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운
장운은 일과를 마친 뒤 담배를 꼬나물고는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생활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늘 격하고 노동의 강도가 강한 일만을 주로 도맡았던 그이기에 정적이고 갇힌 듯한 삶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어쩌다 그 사람과 엮여 거의 죽을 뻔하고 정신이 들어 보니 이곳이다.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하긴 그 사람의 것이 되어 버린 지금, 선택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의문도 들지만.
땀 냄새에 절어 있던 누런 벽지와 말라붙은 장판이나 쿰쿰한 냄새가 감돌던 단칸방에 몸을 뉘고 잠들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져 버린 인생. 건축 자재를 어깨에 실어 나르며 떨어지지 않는 근육통을 달고 평생 이렇게 벌어먹다 죽겠지 싶었다. 여관방에서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러낼 때만 해도 그가 자신의 삶을 이토록 바꿀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니 어느 정도는 알았을지도 몰랐다. 잠이 덜 깨 눈을 끔벅거리던 그 모습에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해 버렸으니까. 이기현이 평범한 사람이었고 장운과 평범한 방식으로 만났더라면 그는 이기현을 쫓아다녔을 게 분명했다. 그럼 어쩌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하릴없는 상상을 해 버리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물론 이건 자신의 차례 따윈 죽어도 없었으리라는 걸 알기에 찰나의 유희 같은 것이다. 이기현의 짝이라는 남자를 만났을 때 확실하게 각인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저자를 이길 순 없음을. 저 어둠을, 저 깊이와 짙음을 감히 인간의 몸으로 겨룰 순 없다고. 장운은 납득하고 패배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이기현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게 허락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감정을 절제하고 감응에 동화되지 않는 훈련을 마쳐 심지어 이기현을 보호하는 역할을 부여받지 않았는가. 말석이나마 그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삶이리라. 예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으리으리한 집 앞에 서서 장운은 나머지 담배를 태우고 집 앞의 재떨이에 꾹꾹 눌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거기 숨어 있지 말고 그만 나오지.”
그의 말이 끝나고 잠시 뒤, 정원의 나무 그늘 속에 숨어 있던 한 인영이 싱글거리며 나타났다.
“오~ 좀 예민한데요.”
“누군가 했더니, 오늘은 당신이군.”
이기현의 친구 역할로 붙어 있는 신의 개였다. 사람이 덜되었다며 경박하고 재수 털리는 새끼라고, 김태영 얘길 할 때마다 박현진은 이를 갈았었다. 과연 그럴 만도 하게 화려한 차림이었다. 몸을 던져 이기현을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유사시엔 이기현을 제 앞에 방패막이로 세울 양반으로 보인다고, 장운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빠르게 김태영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담배?”
새것을 하나 빼물고 물었다. 김태영은 주머니에서 금연 껌을 꺼내 흔들었다.
“보다시피 이래서.”
“어차피 없었소.”
빈 곽을 김태영 쪽으로 향했던 장운이 픽 웃는 것과 김태영이 호기롭게 입술을 올리는 건 동시였다. 장운이 담뱃갑을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깔끔한 포물선과 함께 소리 없이 골인한다. 한껏 숨을 들이켜며 담배를 빨더니 연기를 내뱉었다. 김태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금연 껌을 두 개 꺼내 씹었다.
“그쪽도 이제 연구소에 들어왔으니 금연해야 할 텐데요?”
“그건 가깝게 지내는 사람만 금연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그러니까 하는 소린데요. 가깝게 굴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큼성큼 본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장운이 물러서지 않아 두 사람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로 간격이 좁혀졌다.
도발하듯 김태영의 얼굴 근처에 훅 연기를 내뱉으며 장운이 말했다.
“보러 간다는 것도 막아서면서 뭘. 내가 가깝게 가고 싶다고 갈 수나 있는 분이던가?”
“당장 출근 하루 만에 이기현한테 접근해 놓고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
“그거야 접근한 게 아니라 내가 가려던 곳에 마침 TV가 와 있었던 거고.”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장운은 쓰게 웃으며 몇 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데크에 비벼 꺼 버렸다.
“그것 때문에 몸소 행차하신 모양이군. 이기현의 친구분.”
“앞으로 계속 볼 사이니 미리 경고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피차 시끄러워지는 거 원치 않잖습니까? 훈련받았으니 잘 알 거 아니에요.”
“알아서 처신할 텐데 쓸데없이 시간 낭비는. 뭐,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소. 참고하지.”
“그래서, 오늘 이기현과 무슨 얘길 한 겁니까? 꽤나 정다워 보여서 끼어들 수가 없었지 뭐예요.”
왜 이기현이 결국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지, 장운은 몇 개월 겪어 보지도 않았는데 통감하는 중이었다. 이기현과 나눴던 대화들은 핵심 내용을 추려 보고서를 올려야 했고 그에게 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한정되어 있었다. 가령 도망을 부추기는 주제나 섬의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여우 신이 도망칠 수 없도록.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도청기를 붙이지 그래.”
“그건 이기현이 학을 떼고 싫어하니 어쩔 수가 없는 거라서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동의를 구하듯 김태영이 눈썹을 내려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느물거리는 태도와 달리 눈에서는 칼날이 번뜩이는 듯했다. 이 집 종자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이었지. 장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 얘기 안 했소. 그냥 연애 상담을 해 달라던데.”
“뭐요? 연애 상담?”
떠올리는 게 꽤 고역이라 되새기는 장운의 얼굴이 무시무시해졌다.
“가주께 숨기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었소. 뭔지까진 얘기 안 했고. 나보고 애인이 크게 화날 만한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
“뭐…… 누구나 비밀은 하나씩 있는 법이니 너무 두려워할 거 없다고 했지. TV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마 더 더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TV의 비밀쯤이야 별거 아닐 거라고.”
“쿨럭!”
김태영이 사레가 걸린 기침을 내뱉었다. 캑캑거리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제대로 걸린 모양이라 장운은 얼굴을 찡그리며 가방 옆에 대충 꽂아 둔 텀블러를 건넸다. 김태영은 허둥지둥 뚜껑을 열고 들이켰다가 그대로 뿜어 버렸다.
“아 씨! 이거 뭡니까?”
“술인데.”
“수……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술을 텀블러에 갖고 다녀요? 제정신입니까?”
“일하면서 한 모금씩 마시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는데 그럼 어떡하나. 도와줬는데도 난리군.”
“아 진짜…… 이 인간이.”
씨근덕거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장운의 품에 텀블러를 던져 버렸다. 가슴에 맞고 떨어지는 것을 장운이 가볍게 받아 냈다. 몇 번 더 쿨럭거리고서야 겨우 김태영의 기침이 멎었다.
“그나저나 미치셨습니까? 이기현한테 그런 소릴 하면 어떡합니까. 그 녀석 특기가 확대 해석인데 이상한 생각이라도 해서 엇나가면 책임질 거예요?”
“확대 해석?”
정신 나갔단 소리에도, 텀블러를 던지는 무례에도 화를 내지 않던 장운의 얼굴이 일순 험상궂어졌다.
“확대 해석이 아니라 당신네들이 기만하고 있는 걸 이기현이 알아차리는 거겠지.”
“뭐요?”
“엇나가길 바라지 않으면 솔직해지면 되는 것을 자업자득으로 숨겨 놓고 전전긍긍하는 거, 솔직히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지금 말 다했습니까?”
“내가 틀린 말 했나? 이기현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들, 비밀들이 수도 없잖아. 이런 섬까지 세워 가둬 놓고 새장에 새 키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그 사람은 제 비밀 하나 가지고 잠도 못 자고 빌빌거리던데 당신네들은? 알려 줄 생각도 없잖아. 알려 줘야 할 거라는 인식이라도 해 본 적 있냔 말이오. 신의 날개를 꺾어서 주저앉혀 놓고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나?”
“보자 보자 하니까…… 거기까지 하지?”
이번에 험상궂어진 것은 김태영 쪽이었다. 삽시간에 김태영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하아……. 내가 이래서 이기현의 권속들에게 학을 떼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인이 새기도록 설명해 줘도 결국 도돌이표거든. 입에 발린 소리나 해 대면서 신을 위한답시고 같잖게 설쳐 대며 일을 그르치게 만들지. 훈련할 때 뭐 배웠습니까? 그런 소리 지껄이던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안 배웠어요? 이기현을 차지하겠다고 무슨 짓을 해 댔는지 못 봤냐고. 우리가 이러지 않으면 너희 같은 것들이 이기현을 갈가리 찢어 먹을 텐데 그때 가서도 그딴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일은.”
“우리라고 이러는 게 뭐 기분 좋을 줄 아나? 애초에 이기현이 인간과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인 걸 어떻게 하라고.”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그 말이 끝나고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다 다시 입을 연 쪽은 김태영이었다. 누군가가 엿듣고 있기라도 하듯 경계하며 좀 전보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나직하게 위협했다.
“겨우 총 한 번 맞았다고 기고만장해져서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건방 떨지 말란 말입니다. 댁이 알고 있는 것보다 그는 더 위험하니까. 운 좋게 훈련에 성공해서 주인 곁에 머물 수 있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감사한 줄이나 알 것이지.”
“…….”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였으면 얌전히 협조 좀 합시다. 그쪽이 불순한 눈으로 맴도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알 간수할 수 있는 건 가주께서 관대하시기 때문인 걸 명심하고 입조심하고요.”
“이기현의 권속에게 많이 데였나? 어째 나한테 다른 놈 화풀이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장운이 의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김태영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폭발하듯 치솟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화풀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이자가 해 대는 말이 그 녀석과 똑같아서 자신답지 않게 발끈해 버렸는지도.
다른 사람같이 변했던 차가운 얼굴은 한숨과 함께 지워지고 이기현의 곁에서 보이는 느물거리는 태도가 도로 덧씌워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 아이고 됐습니다. 말을 말아야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 붙잡고 뭐 하는 건지 원. 오늘 내가 온 게 운이 좋은 줄이나 아십쇼.”
“나는 보고해도 상관없는데.”
텀블러를 툭툭 털어 내고 다시 가방에 끼운 장운이 대수롭잖게 덧붙였다. 모르니까. 모르니까 저런 소리를 쉽게 할 수 있는 거다. 낙오로 판명된 권속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지를 알지 못하니까 저렇게 태평하게 구는 거지. 김태영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아 그럼 조정구나 다른 양반들 왔을 때도 방금 했던 말 똑같이 해 보시든가.”
“그짝이니까 그런 말이나 해 본 거지. 나도 사람 봐 가면서 할 말 구분할 줄은 알거든.”
“뭐요?”
“글쎄……. 고맙단 소리요.”
황당해하는 김태영을 두고 장운은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잘 알아들었소. 그짝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요. 높은 분들께서 나 같은 놈을 왜 수고롭게 살려 내 낙원까지 데리고 왔는지야 자알 알고 있으니까. 어찌 됐든 내 할 일 하나만큼은 제대로 수행해드리지.”
칼이 관통됐던― 여전히 옷 밑으로는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어깨 쪽을 가리키며 장운이 싱긋 웃었다. 만에 하나 신의 통제가 풀릴 시에, 혹은 이기현의 안위가 위협당하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이 몸뚱이는 목적대로 쓰일 것이다. 이기현의 권속 중에서도 파괴가 아니라 희생의 성질을 가진 권속으로서.
장운은 세뇌하다시피 주입하던 행동 양식을 떠올리며 눈을 찌푸리고 있는 김태영에게 턱짓을 했다.
“더 할 말이 남았나? 볼일 마쳤으면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돌아가고 내일 봅시다. 이래 봬도 첫 출근이라 좀 피곤하거든.”
손을 쓱 올려 한번 흔들더니 제멋대로 대화를 끊어 버리고 등을 돌린다. 김태영은 장운이 제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꽁초가 보였다. 김태영은 불이 켜지지 않은 장운의 집 창문을 노려보면서 불씨를 구둣발로 짓이겨 꺼 버렸다. 그리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등을 돌려 가로수 길로 훌쩍 넘어갔다.
장운은 현관문에 서서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제복 웃옷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손가락에 담배를 끼워 불을 붙이고는 깊게 들이마셨다. 후욱― 한숨과 함께 뿜어진 연기가 어둠 속에서 하늘하늘 흩어졌다.
역시 이 섬은 마음에 안 들어.
몇 번 담배를 빨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주기적으로 관리인이 와서 치워 주는 깨끗한 바닥에 대충 신발을 벗어던지고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유리잔을 집어 텀블러의 내용물을 따른 뒤 선반 위에 놓인 약통에서 알약을 두 개 꺼내 떨어뜨리고 흔들었다. 알약은 녹아 사라지지 않고 흔드는 것에 맞춰 유리잔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
김태영의 음성을 되새기며 장운은 알약을 노려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어둠 속에서 알약 두 개가 꼬리를 물며 움직이는 그림자가, 꼭 그날 그가 마셨던 고독을 닮아 있었다.
낙원의 주인.
이기현이 도망쳤던 바로 그 이유인 남자는 장운의 앞에 유리잔을 내밀며 말했다.
‘고독입니다.’
그 음성이 너무 부드럽고 온화해서, 장운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독을 내밀면서 하기엔 지나치게 사려 깊은 태도로 이기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설명했다.
‘선택할 권리를 드리는 겁니다. 당신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그는 장운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서도 이기현의 목숨을 우선시한 것에. 이기하에 있어서 장운이 보여 준 희생은 어떤 것과도 바꾸지 못할 귀한 가치였다.
유리잔 속에 떠도는 액체에 장운은 눈을 부릅떴다. 분명 이기하가 그의 눈앞에서 그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는데, 잔 속의 액체는 검은색에 술에 녹아들지도 못하고 기름처럼 따로 떠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자체로 살아 있듯이 하늘하늘 움직였다.
‘하하 이거 참……. 나도 미치고 있나?’
장운은 눈가를 쓸어내리고 자조했다. 눈앞의 현실 같지 않은 생김새의 남자는 그런 장운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예우는 정중했으나 장운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단 그의 뒤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는 수명의 그림자를 제외하고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했지……?’
이기하는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올려 긍정했다.
‘그럼 마시지 않겠다면?’
꽤나 도발적인 자세로 장운이 물었다. 뒤에 서 있던 수행원들이 감히 주인에게 불손한 말투를 보이는 장운을 향해 위협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그들의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떤 액수든 원하시는 금액대로 보상하고 한국으로 안전히 송환해드리겠습니다.’
‘얼마를 부를 줄 알고. 지금 그 말, 무르기 없기요.’
‘물론입니다.’
‘공사 치는 건 아니겠지. 그짝들 보니 사람 하나 묻는 것 정도는 눈 깜짝도 안 하는 치들 같은데.’
이기하의 눈이 장운의 건방진 언사에 붉은 호를 그렸다. 손을 뒤로 가져가자 뒤에 서 있던 자 중 한 명이 커다란 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잠금장치를 풀고 입구를 연 뒤 그를 향해 돌려 보인다. 장운은 가방 안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부족할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십시오.’
힐끔, 뒤에 서 있는 고용인들이 똑같은 모양의 케이스를 각자 들고 있는 것을 엿보고 장운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거 참, 총 한 번 맞았다고 팔자 피겠군. 당연히 돈이지. 내가 머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머저리 아닌 이상 돈을 마다하고 독을 마시겠어.’
‘하하……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바보 같은 선택지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단언해 놓고 장운은 돈 가방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느긋하게 웃고 있는 이기하와 달리, 억지로 끌어 올렸던 장운의 입꼬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 가고 있었다. 호탕한 척 굴던 미소는 어느새 지워지고 경직된 얼굴로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이기하를 노려보았다.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저자는, 위험했다. 분명 형제임에도 이기현과 너무도 다른 존재였다. 한쪽은 그렇게 사랑스러웠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끌어안고 싶어졌는데 다른 한쪽은…….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눈 안쪽을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마에서 굴러떨어진 땀방울이 뺨을 타고 턱밑에 맺혔다. 대치하고 있는 동안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뿐이었는데도.
잠시의 침묵 뒤 장운은 신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손을 뻗어 선택한 것은 브리프 케이스가 아닌 유리잔이었다. 고독이 찰랑거리는 유리잔을 움켜쥐고 입으로 가져갔다. 쯧, 그의 선택에 이기하는 웃음을 지우고 혀를 찼다.
커헉―. 고독을 한 번에 삼킨 장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모처럼 선택지를 줬건만. 어리석긴.’
비난하는 이기하의 말이 끝나고 툭, 툭, 조용한 방 안에 장운의 신음과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뒤에 서 있던 이들이 다가와 다리 힘이 풀리는 장운을 부축해 다시 소파 위에 앉혔다. 경련하는 장운을 붙잡고 고용인들은 그의 목구멍에 억지로 물을 쏟아부었다. 급속도로 몸에 스미기 시작한 고독에 구역감이 치밀어 장운은 마시는 것의 절반 이상을 토해 내야 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비어져 나오며 사지가 전율했다. 그렇게 몇 분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의 귓가로 아까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네가 선택한 일이니까.’
미묘하게 달라진 이기하의 말투를 눈치챌 정신도 없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장운의 의지가 강한 덕분이었다. 그는 간신히 허덕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머저리가 멍청한 선택을 했으니……. 나으리께서도…… 약속을 지키셔야지.’
이기현의 옆에 남아 있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것. 고독이 담긴 유리잔을 건네기 전에 이기하가 했던 말이었다. 주인의 곁에 있는 것만이 중요해진 그에게 선택지는 애초에 의미 없는 것에 불과했다. 더한 것을 요구했어도 그는 이기현을 선택했을 것이므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기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뒤에 선 이의 이름을 불렀다.
‘조정구.’
‘네.’
‘네가 수고해 줘야겠다.’
‘알겠습니다.’
표정이라고는 전혀 읽을 수 없는 인형 같은 사내 한 명이 장운 앞으로 다가왔다. 유리알 같은 눈이 늘어져 있는 장운의 몸을 가늠하듯 훑어 내렸다. 장운은 소파의 머리 받침대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이런 식으로 통제하는 건가?’
볼일이 끝나고 자리를 일어나던 이기하가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장운도 달라진 이기하의 태도를 알아보았다.
‘설마. 평소에는 이런 귀찮은 짓 따위 하지 않지. 말했듯 그쪽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내 나름대로 예의를 다하는 겁니다.’
장운에게 내밀어진 선택지는 둘 다 생(生)이었다. 이기현의 옆에서 살아가는 생, 이기현의 곁에서 떠나 살아가는 생. 이기현의 생명을 살린 대가였다. 하지만 그런 가치가 없는 권속들에게는 선택지 따위 없이 사(死)였을 거란 뜻이었다.
‘이곳은 낙원(樂園)이 아니라 낙원(落園)이었군.’
몸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장운이 쓰게 웃었다. 영생과 신이 잔존하는 극락정토의 낙원(樂園)이 아닌, 신을 위해 잘 꾸며 놓은 나락에 불과한 낙원(落園).
‘어디가 되었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곳이 나락이어도 나의 연인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답하는 낙원의 주인 목소리는 천진난만함으로 가득 차 있어, 장운은 그만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네.’
자각하지 못하고 주절주절 동생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늘어놓던 낮의 이기현에게 장운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렸다. 목에는 그 남자가 보란 듯 남겨 놓은 흔적들을 덕지덕지 달고, 제대로 잠도 못 자서 눈가가 붉은 이기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였다. 이기현이 하는 고민들은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상대를 향한 애정에 따른 것이었다.
장운의 말에 살짝 놀란 듯 자색 눈동자가 둥글게 커졌다가 이내 살풋 접어졌다. 자신을 향한 게 아니었을 미소에도 장운의 심장은 크게 동요했다.
‘네.’
약혼반지인지 결혼반지인지 모를 것을 멋쩍은 듯 매만지며 이기현은 조그맣게 말했다.
‘행복해졌거든요.’
그 순간 장운은 이기하와 공범이 된 기분이었다. 주인을 행복하게 해 주기만 하면 된다는, 권속의 염원은 이루어지고 자신 역시 다른 치들처럼 영원히 입을 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김태영과의 대화에서 자신 또한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정작 그가 화난 것은 남자의 낙원을 인정해 버린 자신이었을 텐데. 체급의 차이를 싫어도 느껴 버렸기에 그자에게 라이벌 의식 따위는 느낄 수조차도 없었다. 장운이 세기의 사랑을 한다고 해도 그자처럼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했다. 장운은 고작 새끼손톱만 한 고독 하나를 삼키고도 여태 불쾌감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런 것을 그자는 먹어 치우다 못해 자기 자신을 독으로 바꾼 독종이었다. 낙원에서 이브를 차지하는 것은 뱀마저 먹어 치운 아담인 게 당연했다.
“행복이라…….”
보고를 올리더라도 이기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묻어 두자는, 걸맞지 않게 소심한 복수를 다짐하고 장운은 픽 웃어 버렸다.
“역시 마음에 안 든다고…….”
액체 속을 돌아다니던 알약은 이제 반쯤만 남아 있었다. 장운은 유리잔 안을 쏘아보다가 고독을 마셨던 때와 같이 한 번에 들이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