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정말 괜찮아?”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물어보았다. 기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진짜 괜찮은 거지?”
“그렇다고 지금 열 번은 말한 거 같아요.”
크리스마스 전야제 행사를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했지만 기하에게 중요하고 급한 일이 생겨서 나 혼자 가게 되었다. 지난날 이브에 심제준의 장례식 인원이 모임을 가진다는 말을 기억한 기하 쪽에서 먼저 권유해 왔다. 신의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일이라 미룰 수가 없다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집에서 혼자 기다리느니 모임에 참석하시라고.
“그래도 혼자 가기 미안해서 그래.”
“빠지는 타이밍에 데리러 갈게요. 대신 저번처럼 술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내가 언제 많이 마셨다고…….”
눈을 가늘게 뜨는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기하는 한숨을 쉬며 내 목에 머플러를 둘러 주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위험하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마시고 그 바 안에만 계셔야 합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내 대답에 그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 너무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한번 꽉 끌어안고 아쉬운 눈으로 놓아준다.
크리스마스이브답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마중 나와 있는 차의 보닛 위에 벌써 눈이 하얗게 쌓였다. 오늘 저녁에 따라다닐 수행원이 무뚝뚝하지만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기하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차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은은한 재즈였다. 가수의 우아한 목소리가 캐럴을 노래하고 있다. 이상하게 울렁이는 기분으로 멀어지는 기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멀어져 점으로 보일 때까지도 내가 탄 차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I hope he brings you to me for Christmas.
I need no flashy lights, no candles, no presents.
나를 배려해서인지 차내는 살짝 땀이 날 정도로 히터가 틀어져 있었다. 앞좌석에 탄 수행원들은 겉옷도 벗어 버리고 조끼만 걸친 채였다. 나도 기하가 둘러 준 머플러는 놔두고 장갑만 벗었다.
A snow white Christmas.
Santa didn't grant my wishes.
So I put on a white beard and a red hat.
머플러의 이음새를 매만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내키지 않아, 너를 놔두고 가는 게.
그렇게 말하며 매달렸다면 너는 무슨 일이 있다 한들 나와의 약속을 우선시했을 게 분명했다. 사실 모임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너와 이브를 온전히 보내고 싶었다고, 그의 등을 끌어안고 하지 못했던 말을 삼켰다.
I'm on my way to meet you.
To carry my wishes, I'm going to see you.
바깥은 눈발이 휘날려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눈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호흡으로 뿌옇게 변하는 창문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간선 도로를 진입하자 가로수 위로 트리 장식들이 즐비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나 놀랄 만큼 북적인다. 번화가까지는 가지 않고 약속했던 바가 있는 외곽에 차를 세웠다.
백화점 앞 광장에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졌다고 박현진은 꽤나 흥분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건물 사이로 본 꼭대기에는 거대한 여우 모양 일루미네이션이 얹어져 있었다. 완성되어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싶었는데 섬의 주민 모두가 거기에 한 번씩 갈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아직도 껄끄러운 혈족들은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고 만에 하나 내 눈에 누군가 영향받기라도 하면…….
몸을 부르르 떨며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동그랗고 얇은 안경테에 렌즈에는 특수 가공을 한 것으로, 마주 보아도 시선을 조금 굴절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세상에, 너무 귀엽다.”
먼저 도착했던 박현진이 내 앞으로 뛰어와 뺨을 붙잡더니 감탄했다. 끝에 방울이 달린 손모아장갑을 낀 그녀 쪽이 귀엽다는 말과 훨씬 어울릴 테지만 잠자코 내 뺨을 늘리는 것을 참아 주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안경 완전 잘 어울려. 학생 같아.”
“웬 안경이야?”
머리를 조금 기르고 펌을 해 전보다 더 북실거리는 머리를 한 김태영이 박현진의 뒤에서 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 게 있어.”
“아아, 저번에 말한 결과물이구만?”
“응? 결과물?”
“눈 색이 좀 다르게 보이잖아요.”
턱짓을 하자 박현진이 얼굴을 붙잡은 그대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자기, 나를 봐야지! 어, 정말이네. 보라색이 아니라 파란색처럼 보이네.”
아무리 익숙해졌어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은 부담스러워 허리를 뒤로 뺐다. 곧이어 문 쪽에서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다.
“어라, 다들 벌써 오셨네요.”
열린 문 사이로 찬바람이 들이닥치고 심제준이 나타났다. 커다란 잠바를 입어 그는 옷 속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야 이렇게 빨리 또 모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너무 행복하네요.”
만면에 미소를 한가득 지어 보이더니 그 커다란 잠바 속에 손을 넣고 뒤적뒤적하며 선물 상자를 하나둘 꺼냈다. 이걸 품에 안고 오느라고 저런 차림이었구나……. 상자는 예쁘게 포장되어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 박현진에게 먼저 주고 내 것은 한참을 뒤지더니 보라색 포장지에 싸인 것을 내민다.
“메리 크리스마스다. 기현아.”
“어……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네가 여기 와 준 게 선물이지 뭐. 덕분에 장운 씨도 온다고 하고.”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다음에 만날 때 선물할 테니까.”
“술!”
벌써 포장을 뜯어 버린 박현진이 뒤에서 외쳤다.
“이거 도수 진짜 센 건데, 신난다. 오늘 다 같이 마시면 되겠다. 그치?”
나름 작은 병이기는 했지만 그녀한테 휩쓸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어찌 되는지 익히 겪어 본 바가 있던 나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뭔데? 뭐? 선물? 내 거는?”
“그나저나 기현아 웬 안경이야? 잘 어울리네.”
“오늘만 임시로 쓰는 거야.”
“아니 다들 이기현한테만 관심 가지네. 저기 나한테도 관심 좀 주십쇼. 나도 펌하고 왔거든요? 머리색이 아예 달라졌는데요?”
“태영 씨 머리하셨네요. 잘 어울려요.”
선물을 내밀며 심제준이 기계적인 칭찬을 해 주었다. 김태영이 내 거는 왜 작냐고 심제준의 선물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자기는 선물 준비도 안 해 놓고 정말이지 양심이 없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소리를 박현진이 똑같이 읊어 주었다.
“하여튼 양심 따윈 없어요.”
“아니 근데 라이터네? 나 금연하는 중인데?”
김태영은 지포 라이터를 몇 번 튕겨 불꽃을 만들더니 재빨리 재킷 안에 집어넣는다. 심제준 때 일로 흡연하는 습관을 들였던 김태영은 금연하는데 꽤나 고생을 했다. 금연 껌을 몇 통이나 비우고도 모자라 주전부리를 씹어 가며 흡연 욕구를 참아 내다가 5킬로나 증량했다. 몸매 관리에 목숨 거는 김태영에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헬스장과 복싱장을 전전하며 겨우겨우 뺀 참이었다.
“종오 씨는? 못 온대?”
머플러를 풀어내며 김태영에게 물었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녀석, 강제로 차출됐어. 그래서 너도 가주님 말고 우리랑 놀고 있는 거잖아. 야아 난 그 녀석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또 첨 봤네.”
“태영 씨, 무슨 일인데요?”
“모르겠네요. 걔랑 나랑은 소속이 달라서. 큰 문제는 아닐 거야. 그런 거였음 내 팀도 소환됐겠지. 별로 걱정할 거 없어. 끝나고 합류한다고 했으니까.”
“장운 씨는 아직 안 오셨어요? 아까 출발한다는 연락은 했는데.”
“알아서 오겠지 뭐. 우리끼리 먼저 시작하죠?”
김태영이 심드렁하게 내뱉고 바 안쪽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상성이 안 좋을 것 같던 심제준과 장운은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그리고 반대로 상성이 좋을 것 같던 김태영과 장운은 삐거덕거렸다. 우려와 달리 장운은 사적으로 연락을 시도하거나 곁을 맴도는 일 없이 깔끔하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태영은 유달리 장운을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장운도 자신을 껄끄러워하는 김태영을 좋아할 리 없었고.
“아무거나 다 시켜도 된다면서? 비싼 거만 다 주문해야지.”
메뉴판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박현진은 서버를 부르더니 숫자가 큰 메뉴들만 집어 주었다. 제일 비싼 술도 세 병이나 주문했다.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마시진 않고 빙글빙글 돌렸다. 되도록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번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기하가 몇 번이나 자기와 술을 마시자는 걸 거절해 왔는데 남들이랑 이브에 술을 마시고 들어갔다가는……. 말은 안 해도 서운해할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반대의 입장이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안 마시게?”
다행히 오늘은 달리는 분위기가 아니라 다들 넉넉하게 즐기고만 있었다. 나는 대충 마시고 있다는 뜻으로 잔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김태영은 납득한 얼굴로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네.”
“뭐를?”
“마시지 말라고. 장례식 때 너 필름 끊기게 만들었다고 꽤나 혼났었으니까.”
“그것 때문 아닌데.”
“그럼?”
물을 들이켜며 옆을 쳐다보았다. 박현진과 심제준은 벌써 들고 있던 술잔을 다 비우고 있었다. 김태영은 내 옆에서 얇게 썬 초리조와 올리브를 집어 먹고 있다.
“전에 기하가 술이 약할 거라고 생각해서 같이 마셨다가 완전 깨졌거든. 그 뒤로 자꾸 나랑 술을 먹자고 한단 말이야. 별 핑계를 다 대면서 거절해 왔는데 오늘 같은 날은 처음부터 기하랑 마셔야 할 거 아냐.”
“요컨대, 최상의 컨디션으로 대작을 하고 싶다 이거구만. 그런데 어쩌냐, 너는 절대 가주님을 못 이길걸.”
“왜?”
“술에 내성을 길렀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며 그가 으쓱해 보이고는 물방울이 맺혀 있는 와인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내성을 길러? 심지어 나는 기하가 술을 마셔 본 경험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오해했다. 내가 하는 얘기를 듣던 김태영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바보냐? 저 자리가 어떤 자린데. 당연히 의전에 관련된 건 전부 익히셨다고. 저번에 집에 초대됐을 때 대접한 술만 해도 그게 얼만 줄……. 아니다 됐다. 아무튼 술에 관련된 건 우리 같은 일반인보다 훨씬 익숙하고 빠삭하실걸. 봐 봐, 이런 거.”
앞에 놓인 와인 병을 눈앞에서 흔들어 보인다.
“라벨 실루엣만 보고도 이름은 뭐고 어디 산인지 무슨 맛과 향인지도 아실걸?”
“뭘 안다고?”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장운이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커다란 체구에 방한용 외투를 걸쳐서 정말 곰 같다.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는 나를 향해 씩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TV.”
“좀 늦으셨네요.”
“길이 어지간히도 밀려서 말이야. 주차할 데도 마땅치 않아서 멀리 대고 걸어오느라고 늦었지. 많이 기다렸나?”
“대체 그 이상한 호칭은 언제까지 할 생각입니까?”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 그를 보며 김태영이 얼굴을 구겼다. 부러우면 그짝도 하나 만들어서 붙이든가, 장운은 느긋하게 답하더니 내 잔에 담긴 술을 허락도 없이 한 번에 마셔 버렸다. 포트와인이라 도수가 상당했을 텐데도 얼굴엔 조금의 변화도 없다.
“귀한 집 자제분들이셔서 그런가 술도 좋은 거만 마시네.”
“장운 씨도 라벨만 보면 어떤 술인지 알아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술맛이 좋으니까 하는 소리지.”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박현진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가 막혀서라고 짧게 대답한 장운은 내내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을 썼네.”
안경 렌즈는 투명했지만 무언가가 내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호기롭게 쳐다보던 장운이 쓱 시선을 돌리고는 내 잔이었던 것에 술을 따랐다.
“눈 색이 좀 다르게 보이네. 일부러 썼나 보지?”
“네. 어울리죠?”
“글쎄.”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일부러 친 장난이었는데 그가 탁하게 중얼거려서 당황했다. 괜히 김태영의 눈치를 보게 됐다.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짤랑짤랑 흔들면서 장운이 말을 이었다.
“너무 어려 보여서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이상하다니? 어떤 식으로?”
또 시작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운은 여유로운 태도로 술을 입에 머금었다가 넘겼다.
“그걸 왜 내가 그짝한테 일일이 알려 줘야 하나. 내 상사도 아니신데.”
“그야 안경 쓴 모습이 뭐 기분이 이상씩이나 할 일이 아니니까?”
“대놓고 물어보든가. 의뭉스럽게 빙빙 돌리면서 얘기하지 말고. 말버릇 한번 답답해서 못 참겠네.”
나는 가운데에 끼여서 말없이 뿔뽀를 먹어 치웠다. 둘이 싸우든 말든 내 소관이 아니다. 너 잘 걸렸다는 투로 김태영이 본격적으로 시비를 붙였다. 특유의 능청을 섞은 비아냥에 장운은 더 능글능글하게 맞받아쳤다. 아주 창과 창의 싸움이었다. 내가 볼 땐 둘이 동족 혐오 중인 것 같은데 싸우지 않고 잘 지내면 좋으련만.
“말려야 되지 않아?”
심제준이 코를 빨갛게 붉힌 채로 물었다. 나는 왜? 하고 물으며 포크를 빨았다.
“저러다 제풀에 지치면 조용해지겠지. 어차피 내가 말린다고 말려질 인물들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온 박현진은 달랐다. 그녀는 의자가 뒤로 넘어가도록 벌떡 일어나더니 ‘아, 왜 이 좋은 날 또 으르렁거리고 난리야, 조용히 못 해요?’라고 한층 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삿대질을 했다.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던 장운과 김태영의 입이 딱 멈춘 것과 동시에 딸랑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났다.
“…….”
문이 열리고 등장한 것은 한 외국인 커플이었다. 바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가 꽂혔고 그들 역시 우리를 보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존재감 없이 구석에서 조용히 음식만 만들고 있던 주인이 그들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주인의 말을 들은 커플의 눈이 안쪽을 향했다. 남자 쪽이 우리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항의하는 목소리다. 주인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자 쪽이 그만하고 나가자며 남자를 잡아끌었다. 남자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았다. 그의 어깨 위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에도 온통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다. 날이 날인지라 좋은 시간을 보낼 장소를 찾아 꽤 헤매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이 열리는 건 쉬웠다.
“괜찮으니까 들여보내세요. 어차피 여기 넓어서 한두 팀 정도 더 받는다고 지장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신께서.”
“제가 나중에 말할게요.”
가게 주인의 허락에 그들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됐다고 안도하면서 내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둘 다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주인의 안내에 따라 구석에 자리 잡고 외투를 벗는다. 여자 쪽은 나이가 좀 있어 보였고 남자는 그녀보다는 어려 보였다. 커플답게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어깨를 끌어안는다. 곁눈질하던 것을 관두고 고개를 돌렸다.
“괜찮을까?”
서 있던 박현진이 내 쪽에 당겨 앉으면서 물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냐고 어깨를 으쓱하며 탄산수로 입 안을 축였다. 어차피 바깥에는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고 당장 내 옆에만 해도 훈련받은 복속인이 몇 명이나 된다.
“잘했네.”
라고 말한 것은 장운이었고, 뒤이어 뭘 잘했냐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타박한 건 김태영이었다. 김태영은 단말기를 조작해 그새 저들의 프로필을 찾고 있었다.
“여자는 2지구 사람이네. 와우, 선박 회사 따님이야. 남자는 거주 자격을 얻은 게 며칠 되지도 않았네. 여자 쪽 가족 자격으로 들어왔고.”
“가족 자격?”
“한마디로 결혼할 사이나 뭐 그런 거지. 운도 좋아라. 한 방에 미인에 재벌에 영생까지 얻다니.”
결혼이라, 그 단어를 정말 오랜만에 들은 느낌이었다. 내 인생에 절대 없을 일이라 생소하기 그지없는. 그러고 보니 남들은 청첩장이라는 것도 귀찮을 만큼 받고 초대도 되고 그런다던데 나는 그런 것과는 아예 연이 없었고, 없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었다. 겨우 조용해져 얌전히 잔을 기울이고 있는 김태영에게 넌지시 흘렸다.
“언젠가 나도 네 녀석 결혼식이라는 데에 가 볼 수 있겠지?”
“갑자기?”
“이번 크리스마스도 솔로라고 난리 치지 말고 괜찮은 분 있으면 좀 만나 보고 그래. 저번에 너한테 번호 줬던 분이랑은 잘 안 됐어?”
“아 그 사람? 몇 마디 나눠 보니까 내 타입이 아니더라고.”
하! 장운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김태영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뭐라고 또 한마디 하려는지 입을 들썩거린다. 다행히도 박현진이 먼저 앞을 가로막았다.
“장운 씨도 인기 많길래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짝지어서 놀 줄 알았는데 의외예요.”
“장운 씨도요?”
“응. 내 후배들이 한동안 꽤 따라다녔거든. 근데 아무한테도 연락을 안 했나 봐요? 여기 혼자 와 있는 거 보니.”
허! 이번의 헛웃음은 김태영이었다. 조금 있으면 나도 박현진처럼 작작하라고 소리 지를 판이었다. 잠자코 술만 들이켜던 심제준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오픈되어 있는데 왜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걸까요. 나도…… 외로운데.”
“…….”
눈들이 전부 심제준에게로 쏠렸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남기고 흩어졌다. 하하, 건배합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음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꾸며 낸 게 역력한 부자연스러운 텐션으로 김태영이 잔을 들어 올렸다.
이후의 분위기는 꽤 평화롭고 화기애애했다. 이런 게 송년회구나 싶었다. 산딸기를 얹은 부쉬드노엘을 크게 잘라 나누고 연신 잔을 부딪쳤다. 쉴 새 없이 나오는 음식은 하나같이 전부 맛있었다. 다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다.
술에 취해 가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내가 꺼낸 말 때문인지 대화의 주제는 계속 연애 관련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애 쪽으로는 다들 의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꽤나 놀랐다. 겉모습이 화려해서 여성 편력이 굉장할 듯한 김태영이 생각보다 이성에게 곁을 주지 않는 것은 오랜 세월 지켜보았기에 알고 있었지만, 연애 따위엔 관심 없을 거라 여겼던 박현진이 내가 모르는 사이 파트너가 몇 명이나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한때 그녀와 김태영이 나 몰래 사귀는 건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장운은 또 놀랍게도 겉모습과 달리 이성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라고 했다. 박현진의 표현에 따르면 이성을 몰고 다닐 스타일이라고. 제일 마초적인 유형인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여자들이 보는 눈과 남자의 눈은 다른가? 몇 명이나 사귀어 봤냐는 물음에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꼽는데 두 손을 훌쩍 넘어갔다. 좋아한다고 다가오면 딱히 밀어내지는 않았다며, 김태영과는 정반대의 연애관이었다.
“다들 그저 부럽네요……. 저는 모태 솔로인데 말입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심제준이 울적하게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 대화의 주제는 심제준에게 연애 코치를 해 주는 것으로 흘러갔다. 그조차도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해 대느라 막상 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떠들썩한 것이 꽤 즐거웠다. 한참을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나는 라즈베리 시럽을 섞은 탄산수를 홀짝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에서 캐럴 성가단의 화음이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 눈발은 점차 더 거세져 나뭇결이 살아 있는 창문틀에 하얗게 서리가 꼈다. 이제 피부처럼 친숙해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 있나?”
어느새 곁에 다가앉은 장운이 물어 나는 별로, 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자꾸 창 쪽만 바라보며 불안해하는 거 같은데.”
“가주께서 데리러 오신 댔는데 늦어지고 있어서 그럴걸요.”
“나으리께서 여기로 온다고?”
장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뜻밖인 건 장운과 기하의 사이가 적어도 겉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장운은 현실 파악이 빠른 편이라 내 짝으로서 기하를 인정했고 기하는 장운이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참아 낸 것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때 귀에 거슬리는 진동 소리가 났다. 기다렸다는 듯 잔을 옮기던 손이 멈췄다.
출처는 김태영의 재킷 안이었다. 그는 바로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눈에 보일 정도로 동요했다.
“무슨 일이야?”
“음 아니, 뭐…… 별거 아냐.”
거짓말인 게 뻔히 보였다. 재킷 안에 다시 단말기를 집어넣는 손가락이 어색했다. 태연을 가장해 묻는 내 목소리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인데.”
재차 묻는 데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술을 마시기만 한다. 다그쳐 세 번째 물으려 했을 때였다. 이런……. 테이블 바깥에 앉아 있던 심제준이 탄식했다. 고개를 들고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쳐다보는 눈이 애조를 띠고 있었다.
“종오 씨가, 사고가 났다는데요.”
자신의 휴대 전화를 들어 보이며 중얼거린다. 우리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쏠렸다. 얼마나요? 어떻게요? 왜요? 박현진이 쏟아 내는 질문에 심제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짧게, 오늘 모임엔 참석 못 하니 기다리지 말라고만…….”
“그래서 늦었나.”
“이게 갑자기 뭔 일이야 대체.”
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남아 있는 이들이 심제준에게 몰려가 그의 휴대 전화를 들여다본다.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더니 하나같이 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아 내며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물었다.
“박종오와 기하가 같이 있었을 거 아냐. 그럼 기하는?”
기하는? 기하는 무사한 거야? 붙잡아 확인한 김태영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 말이 정답이었을 때 으레 보이곤 했던 표정이.
“좀 전에 왔던 연락이.”
연이은 질문에 결국 김태영이 내키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다치신 모양이야.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연락 왔어.”
대답을 예상해 물어 놓고 고스란히 내밀어진 정답에 한 대 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얼마나……? 묻기 위해 목소리를 쥐어짜 내야 했다. 김태영이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가주께서는…….”
마주치는 시선이 불길했다. 가주께서는…… 뒤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이번에도 나는 알고 있다.
멍청하게 멈춰 버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놓고 천천히 물러났다. 천천히. 몸을 돌려 문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한없이 느껴졌다. 한 컷 한 컷 따로 떼어진 프레임이 되어 눈앞을 덮친다. 온 힘을 다해도 그 속도를 거스를 수 없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도 한없이 늘어난다.
몸이, 정신이 자기 의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 * *
무슨 정신으로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밀어 냈다. 당장 기하가 있는 병원으로 가 달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여기 계시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 눈도 많이 내리고 사람들도 많아 위험합니다.”
“됐으니까 출발해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출발하라고!”
협박을 하고 욕을 해도 그들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하다못해 운전석에서 끌어 내리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막무가내로 구는 내 등을 뒤늦게 따라온 장운이 끌어안았다.
“TV!”
“이거 놔!”
“TV! 사람들이 보고 있어. 여기서 이러면 위험해.”
버둥거리는 내 몸을 더 단단하게 품에 속박한다. 진정해, 진정하라니까, 거친 손바닥이 내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려진 시야를 되찾으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가야 돼. 가야 돼. 가야 돼.
놔, 놓으라고, 그만둬, 막으면 가만 안 둘 거야, 너희 따위가, 너희 따위가.
멀찌감치 서서 우리 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 흥미롭게 여기는 웅성거림, 나를 향한 손가락질, 기대를 품고 부추기는 눈동자, 저 시선, 시선, 시선들. 저것들을―.
“TV!”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뺨에 화끈한 통증이 내달렸다. 뒤쫓아 나온 김태영이 욕을 하며 장운을 내 옆에서 밀쳐 냈다. 피잉― 귀가 먹먹했다. 내가 충격에 고개를 들지 못하자 다급하게 김태영이 앞으로 뛰어들어 어깨를 붙잡았다. 어질어질했던 시야에 걱정스러운 얼굴이 들어온다. 그는 내 뺨부터 확인했다.
“이기현, 이기현 괜찮아?”
“…….”
“괜찮아?”
“……그래.”
시선을 비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장운을 보았다. 자신이 때려 놓고도 그가 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미안……, 급해서 힘 조절을 못 했어.”
“……아니,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해요.”
“무식하게 얘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김태영을 밀치고 뺨을 살펴보는 것은 박현진이었다. 우리 일행이 전부 나오자 가뜩이나 몰려 있던 시선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김태영은 급히 내 앞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고는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정보가 있으면 바로 연락 올 거야. 그때까지만 안에서 기다리자.”
“그래, 여기서 이래 봤자 달라질 것도 없잖아. 들어가자.”
“종오 씨한테 다른 연락이 오면 그때 움직여도 되니까.”
“안 돼.”
즉답에 회유하던 일행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며 천천히 말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그 애는 불멸이야. 수술이 필요할 일이 뭐가 있어? 뭔가 잘못된 거라고.”
“아니라니까. 지금 눈길에 미끄러져서 크…… 아, 아니 정신없어서 그런 거고 가주님은 무사하시다고.”
“그럼 무사한 걸 보러 가야겠어.”
“야 인마, 네가 지금 이 기분으로 거리에 나가면 더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라.”
“그냥 기하의 옆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단호한 내 태도에 김태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꺾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고집부릴 때를 대비한 매뉴얼이 있을 터였다. 김태영의 판단보다 장운의 말이 빨랐다.
“저쪽으로 가지.”
어느새 담배를 문 채로 그가 엄지를 세워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찡그리는 김태영과 달리 나는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짝이 수행원 둘 정도는 막을 실력이 있겠지? 우리는 그사이에 내 차를 타고 가자고.”
“잠깐만. 그게 대체 뭔 소리야?”
이 순간 담배가 절실할 김태영이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보고 침을 삼키며 물었다.
“부탁할게. 김태영.”
차 밖에 나와 몇 걸음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수행원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드디어 알아들은 김태영이 얼굴을 구겼다.
“아니 잠깐만요? 나는 한다고 한 적이 없어요.”
“나도 따라갈게.”
박현진이 얼른 내 옆에 따라붙었다. 거절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선수를 쳤다.
“흥미로 그러는 거 아냐. 내가 아마도 봉합 수술로는 이 섬 안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축이라 그래.”
“…….”
“내 취미가 뭔지 알잖아. 나는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다고. 어떻게 다치신 건진 몰라도 도움은 될 거라고 확신해.”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그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있던 장운이 품 안에 있던 담뱃갑을 김태영에게로 휙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 든 김태영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수행원이 우리 쪽을 향해 쫓아오다 김태영의 발차기를 맞고 옆으로 구르는 게 보였다. 남은 한 명은 심제준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큰 소리가 울렸다. 행인들이 소리 지르고 수행원들이 소리 지르고 김태영과 심제준도 소리를 질러 대서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장운의 등을 따라 한껏 차려입은 인파를 헤치고 달려갔다.
To carry my wishes, I'm going to see you…….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거리를 채운 캐럴이 멀어져 간다.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빛나는 화려한 거리의 조명들도 뒤로 사라져 갔다. 하얗게 부서지는 입김과 시야를 밝히는 눈송이만이 곁에 남았다.
낙원의 크리스마스이브가 끝나 가고 있었다.
* * *
하얀색 벽에 둘러싸인 상자 같은 건물,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티 하나 없는 무채색. 어릴 때부터 나는 병원은 왜 하나같이 하얀색이냐는 의문을 가졌다.
나는 그 하얀색의 복도에서 앉아 멍하니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울 거면 소리를 내서 울어야지 왜 눈물만 흘리고 있어.”
내가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만을 떨어뜨려 우는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나 자신이었다. 장운의 말에 뺨을 문질렀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것이 많았다. 닦아 내도 이내 뚝뚝 떨어져 포기하고 내버려 두었다.
눈을 찌푸린 장운이 옷에 달린 주머니들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달려 있는 모든 주머니를 뒤져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혀를 차며 담뱃갑만을 손에 쥔다. 습관대로 담배를 하나 꺼내 물더니 한숨을 쉬며 도로 빼내었다.
“거, 가슴이 필요하면 말해도 되는데.”
담배를 든 손가락으로 나를 툭 쳤다. 농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모를 모호한 표정이다. 텅 빈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자 자신이 더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어 댔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 잠깐 눈이라도 붙이란 소리요.”
밤새 이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떠날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기하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릴까 봐. 혹시라도 나를 찾을까 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나야 이러는 게 당연했지만 장운도 덩달아 나를 따라 쉬지도 못하고 함께였다. 이브를 날려 버렸는데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그가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장운 씨야말로 이제 그만 가셔도 됩니다. 저 때문에 어제부터 꼼짝없이 여기 붙들려 계셨잖아요.”
“섭섭하게 자꾸 그럴 건가? 이제 와서 쓸모없으니 가 버리라고?”
“그런 뜻이…….”
계속해서 농담이었나 보다. 짓궂은, 그러나 따뜻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그의 눈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울다가 억지로 웃는 우스꽝스러울 내 모습에 장운이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기하와는 다른 투박하고 거친 손놀림으로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 툭툭, 눈물이 더 떨어졌다. 가도 된다고 얘기했지만 옆에서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어제, 존재하는 모든 교통 법규를 다 어기는 듯한 운전 실력을 보여 주며 장운은 나를 기하가 있는 병원으로 데려왔다. 이미 수술실에 들어가 있어 동생의 얼굴이나 상태를 확인할 순 없었지만 대신 박현진이 수술복을 입고 안으로 들어갔다.
명령을 어기고 일찍 온 것이 다행이었다. 마침 나를 불러들이려던 참이었다고, 수술을 전담한 의사가 도착하자마자 수혈을 요구했다.
우리는 혈액형이 달랐다. 하지만 기하의 신체가 허락하는 피는 오직 내 피뿐이었다. 어떤 피를 넣어도 거부 반응을 보이던 신체는 내 피를 주입하자 기적같이 받아들였다. 수혈보다는 먹이를 섭취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고 했다.
한계치까지 피를 뽑고 난 뒤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이었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은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바로 쓰러질 것처럼 굴었다. 혹시 잠시 잠깐이라도 나도 모르는 새 정신을 잃을까 봐 바짝 경계하며 온 신경을 수술실 안쪽으로 집중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고 믿어야지. 너한테는 내가 준 힘이 있으니까. 가늘게 숨을 토해 내며 되뇌고 되뇌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말씀하세요.”
“아까 듣자 하니 나으리는 TV 덕분에 불멸의 몸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럼 원래 불멸의 능력은 TV 거였어?”
“네.”
“대단하네. 나라면 아무리 사랑해도 그런 능력을 남에게 주진 못했을 거 같은데. 처음에 TV가 도망쳤던 건 나으리 때문이 아니었나? 그런 동생한테 어쩌다 능력을 주게 된 건데?”
그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기하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묻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유일한 이는 이미 죽어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얘기였다. 장운같이 내게 복속되어 있지 않는 한은, 그건 중요한 게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까.
어지러운 머리를 짚고 있는 나를 보며 내가 말하지 않으리라 오해한 건지 장운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는 말해도 되는 사이 아닌가? 나한테 연애 상담도 해 놓고는.”
그의 넉살에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런 것도 했었지.
그때 장운의 조언은 정말 생뚱맞은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보다 훨씬 더 큰 비밀을 상대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그러니 내 비밀은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라는 합리화에 가까운 조언이었다. 조언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그 특이한 사고방식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우리 집안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죠?”
“알다마다. 인이 박이도록 들었는데.”
이런 것도 들었을까. 아니, 당신 같은 사람은 상상이나 해 봤을까.
“아버지가 기하를 죽이는 것을 봤습니다.”
장운의 입에 걸려 있던 담배가 툭, 그의 허벅지 위로 추락했다. 그 이상의 말이, 설명이 필요가 없을 거다. 나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 위로 새빨간 핏자국이 남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고스란히 증명해 보이던 날. 너무 참혹하고 끔찍해서 잊을 수 없는……. 그렇기에 잊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사건.
“머리가…… 여기 이마 쪽이 깨져서 완전히 벌어져 있었어요. 그 애가 노란색 병아리 털옷을 입고 있었던 것도 기억나요. 그 털옷 색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서……. 기하는 정말 작았는데, 그 작은 몸에서 피가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첨 알았어. 걔는 근데 죽어 가면서도 나한테 걸어오더라고요.”
“…….”
“그래서 줬어요. 기하를 살리려고. 근데 애초에 내 능력은 처음부터 그 애 것이었거든요. 내가 바보같이 잊어버리는 바람에 넘기는 게 늦어졌을 뿐이지.”
그는 드물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하긴 누구든 이런 끔찍한 얘기를 당사자한테 들었다면 저런 반응밖에 할 수 없을 거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괜히 물어봤군. 지독한 얘기인 줄도 모르고.”
“아닙니다.”
연악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던 신의 끈은 그로 인해 완전히 떨어지고 나는 한낱 인간으로 강등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이 얼굴과 눈으로 현혹하는 여우 고유의 능력뿐.
하지만 그전에 이미 「신이 되고 싶지 않다」는 진음의 명령이 바이러스처럼 모든 혈족들에게 입력된 상태였다. 내가 기하에게 모든 힘을 넘기던 순간을 목도한 이들은 알아서 목숨을 끊든지 아니면 이연화처럼 영영 입을 다물었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TV한테 귀하게 자랐다고 비아냥대던 거 사과하지. 내가 실수했어.”
“그게 비아냥이었습니까?”
“뭐…… 흠…… 아무튼 고생 많았다는 소리요.”
장운이 담배를 꺾으며 연민 섞인 위로를 건넨다.
“기하가 정말 강했어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 애가 내 삶을 지탱해 줬죠.”
“그럼 이번에도 잘 이겨 내겠네. 그런 일도 극복해 냈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밍 좋게 수술실 안쪽이 소란스러워져 나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 몰골이 처참해진 박현진이었다.
“기하는요.”
“수술은 잘 끝났어.”
그녀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피를 너무 많이 빼서 자기도 좀 쉬라니까 왜 계속 여기에 있었어. 병실에 있었으면 알아서 올려 보냈을 텐데.”
“기하는…… 괜찮아요?”
“뭐 처음부터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잖아. 복원과 회복의 문제였지. 재생 능력이 있는 게 다행이었는데 그거 때문에 애먹기도 했어.”
“애먹……어요?”
“그래. 생명을 유지한답시고 조각난 장기가 자꾸 자기들 멋대로 붙어 버려서 다시 다 잘라 내야 했거든.”
정확한 상태를 듣지 못했던 나는 그녀의 말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표정이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박현진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운이 나빴지. 하필 가운데가 뚫린 파이프가 심장을 제대로 관통하는 바람에 피가 급속도로 빠져나가서……. 과다 출혈에 심장은 산산조각 나 버리고, 일반인이었으면 즉사였을 거야. 아니 가주께서도 불멸이니 망정이었지 사실 급사는 급사…….”
“잠깐, 말 좀 가려서 하면 안 되나?”
장운이 사이로 다급하게 끼어드는 바람에 겨우 현진의 입이 멈췄다. 그녀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을 가렸다. 나는 괜찮다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기도하며 달려왔다. 그러기만 한다면, 그 애의 조각만 남아도 나는 괜찮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럼에도 기하의 상태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
신을 계승한 이후에 아이가 다친 것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가 다치거나 누워 있는 모습은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그나마도 빈약한 상상 덕에 어느 한 부분만 다쳤거나, 기껏해야 어머니의 장례식 날 쓰러져 있는 것을 보거나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내 눈앞을 지나가는, 병상 위의 기하의 모습은 내가 상상한 그 어떤 것보다도 처참한 것이었다.
품으로 끌어당겨 눈을 가리는 장운의 손길을 뿌리칠 기운도 없어 나는 놔 달라는 의미 없는 말만을 반복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온갖 기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시체처럼 누워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머릿속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왜 이런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건데.
보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도 알 수 없이 평형 감각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간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성가신, 웅웅거리는 소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 나는 그저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는 기계적인 말만을 되뇌었다. 괜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