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카페에서의 사건 이후로 심제준은 며칠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본토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당분간 얌전히 지내라는 김태영의 충고도 그랬지만 슬슬 이 섬이 이상함을 넘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던 차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열자 창문을 닦고 있던 고용인들이 그린 듯한 미소를 보냈다. 필요한 거 있으시냐는 기계적인 응대. 처음엔 황송했지만 이제는 저 참견에 숨이 막혀 온다. 적당히 거절하고 마루 끝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처음에는 전혀 구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적당히 표현하자면 이 섬은 낯선 땅에 한국의 포장지를 뒤집어씌운 것과 같았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계획도시 그 자체인 섬. 진득한 삶의 냄새 대신 갑부들의 하룻밤 유흥을 위한 휴양지 같은, 화려하고 풍요롭지만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유해 보였고 젊고 아름다웠다. 이 섬에는 옛것과 부적격한 것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것이었고 흠조차도 없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조화를 이루는 여타 보통의 도시와는 전혀 다르다. 과거의 잔재 없이 오직 현재와 미래만 받아들이고 있다.
심제준은 섬의 요소들에 대한 감상을 취소했다. 이렇게 작위적인, 숨 막히게 절제된 섬일 줄은 몰랐다. 이 지독히도 아름답고 쓸쓸한 도시 속에서 진짜라고는 오직 하나, 이기현밖에 없는 듯한 위화감. 그래서 더 맹렬하게 이기현을 찍어 보고 싶었다. 수없이 많은 모조 속에서 진짜 보석 하나를 찾아낸 뿌듯함으로 이기현에게 청하고 싶었다. 너를 내 렌즈 안에 담아도 되겠느냐고.
“전화라도 해 주면 어디 덧나냐…….”
서운했다. 바쁘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화 통화 한 번 정도는 해 줘도 괜찮을 텐데. 얼굴을 비추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안심할 거 아냐. 문득 자신이 그 커다란 체구의 사내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만나고 싶다.
이번이 아니면 영영 못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풍우가 그치고 이 섬을 떠나게 되면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것이다. 자신은 언제나처럼 술을 마시며 추억팔이용으로만 그를 꺼내게 될 것이고 흘러간 과거의 찌꺼기는 퇴색되어 잊힐 게 분명했다. 그 녀석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는 요청은커녕 감사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해 놓고도 어째 더 멀게 느껴지다니. 치솟는 답답함에 벌떡 일어났다. 잠깐 바람이나 쐴 심산으로 고용인들이 청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슬그머니 홀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심제준은 손님용 별채를 벗어나자마자 길을 잃고 말았다.
“여기가…… 내가 나왔던 곳 맞나?”
비슷비슷한 돌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똑같이 생긴 문들은 분간이 안 간다. 평소에 고용인들이 안내하는 대로만 걸음을 옮겼던 터라 지리를 알 턱이 없었다. 심제준은 당황하여 길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주변을 살폈다. 누구 하나라도 지나가면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본가에는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이 섬은 규모에 비해 인구가 많이 살진 않는다고. 번화가나 산업지구에나 가야 북적인다는 소리를 들었었지.
결국 포기하고 심제준은 발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돌담길을 따라 꽃이 한쪽 방향으로 조금 더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꽃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꽃을 따라갔다. 걸음이 더해질수록 돌담에서 꽃향기가 진동을 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곳에 도착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망설이다 문가에 서서 안을 훔쳐본 심제준은 입을 떡 벌렸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경치였다. 문 안쪽의 뜰은 엄청나게 넓고 그 넓은 공간 한가득 꽃이 만발했다.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를 둘러싼 꽃들이 바람결에 파도치며 꽃잎을 안개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건 정말 엄청나잖아. 무심코 습관대로 카메라를 매어 두던 가슴 밑을 더듬거리다 비어 있는 것에 탄식했다.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아까운 풍경에 안타까워하던 차에,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숨긴 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심제준이 건물 아래로 몸을 숨기는 것과 고용인들이 중간 문을 들어서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주전부리를 잔뜩 올린 탁자를 든 그들이 종종걸음으로 안채의 건물에 다가가 고하자 안에 있던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다.
“…….”
그를 알아보고 심제준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그는 그토록 보고 싶던 바로 그, 이기현이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고용인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이기현은 그들의 손에서 탁자를 건네받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째서 찾아오지도 않았던 거지? 놀라움이 가시고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이기현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멀쩡한 데도 자신의 연락을 내내 무시했다는 거 아닌가.
인기척이 사라지고서야 심제준은 몸을 일으켰다. 슬그머니 그가 사라진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은 전면 창이 활짝 열려 있어 다행히도 그의 모습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닌 듯했다. 받아온 탁자를 한쪽에 놓으며 방 안의 다른 이에게 무어라 말한다. 심제준은 신중하게 그 방 바로 밑으로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도중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제준은 조용해지길 기다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척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미안해.”
뭔가 둔탁한 소음과 함께 웃는 소리가 났다. 심제준은 나뭇가지 뒤에서 살며시 고개만 들어 방 안을 확인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두 남자였다. 이기현이 아닌 다른 한 명은 상당한 장신이었다. 그가 심제준을 등지고 있는 통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넓은 등만 보였다. 그는 흑빛 소창의(小氅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등에 수놓아진 이무기 문양이 위협적으로 심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지러워…….”
베인 손가락을 빠는 남자에게 이기현은 목소리를 낮춰 속살거렸다. 손을 빼내려는 이기현에게 남자는 장난을 치며 연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만하라며 밀어 내는 손가락에서 손등과 손목까지, 입술이 닿는 모든 부분에 키스를 퍼부었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웃음소리에 사랑이 넘쳐흘러 그들이 보통 사이가 아니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제준은 목이 타는 기분으로 그들을 훔쳐보았다.
이기현의 상대가 남자였다는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이기현은 예전에도 어딘가 가느다란 구석이 있어 남자 놈들이 곧잘 주변을 맴돌곤 했으니까, 평범한 연애를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다. 그러니 심제준이 느끼는 지금의 이 찜찜함은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저 남자를 어디서 봤더라……. 저렇게 뒷모습만으로도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남자라면 보고 잊었을 리가 없는데. 괜스레 아는 사람 같은 위화감이 강하게 들면서도 본 기억이 없는 미묘한 생각이 드는 뒷모습이었다.
“조심한다니까……. 아 진짜…… 장난치지 마.”
치근대는 남자에게 거부 같지 않은 거부를 하며 이기현이 웃었다. 살짝 상기된 뺨이 싱그러워 보였다. 지척에서 엿본 이기현의 얼굴은 기억하고 상상하던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학생일 때에도 곱상하다고 느꼈던 얼굴은 성장하면서 더 화사하게 개화해 있었고 예민했던 분위기는 나긋나긋하게 변해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이기현의 상대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기현이 무슨 말만 해도 웃어 주는 남자에게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난치던 것을 멈춘 남자가 이기현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서는……. 미약한 항의는 입 속으로 사라지고 입술이 겹쳐졌다. 쪽, 쪽, 부드럽게 표면을 빨아 당기는 소리가 났다. 거부하던 이기현도 몇 번 짤막한 키스를 하더니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호응했다.
심제준은 이쯤에서 그만 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사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안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이상 훔쳐보면 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몸은 점점 더 제자리에 붙박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짧았던 키스는 점점 더 진해졌다. 몽롱한 얼굴을 한 이기현을 책상 위에 밀어 앉히고 남자가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풀려 가는 단추에 그의 어깨를 밀어 내며 이기현이 불안하게 문가를 쳐다보았다.
“잠깐만, 고용인들이…….”
“괜찮아. 부르기 전엔 아무도 안 와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달랬다. 심제준은 순간 피가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저 나직한 음성과 다감한 말투…….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던 심제준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돼. 자신이 한 생각에 놀라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감히 연결 지어 본 것조차 이기현에게 죄스러워야 할 억측이었다. 전에도 한번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떠올린 자는 자신이 정답임을 주장하며 맹렬하게 심제준의 정신을 지배해 갔다. 온 신경과 감각이 방 안의 두 사람에게로 비쭉비쭉 일어났다.
“아…….”
한동안 그의 가슴을 핥던 남자가 이기현의 바지춤에 손을 댔다.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이젠 정말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아 심제준은 떨리는 다리로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심장이 미칠 듯 뛰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방 안에서 신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가 들을세라 가까스로 억눌렀던 소리는 점차 참지 못하고 크기를 키웠다. 아랫도리에 맹렬하게 열이 쏠릴 만큼 열락에 찬 신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기현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 흘러나왔다.
“읏…….”
“…….”
“흐윽…… 기하야, 기하야…….”
기하. 이기현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내내 잊히지 않던 그의 동생의 이름을, 이기현은 애달픈 목소리로 불렀다. 맞아떨어진 억측에 심제준은 숨을 멈췄다. 오래도록 그에게 남아 있던 죄책감은 이 순간 배신감으로 돌변했다.
역시 그랬구나. 너희들은 그랬던 거구나.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때 그 옛날에도, 심제준의 억측은 정답이었던 거다.
이기현에게 두들겨 맞았던 턱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 아려왔다. 이기현이 주먹을 휘두른 것은 모욕을 당해서가 아니라 감춰 뒀던 사랑을 낱낱이 폭로하는 고발자를 향한 분노였다.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려 나갔다. 그가 왜 이런 섬에서 은둔을 하고 있었는지, 사회에서 왜 몸을 감춰야 했는지, 그 사건들의 기저에는 저 배덕한 사랑이 깔려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제정신이 아니야, 저들은 미친 거다.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피를 나눈 형제끼리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고발자의 눈을 하고 심제준은 다시 방 안을 엿보았다. 바지만 벗겨진 이기현의 다리 사이로 남자의 머리가 들어가 있었다. 구음을 하는 이기하의 등 근육이 꿈틀거리며 비단 위의 이무기도 요동쳤다. 이기현은 동생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상체를 웅크려 신음했다.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 참아 내는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쾌감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흥분으로 하얀 피부에 홍조가 오르는 것이 지금껏 본 그 어떤 얼굴보다도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기현의 것을 핥고 있는 이기하는 지독히도 심취해 있었다. 혀를 적셔 미끄러뜨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숭배하는 이에게 봉사하듯 무릎을 꿇은 채로 정성껏 빨고 핥아 올렸다.
심제준은 신음하며 이를 악물었다.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금단의 짓을 저지르는 저들을 비난해야 하는데, 비난은커녕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갔다. 깜박이지도 않고 주시하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잠시 후 가닥가닥 끊어질 듯 짧게 신음하며 이기현이 허리를 꺾었다. 황홀경에 감싸인 이기현의 자태는 지독히도 자극적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이기현의 다리 사이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기현이 파정의 여운으로 발갛게 물드는 것은 온전히 심제준만 볼 수 있었다. 그만의 몫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며 심제준은 저도 모르게 느릿하게 입술을 핥았다. 미치도록 갈증이 일었다.
결국 만족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반쯤 눈이 풀린 이기현의 턱을 붙잡아 입을 맞추며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다리를 벌렸다.
“천천히…… 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든지 이기현의 몸이 위축했다. 쾌감만 어렸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그러면서도 동생을 품기 위해 허리를 끌어당겼다. 구음을 하며 이기현의 쾌락을 우선시하던 남자는 표변하여 다소 거칠게 이기현의 안으로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그의 힘에 밀려 이기현의 몸이 책상 위로 짓눌리며 간신히 고개를 가눴다.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이기하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땀에 젖은 종아리가 허공으로 들리고 그 사이로 더 깊게 이기하가 자리를 잡았다.
“으흑…….”
“형, 윽…… 형님……. 하아.”
억누른 남자의 신음 소리가 이기현의 신음보다 크게 울렸다. 저음의 목소리는 거의 위협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신음을 삼키려고 숨을 죽이는 이기현과 정반대였다.
“읏, 아…… 아…….”
철퍽, 철퍽, 젖은 살갗끼리 맞닿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멋대로 흔들리던 이기현의 다리가 남자의 허리를 감았다. 아래를 쳐 대는 움직임이 점차 강해진다. 이기현의 울음소리도 그에 맞춰 커졌다. 남자의 활배근이 물결치며 금박의 이무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관음하고 있는 심제준을 겨냥하여 은밀한 빛을 발했다.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심제준은 넋을 잃는 자신을 향해 다그치듯 읊조렸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한 쌍처럼 잘 어울렸다. 날 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롭고 완전해 보였다. 머리로 아무리 끔찍한 짓이라고 비난을 퍼부어도 가슴은 아름다운 그들을 탐닉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교접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심제준은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그들의 정사를 고스란히 담았다. 아무것도 쥐지 않아 비어 있는 손가락은 연신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허공 위를 꿈틀거렸다.
세 번째 우연.
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본 것은 확실했다.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이기현의 권속으로서 발현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심제준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뛰고 있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무언가, 무언가가 제 안에서 변하고 있었다.
* * *
그날 이후로 심제준은 틈만 나면 안채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이기현도, 그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만개한 꽃밭뿐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이 본 이기현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물을 수도 없다. 생각했던 바를 의논할 이도 없이 오로지 혼자였다.
심제준은 망연히 본가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그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제가 생각해도 나사가 빠진 것 같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처분 날짜가 떨어진 그와 괜히 엮였다가 피를 볼 것을 두려워한 고용인들이 심제준이 나타나기만 하면 자리를 피해 버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 커다란 궁에 혼자 남겨진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이 보았던 것이 진짜였는지조차 머릿속에서 희석됐다.
찍었어야 했는데, 찍어서 남겼어야 했는데.
그게 정말 진짜였을까. 아니면 이기현을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과 과거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환상은 아니었을까.
“갈수록 가관이네.”
가끔 확인하러 들르는 김태영이 널브러져 있는 심제준을 보며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심제준의 분위기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감응된 것이다. 저런 식으로 흘러가는 걸 몇 번이나 경험했었기에 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빌어먹을 저놈의 권속. 하나도 예외란 없다니까. 김태영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뺨을 오므렸다.
우연 따윈 없다. 우연히 요트를 사고 우연히 바다에 나와 셀 수 없이 뻗어 있는 항로 중 낙원으로 오는 해로를 탔을 우연 따위는 없다. 그런 요령 좋은 일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이곳에 당도한 것은 필연. 고등학교 때부터 감응되었던 복속이 주인의 흔적을 쫓아 본능적으로 이끌린 게 분명했다. 감응을 억누르고 살던 그를 발현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기현이 납치당했다는 뉴스라든가 하는.
역시 이기현의 힘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가주의 시간에 편승하고 대부분의 힘은 잃었지만 여우가 가진 궁극적인 힘인 현혹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이기현이 그 자신도 모르게 뿌린 감응의 씨앗이 몇이나 더 섬에 이끌려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심제준의 사례 덕분에 애석하게도 후발 주자들은 낙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처리 명령이 떨어지겠지만.
운 좋게 발현이 안 된 채로 일반적인 삶을 살다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댁도 참 딱한 인사야. 또 한 명의 떨쳐 낼 수 없는 딱한 이를 생각하며 김태영은 씁쓸하게 툭툭, 심제준을 건드렸다.
“약 좀 먹어 봐요. 정신 좀 차리고.”
그의 손바닥에 캡슐 몇 개를 떨어뜨렸다.
“약 먹고 한숨 푹 자면 나아질 겁니다. 그리고 일정이 나왔어요.”
“……이기현은요.”
마지막에 만났을 때 하도 매달리기에 대충 맞장구쳐 준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약을 먹지 않은 건지 듣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미 손쓰기 힘들 만큼 감응이 진행된 건지. 김태영의 눈이 예의 파충류의 것으로 가늘어졌다. 내 선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됐을까?
“바쁘대요.”
“정말 제 얘기를 전한 거 맞아요?”
“맞다니까.”
심제준은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불만 대신 씹어 삼켰다. 눈앞의 그를 붙잡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이기현을 봤다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어째서 거짓말을 하고 있냐고. 하지만 김태영은 여느 때처럼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착각한 거라고 넘겨 버릴 게 뻔했다. 그저 당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찍혀 있지 않다면 아무 의미 없었다. 자신조차도 제 눈을 믿을 수 없기에.
“카메라가 필요해요. 어떤 것이든 상관없어요. 찍을 수 있는 거라면.”
“어떤 것이든 촬영은 금지라니까. 그거 말고 다른 필요한 건 없어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김태영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기현의 말만 꺼내면 자리를 피해 버리는 자들뿐인 이 섬에서 그가 유일하게 이기현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제준은 김태영이 가 버릴까 봐 그의 재킷 자락을 붙들었다.
“이상하죠. 이기현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없는 것처럼?”
“누구에게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해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나를 피하고 있는 거죠? 전화 통화만이라도 하면 되는데 왜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 건데요.”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어차피 졸업 후에는 만난 일도 없었다면서. 겨우 그 정도 인연이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말로 이상하지 않나?”
“나는 그 녀석을 만나고 싶었어요. 만나려고 노력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거지 내내 만나고 싶어 했다고요.”
“그럼 계속 만날 수 없는 채로 헤어져도 전과 달라지는 건 없겠네.”
싱글거리며 이어진 김태영의 말에 심제준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이기현을 만나게 해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불과 며칠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그는 눈치껏 그만둬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반항심이 치밀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겨우 닿을 수 있게 되었는데,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달라요. 이젠…… 다르다고.”
다시 그 녀석이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빌딩 위에 걸린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던 그 뉴스를 보며 우두커니 서서 세상이 끝나 가는 느낌을 받던 일 따위 다시는.
괴로워하는 심제준을 쳐다보는 김태영의 눈에 희미한 애조가 비쳤다. 이 섬의 누군가는 침입자인 그를 없애려 했고 누군가는 오랜 시간 동안 이성을 유지한 귀한 실험체로 써먹고 싶어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온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길 원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김태영은 입술을 씰룩이며 약효가 돌고 있는 심제준의 어깨를 도닥였다.
“푹 자요. 자고 일어나면 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을 테니까.”
* * *
틱, 틱, 틱, 틱.
심제준은 초침 소리에 눈을 떴다. 방 안은 아직 어둡고 시계는 겨우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모가 깨우러 오기 전에 등교할 채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방학이 끝나고 신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그의 부모는 안 하던 짓을 하는 그를 향해 웬일이냐고 놀리며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그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이른 시간에 등굣길에 올랐다. 어딘지 마음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가볍던 발걸음은 점차 속도가 붙더니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뛸 듯이 빨라졌다. 목련이 흐드러져 있는 거리를 올라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새롭게 배정된 교실에는 아직 아무도 도착해 있지 않았다.
심제준은 숨을 고르며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교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다. 창틀에 반쯤 몸을 기대어 목을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간이 흐르며 텅 비었던 교문 앞에 교복을 입은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점점 교실 안이 시끄러워졌지만 심제준의 눈은 교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등교 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되어서야 검은 세단이 교문 바깥에 정차하는 것이 보였다. 기다렸던 것을 발견한 심제준의 허리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이윽고 차가 열리고, 한 소년이 다리부터 시작해 천천히 차 안을 빠져나왔다. 길게 기지개를 한번 켜며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흔든다. 몇 개월 만에 보는 그 녀석이었다. 여전히 계집애같이 하얀 얼굴에 가느다란 체구를 한, 이기현.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심제준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작년에는 같은 반이었는데 올해도 같은 반이려나, 반의 수가 적은 사립 학교라 운이 좋다면 또 같은 반으로 배정됐을 수도 있다. 기대하며 초조하게 몸을 앞으로 빼던 그의 눈에, 녀석이 곧장 교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차 안을 들여다보는 게 보였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대충 메고 있으면서 차 안에서 다른 가방을 꺼내 반대쪽 어깨에 들쳐 멨다.
뭐 하는 거지……. 심제준이 눈을 찡그렸을 때였다. 차 안에서 웬 하얀 손이 바깥으로 뻗어 나왔다. 이기현은 그 손을 향해 등을 숙였다. 차 안의 다른 인물은 그런 이기현의 손을 잡고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나타난 것은 이기현보다 작고 어린 소년이었다. 멀리서 봐도, 누가 봐도 둘이 형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그를 닮은, 이기현만큼 곱상하고 귀티가 나는 아이. 앳된 얼굴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 이기현의 손짓에 옆으로 다가섰다.
새로운 인물의 출현에 경계를 하기 보다 심제준은 그 아이를 바라보는 이기현의 표정에서 경계심을 느꼈다.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늘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던 이기현이 누군가를 보고 부드럽게 웃는 것은. 일 년을 같은 반에서 지내면서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둘은 그 나이대 형제답지 않게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학교를 향해 걸어왔다. 심제준은 왠지 모르게 더러워지는 기분으로 창에서 내려와 앉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괜한 심술이 일었다. 그래서 그토록 기다리던 이기현이 운 좋게도 자신과 같은 반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도 아는 척하지 않은 채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반가움과 짜증과 질투가 뒤섞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심제준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심제준이 다시 깨어난 장소는 어느 낯선 곳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사방이 어두운 곳에서 널브러진 채로 눈을 끔벅였다. 바다 특유의 물비린내가 진동하고 가까운 곳에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였지.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분명히 태영 씨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면서…….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던 여파로 온몸이 욱신거렸다. 사지가 다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머리도 미친 듯이 지끈거린다. 어지러웠다. 울렁거린다고 생각하자마자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왔다.
“윽…….”
바닥을 기며 시원하게 속의 것을 전부 비웠다. 한바탕 토해 냈더니 정신이 조금 맑아져 심제준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앉아 사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지독히도 어둡고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누군가를 불러 보려 입을 열었다가 떠오른 생각에 퍼뜩 입을 닫았다. 몸을 웅크리고 한동안 사방을 경계하며 살폈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낯선 항구의 적재소였다. 빛이 거의 없는 바닷길에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요트들이 파도를 따라 흔들리고 있다.
욱신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깨어난 후로 몸의 통증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심제준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요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끊긴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기억 속 심제준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쏟아져 꽤나 흐린 날씨였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심제준에게 앞좌석에 앉은 김태영이 ‘공항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고 말했다. 목소리가 노래하듯 들려,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걸까 의아했던 게 기억난다. 정말 집에 보내 주는 건가? 이대로 얌전히? 이기현을 만나지도 못하고 그가 살아 있는 것만을 알고 돌아가도록?
심제준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다 백미러로 그를 주시하는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에 탄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자였다. 그 사내의 눈동자가 꽤 이상하다고 느꼈던 찰나, 차체가 급제동하며 크게 흔들렸다.
‘어이쿠, 조심 좀 하지.’
김태영은 운전자를 나무라며 괜찮냐고 심제준을 돌아보았다. 괜찮다고 말하려는 그의 눈에 김태영의 재킷 안쪽에 착용한 홀스터가 들어왔다. 삐쭉 튀어나온 것은 검은색 총의 손잡이였다.
‘왜 그래요?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요?’
웃는 낯 그대로 그가 물어 왔다. 하지만 심제준은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김태영의 눈동자도 이상했다. 백미러로 비치는 운전자와 똑같은, 조리개가 닫히듯 가늘게 좁아 든 동공. 환하게 미소 짓는 입가와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다음 순간 심제준은 차 문의 잠금을 풀어 버리고 도로 위로 뛰어들고 있었다. 느렸지만 차가 움직이고 있던 통에 그의 몸이 지면을 거칠게 굴렀다.
‘심제준 씨!’
김태영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빵! 빵! 뒤따르던 다른 차량들이 급정거하며 날카로운 소음이 도로 위를 덮었다. 심제준은 몸을 비틀비틀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뭐라 뭐라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의 고통을 참으며 몇 걸음 뛰지도 못했을 때 거친 모터의 소음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바이크 특유의 엔진 소리. 지면을 긁으며 끼이익! 자신의 바로 옆에 밀려드는 차체. 뒤돌아 확인하기 직전 뒤통수에 끔찍한 충격이 와 닿았다. 기억은 여기서 끝이었다.
심제준은 떨리는 손으로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이제는 굳은 피의 가루가 묻어났다. 부서지도록 아픈 온몸은 차에서 뛰어내린 덕분이었다. 충동적으로 위험천만한 짓을 해 버렸다. 돌이켜 보니 살아 있는 게 용했다.
도망가다 붙들렸다면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자신을 두고 사라진 것인지 짐작이 안 갔다. 혹시 죽은 줄 알고 버려뒀나? 아니면 기억을 잃은 사이 자신이 도망을 반복했을지도. 뭐든 간에 이곳은, 이 섬은 위험했다. 심제준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좀 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요트 사이로 익숙한 글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페인트로 대충 흘려 쓴 Midnight BLUE. 그가 타고 온 요트였다. 폭풍 속을 헤매다 상한 부분들이 수리되어 있긴 했지만 틀림없다. 심제준은 허둥지둥 요트에 올랐다. 선실에 들어서서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당연히, 카메라였다.
한차례 뒤엎어 잡동사니들이 온통 널브러져 있었지만 카메라가 든 가방들만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제자리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소지품을 가져다준 자들이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누락시킨 것이 뻔했다. 심제준은 다급히 카메라를 움켜쥐고 부서진 곳이 있는지 살폈다. 기능을 확인하는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버튼을 누르자 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정상적으로 사진이 찍힌다. 됐어, 작동한다. 이제 된 거야.
심제준은 흥분해서 카메라를 들고 빠르게 선실 밖을 빠져나왔다. 부두로 연결된 통로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선체 아래쪽 부두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그 남자는…… 다름 아닌 김태영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가 피우고 있는 담배 끝의 붉은 점 하나가 간신히 시야를 밝혔다.
“태영 씨…….”
심제준은 신음했다. 김태영은 뻐금뻐금 담배를 빨면서 심드렁하게 심제준을 응시했다. 늘 보던 능글맞은 남자는 사라지고 첨예한 분위기의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찾던 건 찾았어요?”
먼저 말을 붙인 건 김태영이었다. 그 말에 카메라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김태영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찾았나 보네요. 잘됐네.”
둘의 시선은 중간에서 가만히 머물렀다. 미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아 정적이었다. 푸슥, 하고 김태영이 태우던 담배의 필터가 끝까지 타들어 가고 둘 사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김태영은 손을 바지춤에 꽂아 넣은 채로 심제준을 차근차근 올려다보다가 인사를 건넸다.
“이제 가도 돼요. 심제준 씨.”
“……네?”
“가도 된다고.”
심제준은 사형 선고가 내려진 죄수의 얼굴로 동공이 되었다. 김태영의 반응은 심제준이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그냥, 쉽게 보내 버린다고?
“무슨…… 뜻입니까?”
“거기 키 그대로 꽂혀 있죠? 연료도 채워 놨으니 충분할 거고, 폭풍우도 그쳤으니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면 되겠네.”
“태영 씨?”
“돌아가야죠. 언제까지 여기 눌러앉아 있을 작정이에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머무르는 건…… 제 맘이죠.”
항의하는 목소리가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태영은 피식 웃었다.
“여기가 사유지였다는 건 잊어버렸나 보네. 이곳의 주인님이 허가받지 않은 사람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어요.”
“그게 누군데요……?”
“이기현.”
물음의 답이었는지, 혹은 나타난 친구의 이름을 부른 것인지 심제준은 파악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김태영의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마지막까지 만나고 싶어 했던 이기현이었지만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랜만이야. 제준아.”
“…….”
심제준은 이기현을 확인하고 힘이 풀려 쥐고 있던 카메라를 그만 떨어뜨릴 뻔했다.
눈이 열린 상태로 보는 이기현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저것이 꿈이 아니라면, 그는 드디어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이기현의 등 쪽에는 믿어지지 않게도 풍성한 꼬리가 물결치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하얀 털들이 어둠을 털어 내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검은 실 같은 것이 그의 등에 고치처럼 달라붙어 출처를 가늠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김태영의 그늘 안에서도 이기현의 자색 눈동자는 빛을 뿜어냈다. 저런 모습을 한 그를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이곳은 미쳤다. 이 비정상적인 곳에서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쳐야 해, 당장. 하지만 안채에서 그를 엿보았던 때처럼 오금이 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잘 지냈어?”
낯선 모습으로 웃어 보이는 친구. 인사를 하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심제준은 도저히 반갑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입을 뻐금거리다가 겨우 그의 이름을 신음했다.
“이기현…….”
“그래. 몇 년 만이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
“늦었지만 미안했어. 배 위에서는 못 알아봤거든. 알아봤으면 조금 더 빨리 조치를 취해 줬을 텐데. 혹시 우리 쪽 애들이 무례하게 굴진 않았어?”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심제준은 도움을 청하듯 김태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심제준 씨는 참 운이 좋네요.”
“…….”
“이 녀석 부탁으로 보내 주는 거예요. 고맙다고 해야죠? 목숨도 구해 줘, 망가진 것도 고쳐 줘, 얌전히 집에 보내 줘, 좋은 일뿐인데 웃어야지 왜 그런 표정일까?”
“저는…….”
“시간 없어. 이만 명령해. 이기현.”
김태영은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기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기현은 김태영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심제준을 응시하며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 제준아. 그리고 이 섬에서 본 것은 어떤 것도 발설하지 말고 잊어버려.”
“…….”
“나를 봤던 것도, 여기가 어디였는지도 잊어버려. 부탁할게.”
부탁할게, 라는 그 말에 심제준은 반박하려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런 눈으로, 그런 얼굴로 부탁을 하는데 거역할 재간이 없었다. 김태영이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쫓지 않을 겁니다. 해코지도 안 할 거고. 물론 심제준 씨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입 다물고 사는 게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제준 씨라면 떠벌렸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거라고 믿어요.”
“태영 씨…….”
“아, 노파심에 덧붙이는 건데, 다음번에 또 알짱거리면 그땐 무사할 거라고 장담 못 합니다. 우리 쪽 사람들이 그쪽 벼르고 있어서요. 이쪽 해류 타지 말라고 경고를 몇 번이나 했다는데 따돌리고 도망간 거라면서?”
“…….”
“다음번엔 만나지 맙시다. 잘 가시고. 무사하시고. 건강하시고.”
안녕을 고한 김태영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끝마쳤다.
저들은 진심이다. 자신을 방출시키려 하는 거다. 자신을 무리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거다. 버리려고 하는 거다.
“왜…….”
고개를 젓는 것조차 힘이 들어, 가진 힘을 쥐어짜 내야 했다. 심제준은 거의 악을 쓰듯 목에 핏줄이 돋아서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나를 왜 버리려는 건데……?”
버린다는 말에 이기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버린다니. 무슨 소리야. 애초에 너는 여기에 사는 사람도 아니었잖아.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거야. 이만 집에 가야지.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면서.”
하나 남은 가족인 남동생을 떠올렸다. 돌아가야지, 그들의 말대로.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긴 내 자리가 아니니까. 그러나 그렇게 결심한 것은 찰나에 불과했고 심제준은 이를 악물며 명령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참아 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 아직은…… 아니야.”
“제준아.”
심제준이 기억하고 있는, 이기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 나왔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다 보이도록 한숨을 내쉰다.
“나는 너를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 내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말아 줘.”
재고할 의지 없는 담백한 인사에 그는 호소하려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들의 눈은 단호했다. 이방인은 떠나라고, 낙원에 초대받지 않은 객은 그만 퇴장하라고 밀어내고 있었다. 외부자를 보는 생경한 눈에 심제준의 머릿속이 텅 비어 갔다. 이렇게 갈 순 없어. 이렇게 버려질 순 없다. 너를 두고 떠날 순 없어. 하지만 의지를 반한 몸이 제멋대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물러나지 않기 위해 버티는 그의 손아귀에 카메라의 딱딱한 표면이 느껴졌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자신들을 향하는 카메라 렌즈를 보고 돌아가려던 그들이 시선을 모았다. 찍지 말라고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찍어 달라는 듯 동작을 멈추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심제준의 눈동자가 떨렸다. 위이잉― 줌이 되는 소리에 맞춰 이기현의 얼굴이 렌즈 안을 가득 메웠다. 자신의 눈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생각했던 대로, 이기현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그 어떤 피사체보다도 우월하고 특별했다. 사진에 혼이 담긴다고 믿어 사진 찍는 것을 두려워했던 옛 선인들의 말처럼, 이기현을 찍는다면 사진 속에 그의 혼마저 가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쫓겨날 거라면 적어도 네 조각만이라도―. 손가락 끝이 셔터 버튼 위에 걸렸다. 살짝만 힘을 주면 끝이었다. 그의 오랜 염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심제준은 버튼을 누르는 대신 카메라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놔 버렸다.
“…….”
김태영은 수면으로 떨어지는 카메라를 보며 손에 들고 있던 빈 담뱃갑을 구겼다. 첨벙 소리와 함께 카메라는 작은 파문 하나만을 남기고 바닷속으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너를 두고 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너 없이 살고 싶지 않아, 귀를 기울여서야 들을 수 있는 울음 섞인 다짐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떠돌았다. 부옇게 밝아 오는 태양이 그의 등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어 그늘진 심제준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있었다. 저쪽 생의 연을 끊어 버리고 그가 그들과 같아졌다는 것을.
김태영은 씁쓸하게 마지막 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봐, 내 말이 맞잖아. 저자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걸. 도망가라고 손수 요트의 앞에 옮겨 줬는데도 조타 장치가 아닌 카메라를 잡은 순간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어.
참담한 표정을 하고 있을 그의 친우를 위해, 김태영은 대신 팔을 벌려 낙원에 머물 자격을 거머쥔 이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어서 와요.”
우리들의 낙원에.
“집으로 갑시다. 심제준 씨.”
* * *
일주일 뒤, 한국에서 심제준의 장례식이 열렸다. 구름이 잔뜩 끼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장례는 심제준의 요트와 소지물들을 인계하고 우리 가문의 주도하에 인적 드문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은 적막했다. 일찍이 양친도 타계해 친척도 거의 연락이 끊기고 조문객도 몇 없어 우리 쪽에서 보낸 조문객들이 사흘간 자리를 채웠다. 하나 남은 가족인 남동생만이 상주가 되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기하에게 말했더니 그런 반응이었다.
“심제준에 대해 조사했을 때 알게 됐었습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더군요. 남아 있는 혈육은 남동생 하나고요.”
“미리 알았으면 내게 말해 주지 그랬어. 그럼…….”
“그럼 다른 선택이 있었을까요?”
내 이마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만히 딸려가 기하의 품에 안겼다.
“이미 감응된 이상 다른 선택은 없었어요. 그러니 슬퍼하지 마세요.”
기하가 장례식 장면을 송출하고 있는 태블릿을 꺼 버렸다. 그러자 오열하고 있는 울음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동생의 가슴에 기대 눈을 감고 밀려드는 죄책감을 몰아내려 애썼다. 형, 형, 왜, 어째서, 형까지 가 버리면 나는, 나는……. 관을 끌어안고 사무치던 목소리에 심제준의 선언이 겹쳐졌다.
이미 한참 전에 감응된 상태라고 했다. 지금껏 억누르고 살았던 것은 기하가 사회에서 내 흔적을 지워 냈기 때문이라고. 한번 각성한 이상 돌려보내도 소용없을 거라고 했다.
폐인이 되어 자유로운 것이 나을지, 권속이 되어 속박당하는 것이 나을지, 나는 선택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네 선택을 기다리며 시험했다.
자신의 장례식을 보며 심제준은 한쪽 구석에 박혀 홀가분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자기한테 올렸던 술이니 자기가 전부 마셔야 한다고 우기더니 반나절 내도록 이어졌다. 의외로 말술이라 그 많은 술을 동이 나도록 부어라 마셔라 중인데도 멀쩡했다. 그의 앞에 앉아 나도 묵묵히 자리를 채워 주었다. 저쪽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심제준의 과거에 추모를 올렸다.
서로 술을 따라 주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 입술로 가져갔다. 어떤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건넬 말을 찾지 못해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대작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반지.”
말문을 튼 것은 뜻밖에도 반지 얘기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반지를 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적색과 자색의 보석이 교차해서 손가락을 감은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이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꽤나 익숙해져 거슬리지 않고 친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거 그 사람…… 아니 네 동생이랑 같이 나눈 거지?”
“그래.”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심제준을 기하와 독대시켰다. 기하를 마주한 심제준은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개안되어 완전히 열린 눈에 담기는 기하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눈이 닫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다른 말이 필요 없음을, 어떠한 설명도 무의미해졌음을 심제준의 표정을 보고 가히 짐작할 뿐이다.
“네 동생 말이야.”
기하의 얘기가 흘러나오자 척추가 바짝 긴장했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몰라도 심제준은 기하를 만난 이후로 하고픈 말이 많은 얼굴을 꾹꾹 참아 내고 있었다. 망설이던 녀석은 작게 한숨을 토해 내며 아니라고 몇 번을 중얼거렸다.
“그냥, 못 알아보겠더라고. 어릴 때랑 너무 많이 달라져서.”
“그렇게 달라졌나?”
“아예 다른 사람이 됐던데. 전엔 너보다 작고 되게 예쁘장했잖아. 클 거 같긴 했는데 저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고.”
“뭐…… 오래전 일이니까.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이렇게 변해 버렸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흘려버리는 나를 심제준은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정작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마셔 놓고도 새 술을 따르지 않고 빈 잔을 굴리다가 내뱉었다.
“사랑하는 거지?”
술잔을 기울이던 손이 멈췄다.
“오래전부터 사랑했던 거지? 내가 말했을 때, 그때부터 말이야.”
살짝 억울한 듯한 목소리.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예전의, 내가 그와 싸웠을 때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병원 테라스에서 너를 알아보고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 그거였으니까. 조금 그리운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미안했어. 일방적으로 내가 널 때린 거. 늦었지만 사과할게.”
“평생 사과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찾아온 게 의미 없진 않았네.”
피식 웃는다. 그의 눈빛도 추억 저편을 떠돌며 아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나도 잘한 거 하나 없었는데 뭐. 애새끼처럼 괜히 질투해서 그런 소리나 해 댔으니 맞을 만했지.”
“그게 질투해서 그런 거였어?”
“그럼 뭐였겠어. 내가 설마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엿 먹이려고 그랬겠냐. 하도 동생만 찾아 대니까 질투 나서 시비 걸었던 거지. 넌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것엔 관심도 없고 동생만 바라봤잖아. 동생 말고는 반응을 하질 않았으니까.”
단숨에 말을 이어가다가 뚝 끊고 빤히 나를 주시했다. 정확히는, 내 목을 가로지르는 문신을 보고 있었다. 기하의 목에서도 발견했을 문신을.
“……사랑하는 거지? 네 동생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같은 질문에 나는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긴장하고 있던 심제준은 대답에 조금 허탈한 얼굴이었다. 내가 쉽게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너희들.”
직설적인 듯하면서도 주어가 상실된 기묘한 화법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이었다면, 하다못해 이 반지를 끼기 전에 심제준을 만나 이 질문을 들었더라면, 아무리 조심스럽고 염려에 가득 찬 목소리였어도 나는 피어오르는 죄악감에 몸서리쳤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너를 지금에야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을 리 없겠지.”
“그럼…….”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
속이 아려와 눈을 찡그렸다. 달리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어떻게든 멈추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나는…… 그 애 아니면 안 돼.”
애초에 어떤 것도. 그 애 아니면 안 됐어.
불가능했다. 불가능한 것이 당연한 것을 모르고 발버둥 쳐 댔던 걸 설명할 도리가 없어 그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쳐다보던 심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된 거지.”
무언가를 털어 내려는 듯 심제준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이후에 의식적으로 심제준은 더 이상 기하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내가 무얼 하고 살고 있는지 묻더니 연구소를 다니고 있다니까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네가 연구원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데, 하고 말하는 심제준의 짓궂은 표정은 영락없는 고등학교 때 그대로였다.
졸업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듣다가 주제는 어느덧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대개 심제준이 끄집어내는 기억들을 내가 적당히 맞장구치는 식이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의미 없이 흘려보낸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차근차근 소생하기 시작했다. 외면하며 묻어 두고 있던 나의 학창 시절은 기억하는 것보다 즐거운 것이었고 철없는 순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은 반이 여럿 된 덕분에 심제준이 나보다 내 소년기를 더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있었다.
서로 창문가에 자리를 맡으려고 말싸움을 벌이던 일이라든가, 유리라고 불리며 엉겁결에 그의 그룹에 속하게 됐던 일, 몰래 땡땡이치다가 걸려서 단체로 혼난 일이나 축제 때 술을 반입했다가 학급 전체가 기합을 받았던 일 등. 제물이 되기 전의 나는 정말 철없이 굴고 까불고……. 극단적이고 광폭하고 기분을 숨길 줄도 몰라 다 배출해 버리는 어린애 그 자체였다.
나는 추억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어야 했다. 내 학창 시절은 기하가 제 몸을 희생하면서 지켜 주었던 것들이었으니까.
“보고 싶었어.”
한참 과거 얘기를 떠들던 심제준이 조용히 고백했다. 정말로 보고 싶었다고, 한 번 더 고백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술을 머금었다. 그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잔을 한번 부딪치고 술을 마셨다.
밤이 깊어 가며 심제준의 장례식이 끝나고 있었다.
“박사님.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몇 발짝 뒤에 서 있던 박종오가 술을 더 따르는 나를 막으며 말했다. 참견하지 말라고 하려 했다. 김태영과 박현진이 요란하게 등장해서 합류하기 전까지는.
“와 이게 무슨 장례식이야. 피로연이야. 아주 술판을 벌여 놨네. 세상에 뭔 술을 이렇게 다 마셨어. 이기현 너 지금 몇 잔째냐. 나도 이제 좀 달려 보자.”
굳이 내 옆자리를 사수하며 비집고 들어오는 그를 향해 미간을 찡그리자 다른 쪽 옆자리에는 이미 박현진이 앉고 있었다. ‘자기 안녕~.’ 유쾌한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말리는 박종오를 무시하고 옆에 딱 붙기까지 했다. 박현진은 그 와중에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자기 술잔을 내 술잔에 챙 부딪히고 소악마처럼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자기 술 마셔 본 적 없지? 잘됐네. 오늘부터 그럼 우리 1일이야.”
“누님 언제…… 오셨어요?”
반대편의 김태영이 내 술잔을 막으며 끼어들었다.
“얘 더 이상 마시면 큰일 나요. 누나 상대는 내가 해 줄 테니까 얘는 좀 놔두지?”
“너는 친한 척 좀 하지 마. 누나라고 부르지 마. 나랑 아는 척하지 마.”
“와 너무하네. 아까만 해도 단둘이서 다정하게 그런 말도 속삭여 놓고는. 날 가지고 논 거였어요? 나쁜 사람…….”
“아주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지. 자기 저 자식 말 듣지 마.”
두 사람이 양쪽에서 내 어깨를 감싸고 자기 쪽으로 이리저리 끌어당겼다. 흔들리는 통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구원 투수 같은 박종오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박사님을 잡을 셈이냐며 가운데에서 그들을 뜯어말렸다. 축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그들의 등장으로 거짓말처럼 가벼워지고 있었다.
심제준은 박현진을 알아보고 ‘그때 그 의사…….’ 하면서 얼굴을 구겼다. 둘이 나 모르는 앙금이라도 있었는지 박현진은 딴청을 피웠고 심제준은 목소리를 높여 툴툴거렸다. 거기다 더해 잘 걸렸다는 식으로 김태영까지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한다. 내외하던 게 언제였다고 벌써부터 무리에 녹아든다.
그래. 저 녀석은 원래 저런 성격이었지. 늘 어디에 있든 무리를 주동하는 시끄럽고 활달한…….
머리가 광광 울린다. 오늘 좀 많이 마셨더라니, 거기에 누가 초대했는지도 모를 장운까지 소주 궤짝을 들고 문가에 나타났다.
“여기가 내 후임 축하 파티인가?”
그게 아니라 장례식 뒤풀이……. 라는 말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단 하나도 맞는 게 없는 그의 말을 정정해 줄 힘도 없었다. 어쩌다 이런 멤버 구성이 되어 버린 거지. 박현진을 필두로 김태영과 장운이 합세해서 부어라 마셔라가 끝없이 이어졌다. 심제준은 그들과 오래도록 알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나만 한가운데에서 넋이 빠졌고 다들 신나 있었다. 내 그림자 노릇을 하는 박종오마저 내 술을 대신 마셔 가다 눈에 띄게 취해 버렸다.
이따금씩 내 입 안으로 안주가 강제로 들이밀어졌다. 뭐가 잘못된 건지 끊이지 않고 궤짝이 들어오고 안주가 쉴 새 없이 날라진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 기분이 이상했다. 튕겨져 나가려는 나를 박현진이나 장운이 자꾸 끌어다 앉혔다. 어색함에 허우적거리면 원래 술 마시면 다 이렇게 맛이 가는 법이라고 태영이 반쯤 꼬인 혀로 타일렀다. 한쪽 구석에선 심제준이 박현진을 붙잡고 그동안 쌓여 있던 것을 줄줄줄 나열하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김태영에게는 원한이 깊었는지 꽤나 볼만했다.
결국 주거니 받거니 하며 홀짝거리다가 나도 취해 버렸다. 종래에는 완전히 나가떨어져 기하가 데리러 온 것도 모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