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제준
검은 바다 위,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하얀 요트 한 척이 폭풍우를 버티며 떠 있었다. 거친 파도는 요트를 삼켜 버릴 듯 이리저리 흔들었다. 짧게 깎은 머리를 한 남자가 바닷물을 맞으며 튀어 오르는 로프를 필사적으로 당겼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바닥에 로프가 점점 파고든다. 고통을 참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해역에 들어가서 만났던 정찰선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쪽 해류를 탄 것? 쫓아오는 그들을 따돌린 것?
지겹도록 따라붙으며 돌아가라는 그들의 경고를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폭풍우는 남자의 어리석음을 꾸짖듯 점점 더 거세게 요트를 후려쳤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물품이 와르르 쏟아져 갑판 위를 굴렀다. 로프를 놓친 남자의 몸도 함께 굴렀다. 요트 벽에 부딪친 여파로 남자가 구른 궤적을 따라 붉은 선이 그려졌다.
씨발, 이런 데서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남자가 마지막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부르짖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라이트가 선상을 비췄다. 무언가가 남자가 탄 배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구명선인가? 남자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요! 살려 주세요! 사람이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다른 배가 정박하는 게 느껴졌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꼭 이래야 돼?”
“그럼 어뜩하냐. 들어 버렸는데. 들어 버린 이상은 살려야지 안 그래?”
“너는 그놈의 오지랖…….”
“잔말 말고 김태영. 들어.”
투닥거리던 청년 중 하나가 남자의 가슴 밑에 손을 넣어 일으켰다. 자신의 어깨를 부축하는 손길에 남자는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어…….”
그의 눈이 자신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청년을 보고 크게 흔들렸다.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너는…… 너는 분명…….
그때 별안간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윽……. 허리가 그대로 꺾였다. 몸이 넘어가며 청년의 얼굴이 시야에 스쳤다. 후드 아래의 그늘 속에서 빛을 뿌리고 있는 한 쌍의 자색 눈.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의식 사이로 남자는 청년의 이름을 입 속에서 굴렸다.
계속해서 품고 있던, 옛 동창생의 이름을.
* * *
남자가 다시 정신이 든 것은 어느 병실 안이었다. 낯선 주변을 확인하고 남자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다 신음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다. 어디 하나 성한 부분 없이 고루고루 퍼지는 통증에 끙끙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병실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들어섰다.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젊은 여자였다. 깨어난 그를 발견하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곁으로 다가왔다.
“일찍 정신 차렸네요. 운이 좋았어요.”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통속적인 영화 대사 같은 걸 읊으며 남자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여자는 침대 옆으로 소리 나게 차트를 집어던지고 거친 손놀림으로 남자의 눈을 뒤집어 깐 뒤 펜 라이트를 들이댔다.
“어디긴 어디예요. 병원이지. 뭐 멀쩡한 거 같네요. 그래도 당분간 퇴원은 안 되니까 이 방 안에 얌전하게 있어야 합니다.”
“한국인가요?”
한국어를 쓰는 한국 여자. 한국일 게 당연했지만 남자는 자신의 말이 멍청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양 한복판에 표류하던 몸이었다. 한국이랑은 못해도 달을 채워 항해해야 닿을 수 있던 거리. 큰맘 먹고 전 재산을 털어 요트를 구입하고 이역만리 길을 떠난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와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한 질문이었다. 불친절한 그녀의 입에서 ‘그럼 한국이지 어디긴 어디예요.’ 같은 소리가 들릴 거라 예상하며.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한국은 아니에요. 여기는 사유지입니다.”
“예……?”
대충 휘어 갈긴 차트를 다시 옆구리에 끼고 그녀는 씨익 소악마처럼 웃었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니까요. 동향 사람이 아니었으면 물귀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신께 감사하세요.”
남자는 멍하니 그 말을 굴리다가 등을 돌리는 의사를 붙들었다. 저기……. 나가려는 뒤꽁무니에 대고 묻자 여자의 눈초리가 차가워졌다.
“절 구해 줬던 분들은 어디 계시죠? 감사 인사를 해야 할 텐데.”
“그분들은 신경 쓰지 말고 몸조리나 잘하세요.”
“생명의 은인들인데 성함이라도…… 알 순 없을까요.”
절박하게 물었지만 그녀는 들고 있던 단말기에 무언가를 적어 전송하더니 펜 라이트를 켜 경고하듯 그를 향해 비추며 말했다.
“심제준 씨. 이 방에 꼼짝 말고 있으세요. 어디 가면 안 돼요.”
그리고 나가 버린다. 심제준은 혼자 남겨진 병실에 멀뚱히 앉아서 한참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통증이 밀려오는 어깨를 쓰다듬으며 꺼내지 못했던 물음을 삼켰다.
혹시.
혹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이기현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냐고. 쓰러지는 자신을 지켜보며 서 있던 것은 이기현이 아니었냐고.
하지만 그 녀석은 실종됐다. 실종된 것이 대대적으로 뉴스에 보도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재계의 다툼, 납치, 계승권 쟁탈 같은, 심제준의 인생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굵직한 타이틀과 함께 옛 동창생은 그렇게 사회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그랬던 녀석을 기적과도 같이 바다 위에서 만났을 턱이 없었다.
심제준은 흐릿했던 시야에 스친 자색 눈동자를 되새기며 설마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었겠지,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헛것이라도 봤나 보지 하며 털어 버리려 애썼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창밖의 풍경은 한국의 어딘가를 완전히 꼭 닮아 있었다. 저 멀리 몇 개나 보이는 초고층 빌딩과 오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한국 사람에 도로와 표지판도 익숙하다. 뭐야, 역시 한국이었어. 멍청한 질문에 여자가 놀리기라도 한 건가. 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었기에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거야.
거나하게 한숨을 내쉬며 도로 침대 위에 누웠다. 다음번에 들어오는 의사는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저 여자한테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 * *
다음날에는 더 불친절한 의사가 와서 멋대로 제준의 몸을 뒤집어 가며 진찰을 했다. 피도 뽑고 이상한 기계 속에 들어가 보라고도 하고 별짓을 다 시키고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 방 밖에 나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대신 병원 내에서만. 뭐 이렇게 불친절한 병원이 있냐며 데스크에 항의해도 개, 소, 닭 보듯 한 눈초리만 돌아왔다. 그들은 제준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고 묻는 말에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단지 기다리라는 말만을 기계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피해 의식이 아니라면 한 남자가 제준을 감시라도 하듯 따라다니고 있었다. 심제준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묻기라도 하면 더 가깝게 다가왔다. 바깥에 나가려고 하면 노골적으로 앞을 가로막고 섰다. 완력으로 이길 수도 없는 덩치에 누구시냐고 물어도 무표정하게 빤히 심제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뭐야…….”
결국 심제준은 자신의 병실 안으로 피신하듯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소득도 없이 의심과 불안만 얻었다. 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더라. 나를 구해 줬던 사람들은 왜 나를 방치해 두고 사라진 거지.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폭풍 속에서 그를 구해 줬던 것은 두 사람이었다. 화려한 머리색을 했던 키 큰 남자와 대학생 정도로 보이던 남자. 그중 대학생 쪽이 그가 아는 이기현을 정말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이기현이 성장했더라면 저렇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김새였다. 심제준은 졸업 후에 이기현과 연락하려고 애썼지만 닿지 못했었다. 사립 중고등학교를 함께 거치며 무려 세 번이나 같은 반을 배정받아 놓고도 사진 한 장 찍어 둔 것이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워 졸업 후에 은사들을 찾아가 이기현의 주소를 알아냈지만 이사를 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 나와야 했다.
그가 진로를 사진작가로 정하면서 이기현을 떠올리는 빈도는 잦아졌다. 어떤 인물을 찍어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이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이기현이었다면, 하는 가정을 하고 아쉬워했다.
창틀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던 그, 이름을 부르면 눈만 돌려 바라보던 그를 찍어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린 눈으로도 그 아이는 특별해 보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었는데. 수많은 모델이 그의 카메라를 스쳐 지나갔지만 인물 사진만은 만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 한편에 늘 이기현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살던 그가 어느 날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납치 사건을 봤다. 너는 거기에 있었구나 하는 반가움과 함께 충격적인 내용에 몇 날 며칠을 자기 일인 양 휩쓸렸다. 종래에 결국 실종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어찌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지금 슬럼프에 빠진 것도 어찌 보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이후에 아무것도 찍고 싶지가 않아졌다. 어떤 작품도 내놓지 못하고 방황하다 결국 상속받은 유산으로 요트를 구입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정처 없이 떠돌며 제3 세계에 머물다 찍고 싶은 것을 찾을 셈이었다. 그를 동하게 만들 특별한 피사체를 찾아서.
그런데 그러다 폭풍우에 휩쓸려 이기현을 닮은 사람을 만났다니. 이건 어찌 보면 하늘의 안배일지도 모른다.
심제준은 거기까지 사고를 진행시키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목숨을 구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도 하고 싶고 겸사겸사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해야 찾아갈 수 있을까,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신변의 걱정 따위는 이미 안중에 사라지고 심제준은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찬 머리를 병상의 베개에 묻었다.
* * *
그를 찾은 것은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병원 밖으로의 출입이 금지되어 감시원을 매달고 중간층에 있는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무심코 난간 밑을 내다보았다. 커다란 체구의 사내 하나가 바로 밑의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청년에게 뛰어오고 있다. 싸움이라도 난 건가. 한 대 칠 기센데 싶어 상대를 확인하고는 눈을 의심했다.
벤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히, 틀림없는 그 사람이다. 폭풍 속에서 봤던 그 대학생! 하지만 그것보다 밝은 곳에서 확인한 얼굴이 기억 속의 친구를 더 닮아 있어 심제준은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뛰어온 커다란 사내는 심제준처럼 대학생을 찾고 있었는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왜 연락이 안 돼? TV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나는 다 이해한다고 했는데. 전부 이해했다고. 여기로 데려와 놓고 연락도 안 받고 내가 욕심부렸소? 내가 못 할 걸 바라며 욕심부린 거요? 그냥 다른 놈들한테 하듯이 가끔 얼굴만 비춰 달라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커다란 사내의 목소리와 달리 TV라 불린 청년의 목소리는 나지막해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억울한 얼굴로 연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연락이 안 된다는 게 주된 주제였다. 심제준은 심제준대로 눈을 찌푸리고 온 신경을 기울이며 청년의 얼굴에서 무어라도 더 친구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다. 저 귀찮아할 때 고개를 기울이는 습관, 그래 듣기 싫으면 저렇게 속눈썹을 내리깔고 딴청을 피웠지……. 뜯어볼수록 더 닮았다. 아니,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다. 친구의 습관을 발견할수록 심제준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청년은 참을성 있게 사내의 원망을 들어주다가 가끔씩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사내의 목소리에 안달이 섞여 들었다.
“이런 몸으로 만들어 놨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방치해 놓고 만나 주지도 않고 연락도 안 받으면 나보고 그냥 미치라는 건가?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그 말을 한 게 벌써 언제냐고.”
“…….”
“그러니까 하다못해 전화라도 제때 받아 달라니까. 이제 당신 없이는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피하지 말란 말이야.”
비난이었지만 비난보다는 호소에 가까운 어조로 사내가 팔을 벌렸다. 우람한 팔뚝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청년을 후려칠 것 같아 심제준은 목덜미가 팽팽하게 설 정도로 긴장했다. 하지만 사내는 내뱉은 목소리와 달리 청년의 앞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분을 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하세요. 제 앞에서야 상관없는데, 혹시라도 내 동생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아무래도 사내의 목소리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청년은 단호하게 잘라 냈다.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화가 났던 사내는 그의 말에 점차 누그러져 갔다. 몇 마디 더 나누고 청년 쪽이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다. 안 되는데, 이대로 헤어지면 다음번에 또 만날 기약이 없다.
심제준은 조바심 내며 몸을 난간에 기대어 숙이고 밑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유, 유리―!”
단전까지 끌어올린 고함이 끝나고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주변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TV라 불렸던 사람과 커다란 사내마저 전부 심제준을 쳐다보았다. 주목에 얼굴이 빨개지며 심제준은 자신이 무심결에 학창 시절 이기현이 싫어하던 별명을 불러 버렸다는 걸 깨닫고 어버버했다.
“아니…… 유리가 아니라 그…… 이기현이라고.”
아, 이기현이 아니면 어쩌려고. 저 사람이 다른 사람이기라도 하면.
찰나의 걱정에 심제준이 허둥거리며 자신을 올려 보는 그들에게 사과도 인사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대학생의 눈이 미심쩍어하는 것에서 점차 미묘한 빛으로 바뀌는 것을.
“저건 또 뭐야.”
“…….”
“TV를 보고 저러는 거 같은데? 아는 사람인가?”
“아아.”
이기현은 난간을 붙잡고 반신반의하다 점차 크게 손을 흔드는 옛 동창생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했더니, 자세히 보니 어릴 때의 얼굴이 제법 남아 있어 대충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몇 번 같은 반이던 녀석이었다. 이기현은 기묘한 기분으로 동창생을 올려다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세상 참 좁지 않은가. 죽어 가는 걸 건져 왔더니 그게 아는 자였다니. 우연치곤 참으로 얄궂었다. 어쩐지 엊그제 김태영에게 함께 구해 온 자의 얘기를 물어도 별말 없이 넘겨 버리더니 뒷조사를 하고 미리 차단했던 게 분명했다.
자신이 알아본 것을 그쪽도 알아차리고 손을 흔드는 게 더 거세졌다. ‘저기 혹시 이기현……? 기현아 나 알아보겠어?’ 하고 묻는 목소리에도 확신이 묻어난다. 소란스러워지자 병원 안에서 몇 명의 사람이 튀어나와 심제준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반항이 싱겁게도 심제준은 금세 짐짝처럼 들려서 질질 끌려 나갔다. 그러면서도 이기현의 이름을 외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데?”
“……동창이었어요.”
“저거 그대로 놔둬도 되나? 저자들이 뭘 어떻게 할 거 같은데.”
“그러게요. 가 봐야겠네.”
캡 모자를 눌러쓰고 이기현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섞인 슬픈 얼굴에 뭐라 참견을 하려던 장운이 입을 다물었다. 소란이 끝나자 지나가던 사람들은 잠시라도 이기현을 쳐다봤던 것이 죄라도 되는 양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이기현은 잠시 망설이다 휴대 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작성해 두 사람에게 전송했다. 하나는 그의 연인에게, 또 하나는 친구에게.
답이 오는 것을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무거운 숨을 토해 내며 건물 안으로 사라진 소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과거의 목소리가 겹쳤다. 철없이 까불고 날뛰던,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생하고 있었다.
* * *
‘유리, 유리.’
유리. 심제준은 이기현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성질머리가 유리같이 예민하다며 유리라고. 이기현은 그 별명을 싫어해 그가 별명으로 부르면 못 들은 척을 했다. 유리, 유리, 성가시게 부르는 소리에 이기현은 팔 안에 더 깊숙이 머리를 묻었다.
‘우리 유리 자냐? 자? 일어나 보라니까?’
무시하는 것을 알고도 끈질기게 별명을 고수하며 심제준은 이기현이 자고 있는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건드릴 듯 말 듯 손바닥을 펼쳐 머리 위로 흔든다.
‘유리, 야, 유리 네 동생 왔다고.’
그 말에는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히죽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짧게 깎은 밤톨 같은 머리에 장난기가 다분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심제준.
‘하하, 부를 땐 아는 척도 안 하더니 동생 왔다니까 일어나는 거 좀 봐라.’
이기현은 속았다는 걸 깨닫고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곤 다시 책상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심제준은 귀찮게 이기현의 어깨를 흔들고 뺨을 찔러 가며 자꾸만 자극했다. 유리, 유리, 우리 유리, 일어나라고, 유리, 유리, 우리 유리, 질리지도 않고 음률을 붙여 가며 불러 댔다. 그때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이번에는 진짜다. 문 근처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이기하의 얼굴이 형을 발견하고 환해졌다. 이기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에게로 뛰어갔다. 교실 뒤에 모여 있던 놈들이 그 모습을 보고 또 애인 왔냐고 야유를 던졌다. 이기현은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이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며 심제준은 괜히 책상을 한번 걷어찼다.
아마 또 체육복이 사라졌다며 빌리러 왔겠지. 진짜 사라진 건지 사라진 척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거슬리는 놈이었다. 제집 드나들 듯 상급반에 찾아오는 것도 거슬렸고 자신의 말은 무시하면서 동생이 부르기만 하면 앞뒤 제쳐 두고 달려가는 이기현을 보는 것도 거슬렸다. 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이기현이 동생 앞에서만 다정해지는 것도 꼴불견이고, 하필 그 동생 놈이 제 눈으로 봐도 어지간히 예쁜지라 더 거지 같았다.
워낙 유별을 떨어 대는 형제라 학교 내에서는 둘 다 유명한 존재들이었다. 형제 둘의 외모가 수려한 것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봤던 고급 세단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데려다주고 마중 나오는 것도 그들을 더 특별히 보이게 했다. 학생들은 물론이요, 선생들조차 저 형제에게는 꼼짝을 못 하고 빌빌거렸다.
동생을 보내고 돌아온 이기현이 역시나 체육복을 빌려주고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동생 말이야. 친구가 없는 걸까?’
‘누구? 아까 걔가?’
야유하던 다른 녀석이 이기현의 말에 피식 웃었다. 심제준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마침 체육 시간인 하급생 무리가 현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이기하의 모습도 보였다. 앞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반장이 교탁을 쾅쾅 두드리더니 큰 소리로 다음 시간은 자습이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신이 난 놈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기까지 오는 게 이상하잖아. 보통은 먼저 친구한테 있냐고 물어보지 않나? 빌릴 친구가 없는 거 같아.’
‘그럼 시도 때도 없이 형님, 형님 해 대면서 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데 친구가 있겠냐? 저런 브라콤 새끼가…….’
다른 녀석 하나도 심제준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우물거렸다. 이기현이 말을 한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얼른 눈치를 살피며 딴청을 피운다.
‘걔가 친구가 없긴 왜 없어. 선생부터 걔네 학년 애들은 네 동생한테 다 좋아 죽던데? 입학했을 때부터 신입생 중 젤 유명했잖아. 체육복 빌려 달라면 자기가 입고 있던 거라도 벗어줄 텐데 뭔 소리야.’
‘그랬었는데 체육복을 왜 못 빌리냐고.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심제준은 이기하에게로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야, 유리. 쟤 집에서도 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너 따라다니냐?’
‘뭐 따라다닐 것도 없이 집에서야 늘 같이 있는데? 왜.’
이기현도 창문가로 다가와 심제준이 보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동급생들과 웃으며 장난치는 이기하가 눈에 들어왔다. 곧게 뻗은 목이나 단정한 자세가 귀하게 자란 태가 났다.
‘예쁘긴 참 예뻐. 여자애였음 진짜 인기 많았을 텐데 말이야. 저 새카만 놈들 사이에서 혼자만 하얀 거 봐라.’
다른 놈이 어깨동무를 해 오더니 말을 붙였다. 여자애들은 피구를 하고 남자애들은 축구를 시켰는지 다들 잔디밭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기현은 말없이 이기하가 뛰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신나서 죽어라 뛰어다니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이기하는 튀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지도, 소극적이지도 않게 아주 조용히 무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녹아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그 혼자만 이질적이었다. 역동적인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만 그려다 붙여 넣은 것처럼 동떨어진, 다른 존재 같다.
교묘하게 공을 피해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이기하 앞에 공이 떨어졌다. 몇 번의 발길질 끝에 손쉽게 그가 골대에 공을 차 넣는데 성공하자 운동장이 떠나가라 함성이 울렸다. 지켜보고 있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별일 아니었는데도 괜히 뿌듯해져 이기현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세리머니를 하려는지 환호하며 이기하의 앞으로 뛰어오는 동급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학생들이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와 저게 들어가네.’
기하의 동급생들은 그를 끌어안을 듯 달려와 놓고 막상 가벼운 하이 파이브만 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기하가 체육복 앞자락을 끌어 올리더니 흘러내린 땀을 닦듯 얼굴에 문질렀다. 그러더니 잠시 후 조금 더 끌어당겨 더 깊숙하게 얼굴을 파묻었다.
이기현은 빨대에서 내용물 없이 푸슷거리는 바람 소리가 나는데도 끝부분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런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을 몇 차례나 반복하는 동안 이기하도 옷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기현을 심제준도 같이 숨을 쉬며 지켜보았다.
‘유리.’
‘…….’
‘유리.’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이기현이 짜증을 내며 옆을 돌아보았다. 창틀에 늘어져 있던 자세 그대로 눈만 돌려 서로 수초간 눈싸움을 했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심제준 쪽이었다. 그러곤 짜증 난다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주 넋을 놓고 보네.’
‘뭘.’
‘너 말이야.’
‘뭐가.’
‘네 동생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너도 만만치 않다고.’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갑자기 왜 시비야 이 새끼가.’
‘네 동생이 너 쫓아다니는 것처럼 너도 그러고 있단 말이야.’
‘그게 뭐. 어쩌라고.’
버럭 신경질을 내는 이기현에 심제준은 할 말을 잃고 거칠게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주변의 다른 놈들은 눈치껏 일찌감치 손을 떼고 싸움의 불씨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씨근덕거리던 심제준이 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
‘너희 형제 이상한 거 알아?’
‘……뭐?’
직구로 던진 말에 이기현의 눈이 바로 사나워졌다.
‘지금 뭐라고 했냐?’
‘존나 이상하다고. 네 동생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둘이 형제 맞아?’
이기현이 거칠게 심제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금 그 말 취소해. 오늘 뒈지기 싫으면.’
이를 갈며 내뱉은 협박에도 심제준은 이기현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취소하라 으르렁거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이 틀려? 이상한 거 맞잖아. 너희 서로 어떻게 쳐다보고 있는지 알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참을성 없는 주먹이 심제준의 얼굴로 꽂혀 들었다. 우당탕! 커다란 소리와 함께 심제준이 의자들 사이로 쓰러졌다. 싸움이 시작되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동급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기현은 넘어져 구르고 있는 의자를 발로 차며 걸어가 다시 심제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첫 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겨우 한 대를 맞아 놓고 벌써 입술이 터져 부어오르고 있는 얼굴을 움켜쥐었다.
‘네놈 새끼가 뭘 안다고 지껄여? 네가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나한테 내 동생밖에 없는 걸 알아? 네가 우리 사정을 알아?
심제준이 한번 크게 쿨럭거렸다. 이기현이 사정없이 멱살을 잡아 흔들어도 맞서지 않았다. 평소에 다른 녀석이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주제에 자신에게는 주먹을 들지 않는 것에 이기현은 또 배알이 뒤틀렸다. 그래서 두 번째 주먹도 힘 조절을 안 하고 휘둘렀다. 나가떨어진 심제준이 책상들을 엎으며 요란하게 쓰러진다. 교실 안은 구경거리에 신이 난 놈들과 말려 보라고 소리 지르는 음성이 뒤섞여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앞문에서 누군가가 뛰어 들어오며 ‘너희들 뭐 하는 거야!’ 하고 소리 질렀다. 말리는 시늉만 하던 동급생들도 일이 커질 것 같으니 쓰러진 심제준을 부축했다. 맨날 싸움판이 일어나긴 해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면 싸움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옆에서 구경하던 놈들 중 하나가 다시 달려들려는 이기현의 허리를 잡아 안으며 참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야! 야! 이 새끼 너 왜 갑자기 불이 붙었어. 인마! 참아! 참으라고!’
‘저 새끼가 하는 말 들었잖아. 저 개새끼가 우리를……!’
‘그냥 장난친 거 가지고 왜 그렇게 흥분하냐. 어? 야 이 성질 더러운 놈……!’
비틀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킨 심제준이 제대로 터져서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등으로 쓰윽 훔쳤다. 하얗던 교복 와이셔츠에 피가 점점이 떨어진다. 이기현을 쳐다보는 눈이 원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주먹질을 하러 달려들진 않았다. 덕분에 막으려고 심제준을 붙잡았던 다른 녀석들이 멋쩍게 팔을 놓고 물러났다.
‘둘이 대체 왜 싸운 거야?’
뒤늦게 개입한 반장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서로 죽일 듯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저 새끼가 나랑 동생이 이상하다잖아. 씨발 새끼가.’
‘뭐? 겨우 그걸로?’
빵 한쪽 잘못 나눴다고도 싸울 수 있는 나이긴 하지만 반장은 기가 막혀 했다.
‘이상하지. 그럼.’
퉤, 하고 입 안에 고인 피를 교실 바닥에 뱉어 낸 심제준은 이제 거의 분노에 가까운 눈으로 이기현을 쏘아보며 천천히, 그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또렷하게 말했다.
‘너희 둘, 혹시 그런 사이인 거 아니야?’
* * *
심제준은 소파에 앉아 무심코 아래턱을 매만졌다. 그런 일도 있었지. 생각보다 꽂아 드는 주먹이 꽤나 매서웠었다. 이기현이 이성을 잃은 것도, 주먹을 드는 것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비뚤어진 우월감을 가지기도 했다. 감히 아무도 못 건드리는 왕자님을 저렇게 만든 것이 나라고. 그 이후로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려 드는 이기현을 보며 후회해 마지않았지만.
참으로 어렸었다.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걸 가지고 시비나 걸어 대고, 이기현의 숙부라는 사람이 보상을 해 주겠다며 이기현 대신 고개를 숙이던 것이 기억난다. 일방적으로 맞은 것은 자신이었는데 이기현은 결코 잘못을 사과하지 않았다. 신기한 건, 심제준의 부모도 아들을 때린 이기현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제준도 마찬가지였다. 양가 보호자를 대동하고 교내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자리치고 기묘한 분위기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집에 돌아와 퉁퉁 부어오른 턱에 반창고를 붙이는 아들에게 심제준의 아버지는 드물게 하지 않던 충고를 던졌다.
그 애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인가, 심제준은 가해자도 하지 않은 사과를 먼저 건넸다. 그 나이대의 어린애다운 뒤끝 없는 태도였다. 내가 좀 오버했다고, 화를 풀라며 유리라 부르고 예전처럼 어깨를 툭 쳤다.
그러나 이기현은 끝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다.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졌지만 이기현은 워낙 유명했기에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소식은 심제준의 귀에 들어왔다.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원래도 꽤 까칠하고 예민했지만 아예 건드리지도 못할 수준이 되었다고.
동생인 이기하가 집안 사정으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도 꽤나 화제였다. 귀찮게 따라다니는 이기하가 없으면 동급생들과 더 잘 지낼 줄 알았는데 이기현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있었다. 동생이 없어지고 삶을 정지한 사람처럼. 그 무렵에는 심제준도 새로 친해진 친구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이기현에게 가느다란 줄 하나 매어 둔 듯 관심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심제준에게 어쩌면 이기현은, 해소하지 못한 미련이었다.
심제준은 문가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조했다. 괜한 긴장이 심제준을 지배하고 있었다. 기다렸던 사람, 보고 싶던 사람, 가끔 꿈에서도 나타났던 이기현. 진정하지 못하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문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괜히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동료를 붙잡고 진탕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남들이 옛 애인 얘기를 들먹거리며 안주 삼듯, 심제준도 미인박명이니 뭐니 해 가며 청승을 떨어 댔던 것이다. 누군가 그거 짝사랑 아니냐고 흠뻑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심제준은 끝내 자신이 말하는 이가 남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만나면 무슨 말부터 건네야 할까. 일단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지. 그리고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네가 뉴스에 나오는 걸 봤다고 하면 난처해하려나. 너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네가 죽었다고 했다고, 권력 다툼에 휘말려 희생양이 되었다고 떠들어 댄다 하면, 예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멍청이들이라며 빈정거릴까.
이번에야말로 심제준이 머문 방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심제준은 다시 일어나 한 번 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동창생에게 지어 보일 웃음을 준비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 * *
“필요한 건 고용인들에게 말하면 뭐든지 해 줄 거니까 지나다니는 사람 붙잡고 요청하세요. 외출은 당분간 자제하시고요. 정 바깥에 나가야 할 일 있으면 역시 고용인한테 말하시고요. 뭐 있을 건 다 있으니 부족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뭐든 간에 싹 다 고용인을 통해서 하심 됩니다. 여기랑 저 건물까지가 심제준 씨 생활 반경이에요. 알았죠? 그 이외의 지역은 외부인 출입 금지니까 명심하시고요.”
임시로 머물게 된 본가 객실에 얼마 없는 짐을 풀며 김태영은 성의 없이 주의 사항을 주절거렸다. 심제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서까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이기현이 아니었다. 화려한 머리색에 그보다 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김태영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요트 위에서 자신의 배에 주먹질을 한 남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기현은 어디 있냐고, 그는 왜 안 오는 거냐고 묻자 김태영은 이기현이 너무 바빠 자신에게 부탁하고 갔다고 답했다.
그럼 하다못해 전화 통화라도 하게 해 달랬지만 김태영은 웃는 낯으로 그의 요구를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데려온 게 이곳이었다.
“정말 여기가 섬이 맞아요?”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휘황찬란한 도심지를 떠올리며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을 다시 물었다. 이곳이 한국이 아니기에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 줄 수 없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 딸린 섬도 아니다. 하다못해 타국의 한인 타운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에 신기루처럼 떠오른 거대한 섬. 심제준은 그제야 겨우 현실 감각이 돌아오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진짜라면 그것도 문제고 저들이 하는 말이 거짓이라면 그거야말로 문제였다. 판단력이 돌아오며 이상했던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 자신에게 붙였던 감시인이며, 한국이라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위치며, 조금…… 아니 많이 이질적이었던 거리의 풍경들.
뒤늦게 이기현을 알아본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당했다던 이기현, 실종 처리된 이기현이 살아 있는 것을 알아본 것이.
“뭐. 안 믿겨도 섬 맞아요―.”
“그럼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거예요?”
“궁금한 게 정말 많은 양반이네. 기자라더니, 취재라도 하는 겁니까?”
“기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어차피 위험 분자인 건 매한가지인데.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심제준을 보며 김태영은 가느다랗게 눈을 좁혔다. 현재 섬은 우기였다. 해류에 외부자가 섞여 들어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신의 힘으로 계속해서 바다에 비를 내리고 공항은 운행을 정지하며 배도 멈춘다. 한동안 폐쇄되어 오직 내부자들만 오갈 수 있었다. 저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려면 우기가 지나서야 가능했다. 이런 위험 분자가 멋대로 시가지를 활개 치고 다니게 놔둘 수도 없다. 호텔에 머무르게 했다가는 죽음을 위장한 명사들을 발견하고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섬에는 이럴 때 쓰는 매뉴얼이 몇 가지나 됐다. 처분하거나, 혹은 필요에 의해 광에 가두거나. 실험체로 사용하거나. 저자를 구해 낸 것이 이기현이 아니었으면, 거기다 이기현의 동창만 아니었으면 흔하게 처리될 일이었다.
왜 자신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그 와중에 이기현은 김태영을 탓하기까지 했다. 믿어 주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면서 실망한 얼굴을 했단 말이다. 김태영은 쓰린 속을 슬쩍 쓸어내리며 괜히 심제준의 뒤를 노려보았다. 이기현이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 병원에 구류했던 것을 나무라며 이기현은 심지어 심제준을 본가에서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섬사람들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이니까 가능한 한 집 안에서만 머물기를 추천합니다. 얌전히만 있으면 다음 주쯤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짐에 빠진 게 있는 거 같아요.”
“그야 대충 멀쩡해 보이는 것만 건져 와서 그렇겠지. 뭐가 없는데요?”
“카메라요.”
김태영은 이번에야말로 튀어나오려는 본성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촬영에 집착하는 외부자라니, 당장 처리해야 할 수준으로 인물의 평가 등급이 치솟았다.
“이곳에서는 함부로 사진을 찍으면 안 돼요.”
“왜요?”
“왜냐니, 사유지니까요.”
아……. 하고 조금 납득한 듯한 표정을 하던 심제준은 기어코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을 내뱉고야 말았다.
“사람이면 상관없잖아요? 허락을 받고 찍는다면…….”
다행히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눈치껏 입을 다문 심제준은 부처같이 미소 짓고 있는, 그러나 입은 꾹 다문 김태영과 한동안 마주 보고 있었다. 김태영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이미 알아들은 것이 확실한 심제준에게 다시 한번, 어떤 사진도 찍으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인물도 안 돼요.”
“……알겠습니다.”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심제준은 눈치 없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기현이 일반적인 삶을 살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해졌다. 그는 언제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옛 친구 녀석이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일 게 분명했다. 그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이기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포화 상태였다.
“그럼 주의 사항은 여기까지.”
마루 밑에 뒤집어 굴러다니는 구두를 발에 꿰고 김태영은 심제준을 향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주의 사항만 잘 지켜주면 지내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뭐― 잠깐 휴가 왔다고 생각해요.”
“기현이랑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만나러 올 거예요. 아마도 조만간?”
조만간이라는 소리가 아주 먼일처럼 들렸다. 캐묻고 싶었지만 캐물을 수 없는 불편한 벽이 느껴졌다. 이기현의 친구라는 사람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렌즈 안에 담아 왔던 심제준에게는 작위적인 김태영의 태도를 꿰뚫어 보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만면에 가득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전혀 웃고 있지 않는 저 눈만 보아도.
“그러니까 가능하면 얌전히, 집에 갈 날까지 해피한 섬 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평화주의자라서 분란이 일어나는 건 사절이거든요. 그럼 심제준 씨? 우리 섬에 온 걸 환영해요.”
마지막 말은 환영 인사가 아니라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
* * *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심제준은 나태함을 견디지 못하고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심심하다. 무료하다. 무위하다. 원래도 역마살 낀 그였다. 사치스러운 대접을 받고 있어도 좀이 쑤시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이 섬을 형성하는 모든 것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저 처마 하나하나, 장지문도, 기둥에도, 뭐 하나 지나치지 않고 장인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심제준은 첫날 본가 대문에 당도했을 때 무슨 이곳이 유형 문화재인 줄 알았다.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이곳이 테마파크도 아니고, 문화재도 아니고, 고작 한 가문의 본가 건물이란다.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은 또 어떤가. 기이할 만치 밝은 이 섬과 달리 바깥은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예술이었다. 그의 요트를 뒤집을 뻔한 폭풍우는 이 섬 안에는 초대받지 못해 바깥에서만 시퍼렇게 안광을 번뜩였다. 언뜻 보면 저 자연재해가 이 섬을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웬만한 유명한 곳은 가 보았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다. 슬럼프를 한 방에 날려 버릴 요소들이 가득한 곳에 머물면서도 아무것도 찍지 못하는 것에 미칠 것만 같았다.
객실 앞을 지키던 이들이 문을 나서는 심제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처음 며칠은 두려움에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김태영이 말해 준 마지노선까지는 산책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끔은 감시하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용인들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본가에 관한 질문을 하면 뿌듯해하며 성실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단, 은근히 끼워 넣은 이기현에 관한 질문에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상하게도 외부인인 심제준을 경계해서가 아니라, 고용주인 이기현을 두려워해서라는 인상을 받았다.
정해진 구역을 빙 돌아 걸으며 아쉬운 눈으로 건너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기현에게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하루 세끼 정해진 시간에 호화로운 밥상이 들어왔다 나가고, 방에서 굴러다니고 있으면 알아서 침구도 옷도 정리해 준 고용인들이 빠져나간다. 같은 곳만을 맴돌아야 하는 산책은 그만두었다. 슬슬 인내심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심제준은 고용인에게 외출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에게 두 번 더 요청하고서야 겨우 김태영이 아주 귀찮은 얼굴로 나타났다.
“잘 지내고 있었어요?”
찾아온 이가 이기현이 아닌 것을 확인한 심제준의 눈이 축 처졌다. 그래도 세 번째 본 사이라고 반갑긴 반가웠다.
“기현이는 언제쯤 올 수 있대요?”
그의 뒤를 따라 간신히 본가를 벗어나 외곽에 있는 카페로 외출을 했다. 김태영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기다란 다리를 꼬았다. 여전히 바쁘다는 말에 심제준이 항의하는 얼굴을 꾹꾹 참아 내는 것이 보였다.
“그보다 일주일 정도 뒤면 우기가 끝날 거 같아요. 잘됐죠?”
태영은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붓고 홀짝거렸다. 심제준은 김태영에게 흥미를 잃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늘어진 동공이 바깥사람들을 살피며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감시자들의 말에 따르면 며칠간 심제준은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을 했다고 했다. 간혹 이기현에 관한 것을 물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이기현은 지인인 만큼 그를 안전하게 송환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말 제대로 듣고 있어요?”
손끝을 튕겨 심제준을 집중시켰다. 그는 멍하니 김태영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다음 주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요. 조금만 더 참으면 되겠네요.”
“그렇습니까.”
그는 희보에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저 한마디를 더 덧붙였을 뿐이다.
“설마 집에 가기 전에는 이기현을 만나 볼 수 있겠죠?”
“아마도?”
쓴웃음을 삼키며 잔을 기울였다. 모든 주제는 전부 이기현으로 귀결된다. 심지어 자신의 안위도 뒤로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김태영은 자신의 동공이 의지를 가지고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역시 이자는 사지 멀쩡히 섬을 빠져나가진 못할 운인 듯했다. 그는 슬슬 가자고 말하며 일어나 툭툭 몸을 털었다.
주차된 차를 가져오겠다고 김태영이 심제준을 카페 앞에 놔둔 채 자리를 떠났다. 그를 기다리며 심제준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계속했다. 두 번의 우연으로 이기현을 만났다. 세 번째의 우연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마침 멀찌감치서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이기현과 비슷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저절로 눈이 빨려 들어갔다. 다리가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바로 옆에서 지면을 긁는 날카로운 소음과 귀를 찌르는 비명 소리가 울렸다.
“――――――!”
끼이이이이익!
심제준은 바닥에 쓰러져 자신의 몸 바로 앞에서 멈춘 바퀴를 덜덜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피한 것은 찰나였다. 몇 초, 아니 일 초만 늦었어도 정면으로 치일 뻔했다.
비명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자신의 앞으로 질주하는 바이크가 보였다. 그대로 부딪치기 직전 용케도 옆으로 몸을 날린 게 그의 목숨을 구했다. 검은 헬멧을 쓴 바이크 위의 사람은 방금 사람을 칠 뻔하고도 동요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과 몸을 전부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신…… 운……전을…….”
덜덜 떨며 항의하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바이크를 탄 사람은 크게 엔진을 울리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심제준은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바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주변 사람들이 심제준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 있었어요?”
뒤늦게 나타난 김태영이 태연하게 물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심제준을 대신해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상황을 설명했다. 사고 날 뻔했다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조심 좀 하지. 큰일 날 뻔했네. 다친 덴 없어요?”
그는 다정한 손길로 흙이 묻은 심제준의 외투를 털어 주었다. 심제준은 여전히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거칠게 난 스키드 마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몸에 남았을 흔적을.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고의였을까.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우연을 기대하며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 때문에 목숨을 빼앗길 뻔한 게 소름 끼쳤다. 이 섬에 온 이후부터 그의 주변에 현실 같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다치면 안 돼요. 이기현 볼 낯이 없어지거든.”
심제준의 몸을 돌려 에스코트하듯 끌어안고 김태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했다. 낯익은 인영 몇 개가 그의 눈을 피해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혀를 차며 심제준을 보다 가깝게 끌어당겼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