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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37/47)

고백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이 조심스럽게 풀리는 움직임에 눈을 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방 안은 사물 식별이 되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커튼 사이로 반 뼘쯤 보이는 창문 밖은 해가 뜰 기미 없이 그저 새카맣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닿아 있던 가슴도 슬그머니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숨을 흩트리며 그의 체온을 찾는 것처럼 몸을 뒤척거렸다. 내 반응에 그의 움직임이 멈추고 따뜻한 손이 더 자라는 듯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였다면 이 손길에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 엊그제부터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나는 점점 더 정신이 맑아지기만 했다.

그는 드러난 내 어깨에 이불을 끌어다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 옆에 가볍게 키스하고 천천히 일어난다. 기하의 기상 패턴이었다.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발소리를 죽인 아이가 침실을 나가는 기척 끝에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정사를 치르지 않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 시간쯤에 깨어나는 듯했다.

어젯밤도, 기하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 드물게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뻗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부가 되기로 했던 날 이후로 과장 좀 보태서 눈만 마주쳐도 내게 손대려 했던 동생이었기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라도 누님이 뭐라도 언질한 것이 아닐까. 눈치 빠른 아이가 뭐라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겁에 질려 입술을 다문 내 얼굴을 끌어당기며 기하가 사려 깊게 말했다.

‘요 며칠 계속 잠을 설치셨잖아요.’

그게 뭐가 어때서.

‘음…… 일단 잠부터 푹 자고 나서.’

너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었잖아.

가라앉지 않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나는 밤을 꼬박 지새워야 했다.

잠시 후 기하가 현관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기하의 넓은 등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기온 탓에 등 뒤로 하얗게 입김이 흩어지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는 짧게 기지개를 켜며 스트레칭을 하더니 정원의 끝에서 천천히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해안선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전에 한번 같이 아침 운동을 해 보자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기하는 매우 기뻐했지만 내가 함께 하기엔 힘들 것 같다고 걱정했고, 그 걱정은 운동을 따라 나간 첫날 바로 현실이 됐었다. 저혈압인 나는 기하를 따라 일어나는 것도 고역이었던 것이다.

며칠간 계속 잠을 자지 못해 새빨개진 눈을 비볐다. 기하가 도착하기 전에 뻑뻑한 눈에 인공 눈물이라도 집어넣어야 했다. 아니면 오늘 아침에도 심각한 표정을 하는 기하에게 온갖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테니.

같이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걱정을 끼치고 걱정하고, 신경 쓰이고 신경 써야 하고.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혼자 살던 그때에 비하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만큼 지금의 생활은 행복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행복을 망쳐서는 안 된다 되뇌며 서랍에서 안약을 꺼내 눈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리고 커튼이 반 뼘 열려 있는 창에 당겨 앉아 기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정확히 50분이 지나고 해안선 쪽에서 그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항상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같은 시간이다.

기하는 매번 전속력으로 집 근처까지 뛰다가 언덕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정원 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다. 그러곤 나는 적어도 단 한 번도 우편이 온 것을 본 적 없는 우편함을 가볍게 두드린 뒤 입구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편함이 장식용이라고 인식한 나와는 다른 반응에, 혹시 기하가 기다리고 있는 편지라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이의 몸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게 보일 때쯤 나는 슬슬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내가 눕는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기하는 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침실 문을 열고 내가 잠들어 있는지 확인을 했다. 땀이 난 상태로는 절대로 다가오지 않고 그렇게 눈으로만 바라보다 씻으러 간다. 그리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한 시간 뒤, 커피 향기와 함께 나를 깨우러 침대 위를 파고들 것이다.

그렇게 나의 낙원의 하루가 시작된다.

“어젯밤도 잠을 못 잤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김태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나는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티가 나?”

“뭐 티가 나는 것도 나는 거지만 오늘은 다른 놈이 운전했던데?”

“아아.”

나 대신 운전석에 앉았던 자가 돌려준 차 키를 매만졌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나를 뒤에서 팔짱 끼고 바라보던 기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목에 넥타이를 매 주면서 오늘은 운전사를 불렀다고 말했다. ‘잠을 못 잔 상태로 운전은 위험하니까.’라는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덧붙이면서.

내가 내내 자지 못한 것을 알고 있구나. 당황해서 넥타이의 매듭을 지고 있는 기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기하의 눈동자는 따스했지만 그 역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피로가 떠올라 있었다. 애초에 너는 내가 잠들어야만 잠든다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뒤늦게 무거운 머리 한쪽을 때렸다.

‘그럼, 이따 저녁때 봬요.’

그렇게 인사하며 이마에 입술을 누르는 아이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도 잠을 못 잤나?”

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탑승하는 사이로 커다란 덩치 하나가 끼어들며 김태영과 똑같은 것을 물었다. 졸지에 새치기를 당하고 뒤로 밀려난 태영이 질색하는 표정을 하며 내뱉었다.

“그쪽이 왜 이 엘리베이터를 탑니까?”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눈앞에 뭔가가 들이밀어졌다. 장운은 조그만 피로 회복제 병을 흔들며 내가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겨우 출근 두 번째 날일 텐데 장운은 벌써 복장 상태가 굉장했다. 다른 시큐리티들은 칼같이 각을 세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꽉 잠근 검은 제복 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는 소매도 반이나 걷어 올리고 앞 단추도 풀어 헤쳐 불량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기막힌 적응력이었다.

“이 망할 직장은 병가 개념이 없나? 어차피 이 연구소도 TV 네 걸 텐데 몸 안 좋으면 그냥 나오지 말지 그래.”

“아픈 건 아니라서요.”

“어쨌든. 쉬고 싶으면 맘대로 째도 아무도 TV한테 뭐라고 못 하잖아.”

엘리베이터에 몇 명 안 타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나마 타고 있는 두어 명이 날것의 말투에 괜히 움츠러들어 장운을 힐끔거렸다.

“웃기는 양반이네. 이건 연구 층 엘리베이턴데 그쪽이 왜 탔냐고요.”

“올라가는 건 똑같은데 뭘 타든 무슨 상관.”

“허 참, 근무 층 영역이 다르잖아요. 영역이.”

“내려서 몇 초만 걸으면 되는데 까탈스럽긴. 자원을 아껴야지. 땅 파면 전기가 나오나?”

그 뒤로도 둘은 근무 층에 도착하기까지 입씨름을 해 댔다.

저번에 심제준의 장례식장에서는 꽤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왜 서로 으르렁거리지. 의아해하며 장운이 준 피로 회복제 뚜껑을 돌려 따고 들이켰다.

―아, 그거? 하하, 나 왜 그러는지 알아.

“알아요? 왜들 그러는데요?”

점심시간에 누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잘됐다 싶어 아침 내내 신경전을 벌이던 김태영과 장운의 얘기를 했더니 사악하게 클클거린다.

―자기가 가주님 손에 끌려서 가 버린 다음 우리끼리 2차 갔었거든. 거기서 대작했다가 김태영이 장운 씨한테 완전 깨졌어. 그 뒤로 좀 그러더라?

“그게 뭐예요. 바보같이.”

라고 말했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기하 한번 이겨 보겠다고 술을 사 들고 갔던 전적이 있었지 참…….

―신경 쓸 거 없어. 김태영 원래 자기 권속한테는 박하잖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새삼스럽게.

“그래도 김태영은 제준이랑은 친한 거 같던데요.”

―아, 자기 동창? 그 친구는 성격 참 좋은 거 같더라.

심제준은 붙임성이 좋아서 실험체로 자원해 놓고도 잘 지내는 듯했다. 훈련의 초기 단계임에도 위험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나와도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김태영이나 박종오, 장운한테는 평가가 박한 누님도 심제준에게만은 너그러웠다.

―얼마나 싹싹하게 구는지 실험 시설 사람들을 완전히 구워삶았더라고. 전번에는 나한테도 묻지도 않고 누님거리더라니까? 기현이한테 누님이면 자기한테도 누님이라나 뭐라나.

“하하……. 걔 원래 그런 스타일이에요.”

―자기 옛날 얘기 들려준다고 꼬셔서 벌써 두 번이나 만났어. 근데 자기가 심제준 때린 적도 있다며?

“아니, 그걸 그새 말했어요?”

―실험 시설 사람들한테도 다 말했을걸? 거의 무용담 취급이던데. 김태영도 들었을 거야 아마.

“와…….”

김태영도 알 정도면 기하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으려나? 이경헌이 보호자로 학교에 불려 갔었으니 기하도 어차피 알고 있었으려나?

아침에 넥타이를 매 주며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를 떠올렸다. 내가 한동안 잠을 못 자는 것을 알고 있고 그도 따라 잠을 설쳤는데도 추궁하지 않았다. 기하의 기다림이 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어 누님, 혹시…….”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을 뿐인데 박현진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음 아니, 그 이후로 어떤 일도 없었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어.

암호 같은 짧은 대화가 끝나고 우리 사이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박현진 쪽에서 먼저 물음을 던졌다.

―자기 그거…… 가주께 언제쯤 고백할 셈이야?

“…….”

―주제넘은 참견인 건 알지만 그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말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비밀이 비밀이다 보니.

따진다기보다는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오늘의 전화는 이것을 묻기 위해서였을 거다.

―미리 찔려서 하는 말인데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이고 다른 뜻은 없어. 진짜야.

내 침묵이 길어지자 다급하게 덧붙인다.

“알아요.”

나는 서툰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누님. 신경 쓰게 만들어 미안하고요.”

―고맙기는. 내가 괜히 들쑤신 거 아닌가 몰라. 며칠째 잠도 못 자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작게 한숨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예민하게 반응할 게 뻔했는데 내가 너무 앞뒤 생각 없이 저질렀어. 완전히 전용의 실격이야.

“뭐……. 누구한테 죽어도 말 못 하던 걸 누님이 눈치채 준 덕분에 같은 배에 타게 됐는데요. 같이 고민해 줄 사람이 생겨서 짐을 던 기분이라고 말하면 내가 너무한가요?”

―뭐야아, 자기 못됐어.

그리 말하고 박현진도 큭큭거렸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다운 자긍심 넘치는 말투로 받아친다.

―하여튼 상냥하다니까. 애써 나도 위로해 줄 필요 없어. 실수했다는 건 내가 더 잘 아니까.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시간 내서 자기한테 들리라는 염려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잠을 못 자고 있는 건 또 언제 들었지. 김태영인가 아니면 장운인가. 그녀의 말은 전부 옳았다. 말해야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말해야 하는 비밀이었다. 나를 위해서도, 그 아일 위해서도. 가슴이 답답해져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책상 위에 상체를 길게 엎드렸다.

* * *

비몽사몽한 상태로 어떻게 마쳤는지 모르게 일을 끝내고는 집으로 가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도착한 문이 열리고 안에서 한 무리의 연구원들이 쏟아졌다. 신나게 얘기하던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 입을 딱 다물었다. 저런 반응을 보일 때는 뻔하다.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으니.

“박사님.”

“이제 퇴근하시나요?”

어차피 뒤에서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은 없었기에 맥없이 웃었다.

“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몇 번 신세를 졌었던 연구원이 나를 보며 뺨을 붉히고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도 미소를 돌려주었다. 주차장에 내려오고 나서야 그들이 웃던 이유를 알았다. 반질거리는 차체 옆에 검은 코트를 입은 장신의 인영이 서 있다. 수행원도 보내고 차도 딸려 보냈는지 혼자였다. 뒷모습만 보고도 축 처져 있던 기분이 고양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곁으로 달려갔다.

“기하야.”

내 목소리를 확인한 기하가 뒤를 돌아보고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의 품에 뛰어들어 꽉 안겼다.

“언제 왔어? 미리 연락했음 빨리 나왔을 텐데 왜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 안 됐어요. 외출한 김에 형님과 함께 돌아가려고요.”

“그래? 잘됐네. 그럼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운전석을 열고 들어가려는 내게 불쑥 손바닥을 내민다. 영문을 모르고 그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렸더니 기하가 하하 웃으면서 손을 꼭 잡았다.

“키 달라는 뜻이었는데.”

“또? 지금은 괜찮…….”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이 퇴근 시간에 네가? 그의 매너에 감사하는 것보다 정체될 퇴근길이 걱정이었다. 그래도 걱정해서 나를 마중 나왔다는 게 꽤 들뜨게 만들어 얌전히 키를 넘기고 조수석에 앉았다.

“조금 주무시고 계세요.”

그는 내 안전벨트를 매 주고 머리를 토닥거렸다.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묻고 고맙다고 웅얼거리자마자 나는 며칠 잠을 설친 것이 거짓말처럼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얼마나 푹 잠들었다 깼는지 둔중했던 머리가 가벼웠다. 차는 운전자 없이 홀로 공회전 중이었다. 몸을 덮고 있던 검은 코트가 내 움직임에 미끄러져 내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에 걸리는 것 없이 한없이 펼쳐진 바닷가 옆. 방파제 위에서 기하의 형용을 찾았다. 그는 꼿꼿하게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대의 빛이 그가 보는 방향을 비춰 마치 기하가 빛을 뿜어내고 있는 듯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여러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는 한없이 신에 가까운 인간, 신보다 더 신 같은 존재였다. 나는 지금껏 네가 자세를 무너뜨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지금 저 모습대로 오연하게 서서 모든 것을 조용히 관조할 뿐이다. 너는 이렇듯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하는, 지고한 존재로 태어났어야 했다. 그래야 어울렸다. 실수한 게 아니고서야 결코 내 제물 따위로 그칠 그릇이 아니었다.

안전벨트를 풀어 내고 차 밖으로 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인기척을 느낀 그가 뒤를 돌아본다.

“차 안에 계시지 왜 나오셨어요. 밖은 추운데요.”

차에서 뿜어지는 전조등이 그의 슈트 입은 몸매를 조명하고 있다. 몸에 피트 되게 입은 탓에 평소보다 강인하고 날렵해 보였다. 신이었을 적의 기억을 되찾고 나는 통탄했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기대한 그 어떤 모습보다도 장성한 너는 전혼했다. 그 기다림과 짊어지게 된 죄들에 후회가 없을 아름다움이었다.

코트를 돌려주려 내밀자 그는 받는 대신 내 뺨을 그러쥐고 끌어당겼다.

“이거 봐. 벌써 차가워졌잖아.”

전조등을 등에 지고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가 밝게 빛나던 기하의 신체를 덮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입술을 겹쳤다. 나를 나무라 놓고는 자신의 입술이야말로 차갑다. 표면을 문질러 입술이 열리길 재촉하고 길게 핥아 내렸다. 차가운 해풍이 이따금 새어 나가는 하얀 숨을 삼키고 흩어졌다. 따뜻한 게 좋아 내 쪽에서 더 매달렸다. 손이 비어 있지 않아 몸으로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하지만 금세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기하는 자신의 코트를 가져가더니 내 어깨에 도로 둘러주었다. 추웠던 몸이 그 무게만큼 포근해졌다.

“조심하셔야지. 감기 걸려요.”

“너는 아예 외투를 안 입고 있잖아.”

“저야 늘 열이 올라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내 손을 꽉 잡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조끼와 셔츠 위로도 심장의 울림과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등대에 올라가 볼래요?”

그러잖아도 안의 모습이 궁금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아이의 걱정에 불을 지필까 봐 이런 곳에 와 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에 조금 설렜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다. 이따금 파도가 침범할 듯 넘실거리는 거대한 방파제는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길목 같았다. 기하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뒷걸음질 쳤을, 차갑고 검은 길에 발을 올렸다.

멀리서 봤을 땐 가까워 보였는데 예상보다 꽤 걸어야 등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배를 인도하려 열린 한 줄기 길은 걸어오며 느꼈던 불안한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문득 등대가 기하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말을 하면 너는 웃겠지만.

등대 안은 생각보다 밝고 따뜻하며 고요했다. 바깥과 같은 색으로 안쪽도 하얗게 칠해져 공간감 없이 수직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빛을 쏟아 내는 광원의 위에 슬쩍 손바닥을 올려 보았다. 겨우 이 정도의 방해로는 빛에 조금의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감탄하며 그것이 향하는 방향을 등지고 바라보았다. 방대하게 펼쳐진 수평선은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경계가 사라져 있었다. 하늘에 발을 담그고 바다에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빛도 위아래의 구분을 상실하고 흘러갔다. 지구가 아닌 우주의 공간이다. 실체가 있는 것은 오직, 광원이 비추는 빛의 길뿐이었다.

“여기가 시작점이었어요.”

“시작점?”

나는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반대로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광원을 등진 기하의 얼굴이 빛과 어둠의 두 갈래로 쪼개졌다. 한쪽은 눈이 멀도록 강렬한데, 다른 한쪽은 시간도 멈춘 듯 정지되어 있다.

“이 섬을 구축하며 제일 먼저 이곳부터 만들었습니다. 여길 완성한 다음 하나씩 필요한 시설들을 세웠죠. 그래서 여기가 시작점이고, 심장부입니다.”

“여기가…….”

“그 집 안에서.”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는 지금은 듣기만 해야 하는 타이밍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형님께서 오실 날만 기다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했어요. 어린아이가 대통령이 될 거야, 슈퍼맨이 될 거야 같이 말하는 식의 허황된 망상이었죠. 망상에 불과했지만 퍽 즐거웠습니다. 내 망상 속의 형님은 내가 만들어 낸 세계의 주인이고 동반자였으니까.”

“…….”

“어릴 적 형님께서 해 주셨던 약속들을 상기하면서 그것에 살을 붙여 나갔습니다. 단둘이서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세우고 형님이 좋아하는 것들과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추가했어요. 하지만 보고 산 게 그거뿐이라 상상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전부 다 필요하겠더군요. 같이 거닐던 거리도, 연구소도, 나는 가 볼 수 없어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보아야 했던 것들. 욕심내며 만들고자 하니 통째로 도시를 옮겨다 놓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죠. 멀쩡한 터전을 버리고 똑같은 것을 연고지도 아닌 타국의 섬에 구축하겠다니. 아직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뇌부들은 당연히 반대했었습니다.”

내가 수뇌부였어도 그러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들어도 믿기지 않을 규모의 계획이었다. 이뤄 놓은 것을 눈앞에 두고도 이뤄진 게 믿기지 않는.

“그러다 역에서의 사건이 터지고……. 형님이 김시연과 탈출하면서 수뇌부들도 형님께서 실상 액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요. 그전까지는 현혹을 하셨어도 집안사람들 위주로 벌어졌던 참극이라 덮을 수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그 정도 규모로 휘말린 건 제 선에서 처리가 안 되더군요.”

“…….”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참극 덕분에 제 계획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형님이 살아 있는 한 언제든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게 분명했으니까.”

기하가 손을 올려 내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나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

“형님께선 도망치려고 벌인 일이었겠지만, 그럴수록 당신을 붙잡아야 할 명분이 세워졌습니다. 다 같이 죽겠다는 게 아니고선 그들도 내 짝을 감히 해치지 못했으니까.”

“네가 죄를 지을 필요는 없었어……. 나는……. 네가 그러길 바라며 네 형이 됐던 게 아니야.”

내가 날개를 달아 준, 그리고 내 날개를 꺾어 버린 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 환생해 놓고서 복수는커녕 자신의 힘에 겁이 나 도망만 가려고 하셨죠. 내 여우는 이리도 겁쟁이라서 내가 대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 밤중에 차를 몰고 등대로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무기한의 시간을 달라 요청했지만 그는 아는 것이다. 내가 고백을 뱉을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고뇌하며 썩어 들어갈 것이라는 걸.

차근차근 자신의 죄를 꺼내 드는 것은 겁쟁이인 나를 배려해서 고백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저는 형님께서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차마 다 고백할 수 없을 만큼의 피를 흘렸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섬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하다 여겨지는 자들은 닥치는 대로 복속시켰고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간들을 장기 말로, 부품으로 취급하며 저를 살리기 위해 넘겨주신 능력을 제멋대로 사의를 위해 휘두르며 죄를 쌓아 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기하야.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만 얘기해도 괜찮아.”

“형님께서 안고 계신 고백이 어떤 것이든 제 죄가 훨씬 더 클 겁니다.”

“아니야. 장담하지 마.”

그렇게 쉽게 장담하지 말라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기하는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꺼칠해진 눈가를 매만져 주었다.

“며칠째 조각 잠조차도 못 주무시더군요.”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호소하고 싶은 것을 참아 냈다. 죄를 품은 자에게 상냥함은 독이었다. 너는 늘 비난받는 것이 차라리 낫게끔 만들었다.

“그토록 담아 두고 있는 것이 힘든 말이라면 여기서 털어 내세요. 어떤 것이든 저는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지금 여기에 형님과 마주 보고 서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엇이든.”

그 관대한 말은 둔중하게 울리는 머리 한구석을 달콤하게 파고들었다. 너의 그 너그러운 언사에 내가 지은 죄가 포함되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털어놓고 편해지라는 속삭임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속지 말고 입을 다물라는 속삭임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졸렬한 마음을 네가 모를 리가 없었다. 너는 언제나 한 걸음 물러난 내 앞에 두 걸음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차마 털어 낼 수도 없다면……. 그냥 숨겨 둬도 됩니다. 더 이상 묻지 않을 거고 궁금해하지도 않겠습니다.”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내 머릿속을 파헤치듯 굴던 네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는 내게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정말입니다. 이제 과거를 들추며 현재의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미래에 당신이 함께하기만 한다면, 과거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어요. 그 과거가 형님을 괴롭히고 있다면 그냥 버려 버리시면 됩니다. 함께 살아갈 미래에만 집중해요, 우리.”

함께 살아갈 미래.

그 말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숨이 막혀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네가 내린 관대함이 결코 입을 다물고 살 수 없는 명분을 부여해 버렸다. 내 죄는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노래하는 우리의 미래를 훼손해 버린 죄였다. 알고 있던 죄의 무게였는데 그마저도 과소평가였다. 아마 나는 기하가 나를 용서한다 해도 스스로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

내 뺨을 어루만지는 손을 떼어 냈다.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 해야 할 거 같아. 아니, 지금밖에 기회가 없을 거 같아.”

“그렇, 습니까.”

그는 담백하게 수긍하고 내 말을 기다렸다. 꾸미는 것을 하지 못하는 나는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다. 어떻게 해야 그가 덜 상처받고 덜 고통스러워할지 학습하지 못했다. 자신을 보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남을 돌보는 법을 알 턱이 없었다.

너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며 길게 첫음절을 떼었다.

“너는 내가 복수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야.”

“…….”

“내 복수는 이미 내가 환생하기 전에 완성됐었어.”

“…….”

“너를 잃고 저주를 걸었었어. 이 집안의…… 대를 끊어 놓겠다고 결심했었지. 내 종족들을 멸족시킨 핏줄을 나도 말려 버리겠다고.”

최대한 담담한 척 얘기했지만 그의 소매를 붙드는 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상함을 느낀 기하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는 그도 알고 있는 사료의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얘기가 사료에도 담기지 않았던 궁극적인 신의 복수.

“너를 마지막으로…… 이 집안의 직계에 더 이상의 후손은 나오지 않아. 그게 내 방식의 복수였어.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다음 말은 차마 내 입으로 할 수가 없었다. 공회전하며 제자리를 맴도는 차체처럼 ‘그래서’에서 몇 차례나 말이 헛돌았다. 죽을 것같이 숨이 막혀 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숨을 멈추고 그저 파랗게 질려서 기하의 목 부근만 바라보았다.

뒷말이 끊겼어도 기하도 무슨 뜻이었는지 알아차리고 얼어붙었다. 둘 사이에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가 어떤 말이든 하길 바랐고, 또한 어떤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오랜 시간 끝에 기하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그래서’의 다음 말이.

“그래서, 그렇게나 정을 부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겁니까?”

대답할 수 없어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소매를 힘없이 놓았다. 이번만은 정말로 의외였는지 기하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래…….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결벽적인 형님이 제가 매번 안에 내는 것을 용납하셨으니까요. 아무리 내가 밀어붙인 거라고 해도 성정상 이리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는데 하고.”

“…….”

“아무리 우리가 마음이 통했다고 해도 그 부분은 다투겠구나 싶었는데 그래서였군요.”

“미안……해.”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눈에 너무 힘을 주어선지는 알 수 없었다. 겨우 토해진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스스로가 너무 하찮고 끔찍해서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저지른 죄. 정당하다 여겼던 복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내 복수는 성공했기에, 실패했다. 무슨 말로 사죄를 해야 할까. 아니 사죄가 가당키나 할까. 그 옛날에도 지금에도 나는 늘 네게 죄만 저지르고 있는데.

뚫어져라 보고 있는 기하의 구두코가 흔들렸다. 흔들리며 꼭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몸이 끌어당겨졌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는 결국 나를 또 용서한 것이다. 용서받을 자격 없는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솔직히……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지간히도 꽃밭에서 뒹굴었나 보다라는, 이제 볼 수 없어진 자의 비아냥이 들리는 듯했다. 비난받아 마땅한 상황에도 겨우 실망했다는 단어 하나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보면 그자의 평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기하는 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한숨을 쉬다 더 바짝 끌어안았다.

“어차피 내게 아이란 당신을 붙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미안해…….”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때는 그저 너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너를 잃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오직 그 생각만 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쉬, 괜찮아요. 그는 사과를 쏟아 내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달랬다.

“아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건 형님뿐이니까, 아이 따위 없어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

“당신이 내 아이가 되어 주면 돼요. 내가 내 아이에게 해 주고 싶었던 것들을, 형님께 하게 해 주세요. 그 아이를 키우면서 누려야 했을 행복을 형님이 주시면 됩니다. 나 역시 당신의 아이가 될 테니.”

나는 그가 달래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울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온몸의 물을 다 쏟아 버릴 기세로. 정작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그런 나를 품에 안고 진정될 때까지 계속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이제 좀 진정되셨나요?”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보고 기하가 웃으며 물었다. 미안하단 말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자기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 말에 나는 또 미안하다고 말해 버렸다.

우리는 손을 잡고 아주 천천히 방파제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서늘한 해풍이 불어와 열이 오른 눈가를 식혔다. 미래가 잘려 나갔다는 선고를 받아 놓고도 기하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무슨 말이든 받아들이고 용서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주었다. 자꾸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다 탈진하겠어요.”

내가 자는 동안 테이크아웃을 했었는지 뒷좌석에서 커피를 꺼내 손에 쥐어 준다. 진이 빠져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억지로 빨아들였다. 차 안에 마주 앉아 한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사과를 억눌렀다. 하지만 사과 외의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차창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기하의 옆얼굴만 훔쳐보았다.

한결같이 내게 베풀어졌던 그의 시선도 오늘은 바다를 향해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뒤늦게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뻗어 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감정이 일렁이는 눈을 들여다볼 수도 없어 초조하게 주먹만 쥐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할 때 훔쳐보지 않은 척 고개를 푹 숙였다. 기하의 손이 조심스레 내 목덜미를 매만지며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았다.

“드디어 멈췄네요.”

“미…….”

반사적으로 나오는 사과를 갈무리했다.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 형님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건 처음 알았습니다.”

기하는 허리를 내 쪽으로 기울이고 입술을 가져왔다. 눈물에 잠긴 것은 내 뺨이었을 텐데 너의 입술이 더 습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위로가 목적이었는지 입술만을 몇 번 미끄러뜨리더니 금세 떨어졌다. 아까도 그렇고 이번에도. 어젯밤도 엊그제도 너답지 않게 스킨십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었다. 아쉬움보다 침전하고 있던 불안감이 다시 치솟았다. 이런 걸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환멸 나면서도 초조해져 견딜 수 없어졌다. 너는 괜찮다고 해 놓고 사실 전혀 괜찮지 않은 거 아닐까.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내 손가락은 안전벨트를 매 주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하의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형님……?”

자신의 안전벨트를 매려던 기하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왜 그러세요?”

말이 없자 다시 자세를 내 쪽으로 향하고 재차 물어 왔다. 필시 이건,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일 거다. 나는 팽글팽글거리는 시야를 부여잡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계속 키스해 줘.”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숨소리에 섞여 버려도 듣지 못했을 리 없는 가까운 거리였다. 기하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요청에 응하여 기하의 입술이 다가왔다. 좀 전처럼 살짝 표면만 미끄러뜨리고 떨어지려는 것을 손을 뻗어 매달렸다. 경직되는 목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입술을 열어 기하의 혀를 끌어당기고 타액을 섞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깊어지며 기하는 몸을 물리려 했다. 잠깐……. 잠깐만요. 그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달래며 내 팔을 풀어 내고 카 시트 위로 누른다. 명백한 거부에 심장이 떨어졌다.

“왜……?”

한 뼘 정도 사이를 두고 떨어진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기하는 꽤나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피하는데……?”

“형님, 지금…….”

“…….”

“또 울고 계시잖아요.”

동생의 말에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다 닦아 내지도 못할 눈물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 순간에도 고장 난 것처럼 눈을 깜박일 때마다 새 물방울이 뺨을 타고 옷깃 위로 떨어졌다. 왜 계속 울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얼른 집에 가요. 좀 진정하고 자는 게 낫겠습니다.”

커다란 손이 아이를 다루듯 머리를 차근차근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눈물에 젖은 뺨으로 호소하듯 매달리는 나를 보며 기하가 낮게 신음했다. 손을 빼내지 못하도록 부드러운 표면에 연신 입술을 눌렀다. 그러면서도 눈물은 계속해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울면서 애걸하는 듯한, 이상한 모양새로 손바닥에 키스하는 동안 내 모습을 지켜보던 기하의 숨소리는 순식간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부추기지 마세요.”

“…….”

“미안해서 이러는 거라면, 정말 괜찮다니까.”

“그래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흥분을 억누르는 낯선 목소리. 불빛이라고는 바깥을 비추는 헤드라이트와 등대의 광원이 전부라 내게 커다란 몸을 기울이고 있는 기하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전에는 이런 적 없으셨잖아요.”

“…….”

“평소 같았으면 이런 데서는 죽어도 허락할 리 없는 형님께서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뭔데요.”

내가 아주 사소하게 변한 네 행동에 곧바로 불안이 증폭해 버리는 것처럼, 너 역시 평소와 다른 내 태도에 곧장 초조한 태도로 응수했다. 잘못을 고백해 놓고도 그 잠깐의 위화감을 참지 못하고 너를 흔들어 버리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나는 언제나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오만한 인간이었다.

“네가 날 미워하지 않는다는 확인을 하고 싶어서…….”

다행히도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볼썽사납지 않게 매달릴 수 있었다.

“너도, 늘 그래 왔잖아. 나를 만지는 것으로, 내가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애정을 확인해 왔잖아. 나도 불안해서…….”

“…….”

“불안해서 그래. 네 애정이…….”

“…….”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봐 불안해서…….”

기하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기하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지며 아까와 달리 성급하게 덮쳤다. 내 뺨을 움켜쥐고 고개의 각도를 더하며 입술이 깊게 맞물린다. 숨이 막히도록 혀가 밀려들었다. 내내 참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듯 거칠고 우악스러운 키스였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거칠게 나를 원하는 그 행동에 나는 안도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머리 어딘가가 망가져 있는 게 확실하다고, 그리 생각하며 얌전히 입을 열어 그의 것을 받아들였다.

혀로 입 안을 휘저으며 기하의 손이 내 목에 걸린 넥타이를 움켜잡았다. 아침에 나를 보내며 자기 손으로 정성껏 매듭을 지었던 것을 잡아 뜯다시피 끌러 낸다. 빠르게 스치는 표면 사이로 달뜬 신음이 새어 나갔다. 안을 쑤시는 혀의 움직임은 삽입을 닮아 있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제멋대로 점막을 찌르며 꿈틀거렸다. 호응해 보려고 애를 써도 나는 결국 네게 매달려 겨우겨우 숨을 내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하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입 안을 짓뭉개며 한참을 유린하다가 쑥 빠져나갔다.

“…….”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두고 기하는 오르내리는 목젖에 이를 세우다 입술과 혀를 이용해 쇄골까지 핥아 내렸다. 그러고는 지익, 이빨을 이용해 순흔을 덮어 놓은 반창고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화끈한 아픔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기하는 통증을 참아 내는 내 목소리에 밴드를 뜯어내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차 안은 우리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숨소리로 가득했다. 반 뼘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헐떡이며 서로를 응시했다. 내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기하의 눈은 흐트러짐 없이 나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운다기보다는 그냥 떨어지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상태로 손을 밑으로 내려 그의 다리 사이를 매만졌다. 머리 위에서 기하가 낮게 한숨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굵기도 굵었지만 기하의 것은 특히 지나치게 길었다. 더듬으며 찾을 필요도 없이 수납한 쪽의 허벅지 어디를 만져도 부풀어 있는 표면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서투른 손길로 옷감 위의 기둥을 몇 번 매만진 것뿐인데 성기는 요동치며 무서울 만큼 팽창했다.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하의 가슴팍이 커다랗게 들썩거렸다. 나는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고조하는 너의 흥분을 끝까지 부추겼다. 기하의 것은 바지 위로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모양이 잡혀 나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며 정결한 얼굴에 금이 갔다. 서툴기 그지없는, 수음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을 하는 나를 지켜보는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너는 날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본가에 들어서서 화를 풀어 달라고 말하던 그때로 몸의 감각을 되돌리며 되뇌었다.

결국 기하는 언제나처럼 내 고집에 꺾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멱살을 쥐듯 내 재킷을 움켜쥐었다. ‘이제 자제 못 할 거 같으니까 도저히 못 참겠으면 때려요.’, 경고하는 목소리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기하의 어깨를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고급스러운 원단에 배어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취가 코끝을 간질인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소름이 돋을 만큼 좋은 그 향기를 몸속 가득히 빨아들였다.

* * *

고단했는지 이기현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정원에 미끄러지듯 주차하고 이기현을 돌아보았다. 발그레하게 물든 눈가와 뺨이 안쓰러웠다. 운전대에 팔을 교차해 기대고 오늘 그가 했던 말들을 되새겼다. 고백의 무게를 미루어 보았을 때 더 이상 이기현이 숨기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고 자신해도 될 것이다.

내가 자손을 남길 수 없다는 고백은 꽤 쓰라리게 다가왔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진작 하고 있었다. 내 씨는 모든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우수하다고 했으니까. 그들의 판단에 따르면 문제 있는 것은 이기현의 몸쪽이었다. 번식의 시기를 놓친 거라면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아예 가능성이 없었을 줄이야. 눈을 가늘게 좁히고 살짝 부어오른 촉촉한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늘 하루 내도록 시달린 너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좀 더 대담하게 목덜미 위를 쓸었다. 조금 전 내가 남겨 놓은 순흔과 문신 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이기현은 여러모로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었다. 본가에서의 학습 때문인지 아직도 나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몸을 사용하려 들었다. 그런 행동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웠다.

“비밀을 고백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사료에도 나와 있지 않았던 비밀들은 그가 입만 다물고 살았으면 평생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고지식함이 고마웠다. 이것은 아버지도 몰랐던 진실이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때는 그저 너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너를 잃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오직 그 생각만 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복수를 위해 이 핏줄을 끊어 놓고도 나를 만나기 위해 머물렀다는 그 말은 죽도록 사랑스럽기도 하고 서늘하게 꽂히기도 했다. 내 아비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나의 운명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네 사랑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닌 내 아비였을 것이다. 애초에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 따위는 없었다고, 벗어나지 못할 방문을 긁어 대던 그에게 말해 주었다면 더 깊이 절망했을까.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내 운명을 망치려 했던 당신에게, 그래서 내 짝을 만나게 해 준 당신에게.

“그런데 저는 시간이 걸려도 형님께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너에게 고백했다. 아이를 두엇쯤 낳고 절대 도망갈 수 없게 만든 뒤에 고백할 요량이었는데, 영영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나야 상관없지만 네게는 애석한 일이지.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겨우 그 손길 가지고도 이기현은 잠결에도 내 손 쪽으로 얼굴을 비볐다. 나를 찾는 사랑스러움에 손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뛰는 심장을 다스렸다. 가라앉히는 데는 한참이나 걸렸다. 또 그의 몸 위에 올라타는 대신 허리 밑에 팔을 넣어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그를 안고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발소리 옆에 지면을 가볍게 튕기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아아.”

그래. 너희도 있었지.

눈앞을 가로막는 작은 그림자에 나는 지긋하게 웃었다. 정원의 꽃망울 속에 숨어 있던 여우들은 우리의 귀환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적대하며 한껏 들어 올린 꼬리들은 언제나 그랬듯 하나같이 부풀어 있었다. 불안과 슬픔에 잠긴 수십 개의 노랗고 작은 눈동자가 이기현을 보며 눈물을 그렁거렸다. 품 안에 안긴 이기현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들릴 리 없는 울음소리를 냈다. 힘이 다해 희미해진 몸체만큼 나에게도 닿지 않는 가냘픈 소리였다. 바람결에 섞여 무의미하게 흘러가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돌려달라고, 우리의 신을 그만 놓아 달라고, 이제 그만 우리 곁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하고 애원하다 원망하면서 내 발밑에 몸을 던졌다. 바다 건너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지극한 순정이었다. 눈물겨운 충심이었다.

너희들은 절대 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너희의 신은 너희가 아닌 나를 선택한 거야.”

내 등에서 뻗어 나가는 어둠을 보고 주춤주춤 물러나면서도 작은 몸뚱이의 털을 한껏 부풀려 위협했다. 하찮고 귀엽기도 해 웃음이 나왔다. 뱀의 둥지를 등에 지고 있는 내게 저들의 반항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영령들을 먹어 치우고 싶어 기어 나오는 고독들을 도로 몸 안으로 불러들이며 속살거렸다.

그러지 말고 나와 사이좋게 지내야지. 혹시 알아? 착하게 굴면 언젠가는 이기현에게 너희들의 존재를 알려 줄 수도 있는 거고.

“우웅…….”

내가 걸음을 다시 하자 몸을 낮춘 여우들이 그르렁거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달려들어도 소용없음을 알고는 조용히 집으로 향하는 내 등 뒤를 따랐다. 평평한 돌바닥을 통통 퉁기는 수십 개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줄지어 쫓아온다. 여우들은 내가 현관문에 들어서고부터는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창가에 줄지어 앉아 우리의 형용을 목을 빼고 지켜보았다.

저들은 집 안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이 집의 내장재는 바로 본가의 별채를 뜯어 만든 것. 여우의 피가 발리고 힘을 꺾는 주술이 걸려 있는 것들이다.

아, 이것도 이기현에게 말할 순 없는 비밀이었지. 네가 맘에 든다던 이 집은 결국 본가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비밀을 세어 가며 잠든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네게 죽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래. 그것도 있었지. 그것도, 그것도…….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는 역시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요.

역시 아버지와 나는 아주 많은 부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 쪽이 더 악질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는 후회를 했다. 적어도 자신의 결정들을 뉘우치고 한탄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해 왔던 어떤 것에도 후회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니 내가 하는 후회는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후회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더 억눌렀어야 했는데, 더 감췄어야 했는데, 그것들은 후회가 아니었다. 후회라 칭하는 것이 기만일 것이다.

만약 이기현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한들 내가 하는 사죄가 진심일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우러나오지도 않는 참회를 읊조리며 너를 붙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이기현은 모르고 있는 편이 옳다. 이런 내 속내를 모조리 꺼내 보여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는 그리던 이와 다른 내게 많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는 몰라야 했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해 줄 테지 너는. 네 말대로 전생부터 나를 다시 한번 만나기 위해 기다려 왔다는 너라면 이런 나라도 사랑해 줄 테지. 그렇지?

우리의 침대에 이기현을 눕히고 몸을 감싸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벗겨 내며 드러난 살갗에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침대 옆에 떨어지는 옷가지를 보며 창밖의 것들이 길게 울었다. 한참 이기현의 체취를 입술에 묻히고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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