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메라맨 (44/47)

카메라맨

한껏 내리던 눈이 그치고 모처럼 청명한 하루였다. 건물도 거리도,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 어딜 보아도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지만 날씨는 따사로운 쪽에 가까웠다. 사고가 있었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벌써 신년이 된 지 오래다. 심제준은 화단에 앉아 손가락으로 달을 세며 자신이 낙원에 도착한 지 몇 개월이 지났는지 헤아려 보았다. 그러다 연구소 정문 쪽에서 두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미안, 기다렸어? 처리해야 될 게 있어서 좀 늦게 내려왔는데.”

늦었다는 말을 하면서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했다. 여전하네 싶어서 심제준은 속으로 웃었다.

“아니, 방금 왔어.”

햇살은 따뜻했지만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 이기현은 머플러로 얼굴 반을 감싸고 걸어와 차 키로 시동을 걸었다. 김태영은 춥지도 않은지 얇은 외투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어라, 셋이서 가는 거예요?”

약속은 이기현과 둘이서만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와 있는 김태영을 보고 물었다.

“내가 너 못 데려다줄 거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어. 이런 일로 수행원을 부르기도 뭣하니까.”

“고맙다는 말은 됐어요.”

씩 웃으며 김태영이 툭, 심제준의 어깨를 쳤다.

과묵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박종오나, 지켜보고 있으면 자기가 더 아슬아슬해지는 장운과 함께 가는 것보다야, 능글거려도 충실하게 맡은 소임을 이행하고 있는 김태영과 함께하는 게 훨씬 낫긴 했기에 심제준은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이기현과 단둘이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섬의 동쪽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이기현은 특이한 식물군이 발견됐다는 말에 채취 목적으로, 심제준은 촬영 기사로서 동행하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에 목에 걸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심제준은 꽤나 들떠 있었다.

촬영 일은 싱겁게 끝났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도착한 동쪽 해안가에 피어 있는 꽃과 잎줄기 몇 장을 다각도에서 촬영하고 검체를 채취하는 일을 옆에서 살짝 거들어 주는 게 다였다. 이기현이 이 기후에서는 이 군락이 자생할 수가 없다고 이상한 일이라며 중얼거리는 거야 심제준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고.

이기현과 달리 김태영은 연구원인데도 식물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밖에서는 박종오처럼 행동하며 조금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고만 있었다.

“태영 씨. 이만 돌아가자는데요.”

바위를 올라 김태영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담배 냄새가 났다. 자신이 선물해 준 지포 라이터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심제준은 괜히 뿌듯해져 미소를 지었다.

“하하, 금연은 실패하신 건가요?”

손가락에 낀 담배를 크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뱉으며 김태영이 씩, 웃었다.

“세상이 내가 금연하도록 놔두질 않네요.”

짧은 기간 동안 그가 금연과 흡연을 반복하는 걸 보아 왔던 심제준이 그의 말에 따라 웃었다.

“채취는 끝났대요?”

“네, 뭐 문제가 생긴 거 같다고 어쩌고 하던데 태영 씨가 가서 들어 보세요. 저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당연히 문제가 있겠죠,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어쩐지 시니컬한 것이 섞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좁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기현의 등이었다. 그 등에서 뭐라도 보고 있는 양, 김태영은 후우 연기를 내뱉으며 꿈쩍도 하지 않고 응시했다.

섬의 인간들 대부분이 그랬지만 김태영도 이기현의 앞일 때와 아닐 때의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스위치로 전환하듯 아예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걸로는 박현진이 제일 심했던 것 같았고, 김태영은 이기현이 없는 장소에서는 기존보다 날카로웠다. 아마도 이게 본 성격이지 않을까 심제준은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 더 신기한 군집이 많이 생길 거예요. 여기는 거대한 배양실 같은 섬이니까.”

“그건…… 환경이 인위적이라는 말씀이시죠?”

“뭐― 그런 거죠. 사시사철 꽃이 필 수 있는 환경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의 힘이 자연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는 이 섬에서 정상적인 것이 어디 있다고.”

심제준은 눈발이 날리는데도 시들지 않았던 정원의 상사화 무리를 떠올렸다. 그 꽃밭은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그야말로 권능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소멸 없이 생명력만 넘쳐흐르는 장소. 현실이 아닌 환상 같은 공간이다. 그 환상 같은 곳에서 이기현이 살고 있었다.

“동쪽은 신의 힘이 비교적 닿지 않은 곳이니 진행 속도가 더 빠를 뿐이고요. 저 녀석도 다 알면서 그냥 혼잣말하는 거예요. 하아……. 겨울에도 꽃가루가 날리고 수분이 되고 있으니, 벌써 메말라 비틀어져서 씨앗을 떨어뜨려야 했을 식물은 새로 태어나는 식물과 얽혀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낼 테고요.”

새로운 종을 만드는 것. 사실 궁극적으로 신이 바라고 있는 것은 그것이지 않을까.

심제준은 멀리서 일어나는 이기현을 멍하니 쳐다보며 신의 음성을 되새겼다.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음성이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신의 음성은― 그 사람의 음성은 어릴 때에도 그랬지만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깍듯이 경어를 쓰고 있었지만 듣는 이를 굴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낮게 깔리는 저음의 목소리는 모욕을 준다 해도 모욕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그날만은 조금 달랐다.

“심제준 씨. 뭐 좀 하나 물어봐도 돼요?”

적당히 태운 담배꽁초를 얌전히 케이스에 넣어 재킷에 도로 갈무리한 김태영이 심제준의 이름을 불렀다. 별생각 없이 물어보시라 대답하자 바라보는 김태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저번부터 이기현을 왜 감시하고 있는 겁니까?”

“…….”

굳어 버린 심제준의 태도를 보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김태영이 곧바로 표정을 풀고 혀를 찼다.

“누가 물었을 때 어떤 식으로 대응하라는 연습을 안 했어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심제준이 어버버 입을 뗐다.

“그걸…… 어떻게…….”

“너무 티가 나서 모를 수가 없던데. 아마 저 눈치 없는 녀석도 알지 않을까 싶은데요?”

김태영이 짐을 정리하고 있는 이기현을 향해 턱짓했다.

“감시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고 치고, 내가 궁금한 건 나를 놔두고 왜 신께서 굳이 당신에게 감시의 역할을 주셨는지 궁금한 거거든요.”

“…….”

“어차피 들통 난 마당에 말해 봐요. 같은 포지션이라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그건…… 죄송합니다. 말할 수 없어요.”

김태영은 안절부절못하며 목에 걸어 놓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심제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 때문에 그런 거죠? 굳이 가주께서 훈련도 안 끝낸 당신을 고른 거라면 눈밖에 없겠지.”

“…….”

“그래. 대답을 못 하겠으면 지금처럼 차라리 침묵을 해요. 나야 당신 배경을 아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혈족들은 당신처럼 특이한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개안된 걸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눈을 싫어합니까?”

아무래도? 김태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에 기자 신분이었던 카메라맨 하나가 이기현을 스토킹한 적 있었거든요. 그자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폭로하려고 몰래 촬영을 했었어요. 하마터면 큰 소동이 날 뻔했지.”

가주가 왜 자신의 눈에 적대적이었는지 드디어 이유를 알게 된 심제준이 머쓱하게 눈가를 어루만졌다. ‘촬영’ 소리를 했을 때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런 사건이 있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겁도 없이 카메라를 줄 수 있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다녔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맡기신 겁니까? 개안으로 보이는 영역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채근하는 목소리에 은근히 고압적인 기운이 섞여 있다. 심제준은 대답을 회피하며 이기현을 바라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볼일을 마친 이기현은 검체 가방을 든 채로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 그가 입고 있는 코트가 마구 휘날렸다. 그의 등에서 오색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라 너울거렸다. 개안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흔적들을 좆았다. 분명 저것은 얼마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심제준이 이기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이기하가 퇴원하고 이틀 뒤였다.

처음 이기하를 독대했을 때, 그는 강제로 고독을 마셔야 했었다. 저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까 봐 심제준은 공포에 질린 채 이기하의 앞에 끌려갔다.

그러나 신의 요구는 의외로 심플했다.

‘형을 감시해 주십시오.’

제가 말입니까? 어떻게요? 멍청한 물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현의 주변에는 심제준이 대충 아는 것만 해도 수 명의 훈련을 마친 전문 인력이 붙어 있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심제준은 감시는커녕 방해가 안 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당신은 저것들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이기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심제준은 창밖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우들과 눈이 마주쳤다.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걸 숨기라고 말한 것은 가주였으면서, 이것도 또 다른 시험인 걸까, 심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아……. 이기하는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말을 이었다.

‘저것 중 하나가, 최근에 계속 내 주위를 따라다녔습니다. 집 안에 발을 들이진 못하니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외출하면 어김없이 따라다니더군요.’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후에 돌이켜 보면 가주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 자체가 건방진 행동이었다. 이기하는 심기가 불편한 와중에도 인내심을 발휘했다.

‘보통은 우편함 근처에서만 무리 생활을 합니다. 이 섬의 모든 구역은 내 권역 내니까. 이기현을 쫓아다니면 몰라도 나를 쫓아다닐 이유도 없고요.’

‘왜요?’

‘……그야 나를 두려워하니까요. 당신이라면, 이런 나를 쫓아다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심제준은 이기하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보고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손을 청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대체 저 등에 지고 있는 사악한 것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신이라 추앙받는 가주가 저것들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개안을 가진 것에 후회는 없지만 이기하를 볼 때마다 심장 마비에 걸릴 것 같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남들에게는 눈이 멀도록 아름다운 사내였지만 정작 열려 있는 심제준의 눈은 가주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

이기하는 초조한 리듬으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어쨌든, 그렇게 쫓아다니던 녀석이 오늘 아침부터 사라졌습니다. 아침 운동을 나가면 어김없이 따라왔었는데,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그럼…… 해결된 거 아닌가요?’

해맑게 물어보는 심제준의 말에 이기하의 손가락이 뚝 멎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기현의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는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이기하는 이를 갈며 그래서 심제준을 불러들인 궁극적인 이유를 꺼내 놓았다.

‘그것이― 내 생각에는 이기현의 몸속으로 들어간 거 같습니다.’

“이봐― 늦었어, 이만 출발하자.”

멀찍이서 이기현이 그들을 불렀다. 김태영이 알겠다고 소리치고 심제준은 그 뒤를 느지막하게 따랐다. 형의 몸 안으로 여우가 들어간 것 같다는 가주의 말대로, 이기현의 몸에서 희미하게 여우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기현이 의식하고 흡수한 건 아닌 거 같고 여우의 의지였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냥 흡수에서 끝났으면 심제준이 호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이기현의 몸은, 여우가 들어간 시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천계로의 연결 고리가 잘려 나간 뒤 이기현에게서 겉모습으로 남은 여우의 정체성은 꼬리 하나뿐이었는데, 하필 날개가 다시 돋아날 조짐이 보였다. 귀찮기 그지없던 여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심 시원섭섭해하던 차에 이기현의 변화를 발견한 이기하는 말 그대로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기현에게서 신의 힘이 복원될까 봐, 기껏 꺾어 놓은 날개가 재생될까 봐, 갖은 사특한 수를 써 뒀던 것을 뚫고 교활하게도 여우들은 돌파구를 알아낸 것이다.

신성한 영체들이었지. 억지로 빚어낸 고독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여우들은 해치지 않는다. 이기하는 날 때부터 그렇게 정했던 지론이 이번만큼 원망스러운 적 없었다.

‘이기현의 옆에서 다른 여우들이 접근하는지 감시해 주십시오. 여우뿐만 아니라 당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그렇게 명령하는 남자의 음성은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어, 심제준은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가 인간답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기현의 몸에 조금의 변화라도 생기면 곧바로 보고해야 합니다.’

“끝까지 임무를 말 안 한 건 잘했어요.”

주차된 차에 가까이 가기 전, 김태영은 불쑥 그렇게 말하며 질 나쁘게 웃었다.

“만약 말했으면, 내가 당신이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다고 밀고해 버렸을 거예요.”

빙글거리는 웃음은 그 말이 농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어 심제준은 얼떨떨하게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기현은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출발해 버릴 기세였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벌써 안전벨트를 맨 뒤 시동을 걸고 있었다. 창밖으로 대충 손을 흔들고 후진하더니 금세 먼지를 남기고 달려가 버린다. 남겨진 김태영이 자기 짝이 그렇게 걱정되면 오질 말든가 하면서 투덜거렸다. 이기현이 가 버렸으니 재킷을 더듬어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일이 일찍 끝났으니 오랜만에 동생에게나 들러 볼까 싶었다.

일단 심제준을 기숙사로 데려다주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뒤에……. 아, 이대로 동생 녀석한테 심제준을 데려가 소개시켜도 재밌겠다. 두 번이나 죽이는 걸 실패한 타깃을 앞에 두면 그 녀석 표정이 볼만할 테니.

심제준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김태영은 음험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나저나 아까 말씀하신 그 사람이요.”

“음?”

그런 줄도 모르고 심제준은 조수석에 타서 안전벨트를 매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기현을 스토킹했다던 카메라맨은 그럼 그 뒤에 어떻게 됐어요?”

“뭐 어떻게 됐겠어.”

김태영은 별 이상한 것을 다 묻는다는 얼굴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액셀을 밟으며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눈이 뽑혔지.”

* * *

크리스마스의 사고 이후,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낙원은 놀라울 만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평화롭고, 언제나처럼 풍요로웠다. 실제로 죽음을 맞았던 이가 있었는데, 마치 그게 일상적인 일인 양 누구도 이기하의 사고 소식을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했다. 심지어 이기하조차도.

사고의 후유증은 이기현 혼자만 앓고 있었다. 이기현 혼자만 당혹스러워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기현 혼자만 짝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데도 잃어버릴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낙원을 세우기 전의 배경에 대해서 듣지 못했던 심제준은 이기현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적당히 해라.”

그래서 이기현을 보고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김태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요즘 들어 셋이서, 혹은 넷 이상이 만나는 일이 잦아 어느새 연구소 근처의― 김태영이 한국에 머물 때부터 단골이었다는 바가 아지트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그 아지트에 도착해서 이기현은 내내 휴대 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태영이 그런 이기현의 태도에 못마땅하게 말을 얹어도 눈을 돌린 것은 잠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화면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기현이 보고 있는 것은 CCTV 화면이었다. 옆에서 훔쳐보니 서재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이기하가 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좀…… 아니 꽤 유난스럽기는 했다. 그 사고 이후로 이기현이 직접 설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라는데 틈만 나면 CCTV를 확인하고 있으니.

“과보호라니까.”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김태영은 다시금 투덜거렸다. 겨우 화면을 끈 이기현이 미안, 하고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의 보석이 바의 불빛을 받아 유달리 반짝였다. 반지는 성인 남자가 하기에는 조금 화려하다 싶었던 첫인상과 달리 이젠 이기현의 기다란 손가락에 정말 잘 어울렸다. 특히 지금처럼 반지 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 자색 눈동자와 가까워진 보석이 눈과 같은 색으로 빛을 굴절시키는 게 예뻤다.

남의 연인이 되었다는 징표를 예쁘다고 여기는 게 허용되는 선인지 저울질하면서, 심제준은 왜 저렇게 김태영이 짜증을 내고 이기현은 그걸 사과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기현의 주변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감시되고 있었다.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섬 안, CCTV의 의의는 사실 이기현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함임을 이제는 그도 알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만 해도 이기현의 감시자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밥 먹듯이 CCTV에 노출되는 사람이, 자신도 CCTV를 보겠다는 게 나무랄 일인가?

이기현을 감시한 지 어느새 2주가 넘어갔다. 며칠에 한 번꼴로 가주와 독대하고, 그로서는 최선을 다해 이기현의 주변 상황을 해부하듯 낱낱이 보고하면서 심제준이 내린 결론은 변화 없음, 이었다.

‘변화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심할 줄 알았는데 가주 역시 심제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이기현의 귀가가 네 시간이나 빨라졌고 반차를 세 번이나 썼는데?’

귀가 중 한 번은 심지어 심제준과 약속이 있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때도 이기현은 CCTV를 들여다보았고 박종오와 박현진이 같이 동석하고 있었다. 팔을 잡아당기며 말을 거는 박현진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심제준은 곁눈질로 이기현을 힐끔거렸다. 그는 입가에 살짝 휘핑이 묻은 것도 모르고 화면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박종오는 그걸 닦아 주고 싶어서 아까부터 휴지를 손에 쥐고 긴장 태세가 만만이었다. 대신 지적해 주는 게 좋을까― 생각했을 때 이기현이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그리고 화면에서 눈을 돌려 천장을 쳐다본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일행 전부도 그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구석에 동그랗게 박혀 빨간빛이 점멸하고 있는 CCTV였다.

이기현은 그 CCTV를 향해,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쁜 짓보다는 민망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뺨을 살짝 붉히고 멋쩍어하면서 어쩐지 감정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아주 찰나였지만 심제준은 그 표정을 보고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사랑스러움, 그 단어 외에 그때의 감정을 설명할 다른 단어는 찾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내려 이기현이 보고 있었던 것을 주시했다. 화면 속 이기하 역시 자신의 연인과 마찬가지로 CCTV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타이밍 좋게 서로 감시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들은 서로의 집착에 질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 보였다. CCTV의 각도로는 이기하의 등만이 보였기에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본가에서 둘의 정사를 목격했을 때처럼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어떠할지 심제준은 알 것 같았다.

‘나, 그만 가 봐야겠다.’

주문한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이기현은 자신의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심제준의 어깨를 툭툭, 쳐서 미안하다고 표현하고는 거의 뛰다시피 잰걸음으로 아지트를 나갔다.

말리거나 항의하는 이는 없었다. 이기현은 짝의 곁으로 뛰어가 여느 때처럼 품에 안길 테고 화면으로만 비쳤던 표정을 직접 보여 줄 것이다. 심제준은 그보다 더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형제는 서로에게 집착하고 애정을 쏟아 냈다. 이상적이다 못해 완벽하기 그지없는 한 쌍이었다.

그런데도, 이기현을 아는 사람들은 이기현의 태도를 못 미더워했다. 박현진처럼 괜찮냐고 걱정하면 양반이었고, 김태영처럼 적당히 하라고 아예 못마땅한 티를 내는 자도 있었다.

“왜 그렇게 말해요? 둘이 사이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

“그냥 좋은 걸로 안 보이니까 문제죠.”

오늘도 이기현은 어김없이 빨리 집에 들어가 보는 게 낫겠다며 모임 중간에 돌아가 버려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술 한잔을 하게 되었다.

“저 녀석 성격상 지금 말도 안 되게 무리하고 있거나 문제가 있는 거든가, 하여튼 정상적인 상태 아녜요.”

“불안해서 미치려고 하는 거 같지? 사고 직후부터.”

와인 잔을 흔들며 박현진이 말했다.

“아무리 사고 난 거 보고 놀랐다고 해도 한 달이나 지났는데 점점 더 심해지잖아.”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박사님답지 않고요.”

이런 때에 끼어드는 일이 없던 박종오마저도 동의해 왔다. 심제준은 자신을 슬그머니 따돌리는 듯한 느낌을 받던 차였다. 뭐 자신은 섬에 들어온 지 겨우 반년째인 신참에, 저들은 이기현과 알고 지낸 지 두 자릿수는 기본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들과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기하가 왜 사고가 났는지, 이기현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건 자신뿐이다. 거기서 알량한 우월감을 느끼며 심제준은 얼음이 많이 녹아 거의 물처럼 되어 버린 버번을 홀짝거렸다.

“어찌 됐든, 이기현 쪽에서 가주님한테 안달 내는 일은 없었어. 저렇게 단기간에 성향이 변해 버리는 데에는 대개 한 가지 이유밖에 없긴 한데 말야.”

“한 가지 이유요? 뭔데요?”

“그냥 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요.”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지 쓸데없는 말을 해 버릴 뻔했다. 입 안에서 맴돌던 답 대신 적당한 대답으로 얼버무린 박현진은 이제 그만 마시겠다는 뜻으로 마시던 잔을 반 뼘쯤 앞으로 밀어 두었다. 별다른 답을 듣지 못한 일행은 다행히 박현진에게 모았던 눈을 거두고 각자의 술잔을 기울였다.

환기되는 것을 확인한 박현진이 입술을 오므려 한숨을 뱉어 냈다. 자연에서 암컷 개체가 갑자기 수컷에게 집착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유전자를 보존할 수 없다는, 생명에 위험을 느꼈을 시에 종족 번식에 대한 욕구를 가지는 것. 죽을 뻔한 짝을 보고 그런 본능이 싹터 집착을 시작했다면 아귀가 그럭저럭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익히 이기현이 현재 임신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박현진은 부러 그 말을 얹지 않았다. 맞지도 않는 상황인데다 굳이 대화의 물꼬를 텄다가 주제가 그쪽으로 흘러 버리면 낭패였다. 일행 중에는 이기현이 애초에 임신이 가능한 개체인 줄 모르는 이도 있었고, 가주께서도 자신의 입을 봉하라 명하지 않았는가.

“원래 있던 우울증이 사고 이후에 겹쳐서 다른 방향으로 도진 걸 거야. 조만간 검사 좀 다시 해 보려고.”

“이기현이 우울증도 있었어요?”

학창 시절의 마지막 기억은 확실히 날카롭고 가시를 세운 모습이긴 했지만 우울증까지 있었을 줄은 몰랐던 심제준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있는 정도가 아니었지.”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아 해 한참이나 정적이 흐르다가 박현진은 간신히 그렇게 말한 뒤 그만들 하고 집에 가자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다음 날 심제준은 잔뜩 술에 취해 한껏 늦잠을 자고 있다가 저번처럼 도와줄 수 있느냐는 이기현의 메시지를 받고 잠에서 깨어났다. 한낮인데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커튼을 걷어 뒀어도 밤처럼 어두웠다.

“이것도 좀 찍어 줄래?”

오늘 약속은 이기현과 단둘이서 만나는 거였다. 목적지는 저번에 검체를 채취한 동쪽 해안가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평지다. 날씨는 추웠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그럭저럭 괜찮은 온도로 느껴졌다.

“김태영 씨는?”

“바쁜 거 같아서 혼자 왔어.”

이기현이야 굳이 도움이 안 되는 김태영을 달고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지만 심제준은 모처럼 단둘이서만 있게 되어 조금 설렜다.

저번과 똑같이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김태영이 투덜거렸듯이 굳이 두 사람이나 동원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검체 몇 개를 채취하고, 촬영을 하고, 기록 몇 줄을 작성한 뒤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몇 번 쓰지 않은 조리개를 닫고 심제준은 카메라를 목에 걸며 이기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표본을 정리하고 바로 출발할 줄 알았던 이기현은 가방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는 군집을 응시했다.

“…….”

심제준은 그를 채근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뒷모습에 지난날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장면이 겹쳐졌다. 휘청거리지 않는데도 어쩐지 뒤에서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김태영은 이기현이 괜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심제준의 눈에는 그가 필사적인 것처럼 보였다. 필사적으로, 몸이 제 짝을 향하고 있는 것을 멈추고 싶어서 어떻게든 집중할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일행들의 말대로 자신이 달라진 것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거다.

번번이 중간에 돌아가 버리면서도 일행에게 먼저 약속을 잡자고 말한 것은 이기현이었다. 왜 그걸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기현은 확실히 ‘변화’했는데.

한 달가량 감시를 진행하며 심제준은 꾸준히 이기현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보고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감시하면서 딱히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이기하가 염려했던 대로 다른 여우들이 이기현에게 흡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기현의 몸이 회복되는 듯한 조짐도 거기서 끝이었다. 희미하게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날개는 돋아나면 꺾일 것을 스스로 아는 듯 애처로이 시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 변한 것이었다. 이기현은 변화가 없었다, 가 아니라 변화가 있었다고 보고했어야 했다.

눈으로는 군락을 바라보면서도 이기현은 아우터 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꺼내서 확인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슬슬 갈까?”

참는 것을 실패한 이기현이 등을 돌렸다. 짝을 보러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행복한 표정이 아니라 휩쓸려 가는 것에 어쩌질 못하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제준은 뒤따라가는 대신 질문을 했다.

“저기, 여기 말이야. 저번의 해안가랑 똑같이 되어 버린 거야?”

“어?”

“태영 씨가 그러는데 앞으로 더 신기한 군집이 많이 생길 거라더라. 여기가 시작이라고.”

이기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맞아. 식물은 스펀지 같아서 환경이 변화하면 변화하는 대로 곧장 진화하거든. 동물 같은 경우는 몇 대를 걸쳐야 겨우 진화의 결과물이 나오지만.”

“새로운 종?”

“그래. 새로운 종. 자연적으로는 결코 접붙지 않는 식물들이 환경에 적응해서 스스로 새로운 종을 개량했어. 원래대로라면 이 기후에 벌써 말라 죽었어야 하는데.”

“문제가 생길까……?”

심제준은 그렇게 말하고 아무래도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니까, 하고 조심스레 사견을 추가했다.

이기현은 신고 있는 워커 옆으로 하늘하늘 흔들리는 변이종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나는 문제라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일정한 규칙이 있지만 이것들은 다르니까……. 통제 불능이 되기 전에 없애야 돼. 잘못하면 생태계 자체가 망가질 수 있어. 섬 전체로 번지기 전에 소각하라 명령하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기현은 그것을 밟지 않기 위해 애쓰며 바위 위로만 걸음을 옮겼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심제준은 보폭을 크게 해서 그의 등을 따라갔다.

“뭐 좀 물어봐도 돼?”

이기현이 옆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그간 도망을 몇 번이나 쳤어?”

심제준의 물음에 자색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갑자기 그건 왜?”

“어 그냥, 엊그제 술 마시다가 네 친구들이 그런 얘기들을 하더라고. 네가 변한 거 보니 또 도망갈까 무섭다, 뭐 그런?”

“뭐야. 나 없을 때 내 얘기 좀 작작하라고 그래. 안 되겠네 이 사람들.”

작게 한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를 향해 걷는 보폭도 조금 더 커졌다. 심제준은 뛰듯이 걸으며 옆에 따라붙었다.

“몇 번 정도 도망간 건데 그래?”

그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기억을 더듬으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접힌 손이 한 손을 가득 채웠다.

“자잘한 거 포함하지 않아도 되지?”

“…….”

“대충 굵직한 것만 대여섯 번?”

“허얼.”

“그밖에도 무수한 자살 시도가 있었고 입에 담기 힘든 사고도 많이 쳤고…….”

“야아. 너.”

“그래서 뭐, 김태영 같은 녀석이 그런 소리 하는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다른 혈족들도, 기하도.”

오늘 처음으로 이기현은 미소를 지었다. 제 동생을 떠올리자마자 웃은 거라는 걸 심제준은 모를 수가 없었다.

“내 태도가 바뀌면 불안해지겠지. 저게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저러나, 혹시 저러다가 또 뒤통수 때리고 도망가려 밑밥을 까는 것은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거.”

“…….”

“완전히 믿게 되기까지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 업보라고 생각하고 있어.”

“지금은 도망……가고 싶진 않아?”

심제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기현이 불시에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따라붙던 심제준이 한 발 더 앞서 나갔다. 뒤를 돌아본 심제준의 눈에 비친 이기현은 웃고 있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눈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랬다고 기하에게 전해 줘.”

라고 덧붙였다. 심제준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얼굴을 확 붉혔다.

“알고…… 있었어?”

“모를 줄 알았어? 처음부터 알겠던데. 너 진짜 감시하는 데 소질 없어.”

김태영의 말이 맞았구나……. 심제준은 허탈하게 머리를 긁어 댔다. 중간 직책도 없이 무려 가주에게 직접 받은 일이었는데, 뒤늦게 걱정이 밀려들었다.

“나…… 처벌받을까?”

“뭐 때문에? 들킨 거 때문에? 김태영도 지금까지 무사했는데 뭘. 걔는 아예 만난 첫날 감시하러 왔다고 얘기했었어.”

“뭐어?”

그런 주제에 나한테 설교를 했단 말이야? 어이없어하며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알만 하다며 이기현이 작게 웃었다.

“김태영 성격이 좀 그렇지? 의뭉스럽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가끔 이상한 소리 하면서 쎄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고.”

“뭐 좀…….”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냐. 우리 집안사람들이 다 그렇게 비틀린 구석이 있거든. 네가 이해 좀 해 줘. 알아서 잘하겠지만.”

다들 네가 적응을 잘한다고 칭찬하더라. 일행에게 들었던 평가를 덧붙이자 심제준은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너는 그때 그 항구에서 돌아갔어야 한다는 말을, 이기현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를 살려 달라고 자신이 이기하에게 어떻게 매달려야 했는지도 말할 필요 없었다. 의미 없는 말 같은 건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기현은 차 키를 눌러 주차된 차에 시동을 걸며 검체 가방을 트렁크에 넣었다. 아까부터 금단증상이 온 것처럼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참아 내는 것은 무리다. 짝이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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