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mas
‘괜찮아.’
‘괜찮아.’
이기현은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그 말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같이 들렸다. 괜찮을 거라 반복하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잃고 사그라진다. 하얗게 떠 있는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다.
이기하는 지친 얼굴로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는 이기현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후회할 거면서 너는 왜, 이것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거야?
잊어버려 놓고도 어김없이 면도칼을 들고 침실로 숨어드는 형을 이기하는 뜬눈으로 기다렸다. 이번에는 다르길 바라며, 오늘 밤은 부디 자살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 찾아오길 빌면서.
이기하의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이기현은 이기하가 가진 어떤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다. 다른 인간들은 그들의 수명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만 초월한 존재였던 이기현만큼은, 인간인 이기하의 힘으로는 가벼운 상처 하나조차 치유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사실. 한번 신으로 태어난 존재는 권능을 잃고 껍데기만 남아도 영원히 신이라는 것.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족쇄를 채우고 더럽히고 더럽혀도 이기현은 신이다. 이기하는 넘을 수 없는 태생의 벽에 절망했다.
어느새 울다가 정신을 잃은 이기현의 손목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갈라진 부분에 혀를 대고 독을 빨아들였던 때처럼 상처를 흡수했다. 이기현의 자해 자국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이기하의 손목이 욱신거린다. 갈라진 곳이 미처 아물기도 전에 상처를 옮겨 와 이기하의 상처가 더 깊게 벌어졌다. 그나마 그의 몸이 불멸이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이기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배어 나왔다.
이기현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번 상처도 지워져야 할 텐데, 아무리 비정상적인 치유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적으로 잘린 손목은 정상적인 기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손목의 상처 따위야 아물면 그만이지만, 너는, 내일 또 어떤 말로 나를 상처 입힐까.
‘괜찮아.’
이기현은 지금도 울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삐삐삐.
반복되는 전자음이 성가시게 귀에 달라붙었다. 평소에 들어 본 적 없는 그 소음이 거슬려 이기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소음뿐만이 아니라 코끝을 간질이는 약품 냄새도 낯설다.
그는 눈을 찡그렸다. 익숙하지 않은 하얀 천장 위에 낯익은 장식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은색 살에 조그마한 별과 행성 따위가 달려 있는, 크리스마스라고 이기현이 골라 침실에 매달아 두었던 것이다. 같이 쓰는 공간이니 함께 골라 달라며 빨간색이 좋은지 녹색이 좋은지 묻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이기하는 공기 청정기의 바람결에 따라 장식이 흔들리는 것에 맞춰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확 정신을 차렸다.
잠깐, 이기현, 이기현은? 순식간에 밀어닥치는 공포에 그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기현, 도망, 부재, 관리, 묻어 뒀었던 단어들이 머릿속으로 세차게 밀려들고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상체를 반쯤 들자마자 숨이 멈췄다. 침대 바로 옆에, 머리를 대고 이기현이 잠들어 있던 것이다.
“…….”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부풀었던 심장은 지끈거리는 통증을 유발했다. 이기하는 신음이 나오지 않게 이를 사리물며 자고 있는 이기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도망가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 텐데, 도망가고자 했다면 최적의 기회였을 텐데 그는 내 옆을 지킨 거다. 나를 선택한 거야. 믿어지지 않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이기현은 통 잠을 자지 못했는지 얼굴은 수척하고 눈 밑이 거뭇했다. 쓰다듬고 싶었지만 바로 깨어날 것 같아 그는 그저 숨죽이고 바라만 보았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방 안에는 힘겹게 잠을 이어 가는 이기현의 숨결과 돌아가는 작은 기계 소리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 한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
“…….”
앉아 있는 이기하를 발견한 그녀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기하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 세웠다. 용케 비명을 참아 낸 간호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뒷걸음질 쳐서 들어왔던 그대로 나갔다. 방 안은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이기하는 손을 뻗어 그에게 닿지 않게 허공 위에서 형의 뺨을 쓸어내리듯 움직였다.
얼마나 우는 것을 반복했는지 눈가가 온통 붉고 퉁퉁 부어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을 게 뻔했다. 너는 또 자책하고 자책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겠지.
일어나면 뭐라고 말해 주는 게 좋을까. 걱정 끼쳐 미안합니다, 금방 데리러 가겠다고 해 놓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조금 더 신중히, 소리 내지 않고 문이 열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박현진이다. 신이 눈을 뜬 것을 전해 듣고 감격한 얼굴을 한 두 명의 간호사가 더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이기하는 예를 취하는 그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이러다 간신히 잠들었던 이기현이 깨 버릴 텐데.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해도 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이기현이 바로 눈을 떠 버렸다.
“…….”
누가 동생을 해코지라도 할 줄 알았는지 예민하게 몸을 일으켰던 그가 박현진을 발견하고 경계를 풀었다. 그것도 내내 반복했던 일일 것이다. 그러다 곧바로 동작을 멈추었다. 거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듯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이기하의 모습을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자 눈물이 그득 괸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
“형님.”
선택한 것은 늦어 버린 크리스마스 인사였다. 짓물러 있던 그의 눈 밑이 또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달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기하는 링거가 꽂혀 있는 팔을 들어 뺨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세요.”
“…….”
“울지 마세요,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이기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가늘게 몸을 떨면서,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들어왔던 이들도 어쩌지 못하고 서서 바라만 보았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문이 열리고 조정구가 먼저 뛰어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제법 난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 뒤로 두 명이 더 튀어 들어왔다. 김태영과 박종오였다. 인선들의 상태만 보아도 그동안 이기현이 어떻게 살았는지 훤히 그려졌다.
“가주님.”
“깨어나셨…….”
시끄럽게 들어와 놓고 그들은 병실 안을 확인하더니 인사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처치가 필요했던 물품들을 안고 들어왔던 박현진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달래지 못해 이기현의 눈물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 * *
“기현 씨의 눈물샘이 고장 난 것 같아요.”
간단한 처치를 하며 물러나던 박현진이 말했다. 이기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기현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주가 병원에 머무는 동안 이기현은 울지 않는 때가 드물었다. 심장이 관통당해 누워 있는 이기하보다 저러다 쓰러질 것 같아 내심 이기현을 걱정하는 눈이 더 많았다. 정작 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턱을 대충 닦아 버리고 이기하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좀 잠잠해지면 눈 쪽 검사를 받아 보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기하는 제 짝의 턱을 들어 올려 상태를 살폈다.
“그…… 말리려고 했습니다.”
수척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형의 얼굴에 이기하의 눈이 서늘해지는 것을 보고 의사는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제 괜찮으실 거라고 전해드렸는데도 고집을 피우셔서…….”
“이건 뭐지?”
이기하의 손이 이기현의 팔에 꽂혀 있는 채혈용 주삿바늘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알게 되면 난리 날 게 뻔해 이기현도 옷 아래로 감춰 두고 있었던 거였다. 이미 들켜 놓고 이기현은 당황하며 바늘이 꽂혀 있는 팔을 침대 아래로 내려 숨겼다.
“어떻게 알았…….”
“피 냄새가 나잖아.”
침대를 둘러싼 채 내려다보고 있는 의사만 세 명이었는데,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분노가 실린 목소리로 한 번 더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이기하에, 결국 이기현이 중재에 나섰다.
“내가 뽑아 달라고 했어.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목숨이 위험하다고…….”
“목숨이 위험? 제 몸은 불사입니다. 어차피 죽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셨습니까?”
다그쳐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기현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피를 뽑아 달라고 요청했을 테고 이것들은 그대로 실행했겠지. 이기하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의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을 보며 이기현이 천천히 이기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화내지 마……. 내가 너를 빨리 되찾고 싶어서 한 일이었어. 불사든 뭐든, 네 몸이 필요했다면 나는 뭐라도 줬을 거야. 내 장기가 필요했다면 장기를 줬을 거고, 팔다리가 필요했다면 팔다리를 잘라 냈을 거라고.”
“…….”
“……그러니까 화내지 마. 네가 그런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할 수 있겠어.”
울먹이고 있진 않았지만 감정을 실어 말하는 목소리에 이기하의 분노가 갈 곳을 잃었다. 이기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이기현을 바라보다가 크게 가슴을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형제의 관계에 대해, 직접 보지 못하고 학습만 했던 타국 출신 의사 한 명은 왜들 그렇게 이기현을 이기하에게 붙여 놓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 이기현이 신의 역린이라고 말했었는데, 과연 그러했다. 잔인하기 짝이 없던 신은 형의 앞에서만큼은 그냥 성격이 조금 더러운 수준의 평범한 동생처럼 보였다. 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고분고분해지고 복종하는.
물론 저런 눈으로 형을 쳐다보는 동생을 ‘평범하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겠지만.
낙원의 어두운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신이 평범한 인간처럼 적당히 화내고 적당히 민망해하는 이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이기현에게 경외감이 들 지경이었다. 이기현은 결여된 신의 인간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이기하는 누그러져 제 손을 주물거리는 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눈치 빠른 의사 한 명이 얼른 이기현의 팔에서 주삿바늘을 뽑아냈다. 이기하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에 개의치 않고 형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기현이 불안한 눈으로 박현진을 올려다보았다. 남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동생의 몸이 정상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였다. 이제 의미 없어진 심장 부근의 드레싱을 걷어 낸 박현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로 보나 알맹이로 보나 이기하는 이제 완전히, 정상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걱정되는 쪽은 이기현이었다. 이틀간 뜬눈으로 밤을 새며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이기하의 곁을 지킨 이기현 쪽이.
“현진 씨가 괜찮다고 말해 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손가락만을 겹쳐 꼼지락거리는 형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이기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재생된 지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기현 씨가 저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에요.”
박현진은 이기현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예전에 당한 것에 대한 얄팍한 복수심도 조금 가미되어 있었다. 목소리에 스며 있는 반항을 눈치챈 이기하가 입가를 들어 올렸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박현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나 이기하의 시선은 역시나 자신의 형을 향해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그리고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을 앞에 두고 맞닿은 이기현의 손을 꽉 힘주어 잡았다.
“잘못했어요…… 형.”
어리광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며 부른 형이라는 호칭에 겨우 이기현이 반응했다. 이미 깨져 있는 도자기를 어루만지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온다. 이기하는 이기현의 등을 마주 끌어안으며 건너에 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거의 귀신에 홀린 듯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은 나가라는 명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급히 병실을 나섰다. 하나같이 신이 어리광 피우는 것을 들어 버린 데에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소름이 끼쳐 있었다.
제 연인을 위한답시고 신이 어떤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으므로.
* * *
조정구는 침대 옆에 앉아 침상에 머리를 살짝 얹은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이기현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병실을 오가는 동안 이기현은 항상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조정구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이라고.
이기현 정도의 성인 남성이 충분히 발을 뻗고 잘 수 있는 보호자 침대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라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최대한 몸이 편한 자세를 고수하고 회복에 주력했을 거였다. 그편이 간병하는 데에 효율적이지 않은가.
조정구가 물끄러미 제 짝을 쳐다보는 것에 이기하는 혀를 차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몇 번이나 병상 위로 옮기려 했어.”
“…….”
“그때마다 바로 깨 버리니 어쩔 수가 없잖아. 저러고 있겠다고 고집을 피워 대니 도리가 없지. 저렇게라도 잠깐 재우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놔둔 거야.”
“……저는 가주께 아직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
슬슬 주인이 불쾌해하는 것을 느끼고 조정구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기현이 이기하의 팔 한쪽을 붙들고 잠들어 있어 그의 주인은 자리를 이동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여기서 보고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그가 가까이 오라고 명령한다.
“그나저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목소리를 더 낮춰라. 내가 40시간 남짓 정신을 잃었었다지?”
“37시간째였습니다.”
허리를 굽힌 조정구는 이기하에게 속삭이듯이 신이 부재중이었던 37시간 동안의 보고를 읊기 시작했다. 이브와 크리스마스가 겹쳐 대소란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벤트에 정신이 팔린 대부분의 섬 주민들은 신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비교적 원만하게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대비책으로 세워 뒀던 수뇌부들이 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1지구의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 자체도 알지 못하고 넘어갔다.
이기현 일행이 머물던 술집 근처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고 팀이 투입되어 적당히 처리했다는 보고까지 진행됐을 때 이기현이 작게 신음하며 머리를 뒤척였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이기현에게 닿았다.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건지 가늠하며 조정구는 이기현의 생체 반응을 살폈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자세로도 이기현은 용케 깨지 않고 있었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을 주인에게 물어야 할 때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사고 현장을 몇 번이나 조사하고도 조정구는 도저히 답을 내리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사고 현장에는 별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적재물도 없었고 눈이 쌓여 있긴 했지만 스키드 마크가 있던 곳은 결빙 상태도 아니었고요.”
이기하가 운전 교습을 받는 것을 옆에서 전부 지켜봤었던 그였다. 그가 아는 주인은 교통사고를 낼 실력이 결코 아니었다. 교통사고를 낼만큼 속도를 내지도 않았으며 규정을 지키지 않는 스타일도 아니고, 무언가의 방해를 받았거나 알 수 없는 뭔가가 핸들을 강제로 꺾게 만들지 않는 한은.
“도로 근처 어디에도 테러로 보이거나 외부인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가주님의 증언 외에는 현재 증거가 없는 상태입니다.”
“…….”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블랙박스를 확인했을 때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이기하는 아무것도 없는 도로 위에서 스스로 핸들을 꺾었고 곧바로 난간 밖으로 튀어 나가 절벽의 표지판 위로 떨어졌다. 속이 비어 있는 관이 그대로 심장을 관통해 꽂힌 광경이 마치 순교자 같아 보였다고, 가주의 차를 뒤따르던 경호원 중 한 명이 반쯤 실성한 채로 증언했다.
관을 통해 줄줄 새 나가는 신의 피는 토지를 순식간에 오염시켰다. 피는 짧은 시간에 액체에서 고체로 굳어 갔다. 잎맥에서 관다발과 그물맥이 수도 없이 돋아나는 모양과 흡사한 것이었다.
조정구가 연락을 받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복된 차를 중심으로 20제곱미터가량의 토지에 피 그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기하의 시신―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한 것을 수습하고 조정구는 훈련받은 대로 피가 흐른 곳을 전부 불태웠다.
“말씀하시기 어려우십니까?”
“운전 미숙이라고 해 두지.”
귀찮다는 태도로 이기하는 그렇게 일축해 버렸다. 블랙박스를 확인하고 조정구는 예의 신만이 아는 무언가가 벌어진 것이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처리해 온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주인이 목숨을 내걸기까지 한 일이었으므로 그를 지키는 입장에서 알아 두어야겠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병원 앞에 귀찮게 진 치고 있는 것들을 돌려보내고.”
잠들어 있으면서도 제 손을 놓지 않은 채 꼭 붙들고 있는 짝을 내려다보면서 명령한다.
조정구는 가만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그림자처럼 병실 안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나고 가습기에서 수증기를 뿜으며 생기는 진동 소리, 이기현이 고르게 숨 쉬는 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감돌았다. 이기하는 사뭇 피곤함을 느끼며 비어 있는 손으로 목을 주물렀다. 귀찮게 연이어 방문하던 객들이 사라지고 겨우 단둘이 되었다.
그건, 사람만을 셈했을 때의 얘기다.
“…….”
일어난 후로 쭉 배 위에 올라와 있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옆으로 물러나 이기하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그만 여우는 머리통을 모로 기울이고 열심히도 시선을 맞추려 애를 쓰고 있다.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기에 이기하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자칫 이기현이 영향을 받아 보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었고, 애초에 여우들은 이기하를 적대하면 적대했지 따라다닌 적이 없기에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사고가 난 것은 바로 이 여우 때문이었다. 이기하는 사고가 났던 때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이기현을 데리러 간다고 손수 운전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도로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여우의 그림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핸들을 틀었다. 속도가 붙어 있던 차체가 그대로 미끄러져 난간을 뚫고 이탈하는 것을 끝으로 기억이 끊겼다.
작은 여우는 영체라 사소한 물리적인 접촉에는 영향이 없었겠지만 이기하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것들도 전부 영체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체와 영체가 부딪쳤을 때 저렇게 약한 것은 소멸되어 흡수될 것이라는, 찰나의 판단이었다.
주술을 걸어 둔 우편함 근처에서만 얌전하게 살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여튼 귀찮게 됐다며 이기하는 톡톡, 손가락으로 침상을 두드렸다.
이기현을 찾아 헤맸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이하게도 이 여우는 이기현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배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검은 기운으로 작은 발이 검게 물들고 고독들이 먹어 치워 버리려 위협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았다. 보통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림자만 보아도 도망가 버리기 일쑤인 다른 여우들과는 달랐다.
지금도 친숙한 척을 하며 이기하의 배 위에 올라오고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살려 준 것에 대한 은혜 때문에 이런다기엔 지금껏 이기하는 나름대로 여우들이 고독에 먹혀 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왔었다. 여우는 해치지 않는다, 그게 그의 지론 중 하나였었다. 그럼에도 여우들은 자신들의 신을 빼앗아 구류하고 있는 이기하를 적대했다. 게다가 자신은 여우 종을 멸절시킨 가문의 후손이었으니 이기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고.
“…….”
이기하가 몸을 늘어뜨리는 순간을 캐치한 여우가 그의 몸 위에 앞발을 올렸다. 정색하며 팔로 쳐 내자 침대 위를 반 바퀴 구르며 나가떨어진다. 그걸 놀자는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여우는 침대 끝에 버티고 서서 엉덩이를 쳐들고 부풀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집에 안 가면 잡아먹어 버린다.”
그렇게 협박해 보았다. 그리고 협박에서 그치지 않고 뱀을 꺼내 여우의 바로 앞까지 확 뻗어 버렸다. 위협에 놀란 여우가 캥! 소리를 내며 거의 굴러떨어지듯 침대 밑으로 사라졌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이기하는 기운을 흉흉하게 뻗쳐 병실의 반을 장악해 갔다. 해방된 고독들이 벽을 타고 다니며 흰색 페인트칠 된 병실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마음껏 활개 치도록 놔두다가 이쯤 되면 도망가도 벌써 도망갔겠다 싶어 도로 갈무리했다. 그 순간 사라진 줄 알았던 여우의 뾰족한 귀가 침대 밑에서 쑥하고 튀어나왔다.
“…….”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에 이기하의 얼굴이 굳었다. 이 여우는, 다른 영체들과는 무언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