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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35/47)

비밀

무사히 우기가 끝났다. 다시 공항은 재개되고 해로도 열렸다. 개방된 것을 축하하며 그날 밤은 정원에서 소소하게 불꽃놀이를 했다. 가느다란 화약 끝에서 쏘아진 불꽃이 반타 블랙의 장막 위로 새로운 별무리를 만들었다. 퍽 즐거웠다. 불꽃을 두 박스나 터트린 뒤 기하와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나란히 앉아 하늘을 구경했다. 오래도록 비가 내려서인지 머리 위의 하늘은 한없이 높고 구름도 모습을 감춰 동공 같았다.

압도되는 것 같아, 넋을 놓고 구경하다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기하는 그런 내 팔을 잡아 내리고 입을 맞췄다. 키스가 끝나자 그는 나를 그대로 안아 올려 방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침대에서 뒤엉켜 한참 동안 체온을 나눴다. 평소에도 거친 쪽에 가까웠던 정사는 이날따라 좀 더 집요하고 길었다. 기하는 몇 번이나 반지를 낀 손에 입술을 누르고서야 겨우 만족하여 떨어졌다.

나는 완전히 지쳐 시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가다듬었다.

허락한 이후엔 최대한 그가 원하는 대로 응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기하의 분리 불안 증세도 회복되고 내가 도망치는 것에 대한 공포도 옅어질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기하가 몸을 섞는 것으로 나를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지독할 만큼 거칠게 하거나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한 수단이 명백한 순흔들을 남겨 두는 것도 그런 이유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집착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오히려 내가 순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불안을 부추기는 듯 여겨지기도 했다. 마치 내가 예전에 그를 신으로 인식했을 때 그가 다정할수록 닥칠 위험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이제 겨우 시작이야. 가주님께서 안심하실 만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잖아.’

걱정을 털어놓는 나를 박현진은 조용히 타일렀다.

‘가주님께 시간을 좀 줘. 자기가 도망친 세월이 십 년이 넘어. 그분이 안심하려면 그 두 배는 걸릴걸.’

시간이야 충분하다. 신의 무리인 우리에게 시간은 무한한 재화였다. 더구나 기다리는 것에는 도가 텄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기다리는 것만으로 그 애의 불안을 고칠 수는 있는 걸까.

‘실례가 아니면 뭐 좀 물어봐도 돼?’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그것은 내내 내가 외면하고 있던 것. 그녀 말고는 감히 그 아무도 내게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욕조 끝에 기대어 미끄러져 내렸다. 상체가 물속으로 잠기고 내쉬는 숨에 파문이 인다. 꼬르르륵 소리가 나도록 간간이 공기를 내뱉었다.

불투명한 벽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번의 일로 욕실 한쪽 벽을 허물고 불투명한 유리 벽을 세웠다. 내가 욕실 안에 있다는 걸 기하가 밖에서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턱대고 CCTV를 사방에 설치하는 것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니 기뻐해야 할까. 하지만 여전히 겨우 넋을 빼고 하늘을 쳐다본 것만으로도 불안해서 어쩌질 못하는 너를 보면 심장이 아팠다.

도망가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라고, 어디도 가지 않고 네 곁에 있을 거라는, 거짓말로 점철된 말은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대신 내게 단 한 번도 거짓말이 아니었던 유일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사랑해.’

여전히 어렵고 무거운 그 말을 내뱉으면 여지없이 내 얼굴은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말을 할 때만큼은 기하도 내 말을 믿었다. 행복해했다. 안심하는 눈을 하고 ‘저도요.’라고 화답했다. 그 순간만은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마음이 한길로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도 기하를 따라 저 말에 집착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나 네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확인받고 싶어 했는지를 이해했다.

‘둘이 사이가 그렇게 좋은데. 왜…….’

욕조 안에 오래 있었더니 어지러워 몸을 일으켰다. 물이 내 움직임에 넘실거리며 밖으로 쏟아졌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은 뒤 기하가 남긴 붉은 흔적들 위에 옷을 꿰었다.

거실로 나오자 탁자 위에 아직 온기가 남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기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집무실에 가 있거나 서재에 가 있을 것이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크림이 가득 올라가 있는 커피. 한번 마셔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내 기호를 정확하게 맞춘 커피를 내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소리를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박현진은 이곳의 생활이 맞는지 나날이 얼굴이 피고 있었다. 간신히 묶던 머리마저 귀찮았는지 아예 단발로 시원하게 쳐 버려 목덜미가 훤하게 보였다. 그 한 지점에 순흔이 찍혀 있다. 벌써 짙은 색으로 변해 버린 누군가의 입술 자국이.

‘…….’

그녀에게 연인이 생긴 것일까. 연인과의 흔적을 새삼스레 감추지 않는 그녀에 비해,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써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내 목덜미가 괜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목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내게 그녀는 말했다.

‘자기가 정말 가주님을 안심시키고 싶다면 제일 좋은 방법이 있기는 해.’

김태영과 잘도 어울려 다닌다 싶더니 저런 말마저 옮았다. 저런 말을 했을 때 그 녀석답지 않은 훌륭한 조언이 쏟아졌던 것을 기억하고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을 알려 줄 듯 말을 꺼내 놓고 박현진은 내 검사 결과를 아주 꼼꼼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내 쪽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둘이 사이가 그렇게 좋은데 왜 소식이 없는 거야? 진짜 자기 몸이 수태가 가능하면 벌써 아이가 들어서도 몇 번이나 들어섰어야 할 텐데.’

예고 없이 들이밀어진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박현진은 나를 내려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미안, 내가 너무 무신경했지.’

‘…….’

‘그런데 우리끼리니까 솔직해지자. 가주님이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건 자기도 알고 있지?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 얘기는.’

‘자기가 가주님을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 전전긍긍하길래 하는 얘기야. 제일 좋은 방법을 알고 있잖아.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그런 고민은 할 필요 없어질 텐데.’

‘그 얘기는 그만하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의 물음은 기하와 원승호가 했었던 대화를 고스란히 옮겨 온 것과 같았다. 불쾌했던 기억이 빠르게 소생하여 기분을 진창으로 뒤흔들었다. 하지만 박현진의 용건은 사실 그게 아닌 듯했다.

‘자기는 이미 알고 있는 거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무릎을 끌어 올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그런 기억일수록 진득하게 뇌리에 남아 오래오래 나를 괴롭히겠지.

‘자기 몸이 사실 수태가 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정말 예리했다.

따뜻한 잔으로 녹인 손가락은 벌써 차갑게 굳어 있었다. 서늘한 손바닥으로 뜨거운 뺨을 감쌌다. 기하가 없는데도 사방에서 기하의 체취가 났다. 이 집에서는 구석구석 그 어디든 그 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자기?’

박현진에게서 본 적 없는 엄한 얼굴이었다. 숨길 수 없다. 나는 곧바로 항복했다.

‘부탁……드릴게요. 당분간은 말하지 말아 주세요. 기하한테만은…….’

‘물론 그 어떤 것도 내가 먼저 말씀드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잊지 마. 가주님은 진음을 쓰실 수 있어.’

‘…….’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그 아이에게 그 능력을 물려주었으니까.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현진의 얼굴도 슬프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팔을 벌려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기하와 다른, 작지만 부드러운 품에서는 포근한 향기가 났다. 어머니에게도 안겨 본 적 없던 나는 여성의 품에 매달리는 방법을 모르고 간신히 고개만을 맡겼다.

‘가주께서 내게 비밀을 말할 것을 명하시면 나는 거역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

‘이 섬에 온 이후에 가주님은 한 번도 진음을 쓰신 적 없었어. 자기가 나한테 때때로 비밀 얘기를 하는 걸 아시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지. 자기의 대나무 숲으로 남겨 두신 것처럼 말야.’

‘……정말요?’

‘그래. 그러니 이만 동생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뭔지는 몰라도 언젠가 밝혀질 비밀이라면.’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지금은 조용한 혈족들이라 해도 분명 불만을 가진 이가 나올 것이고, 의문을 품게 될 것이고, 원인을 찾고자 할 것이다.

나밖에 모르는 비밀,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누구도 전말을 알지 못할. 추악한 진실.

권능을 이 집안의 직계에게 넘기며 핏줄에 저주를 걸었다. 신의 힘은 직계인 사내만이 옮겨 받을 수 있다. 다음 대의 후계자가 태어날 때까지 직계는 죽지 못하고 자식을 생산하다 신의 힘이 옮겨 갈 그릇이 태어나면 쓸모를 다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기하에 이를 때까지 반복된다. 그리고…….

기하를 끝으로 이 핏줄의 대는 끊긴다. 그것이 내가 축조한 미래.

내 동족을 절멸시켰으니 이 몸 역시 너희들의 핏줄을 끊어 놓겠다는 지극히 순리에 맞는 복수였다.

내 몸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기하의 자식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억을 회복하며 이것을 알아차렸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는, 표현할 수조차 없다.

내내 기하의 아이를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은 자신이면서. 누구와도 좋으니 기하의 아이가 생긴다면 조카님으로 부르며 헌신하겠노라고 기만을 떨어 놓고서 그의 미래를 끊어 버렸다. 피가 섞인 친형제라서 거부한다며, 아무것도 모르고 제물로 살아온 지난날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저주의 대가는 내가 타락하여 액신이 되는 것으로 치렀다고 믿었다. 고스란히 칼날이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위층에서 업무를 마친 기하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워진 커피를 전부 들이켜고 그가 기다릴 침실로 향했다.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기하가 팔을 뻗기 전에 내가 먼저 그의 품에 들어가 얼굴을 묻고 아무 일도 없는 척을 했다. 움직이지 않고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기하는 내 허리를 감고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잠든 기하의 얼굴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니 이만 자기의 동생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뭔지는 몰라도 언젠가 밝혀질 비밀이라면.’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도 박현진은 같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어차피 생겨도 낳을 생각 따윈 없었다고, 친형제의 씨를 품는 배덕한 일은 애초에 있어선 안 된다고. 차라리 잘되었다는 끔찍한 합리화를 하며 덮어 버리고 있었다는 걸 고백해도 너는 예의 그 너그러운 미소를 보일까.

아이를 원한다고 속삭이며 내 몸을 파고들던 기하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밤은 무슨 수를 써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 * *

“못생겼어.”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한 내 얼굴을 본 김태영이 표정을 구겼다. 대꾸할 기력도 없어 책상 위에 가방을 내던지고 얼굴을 파묻었다.

“못생겼어.”

“못생기지 않았습니다.”

뒤따라 들어오던 박종오가 나와 똑같이 커스텀한 커피를 들고 나 대신 대답했다. 김태영은 박종오의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행동했다.

“너는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다고 했잖아.”

나도 김태영의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행동했다. 아침에 내 꼴을 보고 기하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가 자신의 잠버릇이 심했냐고 심각하게 물었다.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기만 해도 깨 버리는 게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렇게 만든 내 잘못이지. 그래서 기하를 깨우지 않으려 밤새도록 꼼짝도 못 하는 바람에 허리가 작살난 느낌이 나는 것도 그의 잘못은 아니다. 내 잘못이지. 어제 같은 밤에는 차라리 섹스를 하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 것이 티가 났는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기하가 말했다.

‘아직도 좀 몸을 혹사시켜야 잠이 드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없지 않냐고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몸을 씻겨 주는 기하의 손길은 다정했다. 뻔히 무슨 일이 있는 나를 보면서도 캐묻지 않았다. 예전처럼 파헤치며 전부 다 말하라고 윽박지르지 않는다.

기하는 확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진음을 쓰지 않았다는 현진의 말이 물소리와 섞여 귀를 두드렸다. 네가 변하는데 내가 제자리에 머무를 순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생각하는 바가 얼굴에 다 쓰이는 주제에 언제까지고 비밀을 감출 순 없을 것이다. 내 고백이 모든 걸 망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체념한 투로 속삭였다.

‘사실 너에게 해야 할 고백이 있어.’

‘예. 말씀하세요.’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손길이 멈췄다. 나는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의 걷어 올린 팔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좀 말하기 어려워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기다려 줄 수 있을까.’

‘…….’

‘많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언제가 되던 반드시 내 입으로 말할 테니까.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꺼내기 어려워했던 말이 무색하리만치 담담한 대답이었다. 괜찮겠냐고 오히려 내가 놀라 되물었다. 기하는 내게 팔을 들어 달라고 요구하고는 가볍게 수긍했다.

‘그것 때문에 어제 잠들 수 없었던 건가요?’

현진의 말이 옳았다. 너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응.’

‘말씀만 해 주시면 뭐든 상관없어요. 무슨 말이든 받아들일 테니까.’

저를 떠날 거라는 말만 아니면요. 뭐든 상관없다면서 덧붙여진 말에 나는 힘없이 웃었다. 정말 그거만 아니면 괜찮아? 후회하지 않겠어? 기하는 흐음 생각에 잠겨 내 피부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이내 거품이 남아 있는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눌렀다.

‘정말 그거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그거보다 더 최악인 건 없으니까.’

아니야. 기하야. 그거보다 더 최악인 게 있어. 장담하지 마.

쾅!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김태영이 다급히 내 얼굴 밑에 손을 집어넣으려 했지만 박종오가 반박자 빨랐다. 다음번에 머리를 내리쳤을 땐 책상이 아니라 박종오의 손바닥 위였다.

“야, 이, 이 자식 왜 이래?”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내가 못생겼다고 해서 그래? 취소한다. 취소한다고.”

“너희 둘 다 나가. 시끄러워.”

머리가 웅웅 울렸다. 나가라는 명령에도 그들은 내 곁을 떠날 생각을 안 했다.

“나 잠을 못 자서 그래. 잠 좀 자게 나가라고…….”

기어 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겨우 눈치를 보더니 나간다. 조용해진 연구실 안에서 웅크리고 머리를 수그렸다. 여기서도 잠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사방을 감도는 기하의 향기가 없는 것만으로도 긴장하고 있던 목덜미가 한결 풀어졌다.

* * *

점심시간이 되어서 옥외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이라도 눈을 붙인 것과 아예 못 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눈이 뻑뻑해서 뜨려고 힘을 주지 않으면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럴 거면 그냥 잠이 들면 될 텐데 또 자려고 마음먹으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덕분에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천근같이 늘어졌다.

“죽겠네…….”

확실히 예전에 비해 몸의 상태가 그리 팔팔하지 않았다. 하루가 뭐냐, 며칠씩 뜬눈으로 밤을 새도 멀쩡했던 나다. 호사스럽게 잘살다가 겨우 하루 잠 못 잤다고 빌빌거릴 몸이 아니었다. 몇 년이나 제자리걸음이던 키가 컸다고 좋아했더니만 체력은 성장은커녕 내리막길이었다.

퍼걸러 옆의 벤치 위에 자리 잡고 길게 누웠다. 청명한 하늘에는 조각구름 한 점 없었다. 캐노피를 타고 오른 넝쿨 사이사이로 햇볕이 부드럽게 새어 나왔다. 연구소 건물을 휘감고 있는 식물들에서 뿜어지는 싱그러운 냄새와 시원한 바람이 포근히 몸을 감싸 안았다. 제발 좀 자라고 자연이 판을 깔아 준 수준이었다. 그래 이대로 잠이 들면 되겠다. 딱 점심시간만이라도. 몇십 분만이라도.

몸을 옹송그리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그리고 나를 놀리듯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더 맑아졌다. 환장하겠네. 고전적인 방법인 양 세기를 사용했다.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세 마리……. 양이 쉰 마리쯤 되었을 때 내 머릿속은 양이 무슨 색에 어떻게 생겼고 그 정도 수를 수용하려면 얼마큼의 목장이 있어야 하나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는 소리다. 꽉 감은 미간으로 주름이 졌다. 멀리서 점심 식사를 마친 연구원들이 하나둘 정문으로 들어오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왔는지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집스럽게 눈을 꽉 감고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발소리는 옥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졌다.

“…….”

한참을 기다려도 더 이상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만 내려갔나 보다 싶어 슬쩍 실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내 위에서 허리를 숙여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

“뭐야. TV 자는 척하고 있었네.”

“장운 씨……?”

이 사람이 여기에 왜 와 있지? 눈을 끔벅끔벅거렸다. 어쩐 일이냐고 묻기 전에 그가 먼저 대답을 했다.

“오늘부터 발령 나서 근무하게 됐는데.”

“아, 정말요? 축하드립니다.”

담배를 문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아직 수습이긴 하지만 적응하는 거 보고 정식 발령 날 거라 하더라고. 박종오 그 양반이 버티고 있으니 같은 팀에 들어갈 순 없다던데. 뭔 일 생기기 전까진 백업 팀에 있을 거요.”

“그럼 같은 직장이어도 얼굴 보기는 좀 힘들겠네요.”

“뭘, 어차피 명분상 신분이라 내가 어디 있든 좆도 신경 안 쓸걸. 맨날 놀러 가면 되지.”

거리낌 없는 말투였다. 시큐리티에 들어갔구나. 몸을 쓰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가드도 적성에 잘 맞을 것 같았다. 훈련 성과가 좋았는지 생각보다 합류도 빠르고 다행이다.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를 지켜보던 장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내가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걸 지켜보다 흠, 흠 하고 목소리를 고르더니 넌지시 말을 건넨다.

“거…… 그 양반보고 적당히 좀 예뻐하라고 하지. 그러다 몸 축나겠소.”

“예……?”

사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런 유의 말에 면역이 없던 나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톡톡, 장운이 자신의 목을 두드리며 짓궂게 웃었다. 그렇게 보여 주는데도 못 알아듣고 그를 따라 내 목을 만지작거리다 손끝에 걸리는 반창고에 얼굴을 화악 붉혔다.

“아니! 지금 이건 그래서 그런 게 아닌데요. 어제 제가 잠을 통 못 자서…….”

라고 말하다 장운의 얼굴이 더 짙어지는 것을 보고 허둥거렸다. 그게 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그래서 잠을 못 잤다는 게 아니고……. 설명하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튼 예…… 어쨌든 제가 잠을 못 잤습니다…….”

“점심은 먹었나?”

“아직 배가 안 고파서요. 이따 내려가서 먹든지 해야죠.”

“그럼 같이 가서 먹든지.”

“장운 씨도 아직입니까?”

“아니? 난 먹고 왔지.”

그게 뭐 어떠냐는 얼굴. 나는 힘없이 됐다고 대답했다. 내 표정이 계속 시커멓게 죽어 있는 것을 보자 장운도 얼굴을 구기고 드디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고민이 있어서 잠을 못 잔 모양인데.”

“하하…….”

“그래서 대체 뭔 일인데? 나한테 털어놔 보든가. 감응이 되나 안 되나 시험도 좀 해 보고.”

성과를 자랑하고 싶은 뿌듯한 표정에 미간을 풀고 웃었다. 장운은 내 맞은편에 앉아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쉬었다. 그의 커다란 체구에 시큐리티 제복이 꽤나 잘 어울렸다. 두툼한 팔뚝에 새겨진 상처가 그를 베테랑처럼 보이게 했다. 빌빌거리고 있던 터라 넘쳐흐르는 저 에너지나 육체에 부러움이 일었다. 어째 내 주변 남자들은 하나같이 내게 열등감을 안겨 주는 사람밖에 없었다. 나도 어디 가서 뒤처지진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워낙 주변 인물들이 특출나 쭈그러들었다.

“여기 생활은 좀 어때요? 살 만한가요?”

“이런 세련되고 고상한 분위기는 적성이 아니라서 첨엔 좀 힘들었는데 뭐…….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젠 익숙해졌소. 연봉도 전의 직장에 비교도 안 되고 일도 편하고 하니. 이러다 푹 늘어지는 것만 좀 걱정이지.”

“장운 씨는 좀 늘어져야 돼요. 수술 끝나고도 한시를 가만있지 않아서 간호사들이 애먹었다고 그러던데요.”

“누가? 박현진 씨가? 그럼 다 나았는데 쓸데없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라니까 그랬지.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야.”

“피부 복원은 거절하셨다면서요.”

“음, 그것도 들었나? 나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장운은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래도 퍽 기뻐 보였다.

“뭐 어차피 옷으로 가리고 다닐 거 누구 보여 줄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수술씩이나.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은 이미 남의 님이 되어 버렸는데 의미도 없을 거 같아 거절했소.”

“그래도…… 앞일은 모르는 일이잖아요.”

빤히 쳐다보던 그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소리, 무책임하고 무례한 거요. TV가 동생 말고는 아무도 성에 안 차듯이 나도 마찬가지인데.”

“…….”

“죽어도 못 이겨 먹을 양반 보여 주며 억지로 포기하게 만들어 놓고, 그런 소리는 약 올리는 거지. 아직도 보고 있자면 아까워 죽겠는데. 쯧…… 그냥 성질대로 한번 확 자빠뜨릴 걸 그랬나.”

후우, 그가 음험하게 내뱉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내 앞에서 흩어졌다. 사내의 말버릇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망을 쏟아 내 놓고 정작 장운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내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얼굴이다.

“장난이었소. 이 정도 심술부리는 건 이해해요. TV보다 꽂히는 사람을 찾으면 그땐 알아서 마음이 움직이겠지.”

“…….”

“뭐 늦게 만나 꿰차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니까. 하하, 하긴 일찍 만났어도 나 같은 놈한텐 기회 한 번 안 줬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지만.”

왜 이렇게 장운의 말투가, 장난이 불편한가 싶더라니. 그의 아슬아슬한 말버릇은 묘하게 강준형을 연상시켰다. 내 권속이면서 훈련되지 않은 날것의, 통제당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여지없이 보여 줬었던 그를.

“그런 장난은.”

“알지. TV의 동생 귀에 들어가지 않게 TV 앞에서만 하는 걸로.”

“기왕이면 제 앞에서도 좀 조심해 주시죠…….”

쭉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래서, TV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말 안 해 줄 건가?”

“말해 주면 그걸로 또 놀려 먹으려고요?”

“내가 적어도 박현진보다는 입이 무거울걸.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상관없고.”

“연애 상담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빙글빙글 놀려 먹는 것에 나도 반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괜히 물어봤다는 뭐 씹은 표정을 한다.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그만 가 봐야겠네.”

벼락같이 일어나는 남자의 등 뒤에 대고 열심히 하시라고 응원을 건넸더니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온다. 씨근덕거리는 그의 어깨에 픽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뭔데?”

“와, 훈련이 정말 잘됐네요. 역시 우수하십니다.”

“놀리는 건 그만하고. 앞으로 나도 입조심할 테니까.”

제대로 자리를 잡고 진지한 태도로 내 눈을 들여다본다. 정말 들어 줄 모양이었다. 의외로워 눈을 크게 떴다. 또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이렇게 해서 할 생각도 없던 연애 상담을, 들어 줄 생각도 없던 남자에게 터놓으며 서로 원치 않은 상태로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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