까지는, 이기하는 더없이 평화로운 날이라고 생각했다.

“…….”

평소와는 다른, 귀를 거슬리게 하는 높은 경계음. 정원을 마구잡이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여우들은 흥분해 있었다. 호소하는 듯한 울음소리에 이기하는 참다못해 젖은 손을 닦으며 눈을 찌푸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우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이기하의 다리에 일제히 매달렸다. 캥! 캥!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고 정신없이 바짓단을 긁어 댄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매달리긴커녕 자신의 그림자도 밟기 싫어하던 여우들이 아니었나.

진정시키는 법을 몰라 한숨을 내쉬며 지켜보는 중 무언가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의식보다 먼저 신경이 반응하는,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지독한 위화감.

그는 이기현이 잠들어 있는 침실 쪽으로 휙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빠르게 사고를 더듬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신체가 먼저 반응했다. 폭발적으로 튀어 나간 몸이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가 침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침실 안을 확인한 이기하는 형을 부르려고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이기현은, 다행스럽게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의 형용을 확인하고 꽉 조여 있던 가슴께의 힘이 탁 풀렸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다. 이건 이미 고질병이 되어 버렸다. 혹시나 이기현이 도망이라도 갔을까 봐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순간순간 미친놈으로 변해 버리는 것.

언제쯤이 되어야 이 버릇이 없어지려나, 없어질 수는 있으려나,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재생된 심장도 병은 그대로 이어지는 모양인데.

이기하는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오는 심장 부근을 문지르며 마침 깨울 시간인 것을 확인하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형님.”

“…….”

“형님, 이만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머리맡에 앉아 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치우고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이러면 이기현은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팔을 벌리곤 했다. 조건 반사적인 행동이다. 이기하의 목에 팔을 감고 여전히 잠이 든 채로 욕실로 옮겨지는 게 매일 그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형님……?”

두 번이나 키스를 해도 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언제나 깨는 것을 힘겨워하긴 했지만 아예 기척도 하지 않는 건 드물었는데. 새벽에 한 번 깬 것 때문에 그런 것인지, 혹은 아직도 아픔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인지, 이기하는 이기현의 이마를 짚어 보고 미열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낯을 굳혔다. 역시 검진을 받아야 했다. 어리석게 형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게 아니었는데.

자책하며 서둘러 이기현이 둘둘 말고 있는 이불을 반쯤 걷어 냈을 때였다.

“…….”

그의 눈 안을 금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햇빛이 스며든 것을 착각한 것인가 이기하는 눈을 의심했지만 작은 빛은 한 번 더,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개안으로 드러나는 그 흔적을 확인하고 이기하는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이기하는 그것을 찾아 꽤나 헤매었었으니까.

눈앞에서 사라져 이기현의 몸에 흡수되었다 결론 내렸던 여우가, 아주 작은 씨앗으로 변해 이기현의 배 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희미하게 아지랑이를 피웠던 것과 같은 가냘픔으로 이번에는 조그맣게 맥동을 울려 대고 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생명력을 발산한다.

그 순간 이기하는 모든 것을 깨닫고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그건, 바로 두 사람의 아이였다. 이기하와 이기현의. 유독 그에게 친근하던 여우는 운명이 뒤틀리지 않았다면 정해진 수순대로 태어났을 그들의 결실이었다. 이기하가 운명을 반복해 환생했듯 전생에 태어났어야 할 씨앗 역시 운명을 거슬러 아비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수정될 리 없는 이기하의 씨가 발아하도록 이기현의 몸을 개화시키고 자신이 잉태되길 기다렸다. 이기현이 보여 줬던 일련의 이상 행동들은 그에서 비롯된 거였다.

사랑하는 이가 제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기하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격정에 휩싸였다. 이건 기적이었다. 기적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치솟는 희열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손을 볼 수 없다고 고백하는 이기현에게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은 진심으로 연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격렬히.

치밀어 오르는 행복감을 주체 못 하고 이기하는 제자리에 선 채로 신음했다. 그는 마음껏 환희하지도 못했다. 긴 세월 마음을 배신당하고 기만당하며 그가 뼈저리게 학습해 온 것이었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방어 기제를 세우고 이기현을 사랑하되 의심한다. 이것이 꿈이라면, 현실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이 행복을 잃어버린다면 자신은 이번에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미쳐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고요하게 마음을 다듬으려고 노력했다. 참아 온 자답게, 기다려 온 자답게, 눈앞의 환희를 바로 그러쥐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결국 넘실대는 감정에 굴복하여 자신의 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손대지 않고 눈으로만 보기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봤자 고독을 덕지덕지 매달고 있는 자신의 존재가 짝과 제 아이에게 해라도 입힐까 몸을 낮춰 웅크리고, 차마 다른 곳에는 손대지도 못한 채 손가락 끝에 조심스럽게 입 맞추고 다시금 입 맞추는 게 다였다.

그는 숭배하는 이를 찬미하며 끝없이 감사하다고 읊조리고는 그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손등에 와 닿는 물기에, 뜨거워지는 감촉에 결국 이기현은 깨어났다.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동생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기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기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말 좀 해 봐. 무슨 일인데. 내가 뭔가 잘못했어?”

“아니요.”

그럴 리가.

잘못은 전부 자신이 한 것이다. 이 어여쁜 존재를 타락시켜 땅에 처박아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억지로 아이를 가지게 만든 더럽고 추악한 내가.

이기하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르고 살았는지 깨닫고 후회했다. 후회라는 감정은 여전히 생소했지만, 업보를 되돌려 받고 있는 중인 것만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늦었지만 용서를 빌어야 했다. 용서받지 못한다 해도, 해야 했다.

“형님께 고백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기하는 울고 있었다. 늘 꼿꼿하게 서서 흐트러짐 없던 남자는 울면서 고귀한 이의 손등에 입 맞추고 참회의 시작을 읊조렸다. 그것은 지은 죄만큼 아주 긴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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