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완전히 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저녁 식사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심제준은 딱딱하게 굳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표정으로도 끝끝내 자리를 지켰고, 김태영과 박현진은 기하가 요리를 해 주겠다고 주방에 들어가자 입으로는 만류하면서도 이게 무슨 횡재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박종오는 나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얌전히 기하의 지시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기하가 가게에 들러서 직접 골라 왔다는 술병을 꺼내자 한층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망해 버릴 게 뻔한 분위기를 중재해야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내가 나설 차례도 없이 다들 갈고닦아 온 사회생활 스킬을 유감없이 발휘 중이었다. 김태영이야 원래도 저런 성격이고, 박현진은 과거의 앙금으로 지난날에 살짝 내외한 게 언제냐는 듯 신나 있었으며, 기하의 옆에서 시중을 도맡고 있는 박종오는 내 권속이 아니라 기하의 권속처럼 보였다. 염려했던 심제준은 기하가 깍듯하게 예우하는 모습에 표면상으로나마 억지 미소를 비추고 있었다.
새삼 다들 성격들이 무던하구나 생각하며 샐러드 접시에서 샐러드를 덜어 냈다. 식탁 위는 내가 만든 요리와 기하의 요리가 섞여 누가 무엇을 만든 것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아니, 않았다고 생각했다.
“…….”
이상함을 느낀 것은 처음엔 박현진의 태도였다. 내가 만든 전채 요리를 입에 넣었던 박현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 번 더 먹더니 눈썹마저 찡그렸다.
“왜 그래요?”
“응? 아니.”
박현진은 급하게 냅킨으로 입술을 닦다가 내 물음에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맛이…… 없나? 나도 내가 만든 요리를 덜어 맛을 보았다. 맛이 없긴 없었다. 기하가 간을 약하게 먹는 것에 맞춰서 최소한의 간을 하는 버릇을 들였으니까.
반대편에 앉아 있는 박종오와 기하는 섬의 관리에 대한 얘기를 조용히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야 역시 비싼 값을 하네. 이거 죽기 전에 한번 마셔보고 싶었던 건데 웬 횡재냐.”
김태영은 술을 물처럼 마시며 신나서 말했다. 그랬던 그도 내가 만든 다른 요리를 크게 덜어서 맛을 보더니 눈에 띄게 당황했다.
“왜. 맛없어?”
기하 외의 사람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한 적은 없어서 이런 반응들에 조금 위축된 나는 소심하게 물었다.
“어어…… 혹시 이거 간 안 했어?”
“했는데. 건강에 좋으라고 조금만 하긴 했지.”
대화를 나누던 기하가 내 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김태영은 맹물로 입을 헹구고는 이번에는 기하가 만든 다른 음식에 손을 댔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졌다. 박현진과는 다른 의미로. 그리고 거의 걸신들린 사람처럼 집중적으로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포크를 빨던 박현진도 합세해 김태영이 먹었던 것에 손을 댔다.
“…….”
그 뒤로는 기가 막힐 만큼 식탁 위의 요리 중 내 요리를 제외하고 기하의 요리들만 비워지기 시작했다. 김태영은 기미 상궁이라도 되는 듯 하나씩 맛을 보며 용케 기하의 요리를 찾아냈고 박현진은 김태영이 먹는 것만 알차게 골라 먹었다. 가만히 먹고 있던 심제준까지도 내 요리는 피하고 기하의 요리만 가져가, 식탁 위에는 갈수록 내 요리만 남게 되었다. 아무리 눈치 없어도 내가 만든 음식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솔직히 할 말이 없는 게 나도 내 요리보다 기하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있긴 했다. 내가 한 건 간을 약하게 해서 사실 내 취향도 아니었으니까. 그 와중에 박종오와 기하만이 남아 있는 내 요리를 묵묵히 먹어 치웠다.
찐 생선 살을 자르며 박현진이 기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가주님은 요리를 따로 배우셨나 봐요? 왜 상주 고용인을 두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요리를 잘하셔서 그런 거였군요.”
요리는 고사하고 주방에 서 본 적도 없을 것 같던 기하가 잡지에 나올 만한 완벽한 형태의 요리를 내놓는 것에 놀라 나도 이미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같이 살 때를 대비해서 기하가 각종 집안일을 습득한 것을 들은 바 있다. 상주 고용인을 두지 않는 것은 내가 우리 집에는 다른 사람을 들이길 꺼려 해서였기 때문이었고. 청소나 세탁 같은 것을 담당하는 고용인들은 내가 집을 비우는 시간에만 조용히 들르는 방식이었다.
기하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레시피를 그대로 외워 버린 것뿐이라 모르는 요리는 아예 못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 기하의 요리는 기복 없이 늘 일정한 맛이 났다. 건강하고 정갈한, 그를 닮은 맛.
내 요리는 뭐가 문제인 걸까. 나도 나름 레시피를 따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씁쓸한 기분으로 많이 남아 있는 내 요리를 한 번 더 맛보았다. 미세한 간이 문제인 건가? 기하와 달리 완벽하게 레시피대로 만들지 않은 게 문제인가? 가령 소금을 넣으라는 말에 간장을 넣은 일이라든가, 몸에 더 좋을 것 같아서 설탕은 안 쓰고 꿀만 쓴 거라든가.
침울한 기분으로 식기를 긁어 댔다. 그럼 그동안 맛있다며 잘 먹은 기하는 뭐였던 거지. 한 번도, 맛이 없다거나 이상하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도 기하의 접시 위에는 내가 만든 요리만이 덜어져 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은 요리를 입에 넣었다. 대각선에 앉아 있는 박종오도 극단적으로 내 요리만 선택하고 있었다.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차린 나는 한층 더 침울해졌다.
식사가 끝나고 기하는 일을 해야 한다며 서재로 올라갔다. 나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기하가 만들어 준 토닉을 마시며 김태영이 가져온 보드게임 같은 것을 하며 놀았다. ‘이런 거, 해 보고 싶지 않았어?’라고 묻는 김태영에게서, 오늘의 모임은 김태영 표 오지랖을 또 발동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손에 있는 카드를 전부 털어 버려야 끝나는 룰을 가진 보드게임이다.
“와 맙소사, 또 이겼다고?”
“이열. 초심자의 행운이네.”
“축하드립니다. 박사님.”
“어떻게 자기는 매번 좋은 카드만 뽑는 거야?”
3판 3연승 중이었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모토를 가진 보드게임은 계급이 높은 카드를 쥔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했고 그 카드가 계속해서 내 덱으로 들어와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보드게임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를 배려해서 실력이 아니라 운이 많이 좌우하는 게임을 골라 줬는데 내가 이렇게 게임 운이 좋을 줄은 몰랐다.
“원래 나는 운이 없는 편인데,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두 번째로 카드를 다 털어 버린 박현진이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박현진은 운보다는 전략으로 나머지를 이기고 있었다. 아마 내 패가 좋지 않았으면 그녀가 1등이었을 거다.
“이제 자기가 올바른 것만 뽑기 시작했다는 뜻 아닐까?”
겨우 게임 가지고 과대 해석이라 생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기하에게 사실을 고백한 뒤 다음날 걱정하고 있었을 박현진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마치 자기의 일인 양 기뻐하며 연신 다행이라고 말해 주었다. 수면제를 타러 그녀에게 들를 필요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불면증은 깨끗이 치료됐으니까.
“아오, 내가 또 꼴찌잖아.”
세 번 연속 꼴찌가 된 심제준이 신경질을 냈다. 꼴찌가 된 사람은 방석도 없는 맨바닥에 앉아야 하고 토닉이 아닌 맹물만 마셔야 했다.
“슬슬 다른 걸 해 볼까 그럼.”
집들이 선물이라고 김태영이 가져온 쌓여 있는 보드게임을 살펴보았다. 몇 시간 만에 이걸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져온 건지 종류가 꽤 많았다.
“웃기시네. 누구 맘대로 그만둬. 난 한 번이라도 이겨야겠어. 다시 해.”
승부욕을 불태우며 심제준이 널브러져 있는 카드들을 그러모아 섞기 시작했다.
“농노가 어디서 감히 목소리를 내나. 어이. 치즈가 다 떨어졌다. 가져오거라.”
심제준 덕분에 간신히 꼴찌에서 면한 주제에 김태영이 거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꼴찌가 되어 농노 신분이 되면 저런 잡다한 일도 다 해야 했다. 기가 막힌 표정을 하면서도 심제준은 얌전히 몸을 일으켜 주방을 향했다.
“이것도 해 보고 싶은데 시간이 될까.”
꽤 규모가 있고 무거운 보드게임 상자를 흔들었다. 표지에 그려진 마법사 그림이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나머지는 다음에 하면 되지. 연말에 약속 한 번 더 잡아서 놀러 오면 되겠네.”
방석 위에 앉아 토닉을 들이켜며 김태영이 느긋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놀러 온다는 게 또 우리 집을 지칭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황당해졌다. 또 놀러 오겠다고? 적응력이 좋아도 너무 좋은 김태영은 아까부터 그러잖아도 자고 가면 안 되냐고 진상을 부리는 중이었다. 어으으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대자로 눕더니 팔과 다리를 헤엄치듯 휘적거렸다.
“여기 맛있는 것도 많고 넓고 너무 편하네. 기현아 나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냐. 나 좀 입양해라.”
“……너, 위층에 기하가 있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저거 아까부터 취했나 본데 놔둬. 자기가 뭔 소리 하는 줄도 모를 거야.”
“아 너무 좋다. 왜 이렇게 여기만 오면 편해지지.”
휘젓는 팔다리에 안 맞게 김태영의 몸을 훌쩍 넘어온 심제준이 치즈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작은 조각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엔 다들 뭘 할 거예요?”
다시 맨바닥에 주저앉아 카드를 섞으며 심제준이 물었다. 말 없던 박종오가 그 순간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나?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애인을 만들어야지.”
“음…… 나는 아직 계획 없어. 상황 봐서 특근할지도 모르겠네.”
“계획 없으면 이브 날 또 다 같이 모여서 놀면 어때요? 장운 씨도 초대해서 연말 모임 겸사겸사.”
심제준의 말에 ‘그 사람은 왜?’ 하고 불퉁하게 내뱉으며 김태영이 상체를 벌떡 세웠다.
연말 모임이라, 시가지가 연말 준비로 한창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번에 기하와 쇼핑하러 갔을 때 구조물을 세우고 있는 것을 봤었다. 건물 외벽과 나무에는 화려한 장식들이 걸리고 들렸던 꽃집 문에는 이른 크리스마스 리스가 달려 있었다.
“괜찮을 거 같네. 그럼 제준 씨 장례식 멤버 그대로 모이는 건가?”
“그러니까 그 사람은 왜 자꾸 부르냐고.”
“오늘도 오고 싶어 했는데 호출 때문에 못 왔잖아요, 자기 못 온다고 날짜를 바꾸라고 난리였는데 연말 모임에 안 부르면 내가 무사하지 못할걸요.”
슬그머니 맹물 대신 토닉을 마시며 심제준이 느물거렸다. 납득하지 못하는 투로 김태영이 심제준에게 무어라 투덜거렸다.
“박사님은?”
정적이 흐르게 만든 것은 박종오의 질문이었다. 기하에게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줘야 좋을지 딴생각 중이었던 터라 별안간 내 쪽으로 돌아온 화제가 당황스러웠다.
“박사님도 모임에 참석하시나요?”
“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자기야 가주님과 보내겠지. 우리 중 유일한 커플이잖아.”
당연한 거 아니냐며 박현진이 입술을 오므렸다. 크리스마스는 연인과 함께―, 언제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건지 슬로건 같은 문장을 읊조리며 배분된 카드를 손에 쥔다. 커플 지옥이라고 읍소하는 김태영이 얼굴을 찡그리고 심제준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와중에 박종오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망쳐 버리는 선언을 했다.
“그럼 저도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뭐어―?”
“그러게 연말 모임인데 웬만하면 참석하지.”
“뭐야, 넷이서 뭘 하라고요. 재미없게.”
“세 명입니다.”
“…….”
“장운 씨도 박사님이 안 오시면 참석하지 않을 테니 세 명입니다.”
끝끝내 확실히 분위기를 조져 놓은 박종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은 박종오가 했는데 다 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앞으로 밀어 놓은 카드 더미를 쥐려다가 그 무언의 압박에 굳어 버렸다. 물론 아직 기하와 약속을 한 게 없긴 하지만 좀 전에 누님도 ‘연인과 함께―.’라고 하셔 놓고 저런 눈으로 쳐다보면 어떡하라는 건지.
대답을 종용하는 눈길들을 피해 난처해져 눈을 내리깔았다. 기하에게 연말 모임을 가도 되냐고 묻는다면 그 애는 속마음이 어떻든 당연히 형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라고 대답할 게 뻔했다. 즐겁게 놀다 오라고 배웅도 해 줄 테고 어쩌면 모임 장소로 데려다주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저야…… 물론 기하랑 보내야죠. 크리스마스니까.”
“역시, 그렇겠지?”
내 대답에 또 초 치는 소리를 늘어놓을 박종오를 염려해선지 박현진은 자자,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카드나 들라고 부추겼다. 불만스러운, 납득하는, 안심하는, 또는 아무 생각 없는 듯한, 제각각 다른 표정들로 자신의 패를 들어 확인한다. 아 진짜 이거 왜 이래, 이번에도 망했네, 툴툴 불만을 터트리는 소리들을 들으며 나도 손에 쥐었던 카드를 살폈다.
기막히게도, 내 손안에는 또 최고 등급의 카드가 들어와 있었다.
* * *
끝내 만취한 듯 보이는 김태영이 집에 가기 싫다고 진상을 부리는 것을 억지로 일으켜 호출한 차에 태웠다.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하가 사 왔던 술이 꽤 도수가 셌던 모양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기하의 사이에서 괜히 긴장하느라 몇 모금 마시지 않아 그냥 기분 좋을 정도로만 취기가 올라와 있었고.
정식 집들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각자 선물을 하나씩 사 왔다. 앞서 보았던 대체 왜 사 왔는지도 모를 애견 하우스나, 보드게임을 비롯해서 누님은 욕실에 놔두는 것으로 보이는 이상한 장난감을, 박종오는 술이 들어 있다는 초콜릿 박스를 가져왔다.
박현진은 입김을 후후 불면서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고 수고했다며 내 등을 살며시 두드리고 차에 올랐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우겨 가면서 정원 한쪽에 놓아둔 애견 하우스 안에서는 언제 작동시켰는지 빛이 새어 나와 어두운 정원 길을 밝히고 있었다. 심제준이 우겨 대던 말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나왔다.
워낙 시끄러운 그룹과 있어선지 집에 들어서자 평소로 돌아온 것일 뿐인데도 조금 적막하게 느껴졌다. 거실에는 김태영이 놔두고 간 보드게임 박스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쌓여 있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 남아 있는 한 장의 카드를 집어 올렸다. 마지막 판의 승리자는 박현진이었다. 그리고 최고 등급 카드는 그때도 내 손안에 있었다.
“…….”
나는 이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박현진이 마지막 판을 이기게끔 일부러 턴을 반복해서 넘겼다. 이 카드를 털어 버려야 이길 수 있었지만 끝까지 손안에 들어온 행운을 거머쥔 채로 끝내고 싶었다. 유치한 고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천천히 보드게임들을 정리해 한쪽에 몰아 두고 기하가 일을 하고 있는 서재 쪽으로 올라갔다. 노크를 두 번 하기도 전에 방 안에서 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문고리를 돌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얇은 테의 안경을 쓰고 모니터를 주시하던 기하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친구분들은요?”
“방금 다 돌아갔어. 다들 너한테 인사하고 간다는 걸 말렸어. 일하는 데 방해될 거 같아서.”
“음― 상관없었는데. 말씀해 주셨으면 제가 내려갔으면 됐을걸.”
피곤해 보였지만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기하가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게 다가오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 손을 악수를 하듯 맞잡았다. 작지 않다고 여기는 내 손도 기하의 손안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작게 느껴진다. 느낌이 좋은 손을 주물주물 매만지며 말했다.
“오늘 갑자기 친구들을 초대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할게. 좀 성가셨지?”
기하는 내 말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런 말씀을…… 혹시 제가 오늘 멋대로 일찍 와서 그러시는 건가요?”
“응? 아니?”
“저야말로 다음번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실례인 건 알지만 아무래도 걱정돼서……. 죄송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커다란 손을 끌어다가 손바닥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보다 내가 이 집에서는 너랑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곧 기쁜 듯 눈매를 휘었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끌어당겨 내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도록 만들었다. 아래가 비벼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어정쩡하게 기하의 상박에 손을 올려 지탱했다. 의자가 두 사람분의 무게로 몇 도가량 더 뒤로 넘어가고 기하가 가볍게 내 입술 위에 쪽 하고 키스를 했다.
“그래서, 오늘 초대는 즐거우셨나요?”
“……응. 즐거웠어.”
“제가 올라오고 나서 친구분들과 뭘 하고 놀았어요?”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밖에서 무슨 놀이를 했냐고 묻는 듯한 어조였다. 내 허리를 붙들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입술로 턱과 귀를 지분거리는 행동은 전혀 아이를 다루는 듯하지 않았지만.
“보드게임을 했어. 너도 같이 했으면 좋았을걸.”
그리고 내가 몇 판을 내리 이겼는지 김태영이 어떤 진상을 부렸는지 같은 소소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듣는 내내 기하는 계속해서 내 얼굴 부근에 입을 맞추며 경청 중이었다. 나한테 연달아 최고 등급의 카드가 들어온 게 신기했었다는 얘기까지 했을 때 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요? 또 다른 얘기는 안 했어요?”
“다른 얘기는 뭐…….”
연말 모임에 관한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건 기하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던 거였다. 어차피 모임에 나갈 생각도 없었던 데다가 괜히 화제에 올리면 네가 보내 줘야 하나 또 신경 쓸 게 뻔해서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순간 마지막까지 내 손에 남아 있던 카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 맞다. 그 녀석들 이브 날에 모임을 할 거래. 심제준 장례식 때 인원들끼리 모여서.”
“흐음.”
굳이 숨길 만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옳았을까. 기하는 그 말을 듣고도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을 뿐이었다. 검지로 내 턱선을 따라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연다.
“장례식 때 인원이라면 형님도 참석하시겠네요.”
“아니? 이브에는 당연히 너랑 보내야지 무슨 소리야.”
내 단언에 기하는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환하게 웃으며 뺨을 마주 비볐다.
“어쨌든 재밌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가끔은 형님 심심하시지 않게 놀러 오라고 하세요. 누굴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 저도 좋았어요.”
턱과 목덜미에 연달아 짧은 키스를 날려 간지러웠다. 슬쩍 얼굴을 뒤로 빼며 기하의 어깨를 꾸욱 눌러 버텼다.
“그런데 말이지.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네.”
“아까 내 요리가 그렇게 형편없었어?”
“…….”
아, 입술을 누르는 것이 뚝 멈췄다. 중간에서 눈이 마주쳤지만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이건 답이 필요 없는 반응이었다. 나는 나대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진짜였다고? 그동안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한 번도 안 한 거야? 네가 맛없었다고 하면 나는 고치려고 했을 텐데.”
“그야 전 괜찮았으니까요. 정말 맛이 없었다면 말씀드렸겠죠.”
“오늘 그 녀석들 반응 보니까 보통 맛이 없는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희미하게 웃음기가 남아 있던 얼굴이 사악 굳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 도움이 안 된다며 그 녀석들을 향한 욕을 하고 있는 게 보여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놀러 오라고 했던 건 취소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 그만큼 최악이었어?”
“앞으로 요리는 저한테만 만들어 주세요.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는 해 줄 필요 없으니까.”
“하하.”
내 웃음에 놀림 당했다고 생각한 기하가 사나워진 표정으로 좀 강하게 허리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물리고 혀가 빨린다. 장난스럽게 기하의 뒷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키스에 응했다. 표면을 쪽쪽거리고 핥으며 가벼운 키스를 하는 나와 달리 기하의 키스는 명백하게 전희의 과정을 따르고 있었다. 음……. 고개를 기울이고 입술을 더 깊숙이 물으며 내 니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맨살을 더듬어 나갔다.
“잠깐…….”
“…….”
“잠깐만. 하하, 간지러워.”
음식을 만드느라 잔뜩 냄새가 배고 신나게 웃고 떠들며 놀아 놓고는 아직 씻진 않은 상태였다. 깔고 앉아 있는 기하의 허벅지에서 벌써 딱딱하게 굳은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네 흥분은 삽시간에 이루어진다.
장난으로 치부하는 척하며 어깨를 밀어 내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하고 싶은데, 안 돼요……?”
당연히 조금도 밀리지 않은 기하가 내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은근하게 물어 왔다. 내 노력에도 너는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나 아직 안 씻었어. 이따가 샤워한 다음에.”
당황한 기색이 보이지 않길 바라며 완곡한 거절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단 한 번도 기하는 정사의 거절을 받아들인 적이 없는데도.
기하는 눈을 좁히며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트는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그럼, 한 다음에 같이 씻으러 가면 되겠네.”
왜 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이 강압적인 말을 속삭이며 내가 입고 있는 니트를 움켜쥐더니 가슴이 다 보이도록 확 끌어 올려 버렸다.
* * *
등대에서 손을 잡고 내려오며, 나는 은연중에 기하가 잠자리를 피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기하가 내 몸에 집착하는 이유가 자손을 보는 일 때문이라 예상했으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최악의 경우 정이라도 떨어지든지, 적어도 한동안은 거리를 둘 것이라고 여겼다. 며칠간 계속 피하던 잠자리에, 옅어진 스킨십에, 그 예상은 확신으로 굳어지고 나는 공포에 질렸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네게서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차 안에서 너를 유혹했다. 몸으로 애정을 확인하려는 건 나쁜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거의 기다렸다는 듯― 기하는 난폭하게 나를 안았다. 처음에 거절했던 것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그런 거란 걸, 기하의 말대로 때려서라도 멈추게 하는 게 나을까 두 번째 생각했을 때 깨달았다.
‘이제 자제 못 할 거 같으니까 도저히 못 참겠으면 때려요.’
너는 새빨간 거짓말쟁이였다. 때릴 수 있긴커녕 그 좁은 조수석 시트에서 나는 팔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구속되어 있었다. 그악스러운 힘이 몸을 짓눌러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고 옷은 죄다 반쯤만 벗겨져 있어 구속구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지퍼만 내리고 꺼내진 그의 성기가 쉴 새 없이 몸 안을 들락거리며 체액을 쏟아 냈다. 검은색 정장 바지 사이로 핏줄이 돋아 한껏 융기한 살덩어리는 수없이 받아 왔던 것인데도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꼭 내 몸속을 물어뜯기 위해 길게 몸을 늘이고 머리를 쳐든 뱀의 머리 모양같이.
기하의 어깨 위에 걸쳐진 종아리가 허리 짓과 함께 어지럽도록 흔들렸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 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하도, 수증기로 뿌옇게 변해 버린 차창도, 차체가 섹스를 하는 움직임으로 쿵쿵 흔들리는 것도.
나는 끝없이 울고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로 머리 쪽의 헤드 레스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울음을 그치는 편이 좋을 거라고, 기하가 경고했다. 울고 있으면 자기는 더 흥분할 거라고.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으며 으르렁거렸다. 목에 붙여 두었던 반창고를 이빨로 뜯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이를 세웠다. 나는 밖을 의식하며 신음을 참고 있던 걸 잊고 비명을 질렀다.
아랫도리를 망치로 찍어 내듯 콱콱 박아 댈 때마다 액체가 사방으로 툭툭 튀어 나갔다. 몸에 맞닿는 가죽 시트는 진작에 축축해져 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없었다. 이대로 숨통이 조여지다가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잔인하게 속을 후벼 파고 있는 지금의 기하는 나를 정말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나는 견디다 못해 땀에 젖은 기하의 드레스 셔츠를 정신없이 손톱으로 긁어 댔다. 온몸이 근육질인 그의 몸은 끄떡도 하지 않고 더 무시무시한 중량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훌쩍 들린 두 다리가 쑤셔 박히며 낮은 차체의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양말만 신고 있는 종아리의 모습이 천박하게 느껴졌다. 그냥 이 순간 내가 하는 것들이 전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선팅이 짙게 되었다고 해도 근처에, 아니 백 미터 밖에서도 지금 이 차 안에서 섹스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제 없이 신음하고, 교성을 지르며 흔들렸다.
봉긋하지도 않은 가슴을 쥐어짜 내듯 움켜쥐고 주무르며 기하는 이를 갈았다.
‘하……. 이 젖꼭지에 우유 방울이 맺히길 기대했는데.’
‘아…… 아파…….’
‘그랬다면 그것도 내 차지였을 거라고.’
짧은 시간 동안 혹사당한 유두 끝은 이미 발갛게 부어서 도톰하게 솟아 있었다. 그의 말대로 당장이라도 뭐가 맺힐 것처럼 끄트머리가 생경하게 돌출되어 있다. 가슴을 주무르는 무자비한 손길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얀색에 가깝던 피부는 손을 탄 대로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랐다.
‘내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아. 아……!’
‘그래도 너는 여전히 다른 새끼들 씨는 밸 수 있다는 거잖아.’
예상대로 기하는 화가 나 있었다. 괜찮다며 웃음 짓고 있었지만 내 고백에 속이 타들어 갔었으리라. 죽을 것 같이 힘든 와중에도 이런 식으로라도 화가 풀린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하는 속을 망가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허리를 움직였고 나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울면서 그것을 끝까지 받아 냈다. 내 차는 앞좌석이 넓게 빠진 모델이었지만 덩치 큰 성인 남성 둘이 얽혀 있기에는 지나치게 좁아 나는 그저 기하의 어깨에 손톱을 박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격렬하게 움직이며 내뱉는 숨, 때때로 토해진 욕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무력한 내 위로 쏟아졌다. 거친 행위만큼 짓씹는 말들도 그답지 않게 날것이었다.
기하가 어느 것에 화를 내고 있는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내가 제 씨를 배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난 것인지, 자신의 핏줄이 끊긴 것에 화가 난 것인지, 내 몸이 다른 남자의 씨는 밸 수 있음에 화가 난 것인지.
혹은 그 모든 것에 전부 화가 난 것인지.
뜨겁게 달궈진 기둥이 평소와 다른 각도로 안을 퍽퍽 짓누르며 정액을 쏟아 내더니 쑥 빠져나갔다. 힘줄이 불거져 있는 성기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희뿌연 점액질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내 구멍에서도 그가 싸 놓은 정액이 한도 없이 흘러나왔다. 두둑두둑, 쏟아 내며 가죽 시트 위에 하얀 웅덩이를 만든다. 기하는 무서운 눈으로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나는 겁에 질려 그런 기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기하의 손이 내 종아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쥐더니 천장을 향해 높게 추켜올렸다. 몸이 한계까지 접히며 구멍이 위로 더 띄워졌다. 끝난 게 아니라 조금 더 편하게 쑤셔 박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나는 서럽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그 뒤로 기하의 화가 풀렸느냐 묻는다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느 사이엔가 집의 침대 위로 옮겨져 있었고 몸에는 정신을 잃기 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정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얕은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비웃듯이 다리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정액이 흘러나오며 잠이 든 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을 굳이 증명해 보였다.
이후에 동생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이 몇 개 있기는 있었다.
‘이제 그럼 걸리는 것도 없을 텐데 내 것을 받아들일 때 조금 더 기쁜 표정을 지어요.’
삽입을 할 때, 혹은 사정을 할 때. 전처럼 진저리 치는 표정을 짓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싫어할 이유가 없으니 거북해하거나 밀어 내는 것에 기분 상해 했다.
또 어디서든 손을 대고 싶어 했다. 전에는 내 성향을 고려해서인지 되도록 침대 위에서만 정사를 치렀다면 이제는 자신이 원하는 어디에서든 몸을 열기를 요구하며 고집을 부렸다. 관계가 개선이 된 것인지 퇴보한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기하는 목 안쪽을 울리며 기분 좋게 그릉거렸다. 내벽에 대고 꿀렁거리던 움직임도 멈췄다. 방금까지 그의 허벅지 위에서 흔들렸던 나는 힘없이 기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헐떡였다. 좋았어요……? 하고 묻는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어 뺨을 문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번, 받아 내기만 하는 것도 진이 빠질까. 어지러운 것이 쉽게 가시지 않아 기하의 어깨에 아예 머리를 기대 버렸다. 코에 와 닿는 청결하게 세탁된 옷감 아래로 기하의 달콤한 체 향이 은근하게 올라왔다.
얼굴을 마주 보고, 내 무게로 너의 것을 품는 이 자세를 나는 제일 싫어했다. 쾌락에 휩싸이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고 기하의 성기가 워낙 긴 탓에 박히면 자력으로는 도저히 뽑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기하는 그래서 이 자세를 제일 좋아하는 듯했다.
싫어하는데도 네 고집에 맞춰 주는 것은 네가 정말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표정을 감추는 것을 포기하면 네가 느끼는 표정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정결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쾌락에 젖어 어쩔 도리 없이 달뜨는 광경은 절경이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였다. 섹스를 하며 내가 허리를 움직여 호응하면 기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정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뒤를 쑤시고 들어오는 성기보다도 그런 네 얼굴에 나는 더 흥분하고 발정했다.
땀이 살짝 배어 나온 아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기하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쾌락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지지하고 있는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여전히 연결된 채로 우리는 다시 입을 맞췄다. 한 번 사정했다고 수그러드는 일 없는 기하의 성기 덕분에 배 속은 정액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마개를 채운 듯 액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욕실로…… 데려다줘.”
겨우 한 번으로 너는 만족했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 다시 쑤셔 박히느니 차라리 욕실에 가는 게 나았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내가 직접 골라 깔아 둔 러그가 온통 체액 범벅이 될 게 뻔했다. 아직도 입은 채인 니트를 들어 올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유두를 지분거리던 기하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날 카섹스를 한 뒤 내 차의 시트는 전부 교체해야 했다. 시트를 가는 것 자체에는 불만이 없었다. 정비공들이 우리가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봐야 했던 게 문제였지.
“그럼 이대로 욕실로 갈 거니까 목에 팔을 감아요.”
그 말이 끝나고 내가 미처 팔을 감기도 전에 몸이 번쩍 들렸다. 여전히 삽입되어 있던 성기가 요동치며 겉으로 드러나도록 내 아랫배를 안에서 불쑥 밀어 올렸다.
* * *
씻으면서 시작한 두 번째 정사가 끝났다. 욕조 끝을 붙잡고 있는 손이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떨렸다. 방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기하는 닿는 모든 부분에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등 뒤에서 후희를 즐겼다. 물속에서 하게 되면 금방 흥분하고 그런 만큼 체력도 빨리 빠져 버린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욕실에서 하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내가 의식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고백 후 변했던 또 하나는 드디어 그가 내 등에 난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보상 같은 개념으로 정사 후에 조금씩만. 도망가지 않겠다는 말을 믿어 주는 듯해서 나는 그가 상처를 핥을 때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충족감을 느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흉하게 돌출된 날개 뼈 위를 아주 살짝 핥고 지나간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잠들 것 같아요?”
몽롱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물었다. 욕실이라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가 더 가라앉아 웅웅거렸다.
“조금 피곤해…….”
“그럼 자요.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세 번째를 암시하는 그 말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솔직히 내 쪽에서 CCTV를 달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절한 후에 대체 내 몸에 기하가 무슨 짓을 하길래 아침에 거울을 확인할 때마다 기겁을 하게 되는지 알 턱이 없어서.
“그냥 같이 자러 가면 안 될까?”
움찔, 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더 용적을 늘렸다. 구멍 안에서 커져 가는 성기에 기가 막힌 심정이 되어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대체 그 말의 어디가 흥분할 거리가 있었던 거야?”
커다란 손이 내 가슴을 끌어 올려 자세를 바로잡아 준다.
“‘같이’나 ‘자러 가자’에서요?”
“진짜 말도 안 돼…….”
“금방 끝낼 테니 조금만 참아 볼래요?”
그러곤 내 턱을 붙잡더니 자기 쪽으로 돌린다. 목이 뒤로 꺾이고 입술을 겹쳤다. 진이 다 빠져 호응할 기력도 없어 가만히 혀를 움직이는 것을 받고만 있었다. 물이 천천히, 얕은 파동을 일으켰다. 기하는 기둥을 뽑지 않고 완전히 구멍에 박은 채로 앞뒤로 느릿하게 흔들기만 했다. 잠들게끔 부추기는 부드러운 몸놀림이었다. 그런 작은 움직임으로도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안은 경련하며 그의 것을 조였다.
“음…… 이렇게 잘 먹으면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데.”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호응은커녕 방금도 잠깐 기절했다가 깬 마당이다. 네가……. 항의하려고 입술을 연 순간 또 정신이 끊겼다. 기하가 뭐라 말하는 것이 계속 뚝뚝 끊겨서 머릿속에 쌓이고 있었다.
“안 되겠네.”
내 상태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웃는다. 그냥 빠르게 끝낼게요, 중얼거린다 싶더니 곧이어 확 잡아 뽑혔던 기둥이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아래에 쑤셔 박혔다.
“아, 아……!”
고문을 당하듯 온몸이 수축했다. 등 뒤에서 기하의 신음 소리가 쏟아졌다. 귓가에 바로 직격하는 소리의 자극에 내 몸은 또 반응했고 기하의 신음이 더 깊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정말 자고 싶은 게 맞아?”
자신의 것을 단단하게 물고 있는 통에 그가 양껏 움직이지 못하고 항의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내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등에 두둑두둑 핏줄이 돋아난다. 나는 반은 잠들어 있고 반은 억지로 깨어 있는 상태였다. 욕조 속으로 미끄러지지 않는 것은 온전히 나를 지탱한 그의 팔과 삽입하고 있는 기둥 덕분이다.
“아, 아파…….”
“하아……, 나도 그래.”
체중이 실려 이보다 더 깊게 삽입할 수 없게끔 꽂혀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빼고 싶어 바르작거렸다. 기하는 얕게 쳐 대면서 벗어나려는 내 허리를 단단하게 잡았다. 수면을 달리는 파동이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했다. 아, 아, 아윽. 난잡하게 울리는 신음을 부끄러워할 정신도 없었다. 나보다 기하가 더 신음했다. 물어뜯어 놓은 목덜미에 콧대를 비비면서 불편한 자세로도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음낭 위에 앉은 자세로 올려치는 힘에 의해 몸이 계속 튀어 올랐다. 평소라면 목이라도 끌어안아 자세를 유지했을 텐데 오늘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서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지탱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몸을 꿰고 있는 그의 성기뿐. 그 덕에 온 신경이 다 삽입한 지점으로 쏠려 버렸다.
“너무 조이지…….”
말을 잇다가 큭, 하고 그가 숨을 들이켰다. 앉아 있는 허벅지가 돌처럼 굳었다. 헐떡거리는 숨이 소름 끼친 등줄기로 쏟아진다.
“아, 아!”
구멍을 망가뜨릴 기세로 몰아닥치는 것에 몸이 쓰러지기 직전으로 기울었다가 뚫리는 움직임에 맞춰 제자리로 돌아온다. 인형처럼 앞뒤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좀 전까지 다정하게 굴었던 것이 거짓말인 양 난폭하다. 내가 쓰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물속으로 처박힐 것 같아 간신히 그의 허벅지를 눌러 지탱했다. 철퍽, 철퍽, 퍽! 탁해진 수면이 움직임을 담아내지 못하고 욕조 밖으로 쏟아졌다. 나도 어떻게든 벗어나려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 봤자 버둥거리는 게 다였다.
기하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 이마를 감싸고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 아…… 아!”
“하아…… 키스, 해요.”
“흐윽…….”
“키스해, 혀, 내밀어 줘.”
호흡하는 것도 힘들어 당장 죽을 거 같은데, 턱이 붙잡힌 그대로 머리를 저었다. 기하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가슴을 들썩거리며 거칠게 숨을 쉬면서도 고집스레 고개를 꺾었다. 공기를 흡입하려 벌렸던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놀라 반사적으로 그의 혀를 세게 깨물어 버렸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으응, 응, 읏, 하아. 두 사람 분의 신음이 입 안에서 뭉그러졌다. 혀의 움직임에 맞춰 철썩철썩 아래를 쳐 댔다. 기분 좋은 부분만을 집요하게 짓누른다.
목이 졸리면 흥분하는 페티시가 있다는 것을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목 같은 게 졸리는데 흥분할 수가 있냐며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많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극도로 내몰린 호흡으로 목이 졸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흥분하고 있었다.
그 차 안에서도, 나는 구속구를 입은 모양새로 짓눌려 두 사람 몫의 호흡으로 가득 차 질식에 가까운 상태였는데도 분명히 흥분했었다. 기하가 내 몸 안에 몇 번이고 사출하는 동안 나 역시 기하의 셔츠 위에 확실하게 정액을 뱉어 냈다. 그걸 기하가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까닥까닥, 정신이 넘어갈 듯 말 듯 한데 하반신으로 맹렬하게 피가 쏠린다. 누가 성기를 붙잡고 강제로 쭈욱 늘리고 있는 것처럼 아프기까지 한 발기였다. 빨갛게 익어 물속에서 기다랗게 기둥을 곧추세웠다.
“윽, 흐윽, 헉…….”
눈을 뒤집기 직전에 기하가 턱을 놓아주었다. 끅, 끅, 산소를 끌어모으는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때문에 그마저도 호흡하기 쉽지 않아 심장이 터질 듯 할딱거렸다.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전신이 의지를 벗어나 발작하고 있었다. 뭐 하나 원하는 대로 기능하지 않고 온 신경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몸 깊숙한 곳에서 속살을 두드리는 물줄기의 감각이 느껴졌다. 내 몸이 이번에는 목적성을 가지고 수축했다.
“큭…….”
고통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그가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조이는 대로 몇 차례나 사출한다.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웅크려 내 것을 잡았다. 손바닥으로 감싸자마자 그에게 붙들렸다.
“안 돼. 싸지 마.”
“아…… 아!”
“하아, 내 입 안에 해.”
다소 거칠게 기둥이 빠져나가고 몸이 휙 들리더니 욕조 옆의 테이블에 누여졌다. 나는 거의 넋이 나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끌어 써야 했다.
기하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늘어졌던 몸이 전기 맞은 것처럼 파드득 뛰었다. 온수에 잠겼을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이 하반신을 덮는다. 사방에서 조이는 점막의 감촉에 몇 번 성기가 꿈틀거렸던 것 같다. 흡입하는 기하의 입 안에 오래도록 배출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비명을 질렀던 듯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 듯도 하다. 진짜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 좋아서, 숨을 못 쉬겠어서, 좋아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좋아서 좋아서 좋아서…….
기하가 내 몸을 가지고 무얼 하든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전혀 상관없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